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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구인배 시인

부흐고비 2022. 2. 24. 07:50

구연배 시인
전북 진안 출생.

1995년 《전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995년 《자유문학》 시 추천 완료.

《자유문학》 신인상(시), 진안문학상 등  수상.

시집 『빗방울은 깨져야 바다가 된다』, 『물의 간극』, 『몽리몽외(夢里夢外)』, 『환한 꽃그늘, 『사계 그리고 환절기』.

현재 서해대학 교수. 전북시인협회 부회장.

 



눈이 되어 내리고 싶다 / 구연배
눈이 내린다./ 꽃잎과 함께 사라져/ 우리를 스산케 했던 나비 떼들/ 분분히 날아와 스스로 꽃이 된다./ 납작 엎드려 치러야 하는 죄/ 그래서 눈꽃엔 향기가 없다./ 눈은 소리 없이 녹을 것이고/ 녹아서 누군가의 피톨로 흐를 것이다./ 그때 나는 보리라./ 우쭐우쭐 돋아나는 새싹과/ 맨발로 걸어도 좋을 향톳 길에/ 싱싱한 꽃대를 거침없이 밀어 올리는/ 들꽃의 씩씩한 이름들을./ 과음 뒤의 속 쓰림 같은 절망의 힘도/ 없어서는 안될 하루 분의 양식/ 새벽길의 눈으로 내리고 싶다./ 어지러운 발자국으로 얼룩진/ 불온한 길을 하얗게 표백시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음 속 그리운 풍경이 되고 싶다.//

늦매미 / 구연배
뒤늦게/ 애벌레를 벗고 우화한 늦매미 한 마리/ 처서 백로를 훌쩍 지난/ 가을 나무를 잡고 운다./ 높다란 가지 끝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저 극진한 울음./ 친구들은 가고/ 사랑도 찾을 수 없고/ 녹음을 훑어 내리는 찬바람만 불어와/ 단풍잎들 하염없이 뚝뚝 떨어지는데/ 하마 귀까지 어두워 졌는지/ 외로워 말라고 매앰 맴 맞소리를 내주니/ 포르릉 내 곁까지 날아와/ 때동나무를 잡고 다시 운다./ 산 도랑물에 지는 하얀 때동나무 꽃잎처럼/ 극진한 울음을 남기고 매미는 진다./ 그렇게 꽃잎 지는 봄과 생이별이더니/ 내내야 그 도랑물에 울음 떨어져/ 여름이 간다./ 세월이 흘러간다.//

멈춘 시계에 대한 단상 / 구연배
멈춘 시계를 본다./ 화석이 되어버린 시간을 본다./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듯/ 시침은 새벽을 가리키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벽 앞으로 내달렸을 것인가./ 생의 마지막 날을/ 가슴에 새겨 넣은 멈춘 시계여./ 너를 들여다보면/ 그리운 내 유년을 만날 수 있을까./ 시디신 허무를 끌어안고/ 새벽 가로등 불빛을 하염없이 쬐던/ 창백한 청년을 만날 수 있을까./ 고장난 마음/ 불통의 시간을 교체할 요량으로/ 시계 방 유리문을 연다.//

풍경 1 / 구연배
바람을 만나기 전에는/ 눈멀고 귀먼/ 온기 없는 물고기였다.// 추녀 끝에 매달려/ 얼음장 같은 어둠을 꽝꽝 두드리더니/ 득음을 했나, 운다// 바람을 깨치고/ 적멸보궁에 드는 무혈 목어// 몇 개의 바다를 마시고 토해야/ 그 한 몸 유유히 건널/ 무심천에 이를까// 환생의 절절함으로 꼿꼿해진/ 지느러미를 세우고/ 헤엄쳐 오르는 직벽의 세상은/ 소실점 없는 외길// 서풍은 불고/ 홀로 가는 길에 풍경이 운다.//

풍경 2 / 구연배
한 번을 다녀가도/ 마음 같은 것 말고/ 껴안을 수 있는 몸으로 와주시는/ 당신이 눈물 납니다.// 무시로 나를 흔드는 이여// 당신의 손길 닿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 나도 모르게/ 노래로 울음으로 황홀케 하시니/ 고맙습니다.// 한 아름 안고 토닥이며/ 사랑에 겨워하시는 말씀이/ 심금을 울립니다.// 사랑은/ 눈 뜨자마자/ 그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마음의 풍경을/ 가슴에 내가 거는 일입니다.//

쑥갓 / 구연배
눈 내리는 날/ 쑥갓 하나 무쳐놓고/ 점심을 먹는다/ 초록향기/ 生의 겨울이/ 쑥갓 같은 그리움 있어 향긋하다.//

카페에서 / 구연배
누군가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 끝에 그리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느린 곡조의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나는 기다린다./ 오지 않을 사람/ 결코 와서는 안 될 사람인 줄도 안다./ 그럼에도 기다리는 것은/ 보석 같은 그리움을 만들고 싶기 때문./ 만날 수 없다면/ 동동거리는 사람 냄새 나는 그리움을/ 이젠 사랑해야지./ 만나서 재가 되는 황홀함보다/ 속으로 파랗게 싹이 돋는 겨울나무 같은/ 그리움을 간직해야지./ 세상과의 결별을 준비하는 단풍잎/ 홍기종기 모여 계절을 모의하는 환절기의 바람/ 젖은 발부리를 말리는 가로등/ 뜨거운 입술을 기다리는 앙증맞은 찻잔/ 슬픔을 압축해 뽑아낸 에스프레소/ 모두 달콤 쌉싸래하다.//

점등 / 구연배
아침 햇살이/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방울을/ 점등한다.// 일제히 켜지는 알전구// 하늘은/ 떠다니는 이슬에게도/ 점등으로 길을 안내하는데/ 나는 무엇을 들고 살아갈까// 삶이란/ 눈[目] 덮은 마지막 날을 위해/ 등불을 준비하는 것이니// 마음이 꽃짐 짊어지고/ 임 마중 가는 길// 나는 나를 점등한다.//

