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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보이스 피싱 / 남정언

부흐고비 2021. 12. 25. 10:02

그날,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건강 공단입니다. 저는 보험료 환급 담당 백재현입니다.”
“공단에서 환급금으로 69만 원을 돌려드릴 예정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다. ‘환급’이라는 말에 마음이 쏠렸다. 아니 어떻게 내가 수술하고 입 퇴원한 날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가. 한 치의 의심을 심을 사이도 없이 공단 직원이라는 사람의 말을 믿었다.

회복은 잘하고 있냐고 상냥하게 묻고는 자주 사용하는 통장을 들고 은행에 가서 환급금액을 확인하라고 했다. 환급까지 해 준다는 배려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 말을 빌리면 그날 은행으로 뛰어가던 내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날아가더란다.

은행에 도착하자 다시 전화가 왔다. 현금지급기에 통장을 넣고 잔액을 찍어 보란다. 통화하면서 숫자를 불러줄 테니 숫자를 찍어보라고 한다.

“이렇게 찍으면 계좌 이체가 되는데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 통장이 사용 가능한지 확인하고 다시 송금해 드립니다.”

말하는 순간과 동시에 현금지급기 화면이 팍! 팍! 팍! 세 번 바뀌더니 통장이 현금지급기에서 튀어나왔다. 통장 잔액에 숫자 O원이 찍혔다. 나는 은행직원에게 뛰어가 기계가 고장 난 것 같다고 설명을 했는데 보이스 피싱에 걸린 것 같다며 이체된 통장계좌는 자동 인출되는 대포통장이란다. 얼마 전부터 서울에서 발생한 전화 금융사기와 유사하다며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빠르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는가. 건강 공단이 환급하겠다는 수술비가 어떤 수술인가. 종합검진에서 내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 수술하고 일 인실에서 한 달을 견디고 퇴원했다. 입원한 병원비가 과다 책정되어 환급해 준다는 거짓말로 사기를 쳤으니 눈을 뜨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항암하고 있던 나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찰서 지능범죄수사대를 찾았다. 전화 금융사기 사건 신고 진술서를 자세하게 적었다. 그날 나와 비슷하게 당한 사람이 모두 13명이었다. 신고한 피해 액수만 해도 2억 원이 넘었다. 정년퇴직한 교장 선생님, 대기업 고위직 임원, 심지어 경찰관도 있었다. 대학생, 할머니, 평범한 아주머니, 나처럼 병원을 퇴원한 환자까지 나이와 직업이 다양했다.

과연 보이스 피싱 당한 돈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졸지에 전화 금융사기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뉴스에나 나올법한 바보 같은 사람이 나라니. 전화 금융사기 주범은 얼마나 잘 사려고 그런 짓을 할까. 나 역시 공돈인 환급금을 받으면 식탁을 바꿀까 아니면 거실 커튼을 바꿀까 잠시나마 행복한 고민을 했다.

한 달 후 지방법원에서 속달 등기가 왔다.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는 한국인 2명, 중국인 2명인데 일망타진 검거했단다. 그러나 피해 금액은 찾을 수 없다는 사건 종결 내용이었다.

경찰서 담당자는 사건이 종료되었지만 잃어버린 돈을 찾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범죄가 일어나지 않게 대비책을 말하면 들어주겠단다. 나는 모든 은행 창구 현금지급기에 전화 금융사기를 조심하라는 손바닥만 한 스티커를 제작해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나처럼 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부터 은행 현금지급기마다 전화 금융사기를 경고하는 내용이 적힌 노란 스티커가 큼직하게 붙었다.

지나간 일이지만 기억은 남아있다. 생활비가 사라져 애먼 남편만 며칠 들볶았다. 식탁과 커튼을 바꾸기는커녕 집안 분위기가 썰렁해지면서 온기가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상대를 속이려 작정하거나 해치려고 덤비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 위안의 방어벽이 생겼는데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어쩌면 시간은 약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전화 금융사기는 갈수록 교묘하게 진화하고 있다. 은행 창구에서 현금을 찾거나 계좌이체 하는 방법은 고전 수법이다. 차라리 옛날에는 보이스 피싱 뿐이었는데 최근엔 개인정보를 털어 카카오톡이나 문자를 통해 친구인양, 가족처럼 급하다며 송금해 달라는 메신저 피싱으로 번지고 있다. 심지어 휴대전화에 대출 앱 실행을 유도하며 젊은이를 대상으로 사기 대출하는 인터넷 범죄가 판을 친다. 개인 정보를 유출하여 개인 신용을 악용하는 범죄 사례 뉴스가 일상화되었다.

보이스 피싱은 불특정한 다수가 대상이다. 고도의 지능 수법을 응용하여 갈수록 악랄해지는데 사람을 위한 좋은 일은 오히려 퇴행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능 범죄 수사의 수준을 올리고 범위를 넓혀야 서민을 괴롭히는 사회악(社會惡)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남정언 수필가

부산출생, 2016년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 수필집 그림책을 읽다』.

부산문인협회, 수필과비평작가회, 부경수필문인협회 회원,

현재 <노마와 영이> 국어논술 강사,

2017년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상, 2018년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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