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강현국 시인

부흐고비 2022. 4. 6. 15:23

강현국 시인
1949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경북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절망의 이삭』, 『견인차는 멀리 있다』, 『고요의 남쪽』, 『달은 새벽 두 시의 감나무를 데리고』, 『노을이 쓰는 문장』과 시선집 『초록발자국』, 『먼길의 유혹』, 디카시집 『꽃 피는 그리움』, 산문집 『오래된 약속』 등이 있다.

대구교육대학교 총장 역임. 계간 《시와 반시》 발행인 겸 주간.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장.

 



마태복음 序說 / 강현국
그런즉 아버지. 아버지,/ 곳간 가득 채워 주소서!//

후렴 / 강현국
큰일났다. 봄이 왔다/ 비슬산 가는 길이 꿈틀거린다/ 꿈틀꿈틀 기어가는 논둑 밑에서/ 큰일났다. 봄이 왔다 지렁이 굼벵이가 꿈틀거린다/ 정지할 수 없는 어떤 기막힘이 있어/ 色쓰는 풀꽃 좀 봐/ 伐木丁丁 딱따구리 봐/ 봄이 왔다. 큰일났다/ 가난한 내 사랑도 꿈틀거린다//

틱낫한 / 강현국
마침내! 어머니는 혼자 남아 혼자 남은 어머니를 만나게 될 것이다/ 빗소리가 일깨우는 텃밭은 마침내! 빗소리가 일깨우는 텃밭으로 滿開할 것이다/ 삶은 바람 부는 대로 구름 떠도는 대로 꽃이 피는 대로 그냥 사는 것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마침내! 구병산이 마침내 구병산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한다면/ 그대 이렇게 대답하라/ 아침은 먹었나요? 그러면 그릇을 씻으세요//

평상이 있는 풍경 / 강현국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감꽃이 피고 감꽃 그늘 아래 아무것도 아닌 듯이 빈 터가 있고/ 이씨를 기다리는 평상이 있고 김씨를 기다리는 주막이 있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김씨가 이씨의 멱살을 잡고 이씨가 김씨의 아랫배를 걷어차고/ 아무 것도 아닌 듯이 허리 굽은 아낙이 술상을 다시 내고/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감꽃이 지고 감꽃 그늘 그 자리에 찬바람이 들어서고/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빌라가 들어서고/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골프장이 들어서고 사우나가 들어서고/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이씨가 안 보이고 김씨가 안 보이고/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아침마다 나는 허리 굽은 아낙에게 담배를 사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아침마다 나는 평상만한 그 섬을 쓸쓸해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안 보이는 이씨와 안 보이는 김씨에게 전화를 걸고 싶고/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아침마다 골프를 끝내고 사우나를 즐기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사라지는 섬처럼 태양에 부대끼고 돌멩이에 부대끼고 땟수건에 부/ 대끼고//

여름 한낮엔 구석이 없다 / 강현국
내 방은 북쪽 구석에 있다/ 습한 구석에서, 나는/ 애벌레 한 마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 애벌레 한 마리가 습한 구석을 질질 끌고/ 기어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여름 한낮을 알리는, 아니/ 앞마당의 광활을 선포하는 수탉의 큰 날개를 부러워하고 있다/ 댑싸리 잎이 몸을 움츠리고/ 쇠비름 잔 그늘이 아연 잠적하는/ 수탉의 한세상을 신기해하고 있다. 나는/ 힘센 수탉의 의기양양이/ 먹이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먹이의 유혹과 먹이의 경계로부터, 먹이의 色쓰기로부터/ 내 방은 북쪽 구석에 있다. 나는 어느 날/ 애벌레 한 마리가 습한 구석을 질질 끌고/ 기어 나오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다//

일막이장 / 강현국
구석을 빠져나온 하나의 구석이/ 또 하나의 구석과 어느날 만나서/ 악수를 한다. 온 몸을 흔들며/ 펼치는 풀밭의 푸른 힘으로/ 일년초 꽃들은 피어난다./ 산그림자 잠시 바다로 눕고/ 시들기 위하여 피어난 개똥쑥꽃,/ 떡쇠 속눈썹이 빛난다./ (전화벨소리 빌어먹을 정전)// 벽 속 철근들이 힘주는 소리 들린다./ 들린다. 개똥쑥은 시들고/ 떡쇠 사라지는 발자욱 소리/ 하늘로 번진다./ 서산 노을이 몸을 태우며/ 좌중의 미간을 밝히는 동안/ 산짐승 소리 점점 커다랗게/ 큰 산 그림자를 일으켜 세운다./ (초인종 소리 빌어먹을, 빌어먹을 다시 정전)// 우리는 헤어지고/ 구석은 구석끼리 몸을 떨지만/ 창경원 늑대의/ 이빨 없는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 비에 젖어 번져가는/ 좌중의 박수/ 소리 궂은 날은 옆구리를 결리게 하므로/ 떡쇠 속눈썹이 다시 빛난다.//

망월지 / 강현국
길은 무덤에서 끝나고 무덤에서 시작되었다/ 그 길의 끝에서 깨진 밥그릇이 긴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둥글게 가라앉은 무덤으로부터 왼손과 오른손이 섬, 섬, 섬, 섬/ 기억의 빗장을 열어주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키 큰 외로움과 등 굽은 그리움만 비에 젖어 적막할 뿐/ 시간의 빈집 위에 달은 지고 캄캄했다//

내 몸이 더워서 달 뜨네 / 강현국
달 뜨는 곳으로 천리를 가면/ 새우처럼 웅크린 초가집 있네// 사립문 열고 다시 천리를 가면/ 댓돌 위에 벗어놓은 말표 고무신// 천리 밖 맨발이 이제 돌아와/ 고무신 신고 다시 또 천리를 가면// 천년을 지새우는 호롱불 가장자리/ 가장자리 붐비는 눈보라 있네//

멀리 가는 강물 / 강현국
울음이란 무릇 간절함뿐이므로 수염이 없고 모자가 없고 단추가 없고 단추 구멍이 없고 꿰맨 자국은 더더욱 없고 간절함 울음이란 맨몸이므로 손이 있고 발이 있고 코가 있고 콧구멍이 두 개 있고// 개구리가 울었다 콧구멍 두 개가 슬픔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 개구리가 울었다 콧구멍 두 개가 둠벙에 빠진 달을 노랗게 노랗게 밀어 올렸다. 쥐죽은 듯 고요한 세상을 잠 못 드는 적막이 벌떡 일어나 탕, 탕, 지팡이로 보름달을 두드렸다 멀리 가는 강물이 팔다리가 쭉, 쭉, 내 몸에 가지를 쳤다//

돌아오지 않는 강 / 강현국
마리린 먼로가 아득하게 사그라지며 까마득 잦아드는 눈부시게 노란 색조의 노래의 뒷모습을 가진 그 강의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 대학 생물학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니 지렁이 쥐며느리 그리마 지네 거미 응애 진드기 집게벌레 먼지벌레라고 귀띔해주었습니다.// 밖이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 알지 못해서 나는 너무 멀리 노래에 엎어지고 나는 너무 깊이 당신에게 빠졌습니다 그 강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기러기 떼들보다 더 멀리 더 깊이 더 유유히 떠내려가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그 강의 이름이 지렁이 쥐며느리 그리마 지네 거미 응애 진드기 집게벌레 먼지벌레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내 몸에 검붉은 반점이 생기고 떠내려간 팔다리가 눈부신 날의 추억처럼 자주 가려웠습니다 가렵다못해 서산을 불태울 듯 화끈거렸습니다// 무주는 폐장이어서 아득하게 사그라지며 까마득 잦아드는 눈부시게 노란 색조의 노래의 뒷모습을 퍼 나르던 두레박 여럿이 허공에 죽은 듯 멎어 있었습니다 더 널리 더 깊이 더 유유히 지평선을 빠져나간 기러기 떼 여기 와서 죽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잡하였습니다 늙은 바위 곁에 세월 곁에 지렁이 쥐며느리 그리마 지네 거미 응애 진드기 집게벌레 먼지벌레 곁에 마리린 먼로 곁에 거기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 강기슭에 돌아오지 않는 강을 실은 뗏목 하나 이름 없이 처박혀 있었습니다 이름이 없어 다행이었습니다//

