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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사거리의 남자 / 노현희

부흐고비 2022. 1. 15. 11:53

독립문 공원을 벗어났을 즈음 낯익은 팝송이 들렸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선율이 차량의 소음을 물리치며 울려퍼졌다.

“Knowing you don’t need me~”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였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번안되어 한 시절 어디서나 들려오던 곡이었다. 나는 이끌리듯 소리를 찾아 나섰다. 사거리에 있는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추억이 되어버린 가수의 노래를 자동차와 사람이 쉴 새 없이 지나는 도심 한가운데서 듣게 되다니. 괜한 설렘으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호흡을 모으는지 상체를 앞으로 살짝 구부리고 있었다. 저녁 햇살이 남자의 어깨로, 보도블럭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파킨스병 20년차
약 미복용시 전신근육마비
기초생활대상자이나 생계비 중지
이유-사실혼 간주’

종이박스에 자신의 이력을 적어 앰프에 기대어 세워둔 남자의 이력서였다. 노랫말은 사랑을 잃은 한 사람의 사무치는 그리움에 대해서였지만 남자의 이력서는 생존의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음에도 줄무늬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남자의 차림새는 정갈했다. 회색 곱슬머리에 베레모까지 눌러 쓴 모습이 버스킹을 하는 뮤지션 같았다. 자신의 앨범 대신에 놓아둔 이력서를 나는 다시 찬찬히 읽었다.

애잔한 음률이 사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남자의 노래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어눌한 발음과 떨리는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듣고 있는 내 마음이 기도할 때처럼 오롯해졌다. 남자는 차로와 인도를 구분하는 안전대에 기댄 듯 올린 손으로 리듬을 탔다. 마이크를 잡은 손은 떨림이 심했고 팔을 몸에 붙이려 애쓰는 것 같았다. 발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치며 리듬을 타고 있었지만 몸의 흔들림과는 다른 박자로 움직였다. 눈도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습관처럼 느리게 움직일 뿐, 무엇을 담는 눈동자는 아니었다.

남자의 뒤로 손수레가 보였다. 앰프며 악보책 등을 싣고 온 모양이었다. 사실혼의 여자에게 수입이 있어서 생계비를 받지 못한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자신이 복용할 약을 구하기 위해서, 혹은 생계를 꾸려가는 가장으로서 그곳에 나와 있을 터였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까. 소음과 매연 속에서 남자는 온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거리에는 신호등이 많았다. 사람과 차는 늘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돌아가는 차도 있었고 멈추는 차도 있었다. 두 번의 신호를 받아야 건널 수 있는 더디고 복잡한 보행로도 있었다. 사람도 차도 초록불이 들어오면 가고 빨간불이 켜지면 서야 했다. 같은 색의 신호로 움직이지만 사람과 차가 봐야 할 신호등은 달랐다. 그게 서로를 지키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교차로에서는 어쩐지 혼란스러워 주위를 더 살피게 된다. 여러 개의 신호등이 있지만 내가 봐야 할 신호등은 하나뿐인데 그랬다. 운전을 할 땐 더했다.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전용차선의 버스가 출발하면 내가 좌회전 차선에 있다는 걸 잊고 가속페달에 발을 올리곤 했다.ㅍ 생계비를 받지 못하게 되어 거리로 나서야만 했던 남자. 사실혼의 여자는 남자의 생계유지에 빨간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남자는 기꺼이 자동차 안의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일까. 차 안의 동행자는 같은 신호를 보고 같은 방향을 향해 간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기에 남자는 매연이 가득한 사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공원도 아닌 사거리 횡단보도 끝자락에서 노래를 한다는 이유로 나는 괜히 의미를 덧씌우고 있는지 몰랐다.

내가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다가갔을 때도 남자는 어정쩡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식당에서 쓰는 스테인레스 반찬통에는 여러 장의 지폐가 들어있었다. 사실혼의 여자가 식당일을 하는 것 일까. 잠시 주춤하다 통에 돈을 넣었다. 그 안에는 아기 주먹 만한 돌멩이가 몇 장의 지폐를 누르고 있었다. 바람에 날려가는 돈을 잡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Anything that’s part of you~”

한 사람의 일부인 그 어떤 것이 누군가에겐 아픔이고 그리움이 되어 삶을 뒤흔들고, 그 마음을 노래에 담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가수는 젊은 날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가수가 불렀던 노래를 한 남자가 거리에서 다시 부르고 있었다.

그 어떤 것, 무엇이라 이름하기엔 막연하지만 너무나 간절하게 와닿는 감정. 누군가의 자취이든, 추억이든 혹은 환상이라 해도 거기엔 매혹이 있었다. 그 매혹의 기억이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던 것 일까. 멀찍이 떨어져서 노래를 듣던 사람들도 지갑을 열어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어정쩡한 행동을 취했다.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뒤섞인 인사 같았다.ㅍ 남자의 노래를 뒤로 하고 그곳을 벗어났다. 신호에 붙잡혔던 차들이 내 곁을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그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도 목적지를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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