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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새우눈 / 한경선

부흐고비 2022. 4. 28. 08:15

바다는 손을 헹구지 못한 채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면서 손님을 맞았다. 무쇠 솥에 불을 때다가 부지깽이 던져두고 뛰어나와 손을 부여잡고 눈물부터 보이던 언니를 닮았다.

갯벌 가까이 있는 바다는 그랬다. 흙과 바람 속에서 뚜벅뚜벅 걷는 사람처럼 꾸밈이 없고 투박했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밴 물이랑을 일궜다. 바다는 온갖 목숨들을 거두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것들을 부추기고 쓰다듬고 다독이느라 분주하다.

인적 드문 산골에 터를 잡고 하루하루를 엮어내는 언니는 때 묻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그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다. 누구를 그립다고 한 적도 없고 삶이 외롭다고 툭 내뱉은 적도 없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품고 눈 끔벅거리는 일 소 한 마리 먹이는 것이 사는 일의 전부인 줄 아는 듯했다. 세상 구경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해도 그런저런 말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없어서 병이 난 어느 날 느닷없이 언니를 찾아갔다. 이미 소문난 대로 사람을 보고는 맨발로 뛰어나와 손을 잡고 눈물바람을 했다. 인사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예 털썩 주저앉아 우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안부도 묻고, 그립고 외로웠노라는 말까지 다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그 질펀한 인사가 민망했다. 학교를 그만 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혼자서 끙끙대면서 야위어갔다. 목 안에 무엇이 돋은 듯해서 말하기도 불편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마음속 가시가 스스로 상처를 낸 것이었다. 그런 가시를 품은 내 앞에서 오랫동안 못 본 사람 하나 찾아왔다고 울음을 퍼내는 모습은 내 안에 고인 눈물을 끌어내지 못했다.

언니의 울음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울음을 뚝 그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나 부엌에 가서 소쿠리와 칼을 들고 나왔다. 그 길로 쑥을 뜯어다 떡을 쪘다. 내가 머무는 동안 왜 왔는지, 얼마나 있다 갈 것인지 묻지도 않고 말없이 밥상에 나물 하나 더 무쳐 내놓곤 했다. 산골 아낙네의 옹이 진 삶을 이제야 쓰다듬을 수 있겠다. 질그릇 같은 삶 속에서도 순박함과 따뜻함을 지켜 사람을 품던 모습이 이제야 눈에 밟힌다. 갯벌을 쓰다듬는 바다를 보니 할머니가 되어 눈물도 마른 언니 생각이 났다.

바다를 보러 갔다가 새우젓 구경을 했다. 사람들은 드럼통 속 새우를 뒤적이며 탱탱한 허벅지와 붉고 선명한 입술과 투명한 피부를 흥정했다. 붉은 꽃 피던 새우의 첫사랑도 여지없이 소금에 절여 오젓이라며 싼값에 넘기고, 알을 품어 키우던 기쁨은 육젓을 만들어 시원하고 칼칼한 본능에 버무렸다. 연보랏빛 여린 꿈은 부드러운 풍미와 맞바꿔 자하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하젓… 불국사 자하문, 보랏빛 새우와 보랏빛 안개,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 닿는 자하문, 진흙투성이 이승과 신비한 저세상이 가리고 서 있는 아득한 문, 뿌옇게 비 내리던 날, 불국사에서 올려다본 그 문을 열면 정말 부처의 나라가 있을 것만 같았다. 여린 새우는 제 목숨 보시하고 자하문 열어 세상을 봤을까. 그날 경주 하늘에선 해탈한 까마귀 떼가 까악 까악 울었다.

뭐니뭐니해도 새우젓은 육젓이 그중 낫다더라. 유월에 잡은 살 오른 새우라야 풍미가 있다더라. 그 말을 믿고 육젓 한 그릇을 샀다. 굳이 찍어 맛을 보라는 걸 마다 했더니 새우 두어 마리를 입에다 밀어 넣었다. 새우는 간곳없고 간간한 바닷물 한 방울만 혀끝에 스며들었다.

새우젓과 고춧가루를 버무려 깍두기를 담갔다. 매운맛도 짠맛도 서로 내세우지 못했다. 태생도 모양도 맛도 제각각 다른 것들이 어우러져 익었고, 시간은 풍미를 저울질했다.

어느 날 무심코 깍두기 한 보시기를 꺼내놓았다. 그때였다. 곰삭은 깎두기 위에 까만 점, 따옴표 같은 작은 점이 보였다. 새우 눈이었다. 이제껏 살면서 새우젓 넣은 깍두기를 처음 먹은 것도 아닌데 왜 하필 그때 내 눈에 띈 것일까. 몸은 다 어디론가 스며들고 눈만 남아 있었다.

아직도 바다를 잊지 못하는가. 끝내 놓지 못한 이름을 따옴표로 새겼을까. 무엇을 그리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일까. 문득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밥상 위를 맴돌았다.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 돌아섰노라, 젊은 날 네게 했던 그 말을 그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염치없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살면서 쏟아낸 빈말들만 깍뚝깍뚝 젓가락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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