고요의 남쪽 / 강현국
떡갈나무 그늘을 빠져나온 길은/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차돌처럼 희고 단단한 고요/ 오직 고요의 남쪽만 방석만큼 비어 있다/ 길은 또 한번 황토 산비탈로 자지러진다/ 온몸에 고추장을 뒤집어쓴 어떤 애잔함이, 출렁/ 섬진강 옆구리를 스치는 듯도 하였다.//

개미와 더불어 / 강현국
고요의 뺨이 만지고 싶어/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봅니다// 오늘도 나는/ 일용할 공복과 하루 분의 권태를 자동지급 받았습니다// 고요가 왼쪽 안주머니에 있다는 생각은, 심심해서/ 왼쪽으로 길을 내는 채마밭 땅콩 넝쿨과 마찬가지입니다// 개미가 물어 나르는 오전 10시가/ 적막보다 가볍다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궁금하면 와보세요// 목이 부러지지 않는 것은 가벼워서가 아닙니다/ 오전 10시가 제 성기를 하늘로 바짝 치켜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공복이므로 / 강현국
3번 버스를 타고, 나는/ 담벼락에 부러진/ 우리들의 그림자를 받아들인다./ 만인 앞에 평등한 六法全書/ 단돈 천원의/ 특별선전기간을 받아들인다./ 나는 지금 공복이므로/ 동인동 뒷골목을 받아들이고/ 누이의 외로운 혼례를 받아들인다./ 이래도 될까, 버스가 잠시/ 시민회관 앞에서 멈추는 동안/ 봉산탈춤이 한창이었다./ 헛기침 앞세우고 양반이 가고 있고/ 재떨이의 꽁초들이 빈정거린다./ 한참을 가다보면/ 사무실의 심심한 의자들이 월요일을 기다리고/ 나는 재빨리/ 한 주일의 잔소리를 받아들인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버스는 논밭을 토해 버리나/ 토해버린 논밭마저 받아들인다./ 나는 지금 공복이므로/ 엄동설한을 받아들이고/ 큰 산과 작은 산을 받아들인다./ 3번 버스의 종점에 와서/ 낡은 엔진처럼 걸걸거리며/ 두류산 공원을 받아들이고/ 나는 비로소/ 까막 까치를 받아들인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어리 크리스마스/ 나는 다시 공복이므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6 / 강현국
공책이 연필을 데리고 연필이 교실을 데리고 교실이 종소리를 데리고 종소리가 운동장을 데리고 운동장과 놀다가 운동장이 오솔길을 데리고 오솔길이 수수밭을 데리고 수수밭이 사립문을 데리고 사립문이 병아리를 데리고 병아리가 마당을 데리고 마당과 놀다가 마당이 실개천을 데리고 실개천이 그리움을 데리고 그리움이 발바닥을 데리고 멀리 떠난 발바닥과 놀다가 발바닥이 외로움을 데리고 외로움이 기차를 데리고 기차가 산기슭을 데리고 산기슭이 저녁놀을 데리고 저녁놀이 초승달을 데리고 초승달이 寂寂寂寂 기러기를 데리고 기러기가 한겨울을 데리고 한겨울이 모자를 데리고 모자가 구두를 데리고 구두가 연필을 데리고 연필이 다시 공책을 데리고 둥둥 구름 떠다니는 공책과 놀다가 흰눈 펄펄펄 허공이 공책이고 공책이 허공이네//

리비도의 망령 ㅡ1934년, 유채, 17cm×13.3cm, 달리 / 강현국
어느 날 적막이/ 어느 날 적막에게 놀러 갔네/ 왼손이 오른손을 찾아가듯/ 내 몸의 빈집인 적막이/ 내 몸의 빈집인 적막에게 놀러 갔네/ 휴가 나온 병사처럼/ 어느 날 적막이 꽃그늘 아래/ 허벅지를 묻고 자고 있었네/ 자물쇠로 잠긴 미닫이 안에는/ 방아쇠 뭉치가 있을 거야 궁금해 하면서도/ 적막의 허벅지를 열어 볼 수 없었네/ 열쇠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었네/ 어느 날 적막이/ 어느 날 적막에게 놀러 갔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가듯/ 내 몸의 집인 적막이/ 내 마음의 빈집인 적막에게 놀러 갔네/ 휴가 나온 병사처럼/ 어느 날 적막이 봄비 맞으며/ 허벅지를 드러내고 울고 있었네/ 실탄이 녹슬면 어쩌나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적막의 미닫이를 잠글 수 없었네/ 자물쇠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었네/ 어느 날 적막이/ 어느 날 적막이 새끼를 치네/ 바위산 석양이 턱. 턱. 숨막히네/ 턱, 턱 숨막히는 왼손과 오른손이 텅 텅 텅./ 총질하고 싶네 어느 날 적막이 어느 날 적막에게 총질하고 싶네//

별이 빛나는 밤 / 강현국
한 고요가 벌떡 일어나 한 고요의 따귀를 때리듯/ 이별은 그렇게 맨발로 오고, 이별은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낱말들의 귀를 자르고/ 외눈박이 외로움의 왼쪽 가슴에 방아쇠를 당길 듯 당길 듯/ 까마귀는 나는 밀밭 너머 솟쿠치는 캄캄한 사이프러스, 거기// 아무도 없소? 아무도...//

통나무집 부근 / 강현국
낙엽 지면, 우리/ 손시릴거야/ 찬 하늘 등에 지고 기러기 날면/ 그래, 그래/ 낙엽 지고 기러기 날면/ 발등에 쾅, 쾅, 투명한 못자국/ 西山 저 혼자 발시릴거야// 손발 따스한 사랑의 집/ 눈 내려도 얼지 않는 영혼의 집/ 오오, 그립다고 우리는 쓴다/ 희디흰 사각의 메모지 위에/ 계곡의 물소리 맨발로 모여들고/ 노을 등진 갈숲이 수런거렸다/ 장대 들고 망태 메고 숲 속을 접어들면/ 초록의 길 하나가 환하게 열리고/ 세상의 한 쪽이 캄캄하게, 지워진다// 쓸쓸한 날의 빗금긋기//

노을이 쓰는 문장 / 강현국
검은 상처가 눈물로 빛날 때/ 어떤 기억이 불쑥 손가락을 내밀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검은 상처가 눈물로 빛날 때/ 어떤 기억이 불쑥 손톱을 길렀다// 고인돌처럼 나 홀로 앉아서// 검은 상처가 눈물로 빛날 때/ 어떤 기억이 불쑥 두 눈을 찔렀다//