사진전 / 구연배
풀잎 위의 청개구리/ 산 채로 박제되었다.// 그 누가 가뒀나 저 어린 것/ 이제 아플 것도 없고/ 깊은 연못에 뛰어들어 울 일도 없겠지만// 한 줄기 바람에/ 하현달은 휘청 허리를 꺾고/ 풀잎 바르르 떠는 밤마다// 박제된 청개구리/ 찰나에 뜨겁게 피가 돌아/ 전시장을 폴폴 뛰어다니겠네.//

무인도 / 구연배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도/ 마실 물이 없고/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도/ 사랑이 없으니/ 너와 나/ 마음의 닻을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외로운 섬일 뿐.//

독도 사랑 / 구연배
온 누리에 비치는 장엄의 일출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너 있음으로 우리가 있는/ 공존의 핏줄./ 언제나 험한 역사의 물결에 쓰러지지 않는/ 무게 중심이 되어 주었고/ 때로는 어둠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는 횃불이 되어/ 함께 나아갈 길을 비추는/ 꺼질 수 없는 등대지기로 한 몸 이룬 어진 섬./ 그런 까닭에 너는/ 수수만년 겨레의 빛이요/ 지성의 인중이요/ 우리 민족의 나아갈 바 형형한 눈빛 같은 것이니/ 너의 스러짐은 우리의 고난이요/ 너의 근심은 우리의 고통이라./ 죽음으로 지켜야 하느니/ 영원토록 힘 다해 지켜내야 하느니/ 어찌 감히 탐내게 놔둘 것이며/ 목숨 보배를 빼앗길 것이냐./ 너의 이름 아래에서 우리는/ 한 배달 한 겨레가 되고/ 너의 존재함으로 우리는 공존의 운명이 된다./ 그러므로 겨레여, 민족이여!/ 빼앗기지 말자./ 감히 털끝도 넘보지 못하게 하자./ 세세무궁토록 명심하고 자랑하자./ 독도여, 사랑하는 독도여!//

늑대 / 구연배
그는 나를 늑대라고 불렀다.// 그럴 만하다./ 난 생살만을 고집했으니까/ 붉은 피 뚝뚝 흘리는/ 살아 있는 살을 즐겼으니까// 나의 별자리는 야행성 늑대/ 밤이 되면/ 두 눈은 더 멀리 반짝이고/ 이마는 뜨거워졌으니/ 코끝에 스미는 피 냄새를 쫒아/ 나의 이성과 감성을 광야에 풀어놓는다.// 굶주린 내 영혼/ 목마르구나/ 망극하구나// 나는 오늘도/ 침엽의 숲을 어슬렁거리는/ 고독한 사냥꾼/ 늙지 않는 평원의 늑대다.//

나무농사 / 구연배
아내는 돈이 될까 해서 심고/ 나는 꽃이나 볼 요량으로 심는다.// 이렇게 바라는 것이 서로 다른/ 삶의 정원이라니// 그러나 걱정 뚝!/ 동상이몽도 자주 꾸다 보면/ 알콩달콩 부딪칠 만하고/ 오월동주도 허허로이 다툼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다가 혹/ 쓸 만한 재목이 되면 팔[賣]거나/ 아니면 꽃 대궐 되어/ 두 눈이 호사를 누린다.// 고단한 살림살이가 재밌다.//

눈내리는 날에는 / 구연배
눈 내리는 날에는/ 죄 없는 양 함부로/ 하늘을 올려다보지 마라.// 너와 나의 욕된 죄/ 덮어주려고/ 하늘 허공을 달려오는 것이니// 세상을 위해/ 주저 없이 뛰어내리는 눈발의/ 가없는 발걸음 소리를/ 이 밤 잠들지 말고 들어야 한다./ 긍휼한 그이 방문을/ 맨발로 맞이해야 한다.// 눈 내리는 날에는/ 겸손한 어깨에/ 하늘이 전하는 순백의 말을/ 소복소복 받아가며 걸어야 한다.//

풍장 / 구연배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라지느냐를 생각한다.// 바람을 읽고/ 바람과 싸우다/ 바람에 눕는 잎의 가벼움이라니// 잘 말린 몸/ 허공을 뛰어내려/ 마지막 숨을 찍는 투신이/ 아름답다// 나무처럼/ 내가 나를 풍장하고 싶다.//

 

탑 / 구연배
세상의 모든 이름은/ 지워지기 위해 존재하고/ 존재하기 위해 지워진다.// 완성보다 더 불안한/ 미완성/ 그러므로 지워지는 것은 아름답다.// 허물어진 한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중심을 잡고 반짝 일어서는/ 탑을 보라./ 더 뜨거운 시대를 위해/ 더 큰 탑이 되기 위해/ 주저 없이 지워지고 있다.// 달이 제 모습을 바꿔가며/ 불 탄 숲속으로/ 소리 없이 계절의 바퀴를 밀고 가듯이/ 부서짐의 절정에서 터져 나오는/ 고요한 소리로 일어서고 있다.//

폐사지의 봄 / 구연배
영화로운 시절은 가고 세월의 그을음만 남았다./ 환한 얼굴 한 번 갖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입 닫아버린 폐사지 석불/ 덩그러니 홀로 예불을 올리며/ 함께 사라지지 못한 운명의 점괘를 떼고 있다./ 벚꽃으로 장엄한 폐사지 야외법당/ 반짝이며 되살아나는 화광[花光]을 보라./ 발밤발밤 얼마나 꽃길을 걷고 싶었을까/ 폐사지 석불이 꽃으로 웃고 풍경으로 말한다./ 듣는 귀는 불에 타버리고/ 우레처럼 질러대던 사자후의 입술은 닳아/ 말[言]들이 고이지 못한지 오래./ 석불의 묵언을 알아채고/ 살아서 돌아온 폐사지의 벚꽃나무는/ 얼마나 행복할까./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느니/ 꽃 같은 그리움은 출렁이지만 말고/ 어서 돌아오라./ 잠들지 못한 정령들이 부활을 꿈꾼다.//

