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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충蟲의 조종 / 구다겸

부흐고비 2021. 12. 25. 09:44

2021 좋은수필 베스트에세이 10선

‘미용실에 오면서 책을 깜빡하다니.’

긴 시간 어쩔까 걱정하는데, 담당 미용사가 넌지시 책을 대여섯 권 건냈다. 센스에 감탄하며 책을 고르는데 《생명진화의 숨은 고리기생寄生》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었다. 생명진화의 숨은 고리라니, 이런 건 어느 교과서에서도 배운 적이 없잖아! 생명은 환경에 맞게 진화한 거라고 배웠는데 기생이 그 고리라니! 듬성듬성 자리 잡은 궁금증을 꿰어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기생충은 ‘나쁘다’ 말고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 없었다. 훑으며 빠르게 읽는데, 초반부터 나의 상식을 깼다.

기생충의 존재가 언제나 다른 생물체들에게 해를 끼쳐온 것만은 아니다. 이는 마치 헤어진 연인의 감정에도 좋고 싫음이 뒤섞여 있고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의 복잡한 양가감정이 줄타기하는 것과 같다.

‘기생충은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기생충≒헤어진 연인.’

스트라이가는 숙주식물에 기생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뒤, 숙주 식물을 말라죽게 한다.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 안에 뿌리를 박고 영양분을 빨아 먹으며 산다. 한방에서는 약용식물로 쓰인다.

‘기생충은 꼭 벌레만은 아니다. 기생 식물도 있고, 약도 된다.’

기생충에 조종당하는 숙주는 감염되지 않은 녀석들과는 다른 행동을 한다.

‘기생충의 숙주 조종!’

마침 그날은 비가 내려 어두침침했다. 이 작고 섬뜩한 괴기, 공포, 스릴을 한 입에 꿀꺽하고 싶었다. 퍼머 끝나면 못 읽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바심이 났다. 재빨리 온라인 서점을 검색했다. ‘절판’이었다. 안되겠다. 그냥 빨리 읽어보자.

연가시는 유충 상태일 때는 곤충의 몸 안에 있지만, 성충으로 자라면 빨리 물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짝짓기도 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연가시는 숙주 곤충이 물가로 가도록 유인하며, 심지어 물에 빠뜨리기도 한다. (중략) 또한 연가시에 감염된 곤충들은 감염이 안 된 곤충에 비해 더 빨리, 더 멀리 걸었다.

교묘하고 기묘하고 무시무시한 녀석이다. 다음 장은 메디나충. 이 기생충은 사람을 조종한단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한다. 그런데 한낱 기생충이 어떻게? 하고 궁금하던 바로 그때, 담담 미용사가 말했다.

“머리 감겨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아 끝났구나, 끝났어.’

감은 머리를 말리는 동안, 몇 가지 선택지를 생각했다.

다음에 와서 이어서 읽을까

빌려 달라고 하면 창피하려나

마저 읽고 갈까.

그때 담당 미용사가 “다 되셨어요. 수고하셨어요” 했다. 그 말이 나에게는 “그만 읽고 가세요”로 들렸다. 메디나충이 인간을 어떻게 조종하는지 알아야 되는데 속이 탔다. 멈칫거리다 입을 뗐다.

“죄송하지만 한 챕터만 더 읽고 갈게요. 너무 재밌어서요.”

그 말은 곧 거짓이 됐다. 한 챕터를 다 읽었는데, 갈 수가 없었다. 안 갈 수도 없었다. 뻔뻔해지기로 했다.

“정말 죄송한데요, 이 책 좀 빌려 갈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요.”

“그럼요. 다음에 갖다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깨끗이 보고 돌려드릴게요.”

그 말도 곧 거짓이 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에 커피를 쏟아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몇 가지 선택지를 궁리했다.

그냥 줄까

중고책을 구해서 바꿔줄까

중고책이 없으면 집에 있는 재밌는 책을 한 권 얹어 줄까.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내 안의 어떤 蟲이 선택을 조정하는 게 아닐까. 메디나충은 제가 알을 낳기 위해 사람을 물가로 가게하고, 연가시도 짝짓기를 위해 사마귀를 물로 뛰어들어 죽게 한다. 내 안에도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야 살 수 있는 蟲이 있다면 첫 번째 선택, ‘그냥 준다’를 선택하게 만들지 않을까?

그런데 기생충은 기생충-남에게 들러붙어 빨대 꽂고 사는 벌레-으로 불리는 게 맞을까? 그들은 숙주 하나만 괴롭힌다. 자기가 살 수 있는 만큼만 해를 끼친다. 더는 욕심내지 않는다. 사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은, 지구에 빨대를 꽂고 산다. 얼마나 많은 생물과 광물을 먹어치우는가. 먹다 남은 쓰레기가 그 빨대에 섞여 들어가는데도 멈추지 못한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의 기생충이 아닌가. 욕심蟲 감염자들.

재벌을 움직이는 돈과 정치인을 움직이는 권력도 실은 충이 아닐까. 돈에 감염된 사람은 더 큰 돈을 쫓고, 권력에 감염된 사람은 더 큰 권력을 쫓는 기이한 행태. 충은 그들을 조종해 국민을 권력 담는 밥그릇과 재물 담는 찬그릇으로 만든다. 나라 땅을 내 땅처럼 주물럭대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것도 권력충, 재물충의 농간일 것이다. 蟲은 蟲을 부르고, 숙주는 기형이 되어간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온라인 중고서점에도 그 책은 없었다. 이런 희귀한 책에 커피를 둘러엎다니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벌레가 내 선택을 좌지우지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에 있는 재밌는 책을 함께 주는 게 제일 좋을 듯했다. 암만 생각해도 그게 최선이었다.

다음번 미용실 가는 날. 커피 쏟은 책과 내가 아끼는 책 한 권을 내밀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미용사님 하는 말,

“아, 그 책 아무도 안 봐요. 그냥 가지세요.”

오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런 희귀한 책을 제가 덥석 받아도 되는 건가요! 종교도 없으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마구 부르고 있었다.

‘커피 쏟길 잘했….’

앗! 혹시 蟲의 조종? 순간 나도 감염자라는 생각에 섬뜩했다.

메디나충에 감염된 사람은 다리를 물에 담그고 충이 살을 뚫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충이 머리를 내밀 때 살살 달래가며 기나긴 몸체를 뽑아내야 하는데, 중간에 끊기기라도 하면 몸 안에 남은 충이 썩으며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간다. 불뱀이 몸속을 휘젓는 느낌 아닐까.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충들도 그럴 것이다. 감염된 몸을 치유하기 위해 불타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그나저나 아무도 안 보는 책 한 권 때문에 내 안에 벌레가 끓는듯하여 악몽까지 꾸었다니 조금은 허무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나는 선택의 순간마다 蟲을 떠올릴 것 같다.


구다겸 수필가 수필과 비평 등단. 솔루니 독서논술·생각N논리 시사논술·'행복한 논술' 집필위원 역임.

                   김포 시민 주도 글쓰기 강사·마포 장애인 복지관 미디어 문학반 강사·러닝파크 온라인 글쓰기 강사.

                   일간스포츠한국방송 기자. 유튜브 파인드랜드 역사 스토리 보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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