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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홍수연 시인

부흐고비 2022. 3. 2. 09:04

홍수연 시인
1961년 부산 출생. 부산교대 졸업. 30년 교사 역임.

울산소식 시민문학상 수상. ‘모반의 혀’ 동인.

《교육자료》 3회 추천, 2018년 1월 《모던포엠》 등단. 

시집 『즐거운 바깥』과 시인과의 대담집 『비의 왼쪽 목소리』.

 



도마 위의 생(生) / 홍수연
한 포기의 달달한 점심을 썬다는 것이/ 도마의 등에 봉합하지 못할 상처를 내는 일일 줄이야,// 남의 살을 탐하기 시작할 때부터/ 잇몸 속에 숨어 있던 이빨은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하고/ 남의 살을 따라 뾰족하게 내민 입술// 한 여인이 문을 열고 나가면/ 한 여인의 옆구리를 물어뜯고/ 두 번째 여인이 문을 닫고 나가면/ 두 번째 여인의 뒤꿈치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지/ 세 번째 여인인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하고,/ 여태껏 문지방에 오도카니 서 있네// 도마에 새겨진 상처처럼 내리는 비// 세상에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 많이 있네// 먹다가 먹다가 퍽퍽해진 살점으로 저 작력이 부치면/ 맹물에 말아 꿀떡꿀떡 삼키는 일 늘어나겠지만// 도마의 등에 새겨진/ 성한 곳 없이 자잘한 칼자국 따윈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세상에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 많이 있네// 세상에!/ 도마 위에서 오롯이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 많이 있네//

한여름, 짖다, 짖지 못하다, 핥다 / 홍수연
한여름이었고 장날이었으며, 계절대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슬펐고 여느 때처럼 나는 무기력했다 언젠가 이 무기력이 나의 소중한 무기가 되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날들이었다 내가 컹컹 소리 높여 짖을 수 있기를 바랬고 내가 맹렬히, 나를 가로질러 도주하는 내 그림자를 앞지를 수 있기를 바랬다 맨드라미처럼 나는 허공을 항해 바짝 약이 올라있었고 맨드라미처럼 속절없이 아팠다// 녀석은 그 날 그 곳에 있었다 팔월의 휑한 초등학교 운동장 담벼락 뒤편 더러워진 솜이 가죽을 뚫고 주먹질을 해대는 허름한 자전거 안장 위, 포개어 쌓은 두 개의 케이지 중 상단 에 서있었다 안간힘으로 케이지를 할퀴고 있었다// 한여름이었고 당직이었으며 관리자 A와 여직원 B는 쉴 새 없이 조잘대었고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앉아 있었지만 서 있었다 벌서는 기분이었으며 그 쉴 새 없이 짖어대는 가느다란 아가리들에 할 수만 있다면 지린내 나는 이불솜을 틀어막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으며 황급히 계단을 뛰어 이층 건물로 올라갔다 창 밖 플라타너스가 오래 나를 들여다보고 갔다// 녀석의 초롱한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백구의 눈물을 본 건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체념한 듯 무더위에 지친 듯 미동도 없다 녀석만이 제 운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긴 혀를 빼물고 씩씩거리며 머리로 하늘을 들이박고 있었다 거부함으로써 녀석은 눈에 띄었고 눈에 띄었으므로 제일 먼저 도축될 것이었다// 한여름이었고 사무실이었으며 업무 중이었다 활짝 열어둔 창 너머로 A가 지나갔다 사무실은 조용하였고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으며 지시사항은 내게 전달되지 못했다 어제 A의 명령에 내가 삼키지 못한 수박씨들이 모래 위를 뒹굴고 있었다// 녀석은 케이지를 핥고 있다 한여름이었고 불볕더위였으며 점심시간이었다 짖지 못하면 핥게 된다 컹컹 짖으면 격리된다 맞은편 가축시장 매대에 겹겹이 전시된 녀석들의 팔다리, 도륙의 세상이다// 물어뜯기기 전에 먼저 물어뜯을 것! 이 바닥에선 누구도 이 명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카프카를 위하여 / 홍수연
카프카는 말했다/ 바보들은 피곤해지지 않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는다/ ㅡ김행숙의 시 「꿈꾸듯이」 중에서// 풋, 그렇다면 나는 바보가 아님이 확실하다 오히려 나는 천재에 가깝다 내가 바보가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 어딘가 나는 부족해진다// 카프카의 말을 빌어, 바보들은 왜 피곤해지지 않는 걸까 그들은 삼손처럼 힘이 센 종족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건강하고 그들은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피곤해지지 않기 때문에"에 주목하자// 잠을 자지 않으므로 카프카는 바보계의 절대지존이 되었다 바보들에겐 구분이 없다 백야…… 하얀 밤…… 그들은 어둠을 파먹고 그 자리에 하얀 알곡을 심었다 그들에게 삼손의 머리카락은 반사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도통 흡수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도통 따뜻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비나 눈보다 강한 종족 내리는 비를 멈추고 얼어붙은 눈을 또다시 얼린다// 바보계의 神, 카프카// 미미하나마 그를 받아 적으며 나는 바보들에게 적잖은 경외심을 느낀다 바보처럼 바보를 위하여, 적어도 오늘밤은 잠들지 않을 것이다