봄이 오면 / 구연배
밟으면 되살아나는 먼지처럼/ 억누르면 더 멀리 번지는 그리움처럼/ 봄이 오면/ 내 마음 언덕에 꽃물결 인다.// 세월 지나도/ 그해 봄으로 기억되는 가슴 속/ 그때 그 사람/ 늙도록 저물지도 앉고 다복다복/ 꽃처럼 피느니// 세상의 모든 꽃은/ 하늘에 올리는 지상의/ 긍휼한 헌화// 숨은 꽃 뿌리같이/ 무장무장 뻗어 네게 닿는 때마다/ 그리운 꽃송이 화르르/ 피고 또 진다.//

 

꽃 / 구연배
꽃이 터진다/ 터지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아픔/ 그러므로 꽃피는 정원에서는 누구나/ 생각에 어지럼병이 든다// 꽃이 핀다/ 핀다는 것은/ 세상에 알려야 하는 상처/ 그러므로 꽃그늘에서는 누구나/ 추억의 피를 흘린다// 그대 그리운/ 생각이 터지고/ 추억이 터지고/ 터져서 마침내 꽃이 되고야 마는/ 간절한 사랑이야기// 상처가 꽃이 된다/ 아픔이 향기가 된다./ 꽃피는 날에/ 꽃피니 알겠다// 네게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었던/ 부드럽지만 단단한 그 겨울의 폭설과/ 정신을 몰아치던/ 그대의 찬 눈빛이 모두/ 아름다운 마음이었다는 걸// 나 이제/ 가슴에 핀 꽃으로 향기로우니/ 봄꽃이라 불러다오// 무섭고 쓸쓸한 삶의 벼랑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기다리느니// 노을이 지면/ 찾지 않아도 반짝이는 별/ 떠오르는 것은 모두 그대임을/ 꽃피니 알겠다.//

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 / 구연배
누구나, 살면서/ 꽃이거나/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때론 격렬히 때론 우아하게/ 마음을 살피고 몸을 드러내지만/ 꽃이 되고 향기가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런즉 들로 나가 꽃을 만나 보라./ 향기를 맡아 보라./ 그대가 바라는 꽃들, 향기들/ 지천으로 피어나고/ 공간 구석구석 은은히 깃들여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 보라./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를.// 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 다르게 사는 것이 꽃이고 향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꽃무릇 / 구연배
올곧은 채로 살다가/ 외로워지는 날이 오면/ 꽃이 되는 마음도/ 타래처럼 얽힌 인연으로/ 가슴이 탄다// 흔적은 있는데/ 찾을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내 안의 그대// 그대 안의 나를 위하여/ 부지런히 일궈놓은 꽃밭에/ 선명히 찍힌/ 새벽새 발자국// 상사화!// 누가 붙인 이름인가/ 불같고/ 얼음 같고/ 영영 이별인/ 먼 인연의 걸음으로/ 앉은자리에서/ 마음만 흔들며 살아간다.//

꽃무릇 2 / 구연배
천만 년이 흘러도 쓸쓸해// 살아도 죽어도/ 그대는 가장 먼 나// 나는 가장 먼 그대//

꽃바람 / 구연배
꽃바람은/ 하늘을 향한/ 가장 극렬한 몸짓/ 그러므로 꽃밭에서는/ 두 마음을 품지 마시라/ 불붙거나/ 얼어붙거나/ 사랑이거나 치정이거나/ 오직 한마음만/ 꽃일 수 있고/ 향기일 수 있느니//

꽃씨 1 / 구연배
꽃은/ 필 때/ 목숨을 건다// 실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의/ 눈부신 관능을 보라// 죽음이 아니고는 맛볼 수 없는/ 씨방 속에/ 꿀 한 방울 숨겼으니// 그러므로 그대여/ 목숨 거는 사람에게/ 방문을 열어라// 꽃씨는/ 스스로 책임지는 사랑의/ 긍휼한 대가다.//

지는 꽃 / 구연배
하르르 떨어진 꽃잎이/ 반기던 걸음에 짓밟히고/ 서운한 어떤 것은 진물을 흘리는/ 꽃나무 그늘에 가면/ 그 날 그 밤의 환하던 몸이/ 어금니 깨물고/ 어떻게 세월 속으로 녹아들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숨을 멈추고/ 제대로 한 번 뜨거운 목숨이 되게 하신/ 그 짧은 열정으로/ 비로소 긍휼한 삶이 열리느니// 그런 까닭에/ 꽃 같은 사랑을 받는 일은 언제나/ 쓸쓸하고 황홀한 것!//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의 얘기를 자분자분 듣다보면/ 상처는/ 저절로 아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채우는 그리움이란 걸/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늘수박 꽃 / 구연배
치정이라 욕하지 마라/ 그대를 칭칭 감고도 모자라/ 뿌리까지 감아버린 실팍한 인연이다// 욕정이라 비웃지 마라/ 그대가 죽으면 나도 따라죽는/ 목숨건 사랑이다// 삶이란/ 허공에 매달려서까지 키워내야 할/ 목숨 값이 있고/ 죽음으로도 바꾸지 못할/ 넝쿨 사랑법이라는 게 있다// 한 몸 이룰지니/ 극진한 사랑을 꿈꾸거든/ 절정의 순간 눈감지 마라/ 죽을지라도 감은 손 풀지 마라// 나무 허리를 마음껏 죄는/ 하늘수박 꽃/ 한여를 폭염이 먼저 지치는/ 목하 열애 중이다//

