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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조정인 시인

부흐고비 2022. 5. 16. 07:30

조정인 시인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 얼마예요』,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과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등을 썼다.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 제14회 지리산문학상, 제1회 구지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웨하스를 먹는 시간』으로 제9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을 받았다.

 



사과 얼마예요 / 조정인
사과는 사실 전적으로 서쪽입니다 사과 속에 화르르 넘어가는 석양, 석양에 물든 맛있는 책장들 산산이 부서지는 새 떼 산소통이 넘어지고 쏟아지는 바람 호루라기 소리 길게, 길게 풀리는 붕대 그리고 구토, 촛불이 타오르는 유리창 당신의 우는 얼굴이 엎질러집니다 시럽이 흐르는 접시들은 누가 난장으로 던집니까 안개의 표정으로 몽롱해지는, 긴 손가락 사이 담배 연기 욕조 속의 정사는 어땠습니까 여자의 검정 유두에 묻은 흰 구름이 정오를 지나갑니다 뒹굴뒹굴 북회귀선을 넘어가는 태양의 휠체어 인류라는 무정형의 얼굴에 던져진 원죄의 돌멩이 퍽! 칼날이 지나가는 북반구 당신은 여전히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선호합니까? 사과 아닌 사과도 없지만 사과인 사과는 더욱 없지요 서쪽 아닌 서쪽도 없지만 서쪽인 서쪽은 더욱 없는 것처럼 봉쇄된 우물…… 적막이지요 온몸이 커튼인 깜깜한 밤이 저기 옵니다 덜컥이는 틀니 아니, 사과 얼마죠?//

화병의 둘레 / 조정인
불어난다, 물결친다, 범람한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둘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장미는 어디서 오나 노래가 오고 노래는 넘쳐서 아물 새가 없지만 그래도/ 넘치는 노래 당신도 노래를 보태러 왔다 울먹이는 둘레// 허공이 불어난다, 물결친다, 구름이 몰려오는/ 오늘, 배달된 장미는 귓불 붉은 어린 구름으로 빚었다// 구름의 낱장들이 희미하게 찢어지며 배열을 이루는 이 일은/ 쓸쓸이라는 언저리가 생기는 일 울먹이지마, 꽃잎으로 분류된/ 찢어진 구름아, 찢어진 공기야// 공기가 너풀너풀 기침을 하네 분홍 목구멍에서 비린내가 풍기네/ 서둘러 집을 그려줘야지// 한 다발 허공을 꺾어 누가 흰 사기 봉분에 꽂았나, 3일간 치르는 창백한 밀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들의 조문이 하염없는//

깨진 화분 / 조정인
두 송곳니 사이 흰 아랫니가 촘촘히 박힌/ 턱뼈만 남은 고양이를 화분에 심었다// 무너진 폐가 같은 토분을 안간힘을 다해 그러안은/ 메마른 흙에게 고양이를 맡겼다// 인적 없는 그곳에서 녀석은 대체 어쩌다가/ 언제부터 그 지경이 됐을까// 들판에 흩어져 덜그럭거리던 짐승의 뼛조각들이 모여들어/ 골격을 이뤘다 서풍이 비를 몰아와 근육을 입혔다// 깨진 화분 틈서리에서 야옹…… 울음이 새어나왔다/ 발톱도 새어나왔다// 머릴 찾은 고양이가 두 앞발에 힘을 주어 흙을 딛고 일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귀를 털고 힘껏 뛰쳐나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찬찬이 나를 뜯어보았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요?// 젊은 망자의 미려한 이마에 꽃을 뿌리고/ 느리고 낮게 영가를 불러주기에 좋은/ 봄날 오후// 화분이 붉은 꽃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키스 / 조정인
그때, 나는 황홀이라는 집 한 채였다// 램프를 들어 붉은 반점이 어룽거리는 문장을 비췄다 인화성이 강한 두 개의 연료통이 엎어지고 하나의 기술이 탄생했다 두 점, 퍼들대는 얼룩은 일치된 의지로 서로에게 스미었다 무풍지대에서도 불꽃은 기류를 탔다 불꽃은 불꽃을 집어삼키며 합체됐다 불꽃형상을 한 혀에 관한 속설이 꿈속에서 이루어졌다 한 줄, 문장이 타올랐다 나는 심연처럼 깊게 타르처럼 고요하게 끓을 것이다//