변방에서 / 홍수연
가사 도우미가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동안/ 아픈 몸을 앞세워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냉장고와 거실과 욕실은/ 낯선 주인의 손길에 자주 뒤척이며 쿨럭거릴 것이다/ 북으로 북으로 발길을 옮겨/ 도시의 끝자락에 위치한 해안을 끊어서 녹인/ 검은 바닷물을 음미하며/ 그녀의 전화를 기다린다/ 그녀의 전언이 당도할 때까지/ 나는 이 곳 도시의 최 변방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변방은 울음을 털기 좋은 곳/ 마르고 새까만 얼굴의 코가 높은, 이국의 노동자가 진흙 묻은 옷을/ 목장갑으로 탈탈 털며 마음 편히 식사하기 좋은 곳/ 그의 척수에 걸터앉은 몇 개인가의 검은 자갈,/ 그랬다 누구에게나 삶은 서사적이며/ 모국을 떠날 때 그가 지불한 비행기 삯의 정당한 반환은/ 그가 개간해야 할 불모지 같은 것/ 누구를 걱정하고 누구를 위해 울겠는가/ 나 또한 쫓기듯 집을 떠나 이곳 변방으로 흘러들어온 이방인/ 붉은색 단풍으로 옷을 지어 입은 듯한 등산복 차림의 미씨 족이/ 술에 취한 듯 왁자하게 노랫가락 드높이는 것도 변방이라서 가능한 일/ 변방은 불모의 땅이자 개척의 땅/ 그녀의 호출 전화벨이 울린다/ 이제 버리고 온 집으로 돌아갈 시간/ 빼앗긴 집을 되찾을 시간/ 한 움큼 쥐었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알처럼/ 영원한 변방 또한 없는 것/ 변방에서 또 다른 변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 낯선 이국의 여자에게 잠시 맡겨둔 이삿짐을 탈환하기 위해…//

이직 / 홍수연
먹고 살던 검은 구상나무의 직장을 그만둔 뒤 더 자주 재어보게 된 내 삶의 무게는 5와 6 사이를 오간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하여 하루 종일 종종대어 보지만, 그 무언가의 실체는 잡히지 않는다// 잡히지 않는 것과 씨름하는 일은 쓸쓸한 일이어서 입술 끝자락에 영문 모를 붉은 물주머니를 이슬처럼 매다는 일이 잦아졌다 성적에, 성과에 시달리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같은 것 바람 같은 것과 싸우는 일이란, 시간을 얼려 금세 녹아 사라져 버릴 싸락눈 같은 것을 빚는 일처럼 공허한 일// 이따금 버티컬을 걷고 따스하거나 차가운 너를 향해 네가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버렸다고 항변하듯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날이면, 왠지 모를 억울함으로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는 날이면 애꿎은 체중계를 발로 툭툭 걷어차며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공평하지 않아, 친절하게 네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내 무게는 내가 잘 안다고, 만질 수도 출력할 수도 없는 영혼의 무게로 떡을 빚을 거야 예쁜 꽃핀을 만들 거야 싸락눈을 뭉칠 거야// 너와 나의 차이이자 구체와 추상의 차이이지, 나는 나비의 영역으로 이직한 사람,//

제비꽃 / 홍수연
옷장 속의 옷들이 나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하릴없이 커져버린 가슴 탓이다// 네게 불룩한 성기가 있다면/ 내게 씨앗을 품은 흙처럼 도드라진 젖가슴이 있노라,/ 위풍당당 가슴을 내밀고 걷고 싶은 적이 있었네// 두 개의 큰 산을 자신에게 옮겨놓은 여성을 보노라면/ 주렴 뒤의 보일 듯 말 듯 한 저고리 아래 살을 훔쳐본 듯,/ 그녀들은 아련한 안개의 병정을 거느리고 있었네// 무작정 올려다보고 싶은,/ 그 두 개의 흐릿한 웃음/ 그 두 개의 꽃과 나무// 그녀들은 큰 산을 소유한 영주/ 사계절 새들이 지저귀고 그녀들의 가슴 골짝에선 내가 모르는 물줄기,/ 내가 먹어보지 못한 신비스런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듯 했네// 그때는 알지 못했네/ ​그 봉긋한 가슴/ 마냥 갖고 싶었던 그 가슴이 무덤을 닮아 그토록 애달픈 것이었다는,/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봉분 위에 돋아난 제비꽃이었다는 것을/ ​나 젊어 알지 못했네// 어머니 높다란 무덤이 세월에 깎이고 깎여/ 그 무덤 내게로 옮아와/ 나 이토록 널따란 무덤을 가지게 될 줄,// 나 젊어 알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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