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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해기둥 / 하재열

부흐고비 2021. 12. 5. 09:53

호수에 떨어진 낙조의 해기둥이 눈부시다. 물을 건너오는 찬바람 맞받으며 옷깃을 여민다. 송림수변공원 세 바퀴 둘레길 걸음에 배어 나온 등의 땀도 이내 잦아지며 선득해진다. 일렁이는 붉은 물결을 멍하니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는 데 내가 흔들리며 떠내려가는 환각에 빠진다.

그렇다. 지금 모두가 떠내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하기도 어렵고 말만 무성하다. 하나같이 입 가리개를 두른 사람들의 종종걸음은 역병의 끈을 떨쳐내려는 몸짓이다. 숙지려나 했는데 추위를 타고 다시 힘을 쓰는 마왕의 기운 같은 그자 앞에 갈 데가 없다. 두문불출이 최상의 길이라 하지만 사람이 어찌 그리 살아내랴. 하여 내가 팔공산 길을 한 바퀴 휘돌아 여기 물가에서 숨을 고르고 있듯이 모두 나름의 마음 풀 길을 찾아 나선 걸음 아니겠는가. 서로 경계의 눈빛에 불안을 담고서.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한 해가 저문다. 일을 잃은 이, 생업의 문을 닫은 이들의 말들이 거리를 메운다. 한쪽엔 새로 벌이가 되는 일이 생겼다는 말도 들린다. 그래도 세상이 영 결딴나지 않고 형평을 맞추는 일인가 싶어 안도의 한 가닥 숨도 섞인다. 쫓기며 살판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반격, 그 결기가 어쩐지 눈물겹다. 만나야 살도록 설계된 인간이란 종이 ‘비대면’이란 방식의 삶을 터득하며 길을 찾고 있으니 반갑기도 괴이쩍기도 하다.

글 걸어놓고 들썩대었던 작품 토론회의 말들이 울린다. 9월에 다시 모인 문우들의 뜻이 여물었다. 마스크를 한 채 한 주에 한 번씩 석 달여 이어왔으니 대단한 글 사랑이요 애착이다. 글 정에 객정도 콩고물처럼 묻었는데 거리두기란 말이 다시 힘을 내던 지난주엔 이게 마지막 수업이 될까 싶은 생각이 문득 스쳤다. ‘알퐁스 도데’의 그 수업을 막은 건 인간의 전쟁이었지만, 보이지도 않는 적, 역병과의 쟁패에 다시 내몰리는 형세이니 길을 알 수가 없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허우룩해진다.

꺼림칙해 하던 일이 걱정을 따라가고 말았다. 며칠 새 더 험악해진 그자의 시샘에 수요토론회의 하반기 끝마무리를 한 끼 밥으로 정을 내려 했던 일은 글로써 주고받는 인사가 되었다. 아쉽지만 밥 먹다가 덜컥 일 당하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이 걷히니 되레 개운하다. 그보다 지금 인간의 능력이 못 미치는 이 갑갑한 상황이 끝내 모두의 사는 수업을 막아버리는 일이 될까 두렵다. 해기둥에 이지러지는 조각 햇빛처럼 사람의 일상이 산란해버리는 사위스러운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걷는다.

역병에 쫓기는 일도 어지러운데 시국에 횡횡하는 말들이 같잖다. 마음 앉히지 못하니 떠돌며 삭여야 숨 쉴 것 같다. 자고로 정치의 입이 원래 그러려니 해온,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선이 엉켜버린 세태가 어찌 될까 싶다. 눈과 귀가 달렸다면 알아들을 불의를 덮으려는 망나니와도 같은 정치의 칼춤이 가관이다. 대체 법 공부했다는 푸른집 주인장 어른은 어찌 이러시는 것인가. 이 혼곤한 시절에 역량이 안 되는 내 글의 삿대질이 씁쓸하고 아리다. 신이라도 되려는 바이러스마저 한 정파의 숙주로, 방패로 삼으려 하는 자들로 정녕 아노미 같은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인가.

느닷없이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노래가 흘러나온다. 호숫가의 쉼터 한쪽이다. 노래하는 스님이다. 통기타 트로트 연주로 탁발하며 떠도는데 몇 번 여기서 만났다. 노래를 불러야 사는 일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도 기막힌 세상에 대들고 싶거나 부처님도 꼼짝 못 하는 역귀를 피해 목청이라도 풀려 나온 건지 노랫가락이 구성지다. 십이월 중순이란 날을 셈하면 모일 사람이 없음을 알 터인데 짐짓 절규하듯 노랠 질러댄다. 몇 사람에 끼여 나도 덩달아 흔들댄다.

이지러지는 해기둥의 붉은 물 조각들 위로 노랫가락이 퍼진다. 내가 떠내려가서는 안 되는 명제를 까마득한 옛 철인을 소환한 노랫가락에 묶으려 애쓴다. ‘세상이 참 왜 이래’ 언제는 세상이 좋았더냐며 심사를 달랜다. 탁발승의 애절한 노랫가락 울림보다 글 쓰는 자들의 글이 더 세상일에 무디다. 알아주지도 않는 녹슨 칼을 차고 있는 것 같아 객쩍다. 제대로 소리 내는 글이 주먹 쥘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 내 글 기도다. 문득 세상일을 받아치려 글 몸살 하던 앳된 문우가 떠오른다. 낙엽 날리던 시월 갑작스레 투병에 들어간 그녀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자다가 잠 깨어 천지신명께 빌기도 했다.

한해의 끝 날들이 아우성치듯 지나간다. 조각조각 떨리는 해기둥을 그래도 품는다. 하늘의 달이 차려면 몇 날이 더 흘러야 하지만, 그땐 심금을 울릴 달기둥에 오늘 해기둥의 이 신산스러움을 풀어 녹이며 홀로 춤이라도 춰 볼까 싶다. 시외버스 타고 이 물가에 놀러 왔던 옛 시절이 그립다. 사계마다 내 젊었던 걸음이 아롱댄다. 봄꽃이 자욱하던 날도, 자지러지게 매미가 짙푸른 숲을 흔들던 날도, 붉은 잎이 춤을 추던 날도, 눈 내리고 얼음장 깨어지는 소리 들리는 날도. 그때도 물에 빠진 해기둥, 달기둥에 잡혀 서성거렸다.

시절이 시리기만 하랴. 봄은 또 오지 않겠는가. 옛적 위쪽 송림사 절집의 숲에서 낯선 처녀들과 어울렸던 늦봄의 날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는다. 갑갑해도 흘러간 꿈도 그리며 이리 사는 것 아니겠는가. 지갑을 두고 와 노래 값을 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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