어떤 개인 날 / 강현국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이제 나는/ 캄캄하게 죽었다// 한갓 남루는/ 행랑 끝 돌아서는 바람의 것이고// 젖은 구두는/ 칭얼대는 구름에게 던져주었다//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이승에서 잠시 우리가 만난 눈부신/ 푸른 푸른 날들의 사타구니를// 연어 떼 탕, 탕,/ 들이받다 가겠지// 주머니가 텅, 비어버린/ 어떤 개인 날// 자동응답기를 꺼버렸다.//

첫 눈 / 강현국
큰 산 외로움이/ 느낌표 속에 갇힌다/ 속달로 보내 온 느낌표 속에/ 발 시린 저녁답이 꼼짝없이 갇힌다/ 서둘러 문을 닫는 멧새들의 겨울 숲과/ 당나귀 먼 길마저 아득하게 갇힌다// 눈물 같은/ 아니 물방울 같은/ 아니 온 세상 열어젖힌 유리창 같은/ 느낌표 속에/ 물들인 군복과 동성로 낱담배와/ 찬물로 배불리던 그 언덕이 갇힌다/ 당신이 보내 온 느낌표 속에/ 당신이 그리웠던 주막집이 갇힌다//

너에게로 가는 길 / 강현국
너에게로 가는 길/엔 자작나무 숲이 있고 /그해 여름 숨겨 둔 은방울새 꿈이 있고/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낮은 침묵의 草家가 있고/ 호롱불빛 애절한 추억이 있고/ 저문 날 외로움의 끝까지 가서/ 한 사를 묵고 싶은/ 내 마음 속에 발 뻗는/ 너에게로 가는 길엔/ 미열로 번지는 눈물이 있고/ 왈칵 목메이는 가랑잎 하나/ 맨발엔 못 박힌 불면이 있고//

내 손이 닿지 않는 가려움 하나가 / 강현국
면도를 하고 나니 /그대 얼굴이 깨끗하도다./ 깨끗한 얼굴로는/ 이 밤의 추위를 껴안을 수 없으리.// 자고 남은 시간에 할 일도 없이/ 등이 가렵다./ 팔을 꺾고 등을 굽혀/ 아무리 구겨져도/ 가려운 그곳은 닿지 않는다./ 어깨를 발바닥을/ 긁으면 긁을수록 확실한 가려움./ 이 가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 손이 닿지 않는 가려움 하나가/ 움츠린 것들의 가려움을 일깨우고/ 자고 남은 시간을 난처하게 만든다.// 벗어 던진 양말이 치근거리고/ 주전자의 끓는 물이 치근거린다./ 밖에는 눈이 내려서/ 새하얀 나무들이 비듬을 털고 섰다./ 어디로 갈까, 섣달 그믐 창가에/ 소의 부러진 앞발이 나란히 걸려 있다./ 털의 야성도 밀리고, 한결같이/ 발굽마저 뽑혀 정결하게 보인다./ 푸줏간 앞을 지나노라니/ 천리 자갈밭이 치근거린다./ 현장 뒤에 숨어 있는 가려움은 무엇인가// 구겨지며 바라보는 어둡고 큰 산/ 큰 산에 붙은 불은/ 구름의 속살까지 번지고 있다.//

견인차는 멀리 있다 / 강현국
차가 처박힌다 등뒤에는 늪이 있다 물풀과 황토물의 늪이 있다 견인차는 멀리 있다 건장한 사내가 한 손으로 늪속의 르망을 끌어올린다 진흙 뒤집어쓴 물방개 같다 내 차는 상처 많은 캐피탈인데, 내 차는 발톱 빠진 늙은이인데 사내는 시간이 없다며 집으로 간다 견인차는 멀리 있다.// 건장한 사내가 흰수염 늙은이 멱살을 끌고 온다 등 위에는 가파른 벼랑 끝 늪이 있다. 깊이 모를 물풀과 황토물의 늪이 있다. 건장한 사내가 흰수염 얼굴을 사정없이 때린다 왜 죽지 않느냐고, 맛을 봐야 된다고, 늪 속에 처박는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맛을 봐야 된다는 듯, 흰수염의 늙은이 참으로 당연하게 늪 속에 처박힌다 처박힌 늙은이 물풀과 황토물을 허우적거린다 허우적거림을 스스로 딱하고 놀라워한다 스스로 안타깝고 민망해 한다 흰 수염 늙은이 말없이 당연하게 얻어맞는다 왜 살아났느냐고, 아직 맛을 덜 봤다고 건장한 사내가 흰수염 늙은이 자꾸자꾸 처박는다 왜 살아났느냐고, 아직 맛을 덜 봤다고, 늙은이 흰수염 늪 속으로 처박힌다 물풀과 황토물의 해와 달 속으로 깊숙이 처박힌다// 늪이었을까 나는, 물풀과 붉은 황토물의, 악몽의 늪이었을까// 견인차는 멀리 있다. 공중 전화는 보이지 않는다 견인차는 멀리 있다. 멀리 있다는 말 끝에는 언제나 큰물 지고 비바람 친다 핸들 잡고 꾸벅꾸벅 몇 번을 존다 저무는 지평선에 자꾸자꾸 처박힌다 처박히는 늪이 있어 처박는 늪이 있다...... 아버지!//

편지 / 강현국
이따금 대합실을 기웃거리는/ 흰나비와 아름다운 햇빛/ 그리고 솔바람 뿐입니다/ 이곳 운문사는/ 자판기 종이컵에 반쯤 고이는/ 200원어치의 적막뿐입니다// 파랗게 엎드린 질경이의 그 길은/ 시냇가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시냇물 무심히 들여다 봅니다/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시냇물 맨발 들여다 봅니다/ 이제 막 대구행 막차가 떠났습니다/ 혼자 남은 물소리 쓸쓸해 합니다// 그대 어느 날이곳에 두고 간 한줌의 눈물, 눈물/ 번지는 저녁 노을 뿐입니다//

가난한 시절 3 / 강현국
솟구쳐 봐, 솟구쳐 보라구/ 어떤 막막함이 제 이마로 찬 하늘 들이받네// 산꿩 때문에, 돌팔매 때문에/ 빈 들녘 들찔레 하혈 심하네, 어머니//

가난한 시절 4 / 강현국
결국 그것은 제 몸 치근대는 바람 때문일 거야 큰 송아지만한 사냥개 절뚝절뚝 저녁 어 스름 이끌고 날 찾아왔지 큰채와 사랑채 이음새 헛간에서 주먹밥 나누어 먹던 한 철 잊을 수 없네 헛간 고요에 상처 아물고 주먹밥의 柔順에 길들여졌다 할지라도 어느 날 훌쩍, 사냥개 사라지고,/ 텅 빈 고요만 비에 젖어 슬폈네// 지평선 아주 먼 데로부터 컹, 컹, 컹, 밀려오는 저녁놀/ 무너지는 소리 컹, 컹, 컹, 컹,//

지평선 가물가물 / 강현국
흐린 저녁, 술잔 속에 내리는 빗소리 듣습니다 어깨 닳아빠진 낡은 탁자 위를 덜컹이며 지나가는 바람소리 듣습니다 굶주린 메뚜기 떼 세월의 뚝살 갉아먹고 있는 듯 기억의 구석구석 깡통소리 왁자하게 들려옵니다 술잔이 소주에게 소주가 쏘주에게 쐬주 한 잔 권하는 흐린 저녁, 변두리 술집에서는 꼼장어도 기억 속의 발가락을 꼼작거려 봅니다 생이, 마른 나뭇잎처럼 가볍게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어느 한때 상처마저 모서리에 찔립니다 오기의 창과 체념의 방패 사이 뜨거운 국물이 펼치는 흐린 저녁, 빗소리 얼얼하게 들려 옵니다. 허허벌판 바람소리 말 달립니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탁자 위에 검붉은 화덕 위에 깡통소리 왁자한 내 몸 올려놓고 삼겹살 구워놓고 지평선 가물가물 굶주린 메뚜기 떼 기다립니다//

