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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운자 시인

부흐고비 2022. 4. 15. 08:25

정운자(鄭雲慈) 시인,수채화 화가
1967년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났다.

강릉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수채화 화가로 활동하다가

2013년 계간 《다층》 2회 추천 완료 등단하였다.

현재 다층, 다층문학회 동인, 양주작가회의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마여인상 / 정운자
당삼채로 붉은 치마를 해 입고/ 국철을 타고 두 시간 남짓 흔들리는 내가 있어/ 중간 어디 이백이 달빛에 취해 비틀거리던 시절/ 단호한 팔뚝에 말아진 채찍/ 동글동글한 얇은 턱 호통을 머금고 있는 가는 눈썹/ 테라코타// 나에게 가는 두 시간/ 그녀가 달려오느라 걸린 이천 몇 백 년// 웃음은 붉어 못 본 척// 밋밋한 가슴을 곧게 세우고/ 두 시간 남짓 흔들리면서 나는 말을 타네/ 덜컹거릴 때마다 종아리는 무겁고/ 어깨는 내려앉네// 나는 투르판 아스티나에서 왔다는/ 자주 저고리에 흘러내린 당상채 빛/ 시간의 부장품에서 꺼내진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옷섶에 손을 넣으면 설레는 빛바랜 연서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지//

치매라는 캐러멜 / 정운자
내 이름은 츄잉츄잉/ 부르기 쉽고 말하기 쉬운 캐러멜// 나 아닌 것에게 가려고 맨발로 용쓰다 보니/ 점점 기억이 안나,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방금 무엇을 했는지/ 우울한 안절부절의 옷을 부여잡고/ 나로부터 달아나려는 창문, 너머/ 단물 빠진 발바닥이 휘청거려/ 살아도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하루를 엿 먹이고 싶은,/ 새로운 이름의 달콤/ 구십년 세월이 꼬리를 물고 따라 오고/ 신물 나는 세계가 입 속에서 녹아내리고/ 눈 뜨면 나를 만나 낯설어지고/ 팔을 휘저을 때마다 기억이 사라져/ 이제 너를, 너마저 잊을 거야// 내 이름을 씹어줘/ 다정하게, 달콤하게 캐러멜//

기침 / 정운자
쏟아놓은 엊저녁 가재도구들, 외면하고 싶은 너의 말들/ 나는 자꾸 누르려고 하고 너는 자꾸 꺼내려고 한다/ 힘없는 내가 이만하면 되지 이만하면 되지 하며 달래는 동안/ 비온 뒤 바닥을 움켜쥐고 올라온 꽃대에서 피어나는 흙냄새/ 내용물이 가득차 잘 닫히지 않는 병뚜껑처럼 폭풍을 매단다/ 한 번만 들어달라고 귀담아 달라고 목을 찢으면서 저 밑바닥부터 왈칵,//

무우당(無憂黨) / 정운자
당(黨)을 하나 꾸리기로 했어 팔만 사천 번 도망 다닌 처사가 빈 가지를 뻗는 그곳으로 팔만 사천 장 팽 당 입회원서를 발송 중이야 제주 한림읍 명월리 팽나무 군락에 다녀온 보살은 팽나무 꽃을 좋아해 와흘리에 매어둔 수령 380년 된 빨갛고 노란 염원처럼 팽나무 열매의 달콤하고 팥알 같은 당(黨)을 하나 꾸리기로 했어 청년 일자리 대책과 장애인 등급제 폐지 등을 기치로 공동 교섭단체 강령을 만들고 해발 600m 팽나무 아래 구멍 많은 사람끼리 오색 줄을 꿰고 말이야 팽나무 꽃을 가입비 대신 받고 입회원서엔 세상에서 팽 당한 이력들을 써넣자고, 팽나무 씨가 사방 사십 리를 가득 채우고 그 씨앗이 백 년에 한 알씩 다 없어질 동안 거칠거칠한 우리 웃음도 팽팽 튕겨져 아무리 웃어넘겨도 껍데기인 나, 나는 입고 있는 그늘만으로도 자격이 충분하지 팽나무를 휘감고 있는 송악처럼 서늘한 그늘이 유일한 내 의복이야 당을 하나 꾸리기로 했어 팽나무 아래 구멍이 많은 사람끼리 서로 구멍이 돼주기로 했어 연대가 되기로 팽나무 꽃이 되기로//

화요일의 날씨​ / 정운자
마주 오는 남자가 방금 프린트 된 자기 얼굴을/ 손수건에 담아 건넨다/ 횡단보도 흰 줄과 검은 줄이 번갈아 말을 바꾼다/ 스템프처럼 내 어깨에 찍히는 강렬한 무관심/ 화요일 출근길에, 플라타너스 손바닥이 날린다/ 확률 20퍼센트, 서울 경기에 가벼운 기별처럼/ 5내지 20밀리 작년에 오지 못한 비가 예약되었다/ 요즘은 버스를 타면 멀미가 난다/ 살아있는 남자와 살아남은 여자가 방금 떠난 자를 환송하러 간다/ 시무룩한 하늘, 속 쓰린 하늘/ 어제 뱉어 내지 못한 이별이 팽창한다/ 길은 어디까지나 이어질 듯 서로의 그늘을 찍는다/ 오른손에 단단하게 거머쥔 가방 밑바닥에서 슬픔이 이완된다/ 종종거리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무관심이 구름을 덮었으므로,/ 복제된 환대가 눈부시다//

