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박은정 시인

부흐고비 2022. 5. 13. 07:30

 

박은정 시인
197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창원대학교 음악과 졸업하였다.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밤과 꿈의 뉘앙스』가 있다.

 


 

대화의 방법 / 박은정
평생 인형의 얼굴을 파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는 아이/ 네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내 이빨은 단단해졌다./ 말을 해도 말이 하고 싶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되물어보던 허기처럼/ 형광등은 깜빡이고/ 인형은 얼굴도 없이 던져졌다// 오늘 이 자리,/ 용기가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지만/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앉아/ 손뼉을 치며 웃는다//

나고야의 돌림노래 / 박은정
두 손을 움커쥐고/ 줄넘기를 돌리는 밤// 한 번 두 번 세 번/ 공중으로 떠오를 때마다/ 어제의 파랑이 빛나고// 붉은 개미떼들이/ 땅 속으로 흘러가며/ 너의 아름다운 발음을 통과한다// 나고야,/ 너는 죽었니 살았니/ 스무 개의 입술이 너를 반복할 때/ 우리는 무엇도 간섭하지 않으며 땀을 흘리고// 너의 퍼머넌트 머리칼과 작은 가슴이/ 환영처럼 흔들리면// 나고야,/ 너는 흥미로운 중심부/ 매초마다 변하는 감정 아래/ 서로의 똑같은 표정을 견디는 것// 꽃가루가 흩날리고/ 성급한 여름이 오고 있었다// 다리에 걸린 줄이/ 밤의 한 철을 넘지 못할 때/ 나고야, 이것은 너의 이름이 깊어지는 병// 열뜬 잠의 출구가 열리면/ 더없이 다정한 돌림노래를 부른다// 감정의 바닥도 없이/ 낯선 도시는 어둠을 새기며/ 척, 척, 척,// 꿈에서 추락할 때마다/ 한 척씩 키가 자라는 소리를 지르고// 나고야,/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공중을 뛰면 발바닥이 아파왔지// 어떤 부유의 밤에도/ 젖은 얼굴이 서럽지 않도록// 네 눈썹에 얹힌 꽃잎/ 한없이 투명해진다//

고양이 무덤 / 박은정

내 고양이가 죽으면 어떤 무덤을 만들어줄까/ 밤은 길고 낮은 멀리 있으니까// 죽은 자들의 무덤은 너무 좁고/ 산 자들의 재앙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넓다// 매일 밤을 사라지지 않으려고 뼛속까지 버텼어// 언젠가는 화장터 앞 벤치에 앉아/ 오래 하루를 보냈다// 말할 수 없는 이유들을 잊으려/ 이유 없는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검은 사람들이 나를 지워줄 때까지// 단풍은 붉고 푸르고 흔들린다/ 갈라진 심장을 가진 자는/ 자꾸만 뒤를 본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이/ 유언으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죽은 자들은 견딜 수 있을까// 고양이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밤의 울음을 길게 운다// 망각이 자라는 자리에는/ 풀 두어 포기// 밤새 팽이는 돌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른다//

노르웨이의 검은 황소* / 박은정
손에는 아름다운 유리수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빛들이 돌아선 밤을 불러들였네// 우리는 방치된 천사처럼 손을 흔드네 바람이 부는 노르웨이는 초록으로 빛나고 떠도는 구름 아래 내달리던 천진한 걸음들// 너의 귀에서 흘러나온 잠을 주웠어// 잠들지 못한 검은 황소의 눈물이 꿈자리를 적실 때 우리는 마지막 송가를 불렀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사랑을 했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랑을 했나// 바람이 부는 노르웨이는 나의 고향 사향노루는 먼 곳으로 달아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해준다면 하얀 스타킹을 신고 발바닥이/ 까매지도록 원숭이춤을 출 텐데// 강물이 넘실대는 일곱 개의 시간이 흘러도 발자국에 남은 문장만을 지겹도록 반복할 뿐// 우리는 누구를 위해 거짓을 말했나/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거짓을 말했나// 초록의 노르웨이에 눈이 내리면 검은 황소는 잠들고 칠흑 같은 잎사귀들과 부서진 달빛을 지났지만 나는 내 나이를 잊었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밤/ 이제는 아무도 노여워하지 않는 밤// 남겨진 손에는 아름다운 무리수들// 셀 수 없는 것을 무한히 셀 때까지/ 노르웨이는 차가운 손을 흔드네//
* 북유럽 동화 제목 인용.

복화술사 하차투리안 / 박은정
하차투리안은 유랑을 한다/ 왈츠를 추듯 정글을 턴하고/ 수백 년 동안 사라진 기억을/ 단숨에 기억해내는 유연함/ 하차투리안은 단련되어간다/ 침묵으로 만든 꽃다발을 창에 걸고/ 무수히 오르내리는 밤들처럼/ 앞발을 들고 하차투리안/ 입을 열면 비가 내리고 강이 범람하고/ 떠내려간 사람들이 언덕을 기어오르지/ 당신에게 어울리는 표정은 말문이 막힌 표정/ 그러니까 슬프고 발랄한 침묵으로/ 오늘은 이상한 일들이 많을 테니까/ 귀가 먼 부랑자가 노래를 부른다/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우리의 전사 하차투리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도/ 날마다 비밀을 발설하지/ 하차투리안이 걷는다 두 팔을 흔들며/ 그의 마법이 뚱뚱해졌다 날씬해졌다/ 늑골 속에서 회오리가 분다/ 감정의 무감각과 무기력을/ 유일한 취미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의 입에서 나비가 날아다니고/ 내일 하루도 늙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도/ 생을 되풀이하는 복화술사/ 문득 살아온 날들이 행방불명된다//
* 2010년 《시인세계》 신인상

 

드로잉 / 박은정
사슴을 잡아먹었어요 허기도 없이/ 친구들은 모두 뒷다리를 뻗으며 달아났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용서와 보복의 타란텔라/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태어나는// 당신과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다리에 엉킨 콜타르가 온 몸을 타고 올라요/ 보이나요 내가 가진 그림은 이만큼의 액운으로 가득하죠// 사막의 캔버스 위에는/ 황달 걸린 두 개의 눈알과/ 차이무를 입은 어린 소녀들이/ 흔적도 없이 살육되는 백색 풍경// 한 벌의 곡(哭)을 입어요/ 쓸모없이 아름다운 점괘와/ 바람에 누렇게 닳는 부적의 명도(明度)/ 쓸쓸한 누보로망의 문장을 덧칠하던// 소녀의 함몰된 유두/ 형체를 도려내는 선의 기행(奇行)/ 사전을 펼치면 아름다운 단어들이/흉측한 단어들에게 잡아먹혀요// 죽은 짐승들은 제 눈을 봐달라며/폭죽 같은 울음을 제물로 바치고/ 가죽이 벗겨진 붉은 소녀들이/ 텅 빈 구도 속으로 달아나는 휴일// 가위에 눌려 눈을 뜨면/ 내 복부를 관통하던 당신의 뿔/ 나는 감정도 없이 태어나고 달아나는/낱낱이 지워지는 형체//시작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회유의 몽타주처럼// 다리도 없이 돌아온 친구들이/ 대낮의 어둠과 손을 맞잡아요/ 감각의 공소시효가 끝나는 밤/ 박제된 내가 첫 울음을 터트려요//

합창 시간 / 박은정
지휘자의 붉은 반점이 짙어졌다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겠지 우리는 파트를 나누어 노래를 부른다 소프라노와 알토가 불협하고 테너와 베이스가 제 목청에 넘어갔다 강당의 커튼이 휘날린다 신의 이름을 부를수록 세기말이 즐거웠던 사제처럼 우리는 간절하게 후렴구를 반복했다 지휘자의 얼굴이 신의 얼굴을 닮아간다 한줄기 빛 속에서 구체적이며 입체적으로 신의 얼굴을 본 적 있니? 악보를 넘기는 손들이 바빠지고 목청이 주춤거렸다 그럴수록 화음은 웅장하게 퍼졌다 지휘자의 슈트 자락이 펄럭인다 저 새들은 언제부터 울고 있던 거지? 저, 저 백치들은? 정오가 되자 길고 누런 잎들이 아래로 늘어졌다 입을 벌리면 가슴이 쿵쾅거렸다 높은 곳으로 낮과 밤이 없는 곳으로 창세기의 새가 날아오른다 천상의 노래를 불러야 해 옆구리에서 투명한 날개가 돋아나도록 지휘자의 동공이 커지자 하품을 하던 여학생의 콧등 위로 파리가 앉았다 일곱 번째 날이 지나고 있었다 최초의 고공비행은 실패했다//

