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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표지(標識) / 홍혜랑

부흐고비 2022. 2. 11. 08:00

지하철 계단을 쏜살같이 내려갔다. 텅 빈 플랫폼에서 방금 떠난 열차의 긴 꼬리가 보인다. 또 후회한다. 집에서부터 조금만 서둘렀더라면 동네의 셔틀버스를 놓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방금 떠난 전동차를 탔을 테고, 그랬다면 목적지에 닿을 때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는 일은 없을 텐데.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이 지상의 모든 것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파스칼의 말이 지하철 플랫폼에서 생각난 것은 오늘뿐이 아니다. 해마다 나의 신년 계획은 '품위있게 외출하자'는 것이다. 이 작은 다짐 하나 지금껏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또 모를 일은 이렇게 위태위태하면서도 목적지에 닿으면 지각할 때보다 그렇지 않은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갈팡질팡 허둥대는 나를 오늘까지 지탱해 준 것은 어느 시인의 말대로 팔 할이 바람이었다.

나의 게으름은 바람에 대한 막연한 신뢰였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바람 속에서 친정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막내딸에 대한 사랑은 시집보내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부모님은 내심 내가 시집을 좀 늦게 가기를 원하셨다. 내 탓이기도 하다. 여고시절부터 '시집 안 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턱도 없이 막내딸을 '큰 인물'로 키워보고 싶은 부모님의 기대를 한껏 부풀려놓으려는 관심 끌기 작전이었을 것이다. '그 앤 시집을 좀 늦게 보낼 것'이라는 어머니의 포부에 단골점쟁이는 '그렇게 안 되겠다'고 점괘를 뽑았지만 어머니는 믿으려 하지 않으셨다.

대학원 진학엔 예나 지금이나 두 부류가 있다. 취직할 동안 간이역 쯤으로 머물거나 아니면 군입대를 늦추어 보려는 도피족과, 인생을 걸고 학문을 해보겠다며 천직을 물색하는 학동들이 있다. 나는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대학원 진학이 흔치 않던 시절 언감생심 대학원을 꿈꾼 것은 공부에는 목숨 걸지 않으면서도 학문에 대한, 아니 '정신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향일성 때문이었다. 내 안에 있는 속물근성은 항상 나와 반목했다. 세속을 포기할 만한 용기도 없으면서 속물은 싫었다. 대학원에서 만난 박사 과정의 노총각 하나가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는 날것'이란 말을 생각나게 했다. 해바라기처럼 나의 눈은 그의 움직임을 따라 돌아갔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중세 프랑스에서 있었던 연인들의 러브스토리다. 수도원의 신학교수 아벨라르가 당시 여성으로서는 흔치않게 학문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엘로이즈의 가정교사가 되면서부터 그들은 학문보다 사랑에 열중했다. 시대는 달라도 그들의 사랑이야기 속에서 간간이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에 태어난 그들 연인이 사랑의 대가로 치른 형벌은 가혹했다. 엘로이즈는 수녀원으로 보내졌고 아벨라르는 교수직은 물론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명성을 잃게 된다. 중세에 태어나지 않았기에 암흑시대의 형벌은 면했지만, 나에게도 하늘로부터 경고 메시지가 몇번 날라 왔다.

내가 사랑에 빠져있다는 걸 가족들이 알게 된 것은 병원의 응급실에서였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니 장마 빗줄기가 억세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건널목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렸다. 택시 한 대가 내 앞으로 미끄러져 올 때 눈이 부시던 헤드라이트만 생각난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부모님 몰래 데이트 하다가 큰일을 저질렀으니 대책이 서지 않았다. 꼼짝없이 가족들에게 들통이 나버렸다. 출발도 하기 전에 우리의 인연 속에서 크든 작든 교통사고가 났으니 부모님의 심중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땐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알리지 않아도 다 때가 알아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어느 아버지인들 딸 시집보내며 속으로 울지 않을까 만은 아버지의 섭섭한 마음속엔 특히 내가 대학원을 마치기도 전에 시집간다는 미완의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시골에 있는 시댁으로 폐백 드리러 가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후행 길에 몸소 나서셨다. 그것도 오빠와 남동생을 대동하시고. 지금은 두 시간 반이면 대관령의 고속도로를 질주해서 시댁에 닿지만 60년대엔 기차로 돌아돌아 열 두 시간 걸리는 한국 땅에서 가장 먼 여행길이었다.

목적지에 내린 일행은 택시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대관령 기슭의 시댁을 향해 달렸다. 앞 차에는 아버지와 오빠와 동생이, 뒷 차에는 신랑신부가 탔다. 신작로를 벗어나 시골길로 들어서니 흙길이긴 하지만 택시가 못 다닐 만큼 좁거나 험하지는 않았다. 울창한 송림松林 사이로 까만 기와지붕이 보인다. 처음 만나는 시댁을 백미터 쯤 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앞 차가 정말 믿어지지 않게 스르르 오른쪽 밭고랑으로 누워버린다. 마치 피곤한 사람이 방바닥에 눕듯 어처구니 없는 자동차의 몸짓이었다. 폐백 술병을 품에 안고 있던 남동생이 제일 먼저 택시 밖으로 빠져 나왔고 승객은 모두 무사했다. 그날의 충격 속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진한 물감으로 묻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얼굴이 창백해지도록 놀라신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술병조차 까딱 없이 무사했다"며 애써 사고의 흔적을 털어내려 하셨다. 순간 나는 아버지의 안도감 속에 묻어있는 예언적 기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장애물 경기를 넘을 적마다, 시집가던 날 깨어지지 않은 술병을 대견해 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겁 없이 달려온 길을 뒤돌아보니 지뢰밭도 많았다. 그것이 지뢰밭인 것조차 감지할 수 없었으니 지뢰를 밟지 않은 걸음걸음은 내가 해낸 것이 아니었다. 신이 나의 길 위에 준비해 놓은 표지標識를 읽지 못한 문맹이었다. 다만 대속代贖의 은총만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다.

때를 맞추어 시중時中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은 지하철 계단을 숨가쁘게 오르내릴 때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시집가던 날, 멀쩡한 평지의 전원에서 위기를 자초한 택시 운전기사만큼 내 삶의 운전 솜씨도 어처구니없이 서툴렀다.



홍혜란 수필가 1939년 서울 출생, 숙명여고, 고려대 법학과 졸업. 결혼 후 독일의 마아부르크 대학교 독어독문과 유학, 20여 년 경희대, 고려대, 서울여대, 한국외대 등에서 교양독일어를 가르쳤다. 1900년대 초부터 수필문학에 매료되어 19994년 '한글문학'을 통해 문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에세이집 『이판사판』, 『보다 느끼다 쓰다』, 『문명인의 부적』과 공저 『실크로드의 봄』, 『작고문인 회고집』, 『기독교 수필』등이 있다. 수필문우회, 한국비평문학회, 국제 팬클럽, 한국문인협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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