 

내 마음 갈곳을 잃어 / 강현국
오규원을 읽다가/ 오규원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참 우연한 일도 많지/ 바깥 세상 훔치려다 들킨 창문이 덜컹 내려앉는다// 하늘이 하 맑아서/ 그대 떠난 하얀 길이 잘 보인다 라는 표현은 구식이다// 이승훈 식으로 말하자면/ 최백호가 아니라 눈길이 문제이고 눈길이 아니라 걸으며가 문제이고 금용 노래방 227번 이 문제이고/ 다시 이별이 아니라 이별이라는 말이 문제이고 언어와 사물 사이 미끄러운 눈길이 문제이고 다시 눈길이 아니라 미끄러지는 신발이 문제이고 신발이 신고 가는 내가 문제이고 다시 내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이고 다시// 오규원을 읽다가/ 오규원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참 우연한 일도 많지/ 바깥 세상 훔치려다 들킨 창문이 덜컹 하는 표현은 신식이 아니다// 덜컹 덜컹은 아무 것도 훔치지 못해 덜컹하므로/ 덜컹 덜컹은 아무 것도 도둑맞지 못해 덜컹덜컹하므로//

세한도 / 강현국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고요의 남쪽이 다 젖었다// 이를테면 토종 햇살. 토종 바람. 토종 아내. 토종 애인 등과 같이 토실토실한 토종이 보고 싶어 백일홍 꽃씨를 샀다 원산지가 멕시코인 그의 꽃말이 멀리 있는 친구 생각이어서 그 나마 여잔 다행스럽지 않다 나 이제 손꼽아 무엇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막차 떠나고 길 끊긴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구에서 짧은 인생을 끝내고 우리는 물 자체 또는 안개 같은 물의 모습으로 우주의 끝까지 날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는 에모토 마사루 씨는 당신이 물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물도 당신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한다 머나먼 멕시코... 토종이 아니어서 탐탁찮지만 나는 오늘 고요의 남쪽에 백일홍을 심었다//

 

밖으로부터 나를 잠갔다.
캄캄한, 문 없는 시간이었다.
내 노래의 三年不蜚,
안으로부터 나를 열 때가 된 것이다.

면목 없는 生이여,

2011년 4월, 동신교 곁에서
강현국


한 자락 소낙비 ―세한도 1 / 강현국
너를 사랑한 한때의 소낙비/ 너를 사랑한 한때의 정거장/ 너를 사랑한 한때의 비린내/ 너를 사랑한 한때의 수평선으로부터// 너를 사랑한 한때의 수평선/ 너를 사랑한 한때의 비린내/ 너를 사랑한 한때의 정거장/ 너를 사랑한 한때의 소낙비까지//

하얀 대낮 ―세한도 2 / 강현국
모든 길이 새하얗다/ 새하얀 길 따라 그리움이 새하얗고/ 호프집 창 너머 예배당이 새하얗다// 칼도 經도 없이/ 바짝 마른 고요의 굴뚝으로부터/ 풀, 풀, 풀, 흩어지는 오직 흰 구름//

누이와 기러기 ―세한도 3 / 강현국
왼손이 오른손을 찾아와 꽃 피는 동안// 한 하늘 기러기 맨발자국이/ 지붕까지 내려와서 기럭, 기럭, 하는 동안//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가 꽃 지는 동안//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 베란다 흔들의자가/ 해 뜨는 동쪽으로 기우뚱하는 동안//

미주리 하늘 너머 ―세한도 4 / 강현국
倭館은/ 대한민국 속의 일제시대 같다// 늦은 봄 어느 날이/ 늦은 봄 어느 날의 招人鐘을 누르면// 대합실 앞에 문득 서 있는 그대/ 일제시대 속의 대한민국 같다//

캄캄하게 꽃 진 자리 ―세한도 5 / 강현국
아무도 없는 산마루는/ 아무도 없어 기막힌 산마루였습니다// 캄캄하게 꽃이 진다 엽서를 쓰려다 말았습니다// 봉평에서 대화까지 소금을 뿌린 듯/ 시냇물 끄트머리가 환한 달빛에 따끔거렸습니다//

김광석을 듣다가 ―세한도 6 / 강현국
태풍이 그의 일생을 신천 둔치에 버리고 떠났다/ 1에서 9까지 입에서 항문까지 낙숫물 소리에 내 몸이 다 젖었다//

레몬빛 허공 ―세한도 7 / 강현국
마침내 허공은/ 마침내 허공으로 가득하다// 나뭇잎 지고// 허공에 파묻혀 허공이신 내 아버지/ 아직도 허공이네//

진밭골 입구 ―세한도 8 / 강현국
자주 왼 무릎을 다치는 당신/ 고요의 외동따님//

세모가 네모에게 ―세한도 9 / 강현국
수면제가 삼켜버린 바다, 한 움큼/ 수면제를 삼켜버린 바다// 누가 제 몸을 사루어 번제를 드리는지// 바다는 없고/ 통곡소리 문득 멈춘 저녁노을 뿐,//

개미와 함께 ―세한도 10 / 강현국
이 많은 탑들을 선생이 다 쌓았소? 내가 물었다/ 탑은 쌓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라오. 그가 말했다//

남으로 창을 넓게 내었다 ―세한도 11 / 강현국
구름은/ 철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친구 생각 ―세한도 12 / 강현국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고요의 남쪽이 다 젖었다//

풀밭 위의 식사 ―세한도 13 / 강현국
풀밭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는다/ 개미와 함께 꿀벌과 함께 바람과 구름과 함께/ 식탁 위에 뚝, 뚝, 떨어지는 감꽃과 함께//

너풀너풀 ―세한도 14 / 강현국
오늘은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너풀너풀//

저급한 희망 ―세한도 15 / 강현국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독 오른/ 뱀 대가리 스스로 꼿꼿하다//

옛 생각 ―세한도 16 / 강현국
싸락눈 내리다/ 구름이 엎지른 기별 댑싸리비로 쓸어내다//

K시인에게 ―세한도 17 / 강현국
더러워서! 먹었던 마늘을 죄다 토해놓고 도로 곰이 된 그대가 그대의 육신을 뜯어먹는 칠흑의 갈피들이 하 투명할 때, 진주라 천리 길이 훤히 보일 때//

L시인 ―세한도 18 / 강현국
햇빛은 이미 봄이니,/ 봄은 또 이 지상에 셀 수 없는 연둣빛 눈을 매달 것이니,//

김훈을 베끼다 ―세한도 19 / 강현국
장롱 속, 깊이, 잠자던 아주 오래 된 그 때 그 피난 간 아버지 땀 묻은 티셔츠 왼쪽 겨드랑이에 숨겨놓은 부적의 붉은 일획처럼//

벽돌과 저녁노을 ―세한도 20 / 강현국
저녁노을에/ 납작하게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

어떤 유리병은‘퍽’하며 깨어진다 ―세한도 21 / 강현국
느티나무 가지 끝을 기어 나온 딱정벌레가 딱딱한 초승달을 갉아먹는 소리 크고 환하게/ 쓸쓸함의 아래턱이 부슬부슬 한겨울 쪽으로 무너지는 소리 점점 더 크고 점점 더 환하게//