수련 피는 아침 / 구연배
물결을 딛고/ 수면 위로 올라선 수련.// 젖꼭지를 문 아기처럼/ 강물을 움켜쥐고/ 볼이 미어지도록 해시시 웃는다// 굽이굽이 잠긴/ 산맥의 발목을 씻으며/ 바다로 가는/ 강물의 노래는 깊어 가는데// 수련 핀 아침/ 빈 하늘 가득/ 흰 구름 몰려간다.//

동백꽃 2 / 구연배
무심히 피는 동백은/ 봄을 인(印)치는/ 가장 확실한 증거// 붉은 인주를 묻혀/ 도장을 찍듯/ 메마른 땅에 꾹꾹/ 봄을 날인한다// 너에게 바친/ 나의 순결을 기억하라/ 꽃잎 혈흔을 보고/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울먹이던/ 눈물 속에서/ 오호라 긍휼한 사랑이 싹텄느니// 동백숲 속에 숨어/ 찻잎을 고르는 처녀야/ 너를 안고 쓰러진 것이/ 산 너머 봄이렸다/ 피 끓는 바람이렸다//

불두화 / 구연배
한 번은 꼭/ 알몸으로 만나야 했다./ 찾아가면 언제나/ 바람보다 먼저 달려와 안기는 꽃몸./ 아, 얼마나 그리웠는가/ 옷 벗지 못한 나는 무례했다./ 용서해다오./ 그대를 탐한 한 마리 짐승이 이제/ 부끄러울 것도 없는 알몸이 되어/ 그대를 마중하리라./ 네가 그랬던 것처럼/ 꽃으로 달려가 눈부시게 안으리라./ 불두화여!/ 욕정도 순해지면 순정이 될까./ 세상을 헤매는 짐승의 눈동자를/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놓고/ 모로 선 마음을 내려치는 꽃주먹 쇠망치./ 달밤 마당에 자욱이 피 어린다.//

어리연꽃 / 구연배
사는 일이/ 먼지바람 같다고 하더니/ 손 한번 잡은 인연이 무거워 훌쩍/ 인도로 간 사람./ 잘 다녀오란 말도 못하고/ 어리연꽃 핀 강가에서 허허로이/ 눈물로 바래느니/ 꽃잎 몇 장으로 강물을 움켜쥔/ 저 환한 꽃불/ 부디 성불하시라.//

목련 / 구연배
봄꽃은 모두/ 겨울이 주고간 선물// 목련꽃/ 별이 반짝일 때 툭,/ 바람이 한눈 팔 때 툭,/ 어둠 어루며 피는 것인데// 살결도 곱거니와/ 향이 맑아/ 심술궂은 돌개바람도/ 목련나무 밑에서는 고분고분// 꽃피는 소리에/ 무거운 걸음을 옮기느라 애를 먹는/ 아흐, 해찰의 봄볕.//

메밀꽃 필 무렵 / 구연배
흐드러진 메밀꽃밭에/ 빈 원두막 한 채// 기다림은 늘/ 꽃길처럼 환해야 하느니// 누구라도/ 사랑하고 싶거든/ 집 하나 지어놓고// 나는/ 네 눈물로도/ 꽃밭이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먹 자두 / 구연배
그녀는 한 가지 옷만을 입습니다./ 아니 한 가지 색깔만을 고집해/ 무얼 입어도 그 옷이 그 옷 같아 보일 뿐입니다./ 머리도 미장원이 아니라 쓱쓱 손수 깎아버리니/ 오히려 가발을 멋으로 얹고 다니는 사람 같습니다./ 화장은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릅니다./ 그녀는 돈도 없습니다./ 아니 많이는 버는데 누군가가 다 가져가는 모양입니다./ 자선 사업가는 아닌데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많답니다./ 당연히 통장도 없고 그 흔하디 흔한 카드 하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한 가지 색깔의 옷만 입는데 언제 봐도 맵시가 있고/ 선머슴 같은 더벅머린데 건강한 스타일러 같고/ 맨 얼굴에 맑은 실 정맥이 이목구비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가을밤의 화한 박꽃 같습니다./ 빈털터리가 분명한데 다녀온 곳이 여간 아닙니다./ (시시할까봐 얘긴데 프랑스 이태리 뭐 이런 곳들이랍니다)/ 산양 뿔처럼 당당하고 얌전한 발목에/ 웬 호기심이 그리도 많은지/ 뭐라고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자두를 먹습니다./ 그것도 붉은 핏기가 뚝뚝 묻어날 것 같은 싱싱한 먹자두를./ 아시겠지만 자두는/ 비를 맞으면 금방 빗물 맛이 배고/ 햇볕을 쬐면 금새 단맛이 드는 과일이지요./ 그녀가 그렇습니다./ 하늘이 주는 침묵과 말씀에 마음을 반응하는 여자./ 그리하여 그 계절의 바람 맛이 나는 여자./ 하늘이 잘 익힌 먹 자두 같은 여자입니다.//

새 망보기 / 구연배
씨앗 심은 텃밭에 새떼를 쫓으라기에/ 시집 한 권 챙겨 들고/ 밀집모자 눌러 쓰고/ 나무 그늘에 앉아 망을 봅니다./ 강냉이 콩 호박 상추 아욱 씨들이/ 단단한 껍질을 벗고/ 연한 살을 뾰족뾰족 밀어 올렸는데/ 그것 뜯어먹자고 기어오르는 벌레들하며/ 멧비둘기 까투리 장끼 콩새 박새/ 건지숲의 새란 새는 다 날아듭니다./ 촉 틔운 씨앗을 빼먹는 놈/ 비린 떡잎을 쪼아 먹는 놈/ 겅중거리는 발목과 투명한 부리가 너무 예뻐/ 넋 놓고 구경만 했습니다./ 혼날 일만 고스란히 남겨놓고/ 잔치를 끝낸 새들은 숲으로 가고/ 나 또한 시집을 다 읽었으니 귀가!/ 유쾌한 탐조 시간이었습니다.//

