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잠결에 놀라

잠결에 놀라 시계를 본다. 벽에 걸린 직사각의 전자시계는 빨갛게 충혈된 숫자만을 보여준다. ‘2;45’ . 방안에 걸린 것이라기보다는 저자거리의 전광판 같다. 무심한 것 같으니라고. 그 숫자만으로는 일어날 시간까지 얼마가 남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비몽사몽에 공간 지각력이 무딘 나로서는 선뜻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돌아누워 협탁의 낡은 탁상시계를 다시 본다. 길고 짧은 두 개의 바늘이 연두색 형광빛을 조심스레 발한다. 모세혈관인 양 가는 눈금들로 나뉘어 있다. 두개의 바늘과 촘촘히 나뉘어진 금들은 몇 시간을 더 자도 되는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그제서야 안도한다. 셈하기에 손가락을 동원하던 유년의 수준이다. 이제부터 더 잘 것이다.

그러나 잡다한 생각에 잠은 멀리 달아났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내가 잠을 버린다. 거실로 나가 최소 볼륨으로 오디오를 켜고 컴퓨터의 부팅도 동시에 시도한다. 심야의 FM을 찾고자 튜닝해보지만 주파수가 잘 걸리지 않는다. 아침마다 CD를 즐겨 듣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방송의 종류가 어디 한 둘이던가. 각 방송사마다 제1, 제2 방송과 AM, FM 등으로 시청자의 기호에 맞추어 싸이클이 아닌 버튼으로 주파수를 설정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수없이 버튼을 눌러대다가 디지털에 굴복한다. 천천히 다이얼을 돌려가며 눈금을 보며 주파수를 맞추던 시절이 있었다. 차라리 그 때가 나았다. 오디오를 끈다.

알람은 숙면의 정적을 깨는 느닷없는 침입자다. 그것이 싫어 알람을 설정해 놓지 않아 이처럼 잠자리를 뒤척인다. 아침 준비에 늦지 않아야지 하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요즘에는 새소리 물소리를 연상케 하는 고운 소리도 많지만 그로 인해 상쾌하게 잠을 깬 기억이 별로 없다. 소리가 아름다울수록 기계음의 무례함과 황당함을 은폐하는 것 같아 알람을 즐겨 사용하지 않는 다.

슬그머니 벽의 디지털 시계를 내려놓는다. 얼마간이라도 제대로 자야한다.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디지털 시대의 조짐들이 꼬리를 물고 연상된다.

- 다운로드 시대

작년 이맘때였나. 아이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MP3를 사겠다고 했다. 성냥갑만한 그것을 통해 컴퓨터에서 음악을 받아 저장한다는 것이다. CD플레이어라면 몰라도 듣고 싶은 음악을 그때그때 리필 할 수 있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그 정도는 놀랄 것도 없다.

온라인 시대의 편리함을 들추는 것 조차도 거추장스러운 시절이다. 필요한 것들의 대부분은 컴퓨터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운로드해서 쉽사리 내 것으로 만드는 세상이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파일이 소리도 없이 둥둥 떠다닌다. 앞으로의 세상은 어찌 변할는지…….

좋아졌다는데 뭔가 허전하다. 듣고 싶은 곡목을 적어 녹음을 신청하던 시절이 있었다. 테이프 한 개에 좋아하는 곡들을 모아 듣기 위함이었다. LP판을 꺼내 닦고 자켓 모서리가 닳지 않도록 청테이프로 붙여놓고 그것들을 수집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것도 모자라 음악다방에서 DJ에게 신청곡을 내밀고 그 곡이 언제 나오려나 조마조마 했던 적이 한 두 번인가. 음악 한 곡을 얻기 위해 치루어야 했던 즐거운 고단함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요즘은 아날로그식 음악 감상법 대신 인터넷을 통해 사이버 자키들이 실시간으로 신청곡을 들려주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나 동시에 대화를 나누며 같은 음악을 듣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나 왠지 허전하다. 편리함에 소중함을 잃어버린 기억들이 많기 때문일까.

컴퓨터 앞에 앉아 MP3에 음악을 다운로드하는 아이를 볼 때면 묻고 싶다.

“니들이 그 맛을 알어?"

- 콘서트에서

아날로그 가수로 연상되는 이가 있다.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시인들이 뽑은 제일의 작사가이기도 하다. 정태춘. 그가 음악을 시작했던 이십 오년 전은 나의 청년기였다. 그의 아내 박은옥을 떠올리면 평범해 보이는 그녀에게 그런 호소력있는 노래가 나오리라는 선뜻 상상할 수 없다. 같은 길을 가는 부부가 함께 세월을 입어가는 과정은 참 아름답다. 대부분의 부부들도 나름대로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며 살기 마련이지만 그들의 동반은 들꽃처럼 소박해 보였다. 세인(世人)을 의식하지 않고 나름의 음악 세계를 지켜가고 있기에 더욱 좋다.

며칠 전 그들의 콘서트가 열리는 정동 세실극장을 찾았다. 여느 가수의 콘서트와 다른 느낌이었다. 대규모 관객동원을 위한 공연이 아닌 만큼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질박한 그들의 노래가 가감없이 전해졌다.

그들은 세상에 외쳤다.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주던 초기의 서정성을 넘어 도시 빈민과 삶의 근원적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현실 참여의 노래들은 또 다른 파장으로 마음에 결을 일으켰다. 관객들 대부분도 그저 한 템포 느린 속도를 즐기는 듯 중, 장년이 많았다. 자신들의 노래가 자본주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은, 자본주의의 소금처럼 와 닿았다.