풍경 / 박은정
아무것도 아닌 것이/ 풍경이 되는 일은 아름답다/ 회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기도처럼// 가방을 열면/ 너의 손이 담겨 있지/ 의미도 무의미도 없이/ 피어나는 꽃으로// 이상한 유언을 쓰다가/ 부끄러워 살고 싶어질 때// 경계도 없이/ 투명한 공중으로 던져올리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나는 왜 여기에 없고/ 너는 왜 여기에 있는가// 고통스러운 두 사람을 본다// 내가 만지는 네가/ 웃고 있는 풍경//

에스키스 / 박은정
네 얼굴이 빛난다/ 백지 위 모래바람을 맞으며/ 대체로 너는 기억이 없고/ …단호한 표정이 없다/ 내일은 새로운 사건이 올지도 몰라/ 발갛게 익은 사지를 버둥거리며/ 기형의 아이가 하나의 세계를 그린다/ 취기에 저린 다리가 코트의 무게에 끌리고/ 순백의 어떤 속삭임을 가장하는 시간/ 오늘밤 이 천박한 고비를 넘기면/ 우리는 얼마나 진화할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는 어제의 부끄러운 몸이 되고/ 귀를 기울이면 잠든 애꾸눈 하나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 그것은 원 안에서 소스라치듯 놀라는/ 저기, 죽은 새의 부리/ 점(占) 속의 불길한 운명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먼 시간으로/ 모호한 정지를 덧칠하는/ 백색의 구름이 낀 네 눈을/ 적나라하게 벗길 수만 있다면/ 백색의 안쪽은 적색/ 다발의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이만큼의 더딘 색으로 나를 지우렴/ 저를 버린 사람들이 잠에 들면/ 기꺼이 짙어지는 창백들/ 죽은 새의 부리가/ 울음이라는 작은 묘혈을 판다/ 네 구름의 평화가 시작된다/ 맵고 거대한 심장이/ 부풀어오른다//

육식 소녀 / 박은정
마을의 도살장에는/ 아름다운 예수님이 태어나고/ 손에는 열락으로 죽은 새// 오리나무 아래 소녀의 잠은/ 깊고 달다// 모두가 검은색이었고 곧 사라졌지만// 서로의 잔인한 감각을 본받는 아이들이 자라고// 늙은 애비들이/ 제 아이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식성을 닮을수록/ 외로워지는 사람들// 등뒤로 식칼을 돌리자/ 가장 먼저 입을 벌린 자들이 죽음을 맞도록// 더운 숨을 뱉을 때마다/ 소녀는 숙성했다// 식도를 넘어가는 부드러운 육질들// 오랜 식육자들의 창자는 흙빛이어서, 서로의 내장에 고개를 파묻고 저를 울먹였다// 누가 인간적인 급소를 찾아낼까// 푸줏간의 잠이 깊어지면 문드러진 고깃덩이들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마지막까지 마음을 돌려주지 않는 고기는 제 주검으로 아름다워질 것이다// 소녀가 눈을 감고 식칼을 돌린다/ 두 팔을 벌리고 공중으로// 모두가 검은색이었고 곧 사라졌지만// 밤마다 소녀의 입에서는/ 가시덤불 같은 어금니가 자라고//

봄밤의 연인들 / 박은정
월식이 얼마나 길어질까요// 가난한 애정 앞의 원숭이들처럼/ 사랑은 무기력하고 기교는 칼날처럼 빛나던 시간들// 오늘의 잠은 더없이 단조로울 거예요// 절반만 완성된 불행에 광을 내는 이들의 이름을 연인이라 부르자 꽃잎을 수의처럼 입고 뛰어가는 아이들// 모든 것들이 몸을 감춘다 누군가는 사랑의 주기를 꽃으로 피우고 누군가는 이별의 주기를 꽃말로 지우기에// 우리는 하나의 부레만으로도 너무 많이 울었다// 바람도 없이/ 날아오르는 봄밤의 음성들// 어디서 흘러들어 이렇게 뜨거운 귀가 되었나// 꽃이 어둠을 통과하고 어둠이 꽃이 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들 온몸에 꽃을 그려넣던 혼백들이 늦은 사랑을 나눈다//

라벨의 즈음 / 박은정
벼랑은 매일 죽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환영이거나/ 돌아올 수 없는 물결의/ 밤과 꿈 사이// 앳된 너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라벨의 음악을 좋아하니/ 그런 어둡고 갈데없는 영혼들의/ 마지막 레이스 같은 거라고// 한 마리의 새가/ 장미를 물고 투신한다// 사라진 뉘앙스들// 물위에 번지는/ 피의 일렁임을 보았다// 내 검열되지 않은 상상 속에는/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이/ 흉기를 들고 노래하는데// 흩어진 파열음들// 음악은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눈을 뜨면/ 고양이가 잠든 침대// 한없이 가까워지며/ 침묵하는//

녹물의 편애 / 박은정
난청을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자/ 울 때마다 녹물을 흘리는 여자가 되었습니다//모든 소리가 녹이 슬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 나는 불협의 감정을 사랑하고/ 나는 병력의 감정을 사랑합니다// 정성을 들여 돌아갈 곳 없어/ 짐승처럼 제 팔을 물어뜯을 때에도/ 슬픔은 쉽게 편애됩니다// 소리의 어디까지 들어가야 음악이 될까요// 조금씩 밤을 넘어온 탄식으로/ 목단꽃 이불이 젖고 있습니다// 공명되던 음들이/ 초록으로 물들 때까지 움츠리는/ 소리 속의 큰 소리들// 나는 무서워서 자꾸 사랑을 합니다// 여자가 귀를 두드리면/ 허공의 낮과 밤이 흩어집니다// 검붉은 말들이 울음 없이/ 벼랑을 내달립니다//

수련 / 박은정
아침은 붉고 연못은 파르스름했다// 두 다리가 젖을수록 치마는 부풀어 오르고, 얼굴에서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풀어진 이목구비들// 많은 방들이 나타났다 두 무릎을 당기면 사방이 사라지는, 굴절되는 천장의 소리, 검은 아가일 무늬// 너의 손을 잡고 꽃을 꺾었지 산 자가 죽은 자의 모습을 닮고 죽은 자가 산 자의 모습을 닮아가는 붉은 뺨에 취해// 이 야만은 무엇인가요 불은 얼굴을 휘감던 수초들의 이상한 무표정, 문을 두드리면 낯선 인기척이 꿈처럼 흩어지는// 동공을 부수는 한 뼘의 단조로운 빛// 절기를 지나 휜 나무들의 병색이 짙어지고, 손톱의 반달이 사라졌다 불길한 징조처럼// 어떤 인사도 없이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파사(破事)의 주소// 차고 희고 막막한 바람 뒤로, 따뜻한 침대와 아름다운 복사뼈가 흔들리고,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드는 자세로 나는 울었다// 거미줄 사이로 흔들리는 아침// 천 개의 유리로 덮인 꿈을 꾸었다 세상의 끝에서, 물장군의 슬픈 밤을 읽는 사람의 목소리로 또 하나의 이름을 지우려는 자// 꿈에서 깨어나니 나는 없었다// 한없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지나는 물고기들과 평온한 이마를 드러낸 채 흔들리던 뿌리들// 한 마리의 잠자리가 수련 주위를 맴돈다// 손을 내밀면/ 가만히 떠오르는 그 무엇.//