빗방울처럼 ―세한도 22 / 강현국
새털구름 위를 달리던 세 발 자전거/ 신발 벗어 거기 두고 맨발로 뛰어내리는 바퀴들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너울너울 ―세한도 23 / 강현국
봄비 자욱하게 지나가셨네/ 저 죽은 나뭇가지 끝 일요일 축축하게 젖었네//

빗속을 둘이서 ―세한도 24 / 강현국
이런날정말싫타!/ 앞으로이런날잦을텐데...깜깜하다!//

나를 훔친 도둑 ―세한도 25 / 강현국
움직이는 물은 그 물 속에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다 라고 시인은 말한다. 꽃 한 송이가 더 피어나는 것만으로도 냇물 전체가 술렁대는 것이다.(바슐라르)// 텃밭을 일구어 옥수수를 심었다. 바람의 가장자리로부터 추녀 끝이 술렁대었다./ 세월을 훔쳐 온 오랑캐꽃이 초록의 빈 터에 고요의 남쪽을 들여놓았다. 오래된 약속이었다.//

어느 봄날 ―세한도 26 / 강현국
구름을 쟁기질하는 너에게서는 늘 낙엽 타는 냄새가 난다.//

R을 위한 모자이크 ―세한도 27 / 강현국
누군가 마당 건너고 창문 건너와 먼지 가득한 책장 밑까지 달빛으로 넘실댑니다(류시원, <바다로 가는 먼길1> 부분)/ 아득한 곳으로부터 넘실대는 달빛은 아득한 곳으로부터 구만리 장천이니……//

이 세상 저자 ―세한도 28 / 강현국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세요”//

침묵 한 그루 ―세한도 29 / 강현국
침묵 한 그루/ 봄과 겨울 사이 天 · 地 · 玄 · 黃 사이/ 군살 하나 없는 뜬구름 같이//
* 한때 나는 구름은 철새들이 벗어놓은 신발이라 쓴 적 있다.

너무나 좋은 혼자 ―세한도 30 / 강현국
아아, 너무나 좋은 혼자! 사마귀는 저렇게 꿰맨 자국없이 저렇게/ 아아, 너무나 좋은 혼자! 신발도 없이 후회도 자책도 없이 메뚜기는 저렇게/ 삶이란 무릇 간절함뿐이므로, 간절한 울음이란 맨몸이므로 아아, 너무나 좋은 혼자!//
* 어떤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입에서 새가 되어 날아가고, 어떤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생으로 스민다.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 ―세한도 31 / 강현국
하늘 높고 바다 깊다/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

오규원 선생께 ―세한도 32 / 강현국
화전민이 일군 허공 아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는 없다/ 허공이 일군 자귀나무 어깨 위에/ 흰 구름 고봉밥 뭉개 뭉개 피어있다// 있다와 없다 사이 허공 위와 허공 아래 사이/ 무심하게 끼어 있는 2005. 9. 10. 토요일. 적막.//

하늘까지 70리 ―세한도 33 / 강현국
새벽 두 시에 마시는 커피/ 새벽 두 시와 함께 마시는 커피/ 감나무가 내려놓은 달빛 아래 마시는 커피/ 감나무가 내려놓은 달빛과 함께 마시는 커피//

저만치서 ―세한도 34 / 강현국
아저씨, 대학교 교장 선생님 되셨지요!// 산꿩 푸드덕, 푸드덕 산꿩, 玄玄玄 저 하늘 저 물결//

한 세상이 떠나고 ―세한도 35 / 강현국
신발장에 신발 올려놓듯 그렇게,/ 2006년 3월 25일 신천 둔치에 개나리 만발해서/ 대문 잠그고 소풍가는 아이같이 그렇게,//

내려놓은 풍경 ―세한도 36 / 강현국
바위 밑에 멈춰 있던 이끼 낀 시간이 우루루/ 물소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하고 싶었던 많은 말들, 따뜻했다// 이승에서 잠시 우리가 만난 눈부신 계곡의 아침 세월 속에 묻었다/ 한 컵의 바람에도 내 삶은 텅, 텅, 깡통처럼 울렸다//

끝말 이어가기 ―세한도 37 / 강현국
감나무 잎 진 자리 텅! 비었다// 떼떼기 방아깨비 호박여치 사마귀 어디로 갔나// 제 주검 입에 물고 어디로 갔나// 기억의 곳간이 텅! 텅! 비었다//

어제는 슬픔이 하나 ―세한도 38 / 강현국
하늘이 하 높고 푸르러/ 그 마을 物物은 耳順하다// 어쩔 수 없이,// 노을 속을 파고드는 기러기처럼/ 강물은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나//

도망치는 문장처럼 ―세한도 39 / 강현국
대전이란 말은 납작하다/ 대전이란 말만 들으면 나는 납작해진다// 납작한 아침 햇살 납작한 저 구름 납작한 넙치처럼/ 쓰다만 편지 도망치는 문장처럼//

낱말에 파먹히다 ―세한도 40 / 강현국
여생이란 낱말의 낯선 잠수함, 여생이란 낱말의 흐린 모닥불, 빈들에서 날 부르는 쓸쓸한 저녁연기, 여생이란 낱말의 한 뼘 양지 녘, 붐비는 첫눈도 차마 범하지 못하는 수성못 여생의 벤치로부터 진눈개비 잦은 벤치의 여생으로 유유자적 미끄러지는 물오리 떼 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유유자적 제 집 찾아가는 산 그림자 본다. 이 밤도 깊었으니 나도 이제 유유자적 건널목을 건너야 하리. 여생의 아랫목으로부터 아랫목의 여생까지 시린 맨발 묻어야 하리.//

어이없이 ―세한도 41 / 강현국
겨울바람이 이유도 없이 내 모자를 벗겼다. 이유도 없이가 한 짓이다. 아버지의 일생과 맞바꾼 모자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은 뻘밭이 막무가내로 내 신발을 삼켰다. 막무가내가 한 짓이다. 어머니의 기도와 맞바꾼 신발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든 유곽이 느닷없이 내 속옷을 벗겼다. 느닷없이가 한 짓이다. 먼저 간 누이의 영혼을 팔아 산 속옷이었으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발바닥으로부터 머리끝까지 바람과 뻘밭과 유곽의 해일이 쳐들어 왔다. 도둑의 행방이 묘연하다. 깻단을 털 듯 누가 물푸레로 내 몸을 두드렸다. 물푸레가 한 짓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소금 기둥으로부터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문자들이 이 빠진 전갈처럼 새까맣게 새까맣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의 소행이다.//

구름 산사태 ―세한도 42 / 강현국
내가 수년 전부터 연작으로 쓰고 있는 세한도 마흔 두번째가 빠져 있다. 파일을 정리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41과 43은 오래 전에 발표해버렸고 최근에 쉰 세 번째 세한도를 잡지에 보내놓은 상태이고 보니 번호를 조정해서 빠진 자리를 메우기도 난감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아마도 번호를 건너뛰었거나 초고를 망실했을 것이다. 흔히 그럴 수도 있지 뭐 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내겐 큰일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큰일이 되는 구름 산사태에 만리장성 무너지는 저간 체험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이가 빠진 느낌이다. 세한도 41은 그러나 가 소재이고 세한도 43은 한적한이 주제이다. 고민 끝에 나는 이 빠진 그 자리에 후박나무 한 그루를 임플란트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이가 빠진 그때 그 자리는 캄캄한 뻘밭에 처박힌 배처럼 오라! 곤궁의 사막이었으니 큰 나무 그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오규원 ―세한도 43 / 강현국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본다//

