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읽기

구름멍 / 이행희

by 부흐고비 2022. 4. 25.

올망졸망 크고 작은 칸이 연결된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가 바쁘게 뒤따라간다. 마지막 칸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더니 이무기가 되어 날아오른다. 그 뒤를 멧돼지 한 마리가 쫓아가더니 흩어져 사라진다. 거실 창가에 앉아 하얀 구름이 벌이는 쇼를 보고 있는 중이다. 언뜻 보면 누군가 커다란 솜뭉치를 맘대로 뜯어서 던져 놓은 듯한 형상인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계속 움직이며 천변만화한다.

여고시절 우리 학교가 전국체전 매스게임을 맡게 되었다. 매일 운동장에 집합하여 땡볕에서 맹훈련을 하였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쭉 뻗고 제자리에 눕는 자세가 있었다. 등을 땅바닥에 대고 눕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같은 반 친구들도 선생님도 모두 사라졌다. 파란 세상에 몇몇 하얀 조각들이 둥실 떠 있었고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광활한 공간에 나 혼자였다. 구름과 함께 나도 끝없이 흘러갔다. 어리둥절했고 뭔지 몰랐지만 황홀했다. 지도 선생님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그대로 구름 세상 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밴쿠버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나는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여기저기 쏘다니다 햇살 좋은 풀밭이 보이면 가방에 넣어 다니던 신문지를 깔아 놓고 그 위에 드러누웠다. 특히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 좋았다. 잠시 앉아서 바다에 눈길을 주다가 지치면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하늘에서 노니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재미. 온갖 시름이 사라지며 마음이 한없이 부드럽고 가벼워졌다.

누구보다 구름을 사랑했던 헤르만 헤세는 ‘한 점 구름’이라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파란 하느레/ 가늘고 하얀/ 보드랍고 가벼운 구름이 흐른다/ 눈을 드리우고 느껴 보아라/ 하얗게 서늘한 저 구름이/ 너의 푸른 꿈속을 지나는 것을”

구름을 보다 보면 시인처럼 나도 어느새 꿈결이 된다. 장자몽이 아니더라도 꿈속인지 현실인지 헷갈린다.

어떤 이는 원숭이가 구름을 타고 쌩쌩 날아다닌다는 상상을 했다. 원하는 곳으로 구름이 순식간에 이동하며 구름 위에서 적과 싸우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구름 위에서 낚싯대를 내려 별을 낚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나는 구름을 조종해서 몰고 다닌다든지 낚시를 해서 뭔가 잡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냥 구름 위에 턱을 괴고 엎드려 한가하게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 게으르게 드러누워서 구름이 안내하는 대로 소리 없이 눈만 굴리고 싶을 뿐이다.

산을 오르다 구름 속에 든 적이 있다. 구름덩어리가 다가와서 나를 관통하는 모습이 다 보였다. 하얀 물 알갱이들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데 온몸이 서늘하게 젖어들었다. 구름 입자 하나하나의 이동이 내 온몸으로 확인되는 신비한 시간이었다. 금지된 신성한 장소에 침범이라도 한 듯 어쩐지 경건해지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들 말한다. 그러나 기실은 하늘 속에 살고 있다. 거대한 대기의 바다 안에서 숨 쉬며 살고 있다. 흐르는 구름을 배경 삼아 산사의 처마 밑에서 흔들리는 물고기 풍경을 떠올려 보라. 대기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바람의 물결에 무심하게 울리는 풍경. “부질없다, 부질없다”하고 일러주는 듯하지 않는가. 인간은 스치는 바람에 사라지는 한 조각구름인 것을. 번뇌에 시달리는 무지한 중생을 일깨우기에 이만한 것이 또 있겠는가.

“우리는 구름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구름이 없다면 우리 삶도 한없이 초라해지리라고 믿는다”는 성명서를 선포한 모임이 있다. 사람들이 태양과 푸른 하늘만 찬양하는 것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름하여 구름감상협회(Cloud Appreciation Society). 회원에게는 매일 지구 전역에서 촬영한 구름사진이 한 장씩 배달된다니 이 아니 매혹적인가. 전 세계에서 구름같이 회원들이 모여들었다니 나도 한번 가입해 볼까 싶기도 하다.

멍 중에는 구름멍이 제일일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캠핑 가서 즐긴다는 불멍은, 캠프파이어의 일렁임이 그럴듯하지만 그 빛 때문에 눈이 아프고, 농염하게 늘어진 능소화가 아름다운 요즘 꽃멍도 즐길 만하지만 계속 보고 있기에는 어쩐지 지친다. 멍하니 보고 있기에는 구름만 한 것이 없다. 서서히 혹은 빠르게 흘러가며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구름에 견줄 것이 어디 있으랴.

코로나19 사태에 갇혀 지내는 요즘 구름멍에 한번 빠져 볼까. 거실 창을 통해 얼마든지 구름은 감상할 수 있으니까. 시원한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바라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깨 너머 / 최원현  (0) 2022.04.26
간 맞추기 / 최희명  (0) 2022.04.26
불돌 / 이승숙  (0) 2022.04.25
돌담 / 김백윤  (0) 2022.04.22
전봇대 단상斷想 / 이용수  (0) 2022.04.22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