목련 / 박은정
뒤돌아보면 없었다// 이 계절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유배된 두 손을 펼치면// 황홀한 불화/ 황홀한 붕괴// 노래하던 새가 목을 꺾고/ 부드러운 물고기가 초록 거품을 토하는/ 말하자면 세상이 끝나는 줄 모르는 아이처럼/ 목련이 떨어지는 풍경을 본다// 사랑이라는 말을 발음하면/ 서로의 몸을 핥는 고양이// 이곳에서도 나는 아름답지 못했다// 성실하게 성장하고/ 과묵하게 작별할 수 있다면/ 겁 없이 사랑할 수 있을 텐데// 눈을 뜨면 낯선 곳에 앉아/ 숲과 안개를 그려 넣는 사람아//

페이드아웃* / 박은정
오늘밤 엑스트라 행인들의 행렬이 지나갑니다./ 장렬하게 눈을 감는 건 오래된 기억을 더듬기 위한 신호입니다./ 막이 오르면 흑백의 그림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지요./ 잠깐, 가벼워지고 싶습니다. 오늘 밤 오래 허락하신다면/ 망설이던 당신이 담배를 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동안/ 알몸의 각도가 되는 건 시간문제지요. 몸짓의 비주얼이 좋으니까요./ 속임수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토록 점멸하는 불빛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지요./ 광대뼈가 튀

어나온 얼굴이 수줍게 멀어지고 있군요./ 멀어질수록 허상은 선명하게 반영됩니다./ 모든 증후군은 위험합니다./ 출근길 신호등은 막바지에 거룩하구요./ 나는 매일 똑같은 처방전을 받아 적습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수소문하는 동안/

관객들이여, 위독한 추측은 당분간 보류입니다./ 이상하거나 어색한 부분들은 바로 배경이 될 테니까요./ 아, 마지막 대사를 놓친 당신이 오버랩되는군요./ 당신의 수치심이 유머가 되는 경계를 생각합니다./ 망각으로 가는 노래는 모두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 속임수는 아주 간단합니다.//
* Fade Out: 천천히 어두워지며 암전 상태가 되는 것

* 2010년 《시인세계》 신인상

 

숲의 수화 / 박은정
바야흐로 먼 이웃에도 밤이 찾아왔습니다. 도시의 끝은 깊고 고요하여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도 나는 뜨거워집니다. 버려진 달과 구름과 야윈 잠꼬대를 듣는 불면의 밤. 이 계절이 당신을 엿드는 동안 우리의 전망은 숲의 세계로 전향하는 것. 낯선 밀회도 없이 몽타주도 없이 숲을 상상하는 일은 때로 간절합니다. 서로의 이름을 건네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천히 잔상만 남기고 일어서는 사람들. 누렇게 벌린 입들이 웃습니다. 수많은 웃음 속에 공허한 추측이 없었다면 좀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요. 더 이상 당신의 다정한 억양을 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현현을 기록할 것은 이곳에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숲이 범람합니다. 이곳의 대화체는 누구든지 바람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 상상하는 것들은 모두 당신이 됩니다. 바람이 일렁이고 늙은 당신이 알몸으로 울고 있습니다. 모든 잎사귀들이 방향도 없이 곤두서고 짐승의 울음은 내내 고요합니다. 입을 열지 않아도 가만히 나를 발음하는 것들. 새들은 깃털을 버리자 공중을 날고 우리는 말랑한 입을 버리자 태초의 불구를 가졌으니까요. 어젯밤 여우는 불면의 밤을 피하지 못해 가끔 천년을 꿈꾼다는 자백을 남겼습니다.//
* 2010년 《시인세계》 신인상

 

구멍을 엿듣는 시간 / 박은정
그래요, 밤은 커피잔에 가라앉은 설탕처럼 꿈을 남기고, 꿈속 누군가는 던져진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겠죠. 시간이라는 자욱한 안개 사이 초침은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드리고 아, 당신이라는 커다란 어둠 사이 아침이 삐져나오는 소리 밤새 들을래요 자코메티 자코메티, 시간이 엿듣는 소리들이 당신의 표정을 훔치고, 옆방 어머니의 손에는 묵은 시간들 구멍으로 향해 가는 소리, 평생 문구멍을 엿보며 떠는 스릴러물의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다면 자코메티 자코메티, 시간 속으로 떨어지는 구멍을 보아요 뼈대만 남은 당신의 슬픔 따위는 식은 수프처럼 구미를 당기지 않는 것, 웃어요 울어요 나의 자코메티, 어머니의 잠이 깨면 새벽기도를 위한 축음의 손잡이를 당길지 몰라요 언제까지 엿보고 있을 건가요 자코메티, 두려움은 온몸에서 실이 빠져나가는 시간, 자코메티 자코메티, 당신의 얼굴은 죽음을 향할 때만 웃고 있어요 발걸음은 처음처럼 처절하게 그러나 자코메티, 당신의 시간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토사물 같은 것.//
* 2010년 《시인세계》 신인상 

 

납치된 영화광들 / 박은정
돌아봐, 사진 속 너희들을 찍어줄 테니/ 새벽은 바람 없이 모래언덕을 불러 삼각대를 세우고/ 광기 없이 붉은 사진을 연신 찍네/ 셔터에 눈이 먼 얼굴들/ 찍어도 드러나지 않는 빛/ 발기하지 않는 어둠을 향해 몸을 트는 허공은/ 한 장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 깔깔거리며 입을 여는 발랄한 인생들/ 납치된 영화광들의 의욕 넘치는 대사/ 오옷, 우리는 단지 예정에 없던 영화를 보는 것뿐이야/ 곧 시작될 영화는 아름다운/ 질기게 아름다운 빛들의 공포/ 등 뒤에서 덮치는 지문에 몸을 낮추고/ 흔들리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입을 쩍 벌린/ 비명은 지금 포장 중이야/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두려움을 아니?/ 몸의 돌기에서는 달싹한 플라스틱 맛이 나는/ 사르르 감겨오는 혀의 느낌/ 너희들의 이름에 괄호를 열고 새벽 지문을 다는 건/ 우연을 가장한 죽음이 아침으로 오고 있다는 것/ 적요는 흐르는 자막 위 마지막 눈을 뜨고/ 복선 없이 드러나는 영화광들의 침묵/ 돌아봐, 사진 속 웃는 너희들을 찍어줄 테니/ 혼자만 남은 사진 낭자한 붉은 암호들/ 심약한 너희들이 북북 찢어지는구나/ 오그라든 검은 필름 속에서, 오오//
* 2010년 《시인세계》 신인상

 

We Lost The Sea* 박은정
무릎을 꿇고/ 한 세계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밤/ 마음에 드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었다// 이곳에 남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까지/ 서로의 사랑을 저의 불찰이라고 말하며// 이 세계는 끝도 없이 확장되는 나쁜 마음//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물러설 곳 없는 곳에서 히죽거린다//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던 네가 사랑을 말하면/ 선반 위의 책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시력을 잃은 사람이 한눈을 팔 듯/ 서로의 먼 바다를 본다// 그때의 우리는 위인도 아니었고/ 평범한 사람도 되기 어려웠지만/ 까맣게 흐르는 귓속말을 사랑하던 자들// 똑같이 아팠는데 혼자만 우는 사람/ 이건 도무지 공평하지 않잖아// 검은 구름이 리드미컬하게/ 죽은 자들의 무덤을 넘어간다//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다행이었지만/ 언제나 되돌아오는 건 분주한 파도 소리// 거대한 사랑 앞에선/ 서로 난청일 수밖에 없는 것// 한 발짝만 더 들어가자/ 어려운 두 귀가 물결에 풀어질 때까지// 공중으로 떠오르는 파도/ 넘어지면서 쏟아지는 나무들// 우리가 잃은 것은 바다뿐이었을까// 노래를 부르려 입을 벌리면/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혀가 있었다//
* We Lost The Sea : Departure Songs의 곡에서 차용.