아들을 위한 각서 ―세한도 44 / 강현국
이따금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이따금 우르르거리는 쥐떼들과 함께 2008년 3월7일 모처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허공과 공허는 다 같이 이름씨이다. 뼈다귀감자탕과 보쌈을 안주로 소주와 맥주를 밤늦도록 마셨다. 허공은 자연이고 공허는 인위이다. 소주와 맥주를 따로따로 마시다가 우리는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마셨다. 그대는 착해서 마시기 싫은 술을 내 식으로 벌컥벌컥 목마른듯 마셔주었다. 잘 취해서 허공은 허공으로 발효하고 공허는 공허로 미끄러졌다. 허공과 공허는 비슷한 말이지만 섞이지 않는다. 허공하다는 말이 안 되고 공허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천정에서는 보이지 않는 쥐들이 우르르 우르르 소나기를 신고 뛰어다녔다. 공허가 한 짓이다. 허공을 떠다니는 남도의 꽃소식이 내 두개골을 열었나 보다. 새벽녘엔 쥐떼들이 아이젠을 신고 우르르 우르르륵 내 머리 속을 뛰어다녔다.//

버려짐의 태초 ―세한도 45 / 강현국
태초에 버려진 개들이 있었다, 버려짐의 태초, 버려짐의 아르케, 성경에 기록된 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와 같이 태초로 번역된 아르케, 싸이프르스 그늘 아래 널브러져 파르테논 신전의 풍경을 완성하는 버려진 개들의 태초, 버려짐의 아르케! 꿈결 같은 에게해를 지나며 꿈에서 깨어나니 나는 어느 소설의 일절처럼 한 마리 벌레로 버려져 있었다. 흉측하고 끔찍했다//

선창가 안개에게 ―세한도 46 / 강현국
에게해는 하늘을 닮았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고 합니다. 하늘이 푸르면 에게해도 푸르고 흐리면 흐리고 검으면 검고 하늘이 붉으면 에게해도 그 빛깔이 붉어진다고 일러주었습니다. 하늘 마음먹기에 따라 에게해도 마음먹나 봅니다. 우리 일행의 그리스 안내자는 선교사인 남편을 도와 집시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는 《내 사랑 집시》를 출간하기도 한 희랍어에 능통한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남편의 성은 손씨이고 양자로 들인 집시의 성은 발씨라 했습니다. 손발이 잘 맞아 행복하게 지낸다며 웃었습니다. 선창가 안개여, 자욱한 섬이여, 되돌아보면 당신과 나도 손발이 잘 맞은 삶의 한때가 있었겠지요. 그것이 비록 엊그제라 하더라도 한때; 그때 그곳은 늘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수평선 저 너머 흰 구름 선반 위에 있을 터입니다.//

섬뜩한 파수꾼 ―세한도 47 / 강현국
고구마를 심으려다 호박을 심었습니다. 산짐승 중에서도 특히 멧돼지가 고구마를 너무 좋아해서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아나지 않으면 큰일이지 그것이 비록 돈과는 관계없는 내 심심파적의 작물이라 하더라도 멧돼지가 파헤치고 물어뜯어 난장판이 되어버린 고구마 밭은 생각만 해도 억장 무너지지 망연자실 하겠지” 쑥의 뿌리는 너무 질기고 깊이 박혀서 근절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렁이가 먼저 죽으니 농약을 뿌릴 수도 없는 일이지만 제 아무리 맹독성의 제초제를 뿌린다 해도 며칠 있다 되돌아보면 나 아직 이렇게 멀쩡해 하며 새파랗게 손사래를 치는 쑥과 한나절 씨름을 하고 겨우 한 이랑을 만들어 거름을 주고 비닐을 덮씌우고 십여 포기 호박을 심었습니다. 호박 넝쿨도 그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잘만 가꾸면 개망초 토끼풀은 물론 쑥까지 해치울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난 코브라처럼 번쩍 쳐든 고개를 대문 밖까지 내밀어 오래 비워 둔 옛집을 저 혼자 지키는 섬뜩한 파수꾼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거든요.//

편지 ―세한도 48 / 강현국
샬롬,/ 한때는 신부되기를 꿈꾸었던 적도 있었던 저에게 언제부터인지 경원시 되었던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언어로 인사하면서 마음 평안함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선생님과 통하는 언어라는 점에서, 선생님 마음의 평안함을 전달 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시와 반시》 지난 봄호의 <혼자 가는 먼길> 마지막 회는 너무도 처절한 외로움의 고백이었습니다. 꼭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 들판에서 하염없는 비를 맞고 있다면 나 역시 그런 처절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내 찢어진 우산이라도 잠시 머리 위에 드리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선생님은 그저 누군가가 아니었습니다. 어설픈 우산으로는, 혼자 가는 먼 길에 어지러운 발자국만 보탤 것 아닌가하는 우려로 그저 세월에 맡겼나 봅니다. 이제 그 내리는 비를 그대로 다 맞아내신 선생님과, 새롭게 다가온 선생님의 시에 축복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외로움이야말로 시인의 일용할 양식 아니겠습니까, 사실 선생님께서 그간 광장에서, 난무하는 광장의 언어 속에서 외로울 틈 없이 사셨고...며칠 전 새벽꿈에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별다른 내용도 없는 꿈으로 그저 저에게 평소처럼 인사를 하셨습니다. 한시인, 얼굴 보기 왜 이래 힘들어...꿈꾸기 전날 다시 읽어본 <혼자 가는 먼 길>의 여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게 새벽꿈은 생활과 관련된 예시몽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날 한번 뵙겠습니다.// 샬롬,//울산에서/○○○드림//

우주의 떠돌이 ―세한도 49 / 강현국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은 그렇게 말하지만; 지구는 당신을 위해 공전하지 않는다. 바다는 당신을 위해 밀려오고 밀려가지 않는다. 새는 당신을 위해 노래하지 않는다. 해는 당신을 위해 뜨고 지지 않는다. 별은 당신을 위해 반작이지 않는다. 모든 아름다운 것과 경이로운 경험은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은그렇게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주변을 잘 돌아보라. 그무엇도 당신 없이 존재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지구는 지구를 위해 공전하고 바다는 바다를 위해 밀려오고 밀려가고 새는 새를 위해 노래하고 해는 해를 위해 뜨고 지고 별은 별을 위해 반짝인다. 지금까지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했든, 이제 당신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안다.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은 그렇게 말하지만; 당신은 우주의 떠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함께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한도 50 / 강현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새는 봄날을 노래 부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혼자 핀 감꽃 저 혼자 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 깊어 눈곱만한 메뚜기 알에서 깨어날 때 눈썹 같은 메뚜기 가랑비에 젖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널 때 질기기도 해라 저 달은 왜 새벽 두시의 감나무를 데리고, 새벽 두시와 함께 마시던 커피 잔을 데리고, 커피 잔에 가라앉는 빗소리를 데리고 한사코 따라와 가랑잎 흩날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家出하는 쓸쓸함, 家出하는 외로움의 고래 등짝이 내 몸을 쿵쿵 들이 받을 때 피 튀고 살 흩어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날 때//