숲, 맨 처음의 바다 / 구연배
어둠이 걷히는 새벽 숲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갓 피어난 나뭇잎들이/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푸름/ 창밖은 벌써/ 깊이를 감춘 녹음이/ 처마 밑까지 차오르고 있다// 바다 이전의 바다/ 숲으로 헤엄쳐 간다// 숲에서는 모두가 맨발이다/ 나무나 새 다람쥐/ 안개나 바람/ 산을 넘어가는 달까지도 맨발이다// 신발을 벗고 흙을 밟는다/ 간지럽고 따뜻하다/ 흙이 살아 있음으로 부드럽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문득, 흙속에 묻혀/ 녹음을 밀어 올리는 뿌리처럼/ 숲에 묻혀/ 나만의 바다를 밀어 올리는/ 시인이 되고 싶다, 고 생각한다// 고여 있거나/ 낡은 것이라고는 없는 숲/ 집에 돌아오는 길은 온통/ 익사해도 좋을 바다/ 녹음이었다.//

안개 속에서 / 구연배
빈들이나 마을/ 보이는 것 모두 점령하고도/ 옛 길 고스란히 남겨두고/ 풀잎 하나 꺾지 않더니/ 세상의 고요를 가일층 깊게 하기 위해/ 수런대던 눈동자들을 하얗게 눈멀게 한다.// 어둠보다 더 깜깜한 안개 속에서/ 유유히 계절을 실어 나르는/ 강물을 보아라./ 바다에 이르러 더는 흐를 수 없는/ 억겁의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두고도/ 넉넉히 비어 있는 허공을 또 보아라.// 안개는/ 떨어지는 꽃잎 하나의 무게에도/ 온몸을 기울여 흔들리고/ 보이지 않는 깊은 상처까지/ 소리 없이 문질러 아물게 하느니// 보이지 않아서 벼랑뿐인 새벽길을/ 누가 맨발로 걸어가는지/ 어느 꽃이 조심스레 저를 피워/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지 알 수 있다.// 보이는 것들은 사실/ 우리를 얼마나 쓸쓸하게 했던가/ 가질수록 뼛속 깊이 허전하게 했던가// 그럼에도 안개는/ 세상의 것들로 서로서로 중심을 잡고/ 타오르라 한다./ 타올라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 길이 되고 꽃이 되는/ 아름다운 혁명의 씨앗이 되라 한다.//

 

지금은 투병 중 / 구연배
아내가 돌아와 앉을/ 의자를 닦는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힘없이 쓰러져 있는 나무다리를/ 걸레로 쓱 문지르니/ 죽어 있던 무늬가 결 곱게 되살아난다.// 닷새 후면 아내는/ 이 의자에 앉아/ 비워둔 공간을 채우고/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저 나무무늬처럼/ 결 곱게 회복될 것이다.// 아내는 지금 투병 중이다.//

 

불효자의 문병 / 구연배
몸살감기에 걸려/ 밥숟갈 뜨기도 되다는 어머니가 걱정돼/ 밤늦은 퇴근길을 본댁으로 향했는데/ 아픈 삭신을 달래려 일찍 잠자리에 드셨는지/ 집안 불은 꺼져 있고/ 마당은 어둠에 휩싸여 적막했다./ 걸음을 알아채고 반기는 강아지를 토닥이다/ 까치발을 하고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려/ 창문 틈에 귀를 대고 서 있자니/ 발목 무릎이 욱신욱신 시리다./ 잠 깨우기 차마 송구해/ ‘어머니, 저 왔다 가요’/ 속말로 문안드리고 마음을 합장하는데/ 마른기침 속에 섞여 들려오는 여린 목소리./ ‘늦었구나, 나 괜찮으니 어여 가 숴라.’/ 화단 꽃가지 한 송이 꺾어 현관문에 꽂아두고/ 대문을 나서는데 끙! 하며/ 돌아눕는 어머니의 앓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아버지의 봄맞이 / 구연배
겨우내 녹슬고 무뎌진 쟁기 날을 벼리고/ 헐거워진 괭이자루를 맞춰 끼우며/ 아버지는 들판을 갈아엎기 위해/ 양지쪽 구석배미부터 도랑을 친다.// 눈이 녹고 땅속 깊이 박힌 얼음도 풀려/ 흥건히 봄물 고이기 시작하면/ 쟁기 날이 잘 먹겠는지 여기저기/ 삽을 찔러보고는/ 일 나갈 날짜를 큼지막이 달력에 그려 넣는다.// 그리고는 헛간에 넣어둔 멍에를 꺼내/ 정성껏 반질반질 닦는다./ 아버지는 언제나 철저해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루는 법이 없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멍에이기도 했으니까//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쟁기 일은 계속되고/ 갈아엎은 골과 이랑이/ 봄 햇살에 젖은 몸을 말리며/ 깊은 숨을 들이쉰다./ 그때 나는 보았다./ 어머니의 젖살처럼 흙이 부드럽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을/ 그리고 살아서 꿈틀대는 모습을.// 그러나 봄 흙은 아직 무르고 유약해서/ 거름을 주고 아침저녁으로 일일이/ 물꼬마다 물을 물려야 했다.// 이어받은 땅, 의심할 것도 없이/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는/ 땅심을 키우는 쟁기질과/ 헐거운 자루를 맞춰 끼우는 요령과/ 농사 때를 정하는 놀라운 지혜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몇 번이나/ 빼앗겼다 되찾은 땅이었는지/ 크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틈 날 때마다 농부 됨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온 들판을 갈아엎고 나서도/ 마음 밭을 가는 아버지의 쟁기일은/ 사는 날까지 멈출 줄을 모른다.//