슬픔의 문수 / 조정인
허리께에 닿는 낮은 대문, 집둘레는 빨강 노랑 자잘한 꽃들로 가꾸어져 있다 떠오르다 가라앉곤 하는 섬 하나, 심하게 다리 저는 남자가 그리로 가더니 한참을 구겨앉는다 고개를 꺾고 꽃을 들여다보는 어깨 위로 투명한 얼룩 같은 햇살이 어룽진다 나는 남자가 일어서 멀어질 때까지 먼발치에 기다린다 그 자리로 가 앉아볼 요량인데 망설이다 그만둔다 그의 슬픔은 문수(文數)가 커서 내게는 아무래도 헐렁할 것 같다 한 꽃나무가 한 꽃나무를 위해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이상하게 절뚝이며 길을 재촉해갔다//
* 이상 '꽃나무'에서 인용

버찌, 혹은 몰락 / 조정인
꽃, 이후// 바람을 선율로 바꾸는 자의 손가락이 빠르게 스쳐 잎사귀를 일으켰다/ 이마가 서늘했다 악보 한 장 몸속 찬물 같은 어딘가로 깊숙이 떨어졌다// 젖은 악보를 짚어가다 열매를 열애로 오독했다 잎사귀 사이/ 버찌가 얼굴을 붉혔다 봄날은 그렇게 번졌다// 나는 당신께 옮아가 무수히 흩날릴 것이다/ 다 털릴 것이다 소거될 것이다// 사랑의 정점을 몰락으로 말하는 나무// 스스로 혹독하여 스스로 단두대를 세운 나무 거뭇거뭇 낭자한/ 혈흔을 남겼다// 버찌, 혹은/ 몰락을 밟으며 나무 아래를 간다, 사랑의 희미한 기원을 더듬어// 여기서 사랑의 과원은 얼마나 먼가, 그곳에 당신이 있기는 한가//

나무가 오고 있다 / 조정인
나무의 월식(月蝕) 지나 우리는 겨울을 통과했다// 나무 안에 펼쳐진 백사장으로 물 들어오는 소리 아득한 잔설(殘雪)의 날들 지나/ 기억의 잠복기를 마친 나무의 미열을 누가 꽃이라 불렀나 우레의 마른 울음이/ 꽃눈에 닿기 직전, 날개를 퍼덕여 착지한 흰 빛에서 태어나 점차 분홍으로/ 접어든 시간을 벚꽃이라 불렀나// 봄날의 대부분을 나무에 기대 보냈다 나무는 방금 도찯한 연푸른 저녁을/ 흐린 오후에 잇대는 일을 묵묵히 수행해갔다 그것은 망각 속으로 스며든/ 기억의 회로를 제 몸에 새겨놓는 일 나이테를 되돌리면/ 현악사중주의 음색이 느리게 풀렸다// 나무는 그때 초신성을 겪는 한 그루 늙은 별// 어제는 나무 속으로 사라지는 시간을 따라가 아무 기다림도 없이 전생의/ 한 때 같은 꽃그늘 아래 우두커니 앉았었는데 어느, 뱀처럼 슬프고 사슴처럼/ 향기롭던 한 시절을 실은 운구가 나무를 한 바퀴 돌고 나가는 거였다/ 나무가 저마다의 망각 안에 환하게 깨어 불타는 사월// 오늘은 벚나무 한 그루를 보내고 왔다 망각을 되짚어 가려는 듯 스스로 일으킨/ 폭설 속으로 멀어지는 나무 이 거리는 도열해 있는 가로수의/ 기억과 망각의 힘으로 계절이 발생한다// 저기, 또 다른 분홍이 기미를 데리고 나무가 오고 있다 행려환자처럼/ 다리를 절뚝이며 혹독한 기다림으로 가슴의 절반이 사라진/ 자귀나무 한 그루//