‘북한강에서’와 ‘시인의 마을’을 들으면 그의 웅얼거림은 나의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음악을 오랫동안 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음악성은 대중과 다소 거리를 유지한 듯 보였고 일반인들이 흔히 연예인에게 기대하는 ‘끼’가 없었다. 그러나 서정과 현실풍자의 직설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공감해 보라.

공연이 시작되었다. 요즘 대부분의 콘서트는 초호화 무대장치에 유명 연예인을 게스트로 초청해 분위기를 돋운다. 음악보다는 이벤트라 함이 어울릴 기상천외의 쇼를 연출한다. 현란한 대형 스크린과 번쩍거리는 조명에 관객들은 열광하고 기획 자체가 그것들을 의도한 것이다. 관객의 혼을 빼놓을 듯한 전자음의 소용돌이가 객석을 휘도는 공연과는 사뭇 달랐다. 목소리와 사람이 연주하는 악기만으로 진한 감동을 주는 아날로그형 콘서트에 빠져들었다.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그곳에서 맛 본 막걸리였다. 공연 중간의 휴식 시간에 관객을 위한 한 잔의 막걸리, 그것은 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인 술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변함 없었다. 아날로그의 시대가 가고 디지털이 세포분열의 속도로 세를 확장해 가는 이 시대지만 그들은 통기타 하나면 그만이었다. 앞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중매체에 얼굴을 비추기보다는 늘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의 삶터에 함께 하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세상, 그들이 노래를 생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 세상은 정녕 아름답지 않는가.

- 젠가 게임

보드게임카페를 아는가. 수능이 끝난 아이는 날마다 그곳에 출근 도장을 찍는 듯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뻔질나게 다니기가 민방했던지 엄마도 함께 가면 좋아할 것이라는 선심성 인사치레를 곁들였다. PC 게임방의 붐이 엊그젠데 이젠 보드게임이라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녀석들도 싸이버 놀음에 신물이 난 것일까.

지난 겨울 가족여행으로 싸이판에 갔을 때다. 밤 바닷가의 별을 헤는 것도 원주민의 놀이를 구경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붉게 취한 필리핀해의 해넘이가 끝나면 작은 섬의 저녁은 길었다. 우린 호텔 로비의 각종 놀이기구를 섭렵했다. 그 중 아이들이 환호하며 달려든 것이 ‘젠가’였다. 도구라야 새끼 손가락 만한 나무토막 수 백 개가 전부였으며 놀이 규칙 또한 단순했다. 한 층은 가로로 또 한 층은 세로로 엇갈리게 나무들을 차곡차곡 쌓은 후, 미세한 손놀림으로 흔들림 없이 나무토막을 빼내는 놀이였다.

그것은 싱겁고 단조로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긴장과 흥미진진한 놀이였다. 일정한 부피의 토막들이 빈틈없이 쌓인 곳에서 한 개 씩 빼낼 때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정교한 소근육의 사용을 요하는 것이었으며, 보는 이들 또한 숨을 죽였다. 함께 할 인원도 자유롭고 벌칙도 무궁무진하니 응용하기에 따라 뜻밖의 즐거움이 숨어있었다. 가족이 이렇듯 한 곳에 집중하여 놀아본 것은 설날의 윷놀이 말고는 없었다. 특정 메카니즘의 개입없이 서로 얼굴을 맞대는 이런 인간적인 놀이가 있었다니…….

주도면밀하지 않은 나의 성향을 증명하듯 내 순서에 와서 그것들은 와르르 무너지곤 했지만 승부근성이 없는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패자가 여행 후 3일간의 설거지를 하기로 했으나 그 또한 평소 나의 일거리였으므로 게임에 졌다한들 별반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러나 대표적인 아날로그 성향의 놀이인 젠가에서, 무엇보다 아날로그 펜인 내가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좀 애석할 뿐이었다.

- 건널 수 없는 강

고속철의 시대라며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높다. 경제 개발의 물꼬를 튼 경부고속도로를 아날로그 방식에 비유한다면 고속철의 개통은 디지털에 견줄만한 속도 혁명이다. 그러나 초기의 시행착오 때문인지 운행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장에 쏟아지는 디지털 상품들은 이처럼 편리함을 주지만 한편 우리에게 문화적 혼란을 겪게 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의 탄생에 너나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의 기능을 익히느라 시간을 할애한다. 이러한 신기술은 수용성이 높은 신세대와 그 반대인 기성세대간 이해관계와 유대감의 간격을 멀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둘의 가치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 예를 들면 지하철이 멈추거나 엘리베이터가 움직일 때 제어는 디지털이지만 출력은 아날로그라고 한다. 아날로그의 어원이 ‘유사하다(aualogous)’, ‘닮았다’에서 기인한 것이니,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디지털에 비해 극복할 수 없는 물리적 한계도 많다. 디지털 또한 무한한 장점을 살리고 아날로그를 접목하거나 흡수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에 대한 끝없는 수요와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날로그를 벗어날 수 없다. 대화와 요리하기, 악기 연주와 글을 읽고 쓰는 것……. 이처럼 작은 즐거움들은 아날로그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의 영원한 본질은 아날로그일 것이다.

그 강에 발을 담글 때 비로소 평안하다. 우린 이미 아날로그의 강을 건너온 듯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아닐까.



엄현옥 수필가 전남 장흥 출생. 우석교육대 졸업. 1996년 《수필과비평》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 PEN 클럽 회원, 제물포수문학회 회원, 제물포수필문학상, 인천문학상, 신곡문학상 본상, 인천 PEN 문학상 등 수상.

수필집으로 『다시 우체국에서』, 『나무』, 『아날로그-건널 수 없는 강』, 『질주』, 『작은 배』, 『발톱을 보내며』 등.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