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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맏며느리 사직서 / 민명자

부흐고비 2022. 3. 28. 16:03

서점엘 갔다. 신간도서 코너에서 책을 살피는데 제목 하나가 눈길을 끈다. ‘며느리 사표’다. 순간, 오래전에 내가 썼던 ‘맏며느리 사직서’가 번개처럼 스치며 묵은 상처를 건드린다. 이 책의 저자(영주)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대가족 장손과 결혼한 저자는 어느 추석 이틀 전, 시부모에게 ‘며느리 사표’를 내민다. 결혼 23년차 되던 해였다. 여러모로 가부장적이며 외도까지 한 남편에겐 이미 이혼선언을 한 뒤였다. 비난할 일도 칭찬할 일도 아니다. 누구든 타인의 삶을 대신 살 수 없는 한 함부로 재단할 권리는 없으니까.

저자는 신발을 잃어버리거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은 잠재적 무의식의 발현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잃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저자가 택한 건 칼과 등불이었다. 칼은 ‘죽임’이 아닌 냉철한 이성과 판단이 포함된 ‘살림make live’의 기호였고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기호였다. 그 바탕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15년 전, 나는 가족카페에 ‘맏며느리 사직서’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결혼 33년차 되던 해였다. 그때 상황을 지금 다시 겪는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동생 셋과 시누이 셋, 내가 결혼할 때 막내 시누이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긴 세월 지나는 동안 모두 다섯 남매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그들은 늘 입으로만 효자 효녀였고 막상 책임질 일에선 방관자가 되어 뒤로 물러섰다. 남편은 유산이라곤 물려받을 것 하나 없는 가난한 집안의 맏이였다. 동생들은 도움을 받으면서도 어찌 그리 당연한 듯 당당했는지, 우리부부는 도움을 주면서도 왜 그리 빚진 죄인처럼 전전긍긍하며 살았는지. 고마움은 없고 요구와 불평불만만 가득한 동생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맏이였다. 온힘을 다해 살았지만 결국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극단의 한계에 도달한 나는 맏며느리라는 굴레를 벗고 싶었다.

‘며느리 사표’를 내밀 때 저자에겐 내심 두려움도 컸다. 그러나 저자의 시부모님은 너그럽게 용납했다. 이혼을 불사했지만 그것 역시 남편의 각서와 부부 상담으로 불평등을 극복했다. 여러 노력 끝에 자녀들이나 자신도 모두 정신적·경제적 자립에 성공했다.

시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분명히 나를 지지해주셨을 것이다. 맏며느리에 대한 시아버님의 신임은 두터운 편이었다. 어느 새벽, 그날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우린 그때 시댁과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국이 식지 않을 거리였다. 큰아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대문을 열었다. 시아버님이셨다. 내게 할 말이 있어 왔노라고 하셨다.

“니 시에미가 너한테 모질게 한 거 내가 대신 사과하마. 용서해라.”

사과라니, 용서라니, 감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몸 둘 바를 모르며 집으로 들어가시자고 했지만 한사코 마다하셨다. 그 말씀만 하시곤 천천히 등을 보이셨다. 골목을 다 돌아나가실 때까지 나는 속절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은 나만의 소중한 비밀로 간직되었고 이후 시아버님과 나는 눈빛으로 말했다. 여명이 희붐한 골목, 가늘고 힘없던 목소리와 물기어린 눈빛, 허름한 점퍼 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지척지척 가시던 뒷모습은 아프게 각인되었지만 한편 그 영상은 내가 어려울 때마다 힘을 얻는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게 정신적 지주로 계시던 시아버님이 오랜 병고 끝에 작고하시자 나는 점점 소진되어갔다. 시아버님 떠나신 지 십여 년이 지난 후, 나는 결국 ‘맏며느리 사직서’를 쓰고만 것이다.

시집식구들이 사직서에 보인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수위가 높았다. 평생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던 맏며느리가 사직서라는 걸 썼으니 내심 당황했겠지만 그 답은 폭언과 거친 행동으로 돌아왔다. 물론, 나의 ‘맏며느리 사직서’는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은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쩌면 그이가 나보다 더 먼저 ‘맏아들 사직서’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덕이 있는 맏며느리 역할을 끝까지 잘해내서 말년에 대가족이 모여앉아 하하 호호 덕담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한때 나의 꿈이었다. 맏며느리라서 무조건 잘해야 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한구석엔 ‘맏며느리 콤플렉스’나 ‘원더우먼 콤플렉스’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땐 고생 끝에 낙이 있을 것이라 믿었으며 그 길을 위해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도 부족한 점이 있었겠지만 그동안 맏며느리로 고되게 살았던 수십 년의 시간들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제로로 환원된 것 같은 허무감에 한동안 우울이 깊었다.

순종, 희생,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 폭력의 언어가 되고 만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인권운동가도 아니다. 다만 ‘나,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나, 실종된 나’를 찾고 싶었을 뿐이다. ‘맏며느리 사직서’는 바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길을 여는 첫차의 탑승권이었던 셈이다.

인생은 주관식과 객관식이 뒤섞여 있는 시험지다. 정답은 안갯속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그 답안을 다른 사람이 대신 써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시험지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거다.

아직 다 못쓴 인생 답안지에 ‘성철스님 임제록 평석’에서 읽은 글귀 하나를 적어본다.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되면 자기가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곳이라.”

‘스스로 주인이 되면 아무리 더러운 똥구덩이나 거친 가시밭에 있다 해도 그곳이 연화대요, 극락세계요, 참된 곳’이라는 말도 마음 밭에 양식이 될 씨앗으로 심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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