링링* / 박은정
나라는 사람의 끔찍함과 낮과는 이율배반적인 밤의 마음과 사람으로/ 태어나 짐승의 울음보다 못미더운 웃음 짓던 날들 사이, 신의 선물처럼/ 여름 바람이 불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고 지나갔다 나는 슬프지 않았고 지낼 만했는데,/ 나를 통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건널목을 지나 버스를 갈아타며/ 나는 자주 열쇠를 잃었고 하릴없이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불시에 들리는 빗소리가 창문에 들러붙었다/ 둘 곳 없는 시선처럼 어색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빗물이 지난한 어제처럼 안쓰러워// 너는 잘 때마다 왜 그렇게 이를 악물고 자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날들이 지나고/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기억만 남았는데/ 나는 괜찮다는 표정만 늘었다// 속수무책 내뱉은 말들이 소문이 되고 진실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공모자였으며/ 뒤돌아서면 모두 배신자들이었지만, 진실은 거짓말보다 항상 아름답지 못했고// 눈앞이 어지러울 때마다 손에 쥐지 못한 것들을 원망했다 줄지어 쓰러지던 야자수들이/ 뉴스 화면에 비췄다 링링이라는 이름의 태풍이 왔다고 했다 두려운 마음이 지어낸 작고/ 귀여운 이름들// 언젠가 오래 불렀던 이름이 있었다// 손안에 굴리면 사랑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흔해서 싫어했던 내 이름을 처음 듣는 이름처럼 불러주던 사람// 아직도 화가 안 풀렸니?/ 태풍이 오려나 봐, 창문을 닫아야겠어// 손을 내밀면 작고 귀여운 것이 손안에 들어와/ 재롱을 부리다 가시덤불을 던져준다// 정적으로 가꾼 정원에/ 불시착한 미래처럼//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른 채/ 신의 선물처럼 흔적 없이 빠져나가는// 약속될 수 없는 마음을 실험한 사람의/ 볕들지 않는 안색이 있어// 나만 아는 예쁜 꽃을 품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이가 흔들렸다//
* 2019년 필리핀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

302호 / 박은정
빗소리가 귓바퀴에 모래알처럼 쌓이고/ 우리는 마지막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이제 악수를 나누며 헤어져야 할 시간, 언젠가 읽다 덮은 소설처럼 시선을 거두고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이럴 줄 알았다면 새로 산 스웨터를 입고 멋진 작별 인사를 연습해 두는 건데// 고장 난 짐승처럼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곧 죽을 듯 일생이 파노라마로 지나가지 멍청한 우리는 입을 벌리고// 아름답구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요상하고 아릅답구나// 의미 없이 혼잣말을 들려주는 일이 좋아서/ 어릴 적 죽도록 오빠에게 맞던 기억이나 동생이 연못에 빠졌던 기억들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 들려주듯// 사랑을 다시 말하기엔 늙었고/ 이별을 다시 말하기엔 지쳤기에// 모르는 사람처럼 각자의 신발을 신고/ 다시없을 다음을 기약하도록// 창밖엔 구름 웅덩이/ 불 꺼진 방엔 모수부호처럼 떠도는 말들// 꿈 없는 눈으로 앓듯/ 자꾸만 이불을 뒤척이는 기분을 아니// 우박이 떨어지고 크리스마스가 오고 그 해 마지막 기도가 잊히면 가엽고 따뜻한 입술에는 못다 한 인사만 남아// 어젯밤 당신은 인간의 말을 버리고/ 짐승의 음성으로 일생을 울어 주었는데// 낡은 액자 속에는 목동과 어린 양들/ 마지막 새해 기도를 올리고// 내가 가진 슬픔은 작고 부드러워/ 두 손이 붉게 물들 때까지// 주여, 우리를 한입에 삼키소서//

우츠보라 / 박은정
너의 이름은 우츠보라. 절름발이 감정으로 겨울을 나는 작고 풍요로운 야생. 세월이 가도 추위는 끝나지 않고 너는 눈보라 속에서 검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눈을 하고 어떤 목소리를 기다리는 우츠보라. 머리칼에서 자꾸 바람이 떨어지고 있어. 왼쪽의 죽음이 오른쪽은 아니라고 위로하는 자들의 뺨이 초라하게 빛날 때. 부질없는 진실을 말하듯 너의 이름을 부르는 메아리들. 이제 그만 손톱에 힘을 빼. 할퀼 수 있었다면 이미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할퀴고 이곳을 떠났겠지. 눈보라는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듯 끝없이 흩어지고.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내 발밑으로 밀려온다. 독한 술을 줄까 독한 담배를 줄까.우리는 꺼진 땅 위에서 자꾸만 부끄러워지고 너의 흰 운동화는 검고 갈 곳이 없는데. 이 걸음을 저쪽으로 옮기면 웃을 수 있을까. 우츠보라는 늙어 버린 표정으로 아름다운 것을 이상하게 말한다. 기어이 살아야겠다고 사랑을 했는데 이미 죽어 버린 사람처럼. 시니컬한 너의 목소리가 눈보라와 함께 녹아내리는 밤. 우리는 단지 마음이 물컹해서 배를 움켜쥘 뿐인데. 괜찮아,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밤이래도. 이제는 벌레의 안간힘만 남은 우츠보라의 눈에서 저편의 내가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

델마와 피크닉 / 박은정
델마, 그를 사랑하는 거니? 그는 타락한 목동이야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부드러운 눈빛과 혀를 휘두르며 심약한 여인들의 가슴을 건드리지 소문에 의하면 그가 머물렀던 마을마다 갈비뼈가 곪은 여자들이 많다니까 목동의 본분은 그 눈빛과 혀로 허공의 선율을 기르는 거 아닌가? 난 그 애를 사랑하진 않지만 아주 아끼지 아낀다는 말에는 손끝에 맺힌 핏방울의 아슬함이 있어// 환풍기가 돈다/ 우리는 단골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델마가 사진을 찍자 누군가 항의를 한다/ 멋쩍어진 델마, 화가 나는 델마, 병신 같은 것들/ 돗자리를 들고 강변으로 가자/ 눈이 내릴지도 모르는 계절을 쫓아/ 시끄러운 것들은 다 없애버리자// 델마와 피크닉을 간다/ 비틀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이러다 갈비뼈가 부러질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뿌연 안개 속을 유유히 질러간다/ 피크닉이라니, 이것 참 근사하지 않아?// 델마, 사랑은 무얼까 글리세린처럼/ 미끌거리며 흘러내리는 게 사랑일까/ 구석에 앉아 부러진 선풍기 날개를 바라보는 게 사랑일까/ 갈비뼈가 자꾸 아픈 건 우리가 부재라는 증거일까// 공원 가장자리에 돗자리를 깐다/ 울퉁불퉁한 자갈이 박혀 있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무수한 허공을 본다/ 델마가 말했다 휴일의 공원 오후는/ 불치병 환자의 미소를 닮았구나// 주인과 산책을 나온 강아지가/ 잔디밭 위를 탱탱볼처럼 뛰어다닌다/ 우리는 식은 김밥을 먹으며/ 검은 강을 바라본다// 누군가 흥얼거리는 소리/ 저문 강물 위로 새가 출렁이고/ 손을 뻗으면 모든 것이 손끝에서 멀어진다// 델마가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너는 꼭 내일이라도 죽을 것처럼 우는구나/ 우리는 갈비뼈에 좋다는 홍화씨를 한 알씩 씹는다/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떠난 것들에겐 굿바이 키스를 날리고/ 이 공원의 강아지에게 남은 사랑을 줘버리자/ 허리가 꺾이도록 웃는 델마, 바라보는 나/ 이제야 우리는 조금 살 것 같다// 델마, 아무래도 이건 꿈속이겠지/ 눈을 뜨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공원에서/ 돗자리도 없이 혼자 강을 바라보는/ 목동의 꿈같은//