세상을 보는 눈 / 정운자
스티븐 윌쳐의 서번트 신드롬*은/ 20분 동안 한 도시를 뇌리에 박아버린다/ 길다란 화판에 도시가 세워진다// 살아있는 카메라,/ 뉴욕은 물론 도쿄까지 건물 하나하나가 재생된다// 세계에서 한국 출산율이 세 번째로 낮다는/ 그러나 여성 수명과 피임 보급률은 매우 높다는 그래프처럼다리를 건너는 아침 공기와 첨탑이 싱긋 만난다// 항공기에서 본 풍경/ 며칠간 되살아난 기억으로/ 빠른 선이 달린다/ 뉴욕의 선은 길고 뾰족한 매의 눈으로/ 엉긴 주름들 한 눈에 펼쳐진다/ 맨해턴과 뉴저지를 가르는 허드슨 강은 여백이다// 어떤 사람은 나선형으로, 직선으로/ 세상을 판별한다/ 나는 아직 선을 꺼내 놓지 않았다// 스티븐 윌쳐의 빠른 스케치에는/ 하루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는 청년들의 미래가 안보인다/ 선으로 다 꺼낼 수 없는 말은 남겨두었다//
*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 사회성 떨어지고 의사소통 능력 낮으며 반복적인 행동 등을 보이는 여러 뇌 기능 장애를 가지고 있으나 기억, 암산. 퍼즐이나 음악적인 부분 등 특정 부분에서 우수한 능력을 가지는 증후군)의 아이.
* 2014.11.17 facebook '자폐 아티스트들이 그린 놀라운 예술작품 10선'에 소개

깊다 / 정운자
가부좌를 틀고 있는/ 그래서 밑이 넓은/ 침전되어 보이지 않는/ 가는 선으로 자신을 버티는/ 무너지며 비로소 무게가 쏟아지는/ 병의 속살이 헤죽거리며 빠져나온다/ 깊이는 쏟아진 부분까지/ 생각의 파편들이 잠시 서 있다/ 수척하고 위태로운//

달그락 거리다 / 정운자
위태로운 그릇/ 무덤덤히 나를 기다려 줄 것 같던/ 병이 깨졌다/ 차르르, 안간힘을 쏟았다/ 마지막 순간을 떠 넣던 기억의 숟가락/ 이기지 못한 무게가/ 헤죽이며 삐져나왔다// 오래 오래 생을 굴려/ 엉덩이가 뚱뚱해진 병/ 그는/ 말랑함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한다/ 얼굴을 못 본 지 여러 해 전이라/ 빈 곳이 되어버려/ 시큼하다/ 살아온 날들이 다 오물 같다/ 살갑고 뜨거운 순간들은/ 입안에서만/ 안절부절 하다 녹는다//

사랑의 레시피 / 정운자
굴소스 한 스푼 잘 저어 줘요/ 그대 식탁에 올려 드릴,/ 굵고 퍽퍽한 그것을 써는 동안/ 그대를 발목 잡던 빨판/ 흔들리는 불신의 대가리/ 내가 당신께 줄 건 붉음밖에 없어요/ 양파껍질로 훌훌 벗겨 낸/ 눈물이 자작자작 졸아들어/ 먹물주머니까지 말랑해질 때까지/ 불을 끄고 눈을 감아요/ 비리지 않게,/ 뿌리도 버려요/ 시커멓게 우려낸/ 식은 눈웃음도 지우고/ 심장을 찬물에 담가요/ 오징어 긴 다리로 건너오는 당신//

조율 / 정운자
거미줄 치며 천장을 옮겨 다니는/ 다리 여덟 달린 생각/ 현을 위한 아다지오 스트링 op. 18-2/ 빠르게 연주해야하는 고음의 4악장/ 레가토, 피치카토로 손끝에 핏물 맺힐 때까지/ 뜯어내도 무기력에 빠진 현이 늘어질 대로 늘어진다/ 일곱 시 여덟 시 아홉 시로 건너갈수록/ 빨라지는 속도를 귀로만 좇는다/ 속도의 귀퉁이를 집거미 한 마리 지나간다/ 망설이는 줄이 흐느적/ 조율을 해야 하는데, 하는데/ 어디로 오는 길도 향하는 길도 없는/ 해태(懈怠)의 시간/ 게으름을 조율한다.//

공지 / 정운자
안동, 춘양, 태백에서 올라온/ 중백의 할머니 네댓 희희낙락 거린다/ 동창이라고 오십여 년 만에 모인 자리/ 멀어도 멀지 않은 추억만큼/ 먼 친척보다 환하게 만난 경옥이 형옥이 옥남이/ 깊어진 주름 업고 온 길// 누구는 며느리 덕으로 호강하고/ 또 누구누구는 사위 잘 얻어 느지막이 팔자 고쳤다는 소문도/ 줄줄이 꺼내놓은 손자 자랑만 못했다/ 먼저 가 기다리는 서방 만날 때는 새 옷 입고 가고 싶다며/ 일찍 혼자된 경옥이 사정에 눈 붉어지고/ 자식도 안 해주는 수의를 준비해야겠다는 말에/ 예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 옥남이는 윤년에 하라며 맞장구쳤다/ 명이 이만큼 길었으니 얼굴 본다며 웃어보지만/ 뭔 놈의 동창이냐고 역정 내던 영감 말이 생각나고/ 여태 취업 못한 아들도 떠올랐다// 어떤 기억은 오래될수록 더 선명해져 밤새 불 밝힌다/ 헤어지며 기약 없는 다음을 약속했다/ 하나둘 왔다가 하나둘 돌아오지 못하고 점점 헐렁해진 모임/ 문자가 또 왔다//

정운자 화백_돌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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