장대 끝 갯바위 ―세한도 51 / 강현국
장대 끝에 두 귀를 내어걸었다. 바람이불면나무들은오른쪽그다음순간은꼭왼쪽으로흔들려요 장대 끝에 두 눈을 내어걸었다. 오른쪽으로흔들린나무는요그다음순간에는꼭왼쪽으로흔들려요 마른 장대 끝에 이목구비를 내어걸었다. 선생님바람도햇살도가을이에요어둠도가을이어서밤이되니몸한쪽이서늘하기도해요//

텅 빈 마당은 팽팽하다 ―세한도 52 / 강현국
그러므로 새가 마당에 날아와 앉는다는 것은 몸 전체가 공간 그 자체인 명사성의 드넓은 세계에 시간성의 흐름과 가벼움을 닮은 동사성의 한 존재가 점을 찍듯 날아와 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새가 마당에 날아와 앉으면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아둔해도 뭔가 일상의 평범한 일에서 느낀 것과 다른, 색다른 느낌을 받고 흥분한다. 어린이도 어른도“아! 새가 날아왔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들의 어색하나 놀라운 어울림을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당은 죽음 없이 한곳에서 영원을 사는 공간의 실체이다. 그에 반해 새는 공간 없이 무변無邊으로 날아다니며 흐름을 창조하는 무형의 동적 실체이다. 따라서 새가 날아와 마당에 앉았다는 것은 이런 상대적인 두 세계가 만나는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늘 보는 새인데도 마당에 날아온 것을 볼 때마다 우리가 흥분하며 기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정효구, 《마당 이야기》, 작가정신, 2008. 96~97쪽)//

동현에게 ―세한도 53 / 강현국
먼 산마루에 내려앉은 멍석만 한 겨울 아침 햇살은 오슬오슬 추워 보인다. 이른 아침 어린이집 마루에 맡겨진 내 외손자 동현이처럼 아침 햇살은 잠시 겨울나무 숲을 머뭇머뭇 낯설어한다. 마음은 제 어미 등에 업혀 꽃그늘 아장아장 꿈길을 가고 낯선 세상 방문 앞에 저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우리 동현이처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이 아니야 먼 산마루 햇살이 겨울나무 숲의 스산함을 부추긴다. 내가 화장실에 가서 조간신문을 읽고 오는 동안 멍석만 한 햇살은 수심찬 계곡과 환난의 검은 바위를 살같이 지나 어느새 수성구 지산동 일대를 환하게 장악하고 우리 집 베란다 가득 넘실거린다. 장난감 마차를 타고 꽃밭을 말달리는 우리 동현이 파묻히는 웃음처럼 아니 그보다는 와인 잔에 찬물 붓고 할아버지와 쨍! 할 때 찰랑찰랑 넘치던 기쁨처럼 그때 그 해맑은 눈빛 너머 철새들의 이동을 이용해 내게로 온 어린 왕자처럼.//

내 사랑 루디아 ―세한도 54 / 강현국
치욕이 치욕의 머리끝까지 성난 가지를 뻗어 올렸다. 달은 이미 지고 밤은 깊어 캄캄했으나 왼팔과 오른팔이 다투지는 않았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치욕이 제 몸을 닫아걸었다. 치욕의 습관이다. 치욕은 혁명의 숙주이므로 겨울에는 털모자를 쓰고 비 오는 날엔 지하철 종점까지 나들이를 가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한다. 치욕의 생리이다. 치욕이 치욕의 발끝까지 젖은 뿌리를 뻗어 내렸다. 잔치는 끝나고 설거지거리만 지천이었지만 손이 발에게 냄새나고 더럽다고 투덜대지 않았다. 닭이 세 번 울었을때 놀란 치욕이 제 몸의 자물쇠를 하수구에 버렸다. 습관은 타성이고 생리는 본능이다. 혁명은 팔다리가 없으므로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계신다.//

옛날 옛적 ―세한도 55 / 강현국
해종일 처적 처적 눈이 내렸다. 옛날 옛적과 거래하지 않겠다. 내일 모레가 경칩인데 그 마을은 하얀 눈 나라였다. 전화기 전원을 끄고 나는 소문보다 멀리 그리고 기억보다 아득히 잠적했다. 배고픈 곤줄박이가 건초더미를 들락거렸다. 사람을 믿은 죄의 기억들이 신발도 신지 않고 불안의 낮과 밤을 들락거렸다. 잠깐, 잠깐 선잠 속에 옛날 옛적 눈이 내렸다. 콩 심은데 팥 났다며 태산이 불쑥 하늘 위로 솟구쳤다. 괘씸한 놈, 아닌 밤중 큰 주먹이 옛날 옛적의 뺨을 때리려다 말썽이 싫어서 그만두었다. 쌓인 눈이 녹자 옛날 옛적 성난 군화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쳐들어왔다. 내 몸 이곳저곳 들락거리던 곤줄박이가 거짓말처럼 앞산으로 잠적했다.//

몸 무거운 가옥 한 채 ―세한도 56 / 강현국
주먹만 한 돌덩이 하나 주어왔어 사흘 밤 사흘 낮 물 먹였어 매부리코였어 그대 형형한 논리가 제아무리 하늘을 찌른다 한들 가야산 빙벽처럼 사흘 밤 사흘 낮을 저 높은 날벼랑에 엎지르지 못하네. 빌립보 감옥 무너진 담장에서 주먹만 한 돌덩이 하나 주어왔어 쭈그리고 앉아 한나절 하이타이를 풀어 수세미로 문질렀어 대머리였어 그대 번쩍번쩍 빛나는 언변이 제아무리 청정해서 강바닥 가재 발을 헤아린다 한들 귀뚜라미 부부처럼 별빛을 찢어먹고 가을 밤 별빛을 새끼 치진 못하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잠 못드는 별빛을 다독이진 못하네. 사도 바울이 갇혔던 빌립보 감옥 무너진 담장에서 언어의 조막손 하나 주어왔어 사흘 밤 사흘 낮 햇볕에 말렸어 등 굽은 안짱다리였어 마그마로 솟구치는 그대 열정이 人家를 덮쳐 추문을 전설로 만든다한들 목 쉰 찬바람에게 햇볕을 오려 만든 털양말 한 켤레 신기지 못하네. 어찌하겠는가, 마시는 물도 숨 쉬는 공기도 주먹처럼 어둡고 돌처럼 딱딱한 날들의 몸 무거운 감옥한 채!//

우울 길들이기 ―세한도 57 / 강현국
배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서야 비로소 너를 만났어 너에게 서는 생솔가지 타는 냄새가 났어 너를 길들였어 내 참 좋은 친구가 된 너는 갈색 머리였어 쵸콜릿 빛 망아지였어 한여름엔 팔 다리가 흘러내리는 우울의 낙지였어 눈 내리면 흘러내린 팔 다리가 빳빳해지곤 하는 엿가락 우울이었어 손에 익은 우울의 고삐를 잡고 가파른 벼랑과 올망졸망한 자갈밭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어 옛집은 흔적뿐이어서 바람도 들지 않고 비도 새지 않았어 편안했어 기억의 털니가 덜거덕거렸어 화내고 기뻐하고 불안해하고 자신만만해하는 한 시절이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어 아궁이 가득 불 비피고 있었어 이스탄불! 이스탄불! 1년 전 오늘 나는 우울의 긴 머리를 빗겨주며 별을 헤다 잠들곤 했었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서 뭉개진 사건들의 흐린 허벅지에 아무도 제 이름을 새기지 않았어//