구(球) / 박은정
이곳은 미세먼지가 나쁨인 초여름의 빌라 안. 너와 나의 거리는 언제나 일정하게 움직인다. 누군가 다가서면 누군가는 멀어지듯이, 너는 구를 그린다. 구는 찢어진 볼처럼 붉다. 붉은 구는 꼭 붉지만은 않아서 검고 푸른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 속에는 마주앉은 우리가 있다. 그곳을 제2의 행성이라고 하자. 대기로만 이루어진 행성, 사람들의 눈빛으로만 이루어진 행성이라 하자. 이곳에서는 따분한 연습 없이 상상한 것들을 그릴 수 있다. 구는 0이 되고 공간이 되고 유희가 되고 슬픔이 된다. 거울이 되었다가 묘비명이 되었다가 밑동이 되었다가 낯선 비밀로 돌변하기도 한다. 너는 구를 본다. 시시때때로 실눈을 뜨고 하품을 하는, 너는 왼손잡이다. 아직 궁금한 것이 많은 나이이다. 이것은 구이지만 구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지만 우리를 빙자한 구이다. 처마 밑에서 비둘기들이 날갯짓을 하는 동안, 낡은 선풍기가 거실에서 돌아가는 동안, 너는 손발을 늘여 그림자를 채워 넣는다. 작은 네 손이 연필을 쥐고 빛을 지우면 검고 심약한 구는 잃어버린 어제처럼 굴러간다. 구는 당돌하고 구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달라지는 빛 속에서 우리는 어지럽다. 당장이라도 저 끝으로 사라질 것처럼 무모하다. 끝없이 가속페달을 밟는 기분으로, 사막이 출몰하고 태풍이 몰아치는 이 행성을 질주한다. 망쳐질 것들은 이미 망쳐진 세계, 입구와 출구를 찾을 수 없어 서로를 껴안고 숨죽일 수밖에 없는, 이곳은 이름 모를 행성이고 우리는 뿌연 대기 안에서 저녁밥을 먹을 것이다. 집 잃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잠이 들 때까지, 어디부터 그려야 할지 어디서부터 지워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여기 가장 둥근 빛 하나가 책상 위에 있다.//

눈에 박힌 말들이 떠나간다 / 박은정
강풍이 불었다 한다/ 내일은 빙판길일 거라 했다/ 무릎이 잠길 정도로 눈이 쌓였다고 하더니/ 어디선가 들려온 캐럴이 잠든 이를 외롭게 만들던/ 그런 혹한의 밤이었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눈으로 눌러쓰듯이/ 실수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사소한 토씨 하나가 바람처럼/ 바닥에 내려앉아 깊이/ 깊이 자신의 길을 파고 있더란다/ 여기 있는 내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면/ 넌 사지가 쪼그라들어 노망이 날 것이라고/ 안간힘으로 말했노라고/ 그랬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더니/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어도 살 것 같은 기분이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으로/ 백지에 써 내려간 문장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염병할,/ 빌어먹을, 천벌받을 글자들이/ 내 눈으로 들어와 눈을 파먹고/ 마음을 파먹고 그림자를 파먹다가/ 사지가 쪼그라든 내가/ 노망이 들어 사랑을 말했다고 한다/ 죽어서도 사랑을 말하고/ 썩어 가면서도 사랑을 말했더니/ 눈에 박힌 말들이 사방무늬로/ 울음을 터뜨리더란다/ 한 줌, 먹물 같은 눈물이/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어딘가로 가고 있을 거라 한다//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 박은정
여기에 눈동자를 그리면 번민의 짐승이 태어난다 의지도 없이 의지를 능가한 채 뛰어다니다 잠시 눈을 붙이면 불현듯 척추가 길어지고 꼬리가 길어지고 나를 삼키던 것이 도로 나를 뱉어낸다 어디까지 떨어질지 폭죽을 따라 솟아오르다 붉은 눈알을 놓치고 비명을 지른다 이것이 최후의 기억인지 최선의 기억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낭하에 몰려 계절을 따르는 새 떼들을 보았고 세상의 경계를 넘어가는 미욱한 울음소릴 들었는데, 허공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앞니 빠진 몰골로 네가 웃고 있다 눈을 끔벅이면 사방이 찰나의 얼굴, 내게는 천장에 매달린 얼굴이 있다 바닥을 흘러넘치는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은 푸르죽죽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영원을 구걸한다 자신을 꾸짖는 나귀의 자세로, 남쪽을 달라 하면 나는 허허벌판 북쪽을 주고 죄 많은 나를 달라고 하면 내가 주고받은 헛소리를 들려주었는데, 아무리 몸을 둥글게 말아도 사람의 울음이 들리지 않는 것은 이곳이 미완의 세계이기 때문인가 나는 척력이 없는 곳으로 뛰어내렸다 어디까지 떨어질까 넘치는 정신이 광기에 휩싸이고 다스릴 수 없는 마음이 사람의 기원을 의심하도록, 끝도 없이 추락하는 시간들이여, 나는 구원을 위해 달린다 4층에서 4층으로 7층에서 7층으로 등허리가 흠씬 젖을 때까지 달리다 보면 여전히 추문처럼 따라붙는 제자리, 저편에서 심장을 쥐고 드물게 아름다운 세계를 흥얼거리는 이는 누구인가 마지막 입구가 봉쇄된 장소에서 조우한 우리는 누구인가 더 이상 달아날 곳 없는 세계에서 본 적 없는 눈표범이 태어난다 그것의 눈속에 나를 흉내 내는 짐승이 있다 손을 내밀면 나를 집어삼키는 짐승, 응화와 양화를 반복하는 얼굴, 질투에 빠진 신께서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눈앞에서 납덩이같은 비가 쏟아진다 척추가 길어지고 꼬리가 돋아난다 이제 우리의 눈은 어디에 감춰야 하나//
* 왕빙 감독의 다큐멘터리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인용.

우리는 죽기 직전에야 함께 있음을 알았다 / 박은정
소란스런 꿈에서 달아난 밤에는/ 태풍에 떨어진 낙과처럼 자신의 모습을/ 개 짖는 소리에 묻어버리고 싶었네// 뜬눈의 소음들이 난무하는/ 목소리, 그 지겨운 목소리들// 부엌에는 추리소설을 읽는 선한 눈동자가/ 안방에는 스모 경기를 보는 중년의 입술이 있어/ 헐벗은 마음을 가두고도 사료 주지 않는/ 소녀의 뒤꿈치가 절름거리고// 이 축축한 세계에선 누구도 멀리 가지 못하네// 목책 아래 가시풀이 바람을 휘감고/ 침묵 속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지평선 되어/ 마른눈으로 대기를 감싸는 손이 있다면// 가능하다면 필연조차/ 우연으로 가장하고 우연의 무력함으로/ 나는 사람처럼 살아가려 하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애매한 용서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늙고 병약한 피아니스트가/ 마지막 안간힘으로 건반을 누르던 밤// 패배보다 멋진 절망 속에서/ 손 하나를 내밀면 마음 하나가 꺾이는/ 한숨이 있고 그 한숨 속에서/ 몸을 축이는 노인의 알약 같은 안온함// 죽은 노인을 둘러앉은 유령들이/ 코를 막고 다음은 누구 차례일지 가늠해보는/ 그런 짜고 막막한 여름이 있었던가// 곤두선 머리카락이 빗줄기에 젖어/ 어제의 미움도 함께 녹아내리던 날들// 백 번을 헤어지자고 다짐했지만/ 다음 날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여자와/ 테라야마 슈지의 책을 책장에 꽂을 때/ 갑자기 솟구치는 눈물을/ 어쩔 줄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고//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잠든 천사의 깃털을 주우려고/ 시린 손가락에 입김을 불던 믿음과/ 간밤의 이불 속에서 덩굴처럼 자라나는/ 의구심이 두 눈을 가릴 때까지// 이 고독한 전쟁 속에서/ 밤은 누구의 편도 아닌 조악한 신을 향해// 엎드려 눈 감고/ 소리 없는 비명 속에서/ 도시를 건너 도시의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사라지는 이야기라면// 우리의 죄를 묻지 않는 물고기들/ 어제의 슬픔을 나무라지 않는/ 나무들/ 바람들/ 절벽들// 그런데 우리가 함께 본 것은 무엇인가// 물음표를 던지면/ 도미노처럼 눈을 감는//