그 / 조정인
1/ 그.와 그의 이미지. 사이에는 쓸쓸함이라는 벌판이 있네/ 돌연 여자의 복판에 허공이 뚫리더니 벌판으로 가 걸리었네/ 여자에게서 뉘엿뉘엿 하늘이 비쳤던가 찌르래기 울음소리 들렸던가/ 그의 이미지.는 여자가 사는 집이 되었네 린넨천으로 된 낡고 부드러운 집/ 여자가 그곳에서 일용하는 양식은 햇살과 그늘 조금/ 그것은 다른 벌레들이 쓰는 만큼이면 족했네/ 쥐며느리가 등허리에 오소소 햇살을 받고 마루틈새를 기어가네/ 아휴, 귀여운 것 하마터면 손바닥에 받쳐 젖무덤사이에 넣을 뻔 했지// 지붕 위로 키 큰 해가 서뿐 내려와 안마당을 거쳐 곧장 안채로 들어섰네/ 해가 만지는 모든 것은 햇살이 되어 반짝이고 지즐대기 시작했네/ 그.라고 여자가 입을 열자 피아노가 난 본시 들판의 바람이었다구, 라며 중얼중얼 울었고/ 수돗물이 떡갈나무 잎사귀에 뛰어내린 최초의 빗방울은 나였다구, 라며 우쭐대기 시작했네/ 깔깔대며 향나무숲으로 내달리는 4B연필을 불러 세웠지 거기 서!/ 여자가 머리채를 틀어 올려 은세공품 빗핀을 반달처럼 걸었네// 벌판 끝에선 그.가 쓰는 치약냄새가 나고 햇살의 모포에 싸인 집이 아련아련 기어가네//
2/ 빛과 소리는 그늘로 가 지난날이 되고싶네 그늘은 추억이 움트기 좋은 모판// 집이 우물처럼 깊었네 우물 안은 모짜르트가 가득 차 오르네/ 집의 눈이란 눈에는 그늘이 고이네 집은 그늘에 잠긴 자귀꽃이 되었네/ 그늘은 사위를 적시고 벌판으로 흘러가네 쓸쓸한 순례/ 그늘이 적시고 간 모든 것은 그늘이 되네 풀포기라는 이름의 나무라는 이름의 그늘/ 집 앞 전나무 꼭대기에 저녁새, 라는 그늘이 날아 앉네/ 저녁새가 그의 이미지. 웅덩이에 들어앉아 알을 품는 여자를 내려다보네 봉인된 그./ 그.와 교신이 안 되네 저녁이란 미궁 쪽으로 여자의 어깨가 사르륵사르륵 허물어지네/ 그곳은 모든 사산된 시간들이 흘러가는 곳 혹 시간의 사금들이 쌓여있는 곳?// 여자가 풀씨를 털 듯 치마를 털고 일어서 방마다 전등을 켜네/ 어둠 속으로 텀벙 불빛 떨어지는 소리 화아 풀씨가 꽃 여는 소리/ 여자의 미세한 움직임 소매 끝에서 쩔렁쩔렁 열쇠소리 들리는 그 집은 한 그루 사과나무/ 추억 두 볼이 발갛네// 지평 위 집들이 앉거나 서거나/ 제각기 다른 이름의 추억이 싹 튼 창문을 이고 가물가물 떠 가네/ 벌판 끝에서 울음 짧은 아이처럼 전화벨이 울리다 그치네//