먼 길 ―세한도 58 / 강현국
혼자 가는 먼 길이 혼자 가는 먼 길을 데리고 먼 길을 가는 동안/ 잃어버린 눈물이 잃어버린 눈물을 데리고 목 놓아 우는 동안 가득한 빈 곳이 가득한 빈 곳을 데리고 가득해 하는 동안//

아름다운 산책 ―세한도 59 / 강현국
당신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내용으로 인생이라는 칠판을 채워나가야 한다. 칠판을 지난 날의 짐으로 채워넣었다면, 깨끗이 지워라.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과거의 일은 모두 지워라. 그 덕분에 현재의 자리에 오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이곳에서, 기쁨을 주는 일을 찾고, 그리로 나아가라!(《시크릿》, 210쪽)//

백철 냄비 ―세한도 60 / 강현국
시골 농가 마당의 백철 냄비를 보면 어쩐지 전날 그집에 심한 부부싸움이 일어난 것 같고, 큰바람이 그 집 을 들쑤셔 놓은 것 같고, 리어카 끌고 양동이 이고 간 엄마 아직 난전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 같고, 집에 기르던 개를 전날 술꾼 아버지와 난봉꾼들이 잡아먹은 것 같다. 술 취한 아버지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이들의 어깨는 바깥의 바람 소리에도 소스라치고, 백철 냄비는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어미의 통곡처럼 바람에 마당을 구르고, 어디 구석에 쳐박혀 오랫동안 집안 식구들 눈에 안 띄고 싶은 백철 냄비. 오줌보 가득 찬 아버지 술 덜 깬 발길질에 으스러지는 백철 냄비, 더운 손으로 만지면 쩍 들러붙는 한겨울 마당의 백철 냄비.(Changing Places/Tord Gustavsen Trio)(<소리, 마음의 물질 5>| 작성자 일뤼마시옹)//

모일 모처 호두나무 ―세한도 61 / 강현국
모일 모처 호두나무, 달빛 질펀한 모일 모처 누가, 왜 純銀의 항아리를 엎질렀을까, 모일 모처 비루먹은 호두나무, 봇도랑이 살고 산비탈이 살고 헛간이 살고 있는 모일 모처, 모일 모처 오래 버려진 호두나무, 참 좋은 기별 같은 도랑물 흐르고, 산수유 노랗게 샛노랗게 몸살을 앓고, 기억의 조랑말들 헛간의 지평선을 땅 끝까지 밀어내는 모일 모처, 모일 모처 온몸에 마른버짐 핀 호두나무, 혈혈단신 모일 모처, 캄캄한 산비탈과 잘 드는 낫과 목 터지는 예초기와 쑥대밭 모일 모처, 그랬었구나. 바닥 헤진 신발 한 짝 살고, 손때 묻은 지팡이 살고, 버석거리는 비닐봉지 살고, 가랑잎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일모처, 추억의 사타구니, 비애의 사타구니, 우울의 사타구니, 첩첩산중 사타구니 백일하에 드러난 사바세계 모일 모처 누가, 왜 항아리 가득한 純銀의 生을 엎질렀을까, 검은 시간의 골짜기로부터 구물구물 기어 나온 사위질빵, 할미밀빵으로부터 친친친친 제 몸 감긴 모일 모처 호두나무, 자다가 벌떡 일어난 개구리 떼들 질펀하게 봄밤 엎지르는 모일 모처, 純銀의 生을 한 입에 구겨 넣는//

세한을 노래한 지 어언 십 년 ―세한도 62 / 강현국
쓸쓸하다고 쓰자/ 쓸쓸하다는 문장으로부터/ 솜털이 송송한 애벌레 한 마리 기어 나온다/ 찬바람 잎사귀 갉아 먹는다// 흔적도 없다/ 뱃길 끊긴 지 어언 십년// 외롭다고 쓰자/ 외롭다는 문장으로부터/ 종아리가 통통한 아기 오리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흐르는 실개천 뜯어 먹는다// 흔적도 없다/ 세한을 노래한 지 어언 십년// 고독하다고 쓰려다 말자/ 고독하다고 쓰려다 만 문장으로부터//

김영근 시인에게 ―세한도 65 / 강현국
의자가 있다/ 의자가 저 혼자 앉아 있다/ 침묵이 데리고 온 의자/ 물소리가 쉬어가는 의자/ 쉬어가는 의자가 앉아 있는 의자/ 구름이 만든 의자/ 구름의 經이 못질한 의자// 스님 불 들어가요// 의자가 있다/ 의자가 꼿꼿하게 앉아 있다/ 달빛보다 깨끗한 의자/ 깨끗해서 내 손이 닿지 않는 의자/ 내 손이 닿지 않아 등이 가려운 의자/ 등이 가려워도 잘 참는 의자/ 서산 저 쪽으로 기우뚱하지 않는 의자// 스님 불 들어가요//

옹알이 ―세한도 66 / 강현국
깽깽이 피었다/ 고요의 남쪽이 옹알거린다// 옹알이는 대지의 체온/ 옹알이는 우주의 리듬/ 옹알이는 태초의 흔적/ 옹알이는 언어의 태초,,,/ 와 같이 쓰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깽깽이 피었다/ 벌들이 찾아와 옹알거린다// 옹알이는 반가운 기별/ 옹알이는 햇살이 차린 식탁/ 옹알이는 시간의 입구/ 옹알이는 초록의 신탁,,,/ 과 같이 쓰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이다//

허만하 선생의 문장 ―세한도 67 / 강현국
“따라서 <흔적>은 <기원>보다 기원적인 것,/ 즉 <기원의 기원>인 것이다.”/ 허만하 선생의 문장 속에는 용암이 흐른 흔적/ 화강암을 깎아 만든 비석의 흔적, 뜬금없이/ 오직 손톱으로 허공에 새긴 三年不蜚의 흔적/ 벌레의 흔적, 벌레가 아닌 것이 벌레인 흔적/ 벌레인 것이 벌레가 아닌 흔적// “아득함을 혼자서 흘렀을 물길/ 무섭다! 시의 길”// 허만하 선생의 문장 속에는 발길소리 멎은 흔적/ 시간을 허물어 만든 봉분의 흔적, 뜬금없이/ 오직 발톱으로 맨땅에 물길을 낸 三年不蜚의 흔적/ 개불알꽃의 흔적, 개불알꽃이 개 불알인 흔적/ 개 불알이 개불알꽃인 흔적//
* 태초; beginning, core, foundation, ultimate concern


남몰래 흐르는 눈물 ―세한도 68 / 강현국
피어나는 꽃잎과 떨어지는 꽃잎 사이/ 분노의 뼈와 치욕의 살 사이 살얼음 호숫가/ 어스름 거느리고 날아온 굴뚝새// ―면목 없는 비애/ ―면목 없는 용서// 솟구치는 눈물과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 말하기와 듣기 사이 두고 온 노르망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 묻은 팔다리// ―그때 너는 어디 있었니?/ ―그때 너는 도대체 뭘 했니?//

흐르는 칼 ―세한도 69 / 강현국
책갈피에 꽂힌 가을하늘/ 가을을 도려낸다 하늘 푸르다// 편지 속에 접힌 가을바람/ 가을을 베어낸다 바람이 분다// 하늘 도려내고 바람 베어내면/ 가을만 강바닥에 가라앉겠지// 잘 드는 칼이여, 쓸쓸한 글쓰기여//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덕규 시인  (0) 2022.04.08
정성수 시인  (0) 2022.04.07
윤보영 시인  (0) 2022.04.05
염창권 시인  (0) 2022.04.01
이대흠 시인  (0) 2022.03.2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