위험한 마음 / 박은정
그 노래가 끊기고/ 개는 비를 맞고 있었다// 멍청한 것, 아직도 그를 기다리다니// 젖은 몸으로 낯선 곳을 헤맸지/ 아름다운 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배우려고// 치마를 펄럭이던 소녀가 퍽큐를 날리며/ 어린 소년을 유혹할 때// 같은 불행을 사이에 두고/ 너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네// 내가 아는 마음이란/ 부르지 않아도 달려가 흔드는 꼬리 같은 것// 소년과 소녀가/ 운명보다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작은 몸뚱이를 부비면// 우리는 병약한 고백을 혀로 녹이며/ 아침이 올 때까지 취했지// 이것 봐, 의도하지 않아도/ 이 세계의 서사는 꽤 비극적이잖아// 회오리가 나무들을 덮치고/ 나쁜 꿈이 잠든 짐승을 깨우듯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미쳐가는 거야/ 누구도 묘사할 수 없는 표정으로// 예배당의 불빛이 꺼지고/ 까마귀가 떨어진다// 네가 죽는다고 그가 슬퍼할 것 같아?// 백태 낀 창문이 흔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소년과 소녀가/ 교훈을 버리고 서로의 입술에/ 미숙한 사랑을 자랑하듯// 불행을 증축하다 어깨가 빠진/ 마음을 꿈에서도 믿을 수 없었다

수맥(水脈) / 박은정
사악하고 아름다운 눈으로/ 나의 몸을 거닐던 사람// 잠수부는 산소통을 버리고 완성하지 못한 심해의 색에 골몰한다// 붉은 딱새들이 흔들리며 놀던 밤// 돋아난 눈을 감으면 물에 번지는 손금이 있었다// 오늘의 나는 낯설구나// 머리칼이 한 줌씩 빠질 때마다/ 돌멩이는 심해 속으로 떨어진다// 불면의 밤이면 유예된 꿈을 점쳤다// 비문의 구름이 끝없는 장벽을 넘어가는 동안/ 박제된 물결 속에서 눈물도 없이 울음을 쏟아내던// 잠수부는 눈 없는 물고기를 오래 바라본다/ 자신의 죽음을 복기하듯// 누군가 나의 발을 흔들고 있어// 악몽은 장롱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 하루만큼 자라고// 눈을 뜨면 검은 고라니가 죽어나가는 방// 돌아오지 못한 자들의 꿈은 누구의 물거품인가// 전생을 거듭한 한 영혼이/ 기묘한 부처의 표정을 짓는다/

숲과 수첩 / 박은정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수첩이 하나 있다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숲속에 흑과 백이 섞여 흐려지고 있었다 숲과 수첩에 대해 매일 메모를 해둬 오늘은 당신에게 전화를 걸고 내일은 전화를 건 사실조차 잊을 수 있도록 검게 다시 나약하게 희게 다시 막막하게 페이지를 넘기면 낯선 페이지가 나타나고 휘갈긴 번호가 휘갈긴 시간들이 휘갈긴 마음이 휘갈긴 망각들이 온통 가득 차도록 숲은 차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눈앞에 보이는 어둠이 지루해지면 잠이 들테고 잠이 들면 다시 네 꿈을 꿀지도 모르지만 책상은 흔들리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건 허리에 안 좋아 누군가 나를 밀어낸다 저녁에는 눈이 내릴지도 모르고 아니 생각지도 못한 불운이 덮칠지도 모르지만 숲은 검고 나약하고 검고 나약한 것들을 보고 있으면 숲은 젖어간다 숲이 젖으면 얼굴이 젖어들고 두 손이 퉁퉁 부을 때까지 눈을 감고 있으면 숲은 수첩이 되고 수첩은 숲이 되어 서로의 몸에 나무를 그려넣는다 하나의 나무에서 둘의 나무로 바람이 불고 셋의 바람이 부는 쪽으로 개미가 사라지는 오후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버림받는 기분을 아니 대답이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혼자 골몰하는 그네가 있다 유년도 없는 두 발이 해가 지도록 흔들리고 있었다//

거미와 월식 / 박은정
거울에 비친 달을 보았다// 날마다 낮과 밤을 바꾸는 연습을 하고/ 너와 나를 지우는 시도를 하였다// 열심히 목도하고 짓이긴 것들이/ 가끔 꿈속으로 살아 돌아왔다// 월식은 언제 시작되는 겁니까//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매번 새로운 두려움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적정 체온 유지는 중요합니다// 벌어진 입 사이로 거미가 들어왔다/ 목젖에 닿아 꿈틀거리는 그것을 토하려고/ 손가락 넣고 캑캑거리다// 두 눈을 찔끔 감고 삼켜버린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러나 죽을 듯 구역질을 하고/ 사지가 뒤틀리고 이미 죽어버린 듯/ 송장 자세가 되지// 힘을 더 빼야 해요/ 모든 긴장을 늦추고 공기와 하나가 된 기분으로/ 자, 숨을 천천히 내쉬세요// 숨을 쉴 수가 없다/ 저것은, 이것은, 이 모든 것은/ 부질없지만 해롭고 나태하다// 누군가 개를 끌고 온다/ 침 흘리며 우는 모습은/ 꼭 네가 그리는 흉조凶兆 같다// 비둘기들이 나무에 머리를 박고/ 떨어진다 저 의지 없음의 존재가 너처럼/ 무심코 내게 오던 공원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기분 따윈 없이/ 벤치에 누워 긴 잠에 빠진답니다// 사라지기 전에 기어이 글썽거리는 빛// 너는 누구에게 보여주려 했을까/ 그 차갑고 부드러운 입김을// 입을 벌리면 알을 슨 거미가 스스로 거미줄 치고/ 자신의 무덤을 준비하고 있다// 모두 누워서 하늘을 본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라도 될 것처럼// 우리는 실감나지 않는 서로를 껴안고/ 빛의 가장자리부터 삼켰다//

영원 무렵 / 박은정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말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았다// 처방전을 주고/ 색색의 알약을 삼키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선생님, 저는 이미/ 잃을 것도 없고 얻고 싶은 것도 없는/ 시간들을 투약한 지 오래예요// 눈 내리는 밤 제설차 밑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고양이// 어떤 자책도 없이/ 자신의 잠을 모두 쏟아 내는//

희박해지다 / 박은정
그는 잠들어 있다. 누구도 간절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삶이란 삶은 모조리 잊은 듯이. 그는 잠깐 슬펐거나 기뻤던 기억을 떠올린다. 어렴풋이 사라져가는 사물들 사이에서. 냉장고처럼 거대한 몸을 뒤척이며. 그의 자취는 나날의 후회로 만들어진 무감하고 단단한 습성 같은 것. 그러니까 그는 자취를 찍는 사람이다. 아니 무언가를 회의(懷疑)하는 사람이었다.//

까마귀를 훔친 아이 / 박은정
눈앞의 검은 빛을 본다// 먼 데서 오는 음악에 맞춰/ 자신의 눈을 가린 채로 춤추는 아이// 아이의 꿈은 댄서였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빛을 향해/ 솟구치고 전진하는// 대화가 없는 여름이었다/ 아이는 난간에 상체를 내밀고/ 낡은 회벽처럼 말라간다// 붉은 빛을 부리에 물고/ 전신의 밤을 춤추는 실루엣// 죽도록 아름답다는 건/ 구분되지 않는 우리를 말하는 걸까// 두 팔을 벌리면 까만 눈알을 굴리며/ 부풀어 오르는 미궁(迷宮)// 너를 사랑해서 훔쳤어/ 그건 내 죄가 아니야/ 빛의 실수일 뿐// 밤마다 머리맡에 앉은 그림자가/ 잠든 아이의 멱을 쪼아댄다// 핏빛 어둠이 선명해질수록/ 제자리에서 몸짓 하나가 생겨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춤이었다// 죄를 지은 여름이었다/ 풍경이 사라진 여름이었다// 먼 데서 오는 음악만이 남아/ 아이를 춤추고 있었다//