아버지의 오일장 / 구연배
흔들흔들 물그림자 비치는 나무다리를 건너/ 아주 강을 건너지 전에 몇 개/ 물돌 징검다리 마저 건너/ 잰 걸음으로 오십 보쯤 올라가다/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서서히 장이 달아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장터 입구 대장간 박씨에게/ 무뎌진 쟁기 날을 벼리라 던져놓고/ 바로 그 아래 기름집에/ 들깨 두어 말 부어주며 나중에 찾겠다 이르고/ 강변 뻥튀기집에서 강냉이튀밥 두 통 퉈 맡겨놓고/ 쇠전에 들러 그놈 참 이쁘다/ 궁둥이 툭툭 치며 시세 물량 알아보고/ 언덕배기 국밥집에 들어가/ 돼지암뽕 곁들여 막걸리 한 되 좋게 마시고/ 장터 한 바퀴 휙 둘러가며 골짝골짝 묵은 소식 듣고/ 똑 부러진 말로 들은 소문 전하고/ 낯익은 장돌뱅이들과 덕담 몇 마디에 너털웃음 웃고/ 축 늘어진 명태 서너 마리 사고/ 아들놈 검정고무신 골라 옆구리에 꿰차고/ 양지바른 쪽에 쪼그리고 앉아 한 숨 달게 졸다가/ 불알친구 만나 흉금 없이 한 잔 더하고/ 용케도 왔던 길 되밟아가며/ 맡긴 물건 찾아 휜 어깨에 들쳐 메고/ 징검다리 건너오다 다리 한쪽 물에 빠지고/ 터벅터벅 집에 가는 황톳길./ 뉘엿뉘엿 어스름 땅거미 동구 밖까지 내리고/ 박꽃 같은 달이 등을 밀며 따라오고/ 소쩍새 애절하게 울음 울고/ 옛 노래 몇 소절 구성지게 부르다 기침하고/ 당신 와요, 연배 아버지 와요/ 지아비 찾는 지어미 소리 아득히 들리고/ 풀잎마다 이슬 흠뻑 내리고/ 어깨를 기댄 두 그림자/ 강 안개 자욱이 깔린 동네 안으로 서서히 잠기고.//

아버지 제삿날 / 구연배
하늘 집에서는 필시 생일날일 터/ 누군가 준비해줬을 잘 차린 아침상 물리시고/ 타고 갔던 꽃상여 손수 몰고/ 일 년에 한 번 집에 다녀가시는 아버지를 만나러/ 오빠와 함께 시골가는 길// 생전에 좋아하시던 고사리나물과/ 쇠고기 두어 근 끊어놓고/ 입 짧은 시부 저녁진지 준비하느라 애쓰는/ 두 올케가 고마워 티셔츠 한 벌씩 샀다// 곱게 지어 드린 단벌 수의를 입고/ 후여후여 집으로 걸어오실 아버지/ 걸음은 정정하신지/ 뽀얀 얼굴에 막새 삼베옷이 여전히 잘 어울리는지/ 마음이 먼저 달려가/ 아랫녘 산모롱이까지 눈마중을 나간다// 한 번 절에/ 십 년 동안 못 찾아뵌 불효를 빌고/ 두 번 절에/ 툭! 문을 열어젖히며/ 앞 산 찔레꽃이 참 예쁘게 피었구나, 말씀하실 것 같아/ 지지리 복도 없으시다/ 목이 메어 울먹임인데/ 아랫목 어머니 제사상으로 목을 길게 빼시고는/ 아버지 좋아하시던 조기찜을 가리키며/ 연신 젓가락을 바꿔 올리라신다// 생전에는 입에 대지도 못하던 술을/ 벌써 몇 잔 째 비우신다/ 형제들 둘러앉아 함께 음복하고 제삿밥을 비비는데/ 어머니, 아무도 몰래/ 한 그릇 곱게 퍼담아 고샅으로 나가신다// 아버지 혼자 얼마나 쓸쓸하실까/ 내 얼른 따라가야지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별 걱정 다 하신다며 막내가 화르르 성을 내는데/ 일 년에 한 번 만나/ 저만큼이라도 정 나눌 사람 하나 만들어놓은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시냐/ 못난 딸이 속 꾸지람을 해본다// 서둘러 길 떠나는 아버지/ 산소 뒷산에/ 소쩍새 피울음이 길게 들려온다.//

석상 / 구연배
억겁의 세월을 피울음으로 외쳤다/ 해도, 꿈틀대는 생명을 꿰뚫어보는/ 석공의 눈빛이 없었다면/ 한갓 바윗덩이에 지나지 않았을 그대//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참고 견디어/ 비로소 그리던 이승으로 환생하던 날// 아 그러나 청동 수의를 입고/ 또 다시 영어의 몸이 된/ 슬픈 운명이여!// 입은 있어도 혀가 없고/ 귀는 있어도 고막이 없는/ 속죄의 세월 얼마나 흘러 흘러야/ 말문이 트일까// 폭풍이 너의 무릎을 꺾어놓고/ 눈 못 뜨게 할지라도/ 부러진 팔뚝 젓고 또 저어라/ 번갯불이 내리쳐 두개골 쪼개거든/ 불씨 당겨 활활 타올라라// 찬 이슬에 마른 목을 축이며/ 하늘을 짊어지고도 너끈히 일어섰던/ 두 발목으로/ 저 높은 순수의 세계까지 걸어서/ 걸어서 올라라, 석상이여!//

골목 풍경 / 구연배
술 취한 긴 그림자 끌며/ 후적후적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가난도 힘이 되는 곳// 벌떡 일어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별빛이 묻어 있는 새벽어둠/ 싸리비로 쓱쓱 쓸어 모으면/ 삶의 뒷얘기들이 반짝반짝 되살아나는 곳//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처마 밑/ 허름한 담 사이로/ 옆집 온씨 아저씨 밤마다 비밀스럽게 힘쓰는 소리/ 아 귀 막아도 사정없이 들려오는 곳// 술내가 그리워서/ 아픈 뒷얘기가 많아서/ 터놓고 살 비비며 살아가는/ 비린 소리 듣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찌그러진 세간 살이 잔뜩 싣고/ 누군가 이사를 온다.// 골목 안이 후끈 달아오른다.//