문신 / 조정인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믐 / 조정인
검은 달빛 아래 나는 생의 기초에 등을 기댄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잔병치레를 한다// 어둠이 툭툭 실밥 터질 때/ 머리 위 하프 뜯는 희고 긴 손가락을 상상했다/ 그것은 백양나무 그림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껍질은 감자를 더 이상 가둘 수 없다, 던가 하는―해빙기의/ 많은 것들이 달의 댓돌 밑에서 기어나왔다// 빛을 더듬는 수많은 섬모에 싸인/ 발아기의 감자는 더는 식물이 아니다/ 싱싱한 독이 고인 턱을 들어 시간의 기슭을 기어가는/ 다지류 곤충의 표표한 그림자// 종양의 신열 속에는 진초록 눈썹 한 낱이 묻혀 있다/ 은밀하고 재빠르게 진행되는 음모의 전모/ 살아있음의 비밀한 무늬/ 감자의 전신이 끓고 별자리의 기미가 푸릇푸릇 떠올랐다// 그믐, 빛과 어둠에 걸쳐진 실낱의 눈썹 밑/ 눈 속에서 펄럭, 개기월식이 이루어지는 사이/ 감자가 구근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고/ 백양나무 마른 가지 위 반뜩, 소리 한 음(音)이 일어섰다//

하수도 연가 / 조정인
심장으로 피를 되돌리는 건 발이다/ 대부분의 날들은 발의 연가에 귀먹었다// 목젖 밑까지 설움이 차 오르는 날/ 머리를 감다가/ 물이 얼마나한 위무의 큰 얼굴인가를 들여다 본 자/ 대야 속으로 더운 눈물을 빠뜨려 본 자// 이제 들어 봐, 쿨쿨 토하는 밑바닥 노래/ 고해소 사제의 캄캄한 방처럼/ 지하로 열린 저 환한 핏줄/ 네가 흘려버린 것들 주워 담는 대로/ 세차게 빛으로 달려가는 거대한 세탁장/ 펌프, 박동소리 들어 봐// 뒷덜미에서 발가락까지 후끈 달아오르는/ 붉은 수치 식히는 알몸을 위해/ 젖소의 유방에 다시 흰 젖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牧夫의 더운 마음으로/ 묵묵히 토관을 빠져나가는/ 발바닥 아래가 너를 견디는 노래//

소환되는 비 / 조정인
베일처럼 불어오는 비// 당신은 그때, 파밭을 지나가는 은빛 소낙비 나는 도심의 쇼핑몰 에스컬레이터를/내려오는 천사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기억의 갠지스로부터 우리는/ 서로의 물고기를 불러 어항에 풀었다// 빗방울 하나가 어리는 지점은 무수한 떨림으로만 기다리던 무(無) 그것은 공간의/ 꿈의 지점 당신과 나 사이 감정의 물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기가 물기를 불러 무게를 가졌다 천천히 돋아난 하나의 물방울이/ 말의 기미를 띠었다 흉중에 고인 물방울들이 입술을 비집고 나와/ 맨 처음 발음한 이름// 하나의 세계가 탄생되었다// 창밖엔 우리가 지녔던 낮은 말들로 추적이는 비// 어떤 경우, 빗소리의 안쪽보다 고요한 예배소도 없다 그곳에서 당신이 보내온/ 신 포도주에 입술을 적시다가 우리의 신분이 품계에는 없는 외로운 천사인 걸/ 알게 됐다 그 방 대형거울 속에 이상한 서술의 외줄타기를 하는 나와/ 찢어진 날개를 깁는 당신 뒷등이 보였다// 소환돼오는... 비/ 굳게 닫힌 시간의 철문 앞에 멈춰, 후드득 몸을 터는//

낙수 / 조정인
느리게 구르던 수차가 덜컹, 깊은 바퀴자국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동안 이곳은 늪지입니다./ 전선에 밎힌 빗방울 하나가, 제게 다가오는 때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수밀도 익어가듯 깊어갑니다. 말갛게 바닥을 탐색하던 빗방울이/ 깜박 저를 놓으며 온 몸에 찰나의 광휘를 둘렀습니다./ 빗방울이 제자릴 찿는 데는 삼천년이 걸린다는데 삼천년 너머,/ 빗방울 하나가 허공에 떨고 있었을 그날에도 하늘은 저리 푸르렀을까요?/ 연일 소소한 바람이 많아진 비 개인 오후, 흰 종이 위에/ -종일 나뭇잎이 웅성거린다고 적어봅니다. 깊어진 여백으로/ 물푸레나무가 들어섭니다. 다 셀수 없는 마음입니다.//