라니아케아 / 박은정
파란 공이 울타리를 넘어/ 해변으로 굴러왔다/ 이것은 정체불명의 행성// 사라져 가는 낙원을 지나/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국의 목소리들이/ 야자수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점박이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모래사장에 묻어 버린 말// 라니아케아,/ 은하계를 유영하는 마음// 어제의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오늘의 걸음이 어디쯤에서 끝나는지//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을 얼굴과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빛의 신앙으로 걷는다// 이곳의 속도는 인간의 눈으로 가늠할 수 없어/ 더욱 아름다운지도 몰라// 무리를 벗어난 행성/ 해변을 가로지르는 무지개/ 검게 탄 피부와 흩어지는 웃음들// 마음은 모래알처럼 사소하여/ 작은 과오도 놓치지 않는 짐승이다// 오늘이 관측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상의 미물이 사라지고 불가능한 행성이 도래하여 모두의 얼굴을 가릴 때까지// 태양 아래 반짝이던 네가/ 파도 속에서 사라진다// 라니아케아,/ 고향으로 돌아가기엔 늦은 시간// 누구도 공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지친 거북들이 모래사장을 기어 다닐 때/ 알 수 없는 빛이 그림자를 비출 뿐//

눈에 박힌 말들이 떠나간다 / 박은정
강풍이 불었다 한다/ 내일은 빙판길일 거라 했다/ 무릎이 잠길 정도로 눈이 쌓였다고 하더니/ 어디선가 들려온 캐럴이 잠든 이를 외롭게 만들던/ 그런 혹한의 밤이었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눈으로 눌러쓰듯이/ 실수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사소한 토씨 하나가 바람처럼/ 바닥에 내려앉아 깊이/ 깊이 자신의 길을 파고 있더란다/ 여기 있는 내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면/ 넌 사지가 쪼그라들어 노망이 날 것이라고/ 안간힘으로 말했노라고/ 그랬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더니/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어도 살 것 같은 기분이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으로/ 백지에 써 내려간 문장들을/ 다시 읽어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염병할,/ 빌어먹을, 천벌받을 글자들이/ 내 눈으로 들어와 눈을 파먹고/ 마음을 파먹고 그림자를 파먹다가/ 사지가 쪼그라든 내가/ 노망이 들어 사랑을 말했다고 한다/ 죽어서도 사랑을 말하고/ 썩어 가면서도 사랑을 말했더니/ 눈에 박힌 말들이 사방무늬로/ 울음을 터뜨리더란다/ 한 줌, 먹물 같은 눈물이/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어딘가로 가고 있을 거라 한다//

허깨비의 집 / 박은정
허깨비들이 사랑을 나눠요 모빌이 반짝이고 딸랑이 소리가 들려요 아이는 보이지 않아요 이 집에 가장 오래 머문 햇빛이 그들의 그림자를 감싸요 이상한 건 내가 그 집의 주인이라는 거예요 나의 의자가 있고 나의 침대가 있지만 나는 없는 집에서 그들은 서로의 몸짓에 열중해요 일주일에 한 번 화분에 물을 주고 오지 않는 우편물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집의 비밀에 대해 속삭여요 나를 닮은 촛농 같은 얼굴로 사람보다 더 진짜 사람처럼,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종이접기를 해요 외로운 건 아니었지만 밤은 길었으니까 날씨를 만들고 천재지변을 만들고 실패한 마음을 만들며 밤을 지새우곤 했지요 그들이 잠이 들면 가벼운 점퍼를 걸쳐 입고 해변을 달려요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살아있다는 것조차 거짓말처럼 느껴지니까요 어쩌면 나는 그 집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르죠 내 아이는 이 집을 떠난 지 오래고, 어떤 이도 나를 찾지 않으니까요 언제나 그렇듯 내일은 내가 모르는 일들이 그들의 집에서 벌어질 테고, 오늘의 내가 아는 일이란 해변의 파도가 허리만큼 오르내리는 일뿐, 여행객들이 폭죽을 터뜨리는 모래사장에 누군가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그려놓아요 밀려가는 파도에 조금씩 무너지는 형체,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달아나야 해요 내가 보이지 않는, 나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허리만큼의 파도가 밀려오고, 허리만큼의 파도가 밀리면, 나를 닮은 발자국이 사라져요 두 팔이 흩어져요 이제 나는 얼굴만 남아 우는 사람, 눈앞에 있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심정으로, 하품을 내쉬면 드러나는 모래의 집, 이 집에는 허깨비도 사랑도 없지만 매일 이곳에 남아 두리번거려온 나는 누가 버리고 간 낙서인가요//

불황의 춤 / 박은정
태양아 나의 얼굴을 앞질러 가는 짐승아/ 나는 너와 반대편으로 눈을 감고 어둠의 춤을 추리라// 어깨를 치고 달아나는 안개/ 세계는 정신의 불황으로 흩어진다// 노멘은 자신의 신음을 낱낱이 복기하며/ 낡은 피아노를 친다 절룩거리며 이어 온 음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이제껏 자신의 얼굴도 모르고 살았다니// 유년의 표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거울/ 아무리 딲아도 웃고 있는 얼굴은/ 몇 겹의 울음보다 슬프다// 간밤의 꿈이 크게 입을 벌리고/ 어린 노멘을 희롱하며 폭소를 터트리면/ 어머니는 노멘의 얼굴을 가만히 덮어 주었다// 꿈마다 불황이 찾아오면 너는 살아 있는 인간/ 춤을 추어라 수천개의 얼굴로// 손톱을 물어 뜯으며 잠든/ 노멘의 얼굴이 아침까지 말게 웃고 있다// 오른뺨을 맞으면/ 시린 왼뺨을 내어주듯이// 우리를 끝으로 이끄는 자들의/ 아름다운 이빨 앞에 엎드려// 자신의 팔을 깨물며/ 슬픔을 참는 어린 노멘이 여기 있다//오 늘처럼 이상한 밤이면 모르는 이웃들을 초대하여/ 세계의 지리멸멸한 친절을 애도하리니// 나의 생은 끝나지 않는 실폐처럼/ 공중으로 떠오르다 무너져 내리는/ 불황 또 불황의 춤// 이곳은 반목의 세계/ 나는 야윈 목젖을 흔드는 배우처럼/ 딱 하루만 울겠습니다// 그의 웃고 있는 얼굴이 떨어지고/ 노멘은 없는 사람// 이제 이웃들은 실어증에 걸린/ 고독한 늙은이처럼 말이 없다// 이것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어느 광대의 잃어버린 전설// 어린 노멘이 불을 끄고/ 없는 얼굴을 하나둘 배웅한다//

프리즘 편지 / 박은정
진눈깨비가 내리면 잠이 들까// 삼각 프리즘을 들여다보던 아이는/ 아직 그곳에 있어// 근사한 빛이 아이의 두 눈을 채울 때까지/ 나는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쓴다// 편지에는 인상적인 책의/ 한 구절이 쓰이고// “늙는다는 것/ 내 앞 말끔히 빛나는 테이블에/ 선이 부드러운 숟가락 하나 놓이고“*// 하루하루가 내가 받는 질문이라면/ 색색의 실을 엮어 보내고 싶은 마음// 시치미를 떼고/ 나는 괜찮아요 잘 살고 있어요/ 모호하고 머저리같이// 안방에는 목양하는 개/ 몰리는 양들이 텔레비전 화면을 채운다/ 한 마리의 양도 셀 필요 없이//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면/ 이렇게 참담한 기분은 들지 않을 텐데// 밤마다 바싹 당겨진 감정은/ 턴테이블 위를 돌다 스스로 튕겨 나가지// 술에 취한 친구는 말했지만/ 죽음을 앞둔 늙은 여가수의 노래가/ 내 귓가에서 반복되고// 가끔 지하철 층계참에/ 주저앉아 잠든 사물이 될 때도 있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분노한 신이 청테이프로 입을 막아도/ 새어 나오는 숨소리는 막을 수 없어// 나는 죽음 앞에서 살아 있고/ 살아서 죽음을 한 귀로 엿듣는 아이// 어제는 비가 왔다더니/ 오늘은 가로등 밑 진눈깨비 날린다// 혼자만 남은 집에 흔적처럼 남아/ 친구가 내던진 유리잔을 치우는데// 누군가 나를 꿈속으로 몰아넣고/ 들려주는 멍울진 심장 소리// 어린 내가 프리즘을 손에 쥐고/ 번민하는 꿈들을 가로지른다// 한 줌의 빛이 주문처럼 자라나고// 채우지 못한 편지에는/ 오색의 태피스트리를 짜 넣는 밤// 세상에 쓰인 적 없는 편지가/ 어둑한 당신에게 도착할 것이다//
* 페터 한트케의 「위협적인 시」 중에서 인용.