소생의 아침 / 구연배
나의 하루는/ 당신이 보낸 시로 시작된다// 몇 줄의 짧은 문장으로/ 말문이 트이고/ 심장이 뛰고/ 정신의 동산에 해가 떠// 지리멸렬한 生의 욕구들이/ 꽃처럼 핀다.//

새벽길 / 구연배
누가/ 바람 속에 바람으로 불어와/ 순결한 풀빛이 되고/ 꽃 속에 꽃으로 다가와/ 투명한 향기가 되는지/ 눈뜨는 아침보다 먼저 깨어나/ 숲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어보면 안다.// 누가/ 씨앗 속에 씨앗으로 떨어져/ 뜨거운 뿌리가 되고/ 흙 속에 흙으로 부서져/ 고요한 땅울림이 되는지/ 새벽 강물보다 먼저 일어나/ 나를 흘러간/ 우물을 들여다보면 안다.// 아, 침묵보다 더 고요한 말씀으로/ 묵은 귀를 씻는 내 비밀한 당신.//

물이 되고 싶다 / 구연배
강둑에 서서/ 흐르는 물을 본다./ 낮게낮게 아래로만 떠내려가는/ 저렇듯 끝이 없는 겸손// 물은 모양도 빛깔도 갖지 않은 채/ 잠 속에 나를 적실지라도/ 나는 물을 보지 못한다./ 다만 물그림자에 비친 모습으로/ 그 마음을 읽을 뿐/ 빈산에 떠오르는 달처럼/ 물 위를 흐르지 못한다.// 가장 낮은 걸음으로/ 까마득한 들녘을 적시고/ 작은 가슴으로/ 우주를 품에 안은 물은/ 비어 있으면서 차 있고/ 차 있으면서 비어 있는 허공이다.// 길 너머 길을 보는 물/ 내가 되어 나를 흘러가는/ 그런 물이 되고 싶다.//

이브의 맛 / 구연배
길을 걷다 목이 말라/ 남의 밭 사과를 땄다./ 덜 익은 푸른 사과/ 하얀 속살을 베어 물자/ 입 안 가득 신물이 차올라/ 목마름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는데/ 아스슴 눈꺼풀이 감기고/ 손끝이 짜르르 오그라든다./ 어! 할 새도 없이 동시에/ 불끈 바지를 당기는 힘./ 푸른 사과 속의, 신 맛 속의 무엇이/ 몸의 목마름은 삭히고/ 정신의 목마름을 주는지/ 향기로운 모순의 맛에/ 연신 어린 사과 속살을 깨문다./ 아사삭 씹히며 눈뜨는 이브.//

흐르는 강물처럼 / 구연배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흐르는 강물 같아서/ 굽이굽이 소용돌이치며/ 구서지고 깨지지만/ 끝내는 바다로 간다네// 어디 평안한 길이겠나/ 때로는 폭우에 휩쓸리고/ 천둥 먹구름에 몸서리치지만// 꽃 피는 봄날도 있으리/ 여름날의 그늘/ 알알이 향기로운 가을도 있고/ 눈 덮인 겨울의 평화도 있으리// 세월은 흘러 내 편이 아닐지라도/ 그대를 놓치는 일 없이/ 바람이 불면 바람을 잡고/ 어둠이 내리면 별빛을 잡고/ 온몸으로 찬 이슬 받으며 굽이굽이/ 흐름을 멈추지 않으리니//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투명한 강물 같아서/ 영원히 함께할 저 바다로 묵묵히/ 흘러간다네/ 흘러서 간다네//

청음 / 구연배
지렁이 울음소리 듣느라/ 밤잠을 놓친/ 새벽 이브자리// 앞산이 밝아온다.//

풍장 / 구연배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라지느냐를 생각한다.// 바람을 읽고/ 바람과 싸우다/ 바람에 눕는 가벼움이라니,// 마지막 숨을 찍는/ 낙엽의 투신이 긍휼하다.// 나무처럼/ 내가나를 풍장하고 싶다.//

해오라기 / 구연배
중심을 꿰뚫어/ 생각나무 한 그루 심어놓을 듯/ 바위에 앉아/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해오라기// 강물이 잠시 굽이칠 때/ 미동도 않던 눈꺼풀이 깜빡/ 닫혔다 열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물고기 한 마리/ 그림자 질 틈도 없이/ 쏜살처럼 달아나고// 날개를 폈다 접는 해오라기/ 깊고 쓸쓸한 숨소리가/ 강물 위에 멎는다//

훈계 / 구연배
가볍게 드나들 것.// 소박하지만 난 늘 실패다./ 집으로 돌아올 땐 주머니 가득/ 구겨진 지폐와/ 온기 없이 나눈 차가운 악수/ 그리고 한 없이 얇은 희망 부스러기들뿐/ 깔끔하게 오늘 하루와 결별하는 데 실패했다./ 주머니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 종잇장처럼 가볍게 나를 내려놓고 싶다./ 더 크고 넓고 높은 것을 쫒아/ 정신 없이 세상을 구겨 넣는 자신과/ 몇 번이나 마주했던가./ 이젠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겨우 한다는 짓이/ 구석진 방에 퍼질러앉아/ 구겨진 지폐를 다려 통장에 담고/ 서늘해진 손등을 비벼 온기를 충전하고/ 은총에 눈감아 버리고 희희낙락!/ 목숨치고는 실로 가소롭고 가련하다.//

일도 사랑도 / 구연배
이거 아니면 죽을래! 하던 마음이/ 어느 날/ 다른 일감 다른 사람을 찾는 순간/ 나는 비겁하게 나이를 먹는/ 세월의 하이에나가 된다./ 염치도 없이/ 나는 나를 용서하겠지만/ 너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얻은 지혜로/ 순결한 세상을 능멸하는 나이여/ 늙음이여./ 살겠다고 눈감아버린 등뒤에서/ 버림받은 추억이 울고/ 잊혀진 사랑이 운다.//