목련 그늘 아래서는 / 조정인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인다// 마른 가지 어디에 물새알 같은/ 꽃봉오리를 품었었나// 톡/ 톡/ 껍질을 깨고/ 꽃봉오리들이/ 흰 부리를 내놓는다/ 톡톡,/ 하늘을 두드린다// 가지마다/ 포롱포롱/ 꽃들이 하얗게 날아오른다//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목련꽃 날아갈까 봐/ 발소리를 죽인다//

그대 안의 백단향 숲길 / 조정인
말로는 다 못할 자비에 잠겨 그가 제자들을 건너다보았다// - 아난다, 내 주홍빛 가사 위로 빗방울처럼 꽃잎이 떨어지누나.*//​ 그는 저에게로 뛰어든 꽃들의 울음을 온몸으로 받아/ 어루만지던 사람 나무 아래 소매 끝을 놓아야 하는/ 결별의 시간이 와있다// 꽃비에 씻긴 망자의 감은 눈꺼풀 안쪽,// 중음中陰 초입에 백단향 우거진 숲길이 보인다 망자는/ 잠잠한 눈빛으로 숲길을 내다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가는 자의 저문 어깨를 스치고 이마가 환한 자가 오고 있다/ 둘은 무심히 가던 길을 가지만 실은, 둘로 나뉘어 사라지는/ 하나, 하나 안에 깃든 둘이다// 세상의 모든 싯다르타,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하나의 싯다르타, 하나의 싯다르타는 끝없는 싯다르타// 망자의 주홍빛 가사 위로 하염없이 백단향나무 꽃잎이 진다/ 생전의 그가 말했듯 꽃잎은 그 자신이다// 이를테면/ 망자는 망자의 전송을 받으며 이승을 떠난다네//
* 드라마(인도) <붓다> 중에서.

모과의 위치 / 조정인
그 윗가지 그 옆가지 그 아래가지에 문득문득 새처럼 날아 앉은/ 푸른 모과들// 깃 치는 소리 낮게, 더 낮게 내려앉은 모과의 동쪽은 지금/ 스스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위치// 사물이 지닌 기쁨의 흘수선을 파드득 치고 날아오르는 조무래기 천사/ 발뒤꿈치를 좇다가 놓치고 들어온 이후// 잎사귀 사이 모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과 쪽으로 얼굴을 돌려/ 모과만을 보여주었다 풀밭에 내려앉은 까치가 호젓한 하느님에서/ 훌쩍, 까치 쪽으로 건너뛴 이후처럼// 선반 위의 퉁명한 모과는 어느 날 불쑥 한 덩어리 의혹을 내밀며/ 갈색 반점으로 뒤덮인 살덩이 쪽으로 옮겨 앉는다// 지층의 그늘을 표면으로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과는 지금/ 갈애를 품은 심장의 위치 또 어느 날의 모과는 요절한 시인의 초상처럼/ 외로 기울어 너머의 시간을 다 이해한다는 식인데// 한 고요가 한 고요에게 건너오는 이 수평적 평온은 어디서 오나// 온몸으로 서쪽인 모과와 함께 어떤 어슴푸레한 꿈속을 천천히 건너가는/ 매우 가볍고 황홀한 춤의 저물녘// 빛이 싹트는 방향 멀리, 눈 쌓인 나목 그 윗가지 그 옆가지 아래 가지에/ 모과의 동쪽이 벌써 와 있다//