희준과 나는 어떤 관계였을까 / 박은정
여기에서 먼저 나는 미안함이 앞선다. 희준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지만 어떤 말부터 얹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희준을 생각하면 시에 투신하고자 하던 열정적인 마음이 떠오르고, 그와 동시에 순수하고 다정했던 사람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그는 이제 눈앞에 다가온 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군분투하는 사람 같았다. 항상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던 그의 열망을 보면서 나는 부럽고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희준을 생각하면 그 무엇보다도 그와 나눴던 다정한 대화, 그리고 몇 번의 쪽지, 언니가 생겨서 참 좋다는 말,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앞날을 기약하던 시간들이 먼저 떠오른다. 시를 사랑해서 시인까지도 보듬어 주고 사랑했던 희준, 얼마 전 ‘희준과 나’라는 낭독회를 김민정, 손미, 서윤후 시인과 함께했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시를 읽으면서 왜 가슴 한쪽이 저려 오는지, 다정한 희준이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우리를 보고 있는 듯해서, 관객 쪽을 쳐다보면 고개 숙인 사람 들이 다 희준 같았다. 아니야. 희준은 나비가 되었을 거라고 했으니깐. 흰 빛과 올리브빛이 섞인 나비가 되어 세 을 구경하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낭독회에 참여하길 잘한 것 같았다. 요즘은 밤에 잠이 안 올 때마 다 그의 첫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을 펼쳐 읽는다. 그의 예민하고 강렬한 문장들이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팔랑거리며 가슴에 남는다. 이 문장들이 더 나아가서 그와 함께 웃고 울어야 하는데, 이제는 희준이 먼 곳에 있으니, 그의 아름다운 문장들이 바람을 타고 더 멀리 움직일 것이다. 희준의 문장을 읽으며 희준을 생각하고 희준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시를 읽으면, 희준이 같이 읽어 줄 것만 같다. 언니, 이 문장은 이런 느낌으로 썼어요. 어때요? 그러면 나는 "어. 희준아. 이 문장 너무 너 닮았다. 너랑 똑같애. 하하”라고 해줄 것이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면서 희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질지 모르지만 여기, 희준의 문장이 시집에 남아있으니, 장하다. 다행이다. 고맙다. 희준이 고스란히 담긴 이 시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니.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들의 마음에 남아라, 나는 혼잣말을 해본다. 꼭 희준이 옆에서 듣고 있을 것만 같아서.//

서기의 밤 / 박은정
밤이었다 낮이라고 하기엔 우울했으니까 부모를 버리고 슬픔에 빠진 아이의 얼굴을 아름답다 느낀 밤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없을 미움에 몰두하느라 자신의 나이를 잊어버린 눈빛이라 말해도 좋을 밤이었다 그날을 우연치 않게 우연으로 점철된 하루였다고 너는 말한다 그리고 나는, 너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너는 언젠가부터 취해 있다 느슨한 혀로 알 수 없는 문장을 발음하느라 자주 흐느낀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했더라 기억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느라 생긴 주름을 나는 어떻게 받아써야 할지 몰라 볼펜을 돌린다 시계 방향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다 보면 끝과 시작이 사라질 테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 멈추거나 추락할 때도 있으니까// 너는 한 문장을 바라보고 있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손끝이 부스러지고 부서진 문장이 슬로모션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 기타라고 발음하자 기타, 네가 기타라고 말하면 나는 같다라고 쓰고 기타라고 쓰면 너는 기다 기어가다 기다랗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너의 혀는 길고 나의 손가락은 마디가 없다 입속의 침묵과 망각으로 만든 문장을 나열 하면 나열한 문장들이 저들끼리 분란하도록, 우리를 지나친 시간이 밤의 무한으로 나아가도록// 그러니까 어제는 밤이라 말해도 좋고 새벽이라 말해도 옳다 모두들 절반쯤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너는 여전히 미간을 좁히며 무엇을 잊었는지 생각한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볼펜을 돌린다 창밖에는 편백나무 숲이 보인다 한 문장만 반복한다 반복하던 날들을 사랑이라 불렀던 적이 있다.//

일기예보 / 박은정
여자는 담배를 피우며 잠깐 창밖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눈이 아닌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러나 밤늦게 눈이 온다는 예보를 기억해 내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밤에 눈이 온다는데 뭐해? 하지만 창밖엔 눈이 아닌 비가 내리고 있었고 결국 비는 물러나 숲으로 갈 것이지만 여자는 여전히 내리치는 빗줄기를 젖어든 길목들을 보고 있을 것인데 우연으로 중첩된 신이 있다면 그리하여 문득 눈이 내리고 그가 문을 두드려 여자가 믿음의 입술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비는 계속 내리고 여자는 다시 담뱃불을 붙였다 빗줄기는 피로하고 무연하고 모색하면서 건물 사이를 헤집어 다녔다 여자는 무언가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 창문을 여닫는데 자정은 멀었고 창틀은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때 문득 여자는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무엇에서 깨어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막연하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뿐이어서 그런 무지한 기분으로 일기를 쓰고 싶었는지 모른다 첫 문장은 비가 내렸다고 썼지만 그 이상은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금 창밖을 보았다 눈은 여전히 내리지 않았고 빈 방이 빗소리로 가득 찰 때가지 여자는 비라고 썼다가 다시 눈이라고 고쳐쓰기를 반복했다//

몸주 / 박은정
감당할 수 없는 밤을/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나며// 어제도 오늘도/ 너를 아끼고 너를 만진다/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내가 모르게 한 일도 아니다// 창밖에는 여고가 보인다/ 여고에는 벤치와 운동장이 있다/ 너는 그것을 울렁이는 여백 같다며/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말한다// 너의 방에는/ 크고 작은 액자들이 있다/ 플라타너스 잎이 기울어진 길 사이/ 무언가를 잊은 얼굴로 서 있는 사람// 소중한 것들을 잊었다/ 처음부터 잃은 채로 태어난 거다/ 미련처럼 복통이 온다// 비탈진 프레임에서는/ 두 손이 땀에 젖도록 찍어도/ 자꾸만 빛 멍울이 번졌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찍을 수 없잖아/ 사라지려는 순간을 어루만지듯/ 흐릿한 피사체의 너를 만진다/ 그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하는 일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캐럴이 흰 눈처럼/ 방 안으로 흘러 들어올 때// 어린아이처럼 뾰족한 입술로/ 내 목덜미를 물어뜯는 꿈// 핏물이 떨어지는 목을 쥐고/ 눈을 뜨면 운동장에는 교복을 입은/ 환호와 탄성이 뒤섞인 소녀들// 등 뒤의 네가 빛을 훝어진다// 암막 커튼을 내리고/ 어둠에서 다시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건네며 인사를 나눈다// 그걸 운명이라 말하면/ 다들 혀를 내두르며 도망쳤다//
* 몸주: 무당의 몸에 처음으로 내린 신. 무당은 그 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신다.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정인 시인  (0) 2022.05.16
주병권 시인  (0) 2022.05.14
서봉교 시인  (0) 2022.05.12
정선우 시인  (0) 2022.05.11
나석중 시인  (0) 2022.05.1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