잠들어도 그리움은 쉬는 날이 없네 / 구연배
당신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깨끗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았네./ 때 묻고 땀 젖은 모습이어도/ 그림자 짙게 드리워진 당신의 넓은 등이/ 하얗게 빛나도록 닦아드리리니/ 아주 가끔씩일지라도/ 나를 찾는 그 마음 내 알기에/ 뼈가 닳는 아픔도/ 살 깍이는 고통도 기꺼이 즐겁네./ 거품이 되어 슬픔을 안으로 감추는 동안/ 당신은 나를 말끔히 씻어내네./ 오, 티없이 맑은 당신. 이제 나/ 그대 마음 속 그늘도 지워버리고/ 생생히 윤(潤)을 내리니/ 흙 묻은 모습으로 다가와 눈부신 속속들이/ 깊고 그윽한 향기로 남아/ 그대 우울한 머리맡을 떠나지 않으려네./ 꿈꾸소서, 끝없이 나를 덜어냄으로/ 고이는 행복/ 잠들어도 그리움은 쉬는 날이 없네.//

장 맛 / 구연배
간장독에/ 고인 달// 몸 바꿔가며/ 익고 있다// 몇 보름/ 몇 그믐을 견뎌야/ 장으로 우러날까// 간장 맛은 달 맛.//

철새 / 구연배
황도의 기울기를 어떻게 알았을까/ 여름 숲의 새들/ 무리지어 날며 떠날 채비를 한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광막한 언덕에 노래를 더하고/ 잊혀진 나무와 꽃들을 기쁘게 하더니/ 풀잎 끝에 차가운 이슬 맺히고/ 그늘마다 서늘한 깊이를 더하는 처서 아침,/ 훌훌 털고 숲을 빠져나간다./ 다 있어도 노래가 없으면 삭막한 세상 잔치에/ 짧게 때로는 길게/ 따뜻한 풍경이 되게 했던 새떼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집 한 채 갖지 않은 두견이/ 울음 한 번 울어 주지 않고 휙!/ 허공을 긋고 멀리 사라진다./ 떠나는 것은 새들인데/ 나만 슬피 회한을 갖는다./ 저만치서 가을이 걸어온다.//

비문을 뜨다 / 구연배
이끼 낀 돌기둥 한가운데 박혀/ 묵묵히 의미를 지켜온 문자들/ 세월이 흘러도 세긴 뜻은 꼿꼿한데/ 행간을 읽는 나그네 눈빛 자못 숙연하다./ 천금의 맹세도 지금에 와서는/ 한낱 조롱거리일 뿐인 세상 인심 앞에서/ 닳고 깎인 글자들이 울음을 운다./ 목숨보다 중히 여긴 정조도/ 죽음으로 지켜낸 명분도/ 바람의 흔적만 남긴 채/ 돌문에 갇혀 풍화되어 가는 어처구니./ 바위에 금을 긋는 무심한 세월을/ 먹지로 떠놓고/ 손 짚어가며 읽고 또 읽느니/ 비바람에 녹슬지 않는/ 마음의 획 하나 붙잡아 두고 싶은 까닭이다.//

거미줄 / 구연배
나방이 붙자/ 출렁출렁 춤추는 거미/ 생사가 한 줄에 걸렸구나.//

광장 / 구연배
광장에 가면/ 섬 하나 외로운 바다를 만난다./ 출렁이는 쓸쓸함과 건널 수 없는 외로움이/ 한 가득 밀물 든 충만./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자꾸만 비어가는 광장의 알 수 없는 품 안에서/ 눈물 나게 이기적인 설움을 꺼내 놓고 끝없이/ 끝없이 얘기하고 싶은 마음들./ 사람은 왜 외로워져야 사람다워지는 걸까./ 모일수록 혼자가 되어 떠도는 섬, 광장에서/ 적의의 시간들을 우적우적 되새김질하는 우리는/ 얼마나 더 쓸쓸해지는 연습을 해야 하나./ 성찰할 줄 아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언젠가는 저 바다를/ 바다의 광막함을/ 날개 밑에 죄 품을 날이 오겠지./ 뼈를 드러낸 그리움을 남기고 우리는/ 머물렀다 떠난다, 파도처럼/ 저 푸른 물길을 걸어/ 바다의 광장, 그 섬에 간다.//

그녀 / 구연배
비가 내린다고 전화를 했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난 뒤의 빗소리는/ 곡조를 타고 내리는 노래로 들린다.// 눈이 온다고 전화를 했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난 뒤의 눈발은/ 하늘을 겁없이 날아다니는 춤이 된다.// 멋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 생각 또한 가멸다./ 그런 나에게 전해주는 그녀의 한 마디 말은/ 구석진 마을의 꽃을 떠오르게 하고/ 강물에 잠긴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들게 한다.// 무시로 나를 힘들게 하고/ 잠시도 나를 평화롭게 놔두지 않지만/ 가난한 마음의 뿌리를 톺아주고/ 버림받은 말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함께 있어도 쓸쓸하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한다./ 그래서 더 절실히 그녀가 필요하다./ 이것이 힘들어도 깊어만 가는 사랑의 이유다.//

그대 등에 기대어 / 구연배
봄 숲에 들어가/ 나무에 등을 기대보면/ 수관을 타고 오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젖살을 더듬는 아이처럼/ 바람의 온기와/ 흙 속의 물기를 발아들이는/ 넉넉한 뿌리의 힘// 저 소리가 터져 꽃잎이 되느니/ 저 온기가 퍼져 그늘이 되느니// 봄 나무 같은/ 그대 등에 기대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디붉은/ 그리움 소리를 듣고 싶다.// 슬픔이 터져서/ 절정의 노래가 되는/ 그리움이 차 올라/ 꿈길 환히 열리는/ 비밀한 사랑을 우거지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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