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끄트머리 / 김종란

부흐고비 2022. 2. 11. 07:42

여섯 다리를 갖춰야만 움직인다는 그가 옵니다. 다리 넷인 당나귀와 다리 둘인 몰이꾼을 거느리고 저기 양반인지 반냥인지가 오네요.

비켜라, 숙여라, 엎드려라, 하는 나귀몰이꾼의 외침대로 우리는 길섶으로 밀립니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꼬집으며 바깥양반이 귀옛말을 합니다.

"퍼뜩 수구리잖고 뭐하노!"

"만다꼬 그캅니꺼?"

양반 일행이 길 가운데를 차지하며 몇 발 앞에 멈춥니다. 길 언저리로 비켜났는데도 몰이꾼은 당나귀를 우리네 쪽으로 바짝 들이댑니다. 가풀막진 개골창으로 떨어질까 발을 멈칫거립니다. 몰이꾼의 심술은 그렇다 치고 당나귀란 놈 좀 봐요. 대가리를 흔들며 투루루 투레질하는 꼴이 우릴 나무라듯, 당나귀란 놈까지도 우리 앞에선 양반 행세를 하네요.

땅바닥으로 엎어지는 바깥양반 말투가 다급합니다.

"우얄라꼬 양반한테 뻗대노! 우째 그리 뻣뻣하게 서 있노?"

"지는 안 할낍니더! 우리가 양반들 찌끄래기입니꺼?"

흙바닥에서도 절을 받으려는 양반, 방바닥인 양 엉덩이를 치켜들고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바깥양반, 길에서도 무릎을 꿇으려는 그의 옆구리를 툭 칩니다.

당나귀 탄 양반이 끄덕하니 당나귀란 놈도 끄덕끄덕하네요. 양반이 떠난 자리에 퉤퉤 침을 뱉습니다. 그런데도 덩둘한 바깥양반은 연신 굽실대며 고개를 못 듭니다. 어쩌면 그는 양반이 아니라 양반이 빌려준 땅을 생각하며 그러고 있을 겁니다. 뼛성을 내며 그의 발을 콱 밟으려다가 애먼 돌부리만 냅다 걷어찹니다.

​ 당나귀 위에 앉아 눈알을 뒤룩대던 떠세 양반님, 너무 뭉그적대면 엉덩짝에서 곰팡이 피고 부스럼 나요. 엉덩이를 나귀 등에 개개며 심드렁히 버틴 건 우리가 제 앞에서 어서 고꾸라지길 바란 거겠지요. 이 고을 전답을 다 꿰찼으니 이 길마저 제 길이라는 뜻이고요.

입으로 쌀값을 묻거나 손으로 돈을 세지 않는다는 양반들,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치고 얼어 죽을지라도 짚불은 안 쬔다는 양반들, 비짓국을 먹고서도 용트림을 하고 죽을 먹어도 이빨을 쑤신다는 양반들, 조상 덕에 흥청망청 저렇듯 여섯 발을 얻어 타고 다니니 우리네가 기어 다니는 개미 새끼로 보이나 봐요.

농사지어 세금 내고 특산품을 공납하며 자식 키워 군대 보내는 건 우리네 몫, 길 한 뼘을 두고도 저런 꼼수를 쓰며 우리를 가녘으로 몰아내는 건 양반네들이지요. 나라님은 나랏일을 어찌 그리 하시는지, 큰 재물 굴리며 큰소리 내는 양반들만 지켜주고 우리한테는 자투리 돌땅 한 뙈기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꼼바리 양반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는 바깥양반이 꽤나 허우룩해 보입니다. 볼멘소리로 그를 닦아세우고 행짜 놓던 게 민망합니다. 자드락길로 들어선 걸 핑계로 그와 바짝 맞붙습니다. 그의 허구리를 슬쩍 감고 새뜻한 낯으로 조곤조곤 속삭입니다.

"저 양반이 빌려준 땅 뺏기믄, 우리는 고마 저 하늘이나 일궈 묵고 사입시더."

"그랄까? 까짓거 그라지 뭐…"

바깥양반의 눈자위가 벌개집니다. 슴벅슴벅하는 그의 눈에다 하늘을 푸지게 그러담습니다. 우리들의 하늘땅이 그의 눈에서 촉촉하게 일렁댑니다.



김종란 작가 경북 상주 출생으로 2011년 '한국수필'로 등단, 수필집으로 『옛 그림 잦추기』. 강남 수요수필 회장과 스페이스 에세이 회장을 지냈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의 의자 / 진영숙  (0) 2022.02.13
표지(標識) / 홍혜랑  (0) 2022.02.11
버려진 꽃바구니 / 지홍석  (0) 2022.02.10
유월이 오면 / 백남일  (0) 2022.02.10
옹이 / 박덕은  (0) 2022.02.1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