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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교라는 곳을 가서 처음 배운 것은 ‘앞으로나란히’와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였다. 앞사람의 뒤통수를 지켜보며 두 손을 들고 내 위치를 맞추려 긴장하였다. 저만큼에서 줄이 좀 굽었다 해도 그것은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앞사람의 뒤통수가 잘잘못의 기준이 되었다. 모든 생각은 ‘나’에서 시작하지 않고, 앞에 있는 친구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습이란 것을 시작하면서, ‘우리’라는 말을 가장 먼저 익혔다. 나만의 생각과 고민을 해결하려는 학습이 아니고 매사는 공동체인 ‘우리’에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초등학교 일학년 교과서의 첫 쪽에는 ‘푸른 하늘’에서부터 시작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푸르다’와 ‘하늘’을 교사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참으로 엄청난 변화다. 인간이 아니고 자연으로 바뀌었다. 언어 학습을 시작하는 어린 아동들에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구체적 사물이 아닌 개념이나 사고에서부터 출발했으니,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능력도 가히 우러러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 앞에 느슨하게 임하다간 ‘꼰대’가 됨은 당연하다. ‘꼰대’는 세상의 변화에 맥 못 추고 고집만 부리다가 얻어걸린 명함이 아닐까. 세상은 저만큼 달려갔는데, 한참은 뒤처져서 아름답지도 않은 목소리로 삿대질까지 해대며 소리치고 있으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이 사회는 미리 준비하고 있던 명함이나 내주듯 ‘꼰대’라 칭할 것이 뻔하다.

“이것들아, 아닌 건 아닝겨. 세상은 그래도 남에게 배려하고 나를 조금 내려놓아야 아름다운겨.”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행동 지침이니 참을 수 없다. 아무리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라고 자식들이 주문한다 해도 그건 아니다. 다른 길은 전혀 생각할 수 없다. 마누라가 옆구리 콕콕 찌르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위층 아이 꾸짖지 말라고 훈수를 둬도 버르장머리 없는 건 그냥 넘기지 못한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소문난 꼰대가 되어도 아닌 건 아니다. 교육은 공동체다.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분 없이 현장에서 가르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사회 교육이다.

그러나 이젠 꼰대가 설 자리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꼰대질 하다가는 나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힘의 원리에 따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국민의 알 권리 앞에 모든 것은 까발려야 하고, 모든 인간은 평등 앞에 차등이 없어야 한다. 백번 옳은 말씀이다. 당연히 그리 굴러가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것이 배려 차원이 아닌 치사한 생각이라면 문제다. ‘여자도 똑같이 군대에 가야 한다.’라는 주장까지 거리를 흘러 다닌다면 어디에다 사고의 기준점을 잡아야 할지 멍해진다.

사고의 시작점이 문제다. 꼰대들은 어려서부터 공동체에 그 시작점을 두었다. 매사는 선공후사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출발하였다. 최고 가치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경쟁사회라는 걸 잊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보다 한발 먼저 가야 이긴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겼다. 당연히 자신을 혹사하더라도 그 가치를 향해 달려왔다. 비록 앞서가려 해도 옆 사람에 대한 배려심은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다르다. 개인의 삶이 중요하다. 남이야 쓰러지든 말든 내가 우선이다. 아니 남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나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살려한다. 이어폰으로 세상의 소리를 틀어막고, 스마트 폰으로 옆 사람의 접근을 차단한다.

시시때때로 귀에 들어오는 말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뭔지는 모르지만, 그냥 서양 사람들이 우리보다 앞섰다고 인식한다. 걸핏하면 미국이 어떻고, 영국이 어떻고, 프랑스가 어떻고 하며 우리의 그것에 관한 판단의 기준점을 세운다. 한국이 추구할 민주주의가 뭔지는 몰라도 서양의 것을 흉내 내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안일하게 흉내만 내어도 괜찮을까.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오염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가장 적확하다며 아침저녁으로 목청 돋우며 고집하는 민주주의는 서양의 개인주의가 아닐까. 그들의 문화는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애당초 단일민족이라서 조금은 양보하며 남을 배려하는 미풍양속이 있었다. 그 고귀하고 아름답던 문화가 서양의 것에 오염되어 사라지고 있음이 안타깝다. 그들은 시작부터 여러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다 보니, 개인의 것을 챙겨야 하는 조급함 속에서 생성되었다. 서양의 개인주의가 우리 앞에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은 아닌지.

적어도 외국 문화를 들여올 때는 우리 것과의 충돌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좋은 문화가 그들로 인하여 말살되는 어리석음은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외래문화란 기왕에 우리에게는 없었던 새로운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맹목적으로 ‘새로운 것’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다시 따져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진정한 가치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때로는 우리 것을 가미하여 재탄생시킬 필요도 있다. 이 시점에서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관해 깊은 연구와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작금의 현상을 지켜보다 보면 사고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많은 경우 ‘우리’라는 공동체보다 ‘나’를 우선하고 있으니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갈등은 나와 남의 작은 갈등에 그치는 게 아니고, 집단과 집단의 갈등으로 심화되어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말로는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나,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화합과 협력과 조화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다.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 행동은 사고의 시작점이 어디냐에 따라 현저한 결과를 가져온다. 모두가 개인의 이기에 빠져 모든 사고의 시작점을 ‘자기’에다 맞춰 놓기에 세상은 갈등 속에서 허덕이고 늘 이렇게 시끄럽다. 조금은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다른 이를 배려하는 시작점을 유지한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밝아질 것이다. 꼰대들도 변화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동참하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이들도 꼰대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의 사고가 남을 배려하는 데에 터를 잡는다면 분명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다. 힘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어 엄청난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한 고집하는 우리 문인들도 한 번쯤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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