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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단어의 무게 / 민명자

부흐고비 2022. 3. 28. 10:51

# 고프다

며칠을 몸살감기로 꼬박 앓았다. 손발 꼼짝 못하고 죽을 듯이 누워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남편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내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묻고, 이런저런 음식을 해주거나 사다주었지만, 음식 생각만 해도 입덧을 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보리차로만 연명하기를 며칠, 어느 아침에 내 몸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어렴풋이 보내왔다.

고프다. 아, 살아나는 거구나. 식욕은 숭고한 거구나. 그렇다면 형이하학적 욕구나 욕망이란 단어에 보냈던 경멸은 거둬들여야 한다. 정신은 고고한 것이고 육신은 비천한 것이라 여겼던 형이상학적 욕망이야말로 얼마나 어쭙잖고 편협한 오만이었던가. 먹을 것이 없어 ‘고프다’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만이 지킬 수 있는 존엄성도 허물어진다. ‘고프다’엔 생명의 무게가 실려 있다.

고프다. 때로는 슬픈 단어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 한편으로 염치없이 밀고 올라오던 공복감. ‘남은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떠밀리듯, 주검 앞에서도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어야 했던 곤혹스러움.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졸기도 했다. 나, 부모님을 다시 못 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밥도 먹고 잠도 잤다. 식욕과 수면욕, 그 준엄한 생존 앞에서 저 멀리 떨쳐버리고 싶었던 단어, 그럴 때 ‘고프다’는 비애의 무게를 더한다.

고프다. 많은 시종을 거느리며 거들먹거리는 욕망의 단어다. 먹고프고, 놀고프고, 자고프고, 가고프고, 사고프고, 살고프고, 죽고프고, 고프고, 고프고, 프고, 프고…. 녀석들은 무엇이든 달라고 손을 내밀며 칭얼댄다. 악착같이 달라붙어 평생을 따라다니며 사람을 제멋대로 부리면서 상전처럼 행세하는 시종. 떼어내고 싶지만 무덤까지 다독이면서 데리고 가야할 떼쟁이. 때론 생명의 신처럼 때론 죽음의 신처럼 얼굴을 바꾸는 변장술사. 채움과 비움, 충족과 결핍 사이에 ‘고프다’의 무게가 있다.

# 반갑다

그녀, 봄날 꽃들의 찬연한 향연을 즐길 여유도 없이 꼬박 3일을 누워 있었다. 사람이 준 마음의 병이 원인이다.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멸감과 상처가 이번엔 몹시 아프다.

거실에 누워 무심히 창밖을 본다. 그때 눈앞에 무언가 아른거린다. 환각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아, 너였구나, 벚꽃.

몸을 일으켜 창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밖을 내다본다. 키 큰 벚나무에서 바람에 휘몰린 꽃잎들이 상향곡선을 그리며 아파트 8층 꼭대기까지 하얗게 치솟았다가 점점이 흩어진다. 오, 나를 보러 온 게로구나. 네 몸의 가벼움이 잠시나마 너를 예까지 불러왔구나. 해와 달의 정기와 우주 진리의 무게가 담긴 꽃잎이 자연의 순리 따라 기꺼이 몸 털며 허공을 난다.

반갑고 또 반갑다, 벚꽃. 나비처럼 춤을 추는 벚꽃들이 그녀의 혼미한 정신에 번쩍, 돈오의 방아쇠를 당긴다. 그녀는 타이르듯 다짐하듯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그래.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너를 위해 있는 거야. 이 세상에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게 있다한들 네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네 왕국에선 네가 왕이어야 하잖아. 우울도 기쁨도 결국 네가 지은 거야. 사람한테 너무 매달리지 마.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인연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돼. 영원히 변치 않는 건 없다는 거야말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잖아. 너는 그냥 너야. 그러니까 한 걸음 물러서서 그냥 걷는 거야. 터널 같은 인생길에서 부딪치지 않고 함께 가려면 어느 정도 간격이 필요하지 않겠어?’

그녀, 어깨를 짓누르던 ‘사람’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낸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진다.

‘세상을 한 번 둘러봐. 75억 넘는 세계인구 중에서 너랑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잖아. 당연히 생각이 다른데 ‘왜 다르냐’고 허우적대다가 죽을 때서야 후회하는 건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그냥 ‘서로 다른 너와 그’를 인정하고 바라보면 돼. 이제 네가 할 일은 시간과의 대면뿐이야. 잔고가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니? 벚꽃, 오늘의 너를 오래 기억할게.’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귀를 크게 열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서. 그녀의 아픈 체험과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내 것처럼 다가왔다. 내 마음에 얽혀있던 거미줄도 하나씩 걷히며 흐렸던 시야가 맑아지고 몸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반갑다’엔 ‘기다리다’와 ‘그립다’의 무게가 있다. 내가 반갑게 환대할,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 무겁다

내게도 ‘사람’이란 단어는 가볍지 않다. 아니, 무겁다. 난해하다. 사람이란 끌고 가거나, 지고 가거나, 이고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손잡고 가야 할 뿐이다.

‘사람’이란 글자를 해체하면 ‘ㅅ, ㅏ, ㄹ, ㅏ, ㅁ’이 된다. 여기서 겹치는 ‘ㅏ’ 하나를 빼고 나머지 낱자를 다시 합치면 ‘삶’이 된다. 우리 삶을 이끄는 주인공은 사람이다. 사람이란 희망이자 절망이며 인생의 주어다. 그 무한한 고리가 인생이다.

그래서일까. 시인도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정현종, 「방문객」에서)라고 말한다. “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라고,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그리하여, 시인은 자신에게 오는 방문객, 사람을 바람의 마음으로 “환대”한다.

직립보행을 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놀이하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로부터 호모 루덴스 등에 이르기까지, 더더더 등등등, 끊임없이 진화해온 다양체, 인간. 그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걸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거늘, ‘인생’이란 하나의 단어이되 사람들의 교집합으로 엮어지는 긴 문장이다.

모든 단어는 제 나름의 무게를 갖고 있다. 개인의 인생은 유한하지만 중중무진의 단어들은 행복과 불행,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거듭거듭 살아남아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삶이란 그토록 수많은 단어들을 동사적으로 실천하는 향연장이며 굿판이다.

서산 넘어가는 해가 하늘에 붉은 물감을 잔뜩 풀어놓았다. 지금까지 이고지고 온 단어들의 무게를 줄여야 할 때다. 그럴 수만 있다면, 보다 더 자유롭게, 벚꽃처럼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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