장미의 내용 / 조정인
12월의 장미를 뒤돌아보다가, 그 싸늘한 불꽃에 곁불이/ 라도/ 쬘까 하다가// 제 무덤을 지키는 적막한 묘지기를 본다 저 얼굴은 죽음/ 의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므로 겹겹 봉인된 그의 안채는 얼마나/ 따뜻하겠니// 죽음의 내용들이 발끝을 들고 장미를 건너간다 일테면/ 골목에서 사라진/ 영아와 참새와 비둘기와 새끼고양이와 늙은 개../ 가볍고 아름다운 그것들은 홀연히 몸을 띄워 대기권 바깥/ 제 투명한 묘지를 찾아들었다 좀 있으면 흙의 일이 궁금/ 해진/ 첫눈이 오고 아이들은 눈이다! 외칠 테지/ 사슴이다, 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는 왜 심장이 사라지나 흰 늑대가 되어 눈보라/ 처럼 하늘 복판을 펄럭이나/ 심장을 쏟았으니 가슴이 다 패어 허공이 된 늑대, 바람이/ 된 울음을/ 암청색 밤하늘에 풀어놓나// 와우우, 운석의 꼬리 같은/ 창자처럼 긴 울음을// 돌연 천공을 찢고 내려와, 폭설에 푹푹 발이 빠지며 내 하/ 얀 늑대가 다가오던/ 기척, 귓가에 붐비던 숨, 더운 혀에 관한 기억들이여 안녕/ 시절이여 안녕//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 조정인
지금은 산사나무가 희게 타오르는 때, 나여. 어딜 가시는지?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내가 나를 경유하는 중이네./ 흰 터번을 쓴 어린 수행자 같은 산사나무 수피를 더듬는다. 내가 나를 더듬고 짚어보고 헤아려 보듯, 나는 재에 묻혀 움트는 감자의 눈, 움트는 염소의 뿔, 움트는 붉은 승냥이의 심장, 봄 나무가 내민 팥알만 한 새순, 겨울 끄트머리에 걸린 시샘달* 방금 운명한 망자의 움푹 꺼진 눈두덩, 생겨나고 저무는 것들 속에 눈뜨는 질문. 나여, 나는 어디로부터 나를 만나러 산사나무 하얗게 타오르는 이 별에 왔나?// 어제 나는 스물일곱에 요절한 나를 조문하고 왔네. 꽃 같은 얼굴이 웃고 있는 영정 앞에 예를 갖추고 향을 피우고 한 송이 애도를 놓고 왔네. 나는 나의 빈궁한 유배처, 나의 고적한 유적지, 불탄 폐사지, 내가 나를 답사하고 탐사 중이네. 휘돌며 흰 보선발을 들어 춤도 춰보네. 나는 파장한 거리의 불 꺼진 상점들. 나는 나의 목 쉰 장사치. 나는 나의 홍등가. 내가 나의 창부, 거간꾼이라네. 그렇다면 나여. 끝내 나의 무엇으로 나는 남으려는지? 나는 나의 번다한 그 모든 혼란과 혼돈. 일생 나를 따라다니며 명치끝을 건드리는 생각이라는 뿔로 한 줄 문장을 쓰는 나는 고작 나의 가냘픈 질서, 나는 오늘도 문득, 내어난 일의 기적을 사네. 나라는 가능성을 사네.// 둑길에는 어린 산사나무가 한 광주리 꽃을 피웠네. 산사나무라는 해당하라는 이름에 묶인, 나무라는 꽃이라는 색色의 배열을 지나네. 몇 걸음 가다보니 못다 핀 꽃망울이 달린 채 부러진 꽃가지가 던져져 있네. 나는 찢겨져나간 나를 지나치지 못하네. 꽃가지를 주워 둑길을 걷네. 지난해 봄빛이 되비치는 둑길, 나는 나의 전생과 후생을 주워 둑길을 흘러가네. 빛과 그늘이 출렁이는 유리, 혹은 유리의 안쪽을 물고기들의 유영처럼.//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네. 하나의 어항을 쓰는 두 마리 물고기의 동거처럼.//
* 2월달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 달(오픈사전)

마른 곤드레 나물을 삶는 밤 / 조정인
이곳은 온통 눈이나 비, 바람마저 살의를 띤 거대한 맹점지대.// 우리의 유일한 지하자원은 고독,/ 고독을 연료로 우리는 검은 연애를 지폈다./ 오로지 동사하지 않기 위해.// 연애의 잔여분 같은 검은 술이 술병 밑바닥에 조금 남아 있다./ 나는 그 검은 것을 오래 보관하려고 한다./ 아직은 무엇을 앓고 무엇에 병들어야 할 지를 묻는다.// 지렛대로 시간의 퇴적층을 뒤집듯/ 긴 나무젓가락으로 나물을 한 번 뒤집었다.// 누군가의 창백한 얼굴이 길게 찢어진다. 안나푸르나의 A는 지금/ 수십 미터 적설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사랑은 그러므로 스스로 얻은 상처가 아름다울 때/ 발현되는 빛? 희미한 기억을 뒤적이는 사이, 겨울이 가고/ 안나푸르나는 잊히고 다시 오늘의 저녁 뉴스가 흘러든다./ 계부, 계모는 아니,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둔다./ 트렁크에 화장실에 베란다에 다락방에……모든 문밖에.// 나에게는 연애의 잔여분 같은 검은 술이 아직 남아 있다./ 마지막 날까지 나는 그 검은 감정을 남겨두겠다./ 그것은 나의 연료, 나의 조난 식량.// 어떤 완강한 고독은 웬만해선 손을 들고 투항하지 않는다./ 박제된 고생대 질긴 내장 같은 검은 나물을 이틀간 물에 불려/ 일만 년째 삶는 중이다. 지구의 빈 화덕에 눈발이 흩날린다.//

수요일의 금잔화 / 조정인
일요일의 엷은 구름을 찢어 빚은 꽃들이/ 한 트럭분 실려 오네. 휴지처럼 둘둘 풀어 일용하는/ 우리들의 채색구름.// 오늘, 귓불이 붉은 꽃들은/ 아침노을이 물든 어린 구름으로 빚었다지./ 신선도 높은 구름샐러드를 주문하고/ 카페-애플 테라스에 앉네.// 빈혈을 앓는 꽃들이 퀵서비스에 실려/ 사라진 애인들을 배송하러 떠나네.// 엉덩이에 잎사귀처럼 달라붙은 팬츠/ 킬힐/ 퇴화된 날개 검정 깃털 같은 속눈썹을 껌벅이며/ 나의 노란 멀미들은 다 어딜 가시나.​// 어떤 수요일의,// 재[灰]로 빚은 꽃들은 만지면 부서져/ 조용히 가라앉네.// 손바닥 위// 무너진 사원 뒤뜰, 깨어진 제대 위에/ 작은 가시관이 놓이네.// 옅은 한숨과 함께 가난한 고백이 흘러나오네.//

푸른 꽃, 테두리는 없고요 / 조정인
나를 배제한 건너편, 나를 배제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예술이 사진예술일 것이다. 심지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볼 때조차도 작가는 자신을 떠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시 쓰기의 수행과 다르지 않다. 도시의 지붕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무리를 떠나 정황을 응시한다. Urban Shapes / Urban Grids를, 일테면 전체와 개체를 렌즈에 담는다. 전체에 값하는 하나의 개체-Grid, 그러한 개체가 복무하는 하나의 전체-Shapes를. 사진 속, 하나같이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그러나 저마다 다른 개별적인 각도로 수런거린다. 저마다 고유한 존재의 그림자를 거느린 자들이다. 텍스트는 무한한 자기증식을 꿈꾼다. 독자에게는 오직 오독과 자폐만이 있을 뿐이다.// 영혼이 제 뼈와 살과 마음을 염려한다. 식물의 잠처럼 잠잠한 날들의 저물녘, 곁에 와 앉는 건 영혼이다. ―괜찮니? 새벽어둠 속에 몸보다 먼저 깨어, 낙심하는 마음을 달래고 오른손의 형식으로 왼손을 더듬어 오는 것도 영혼이다. 몸이 가는 길 몇 발짝 뒤에서 영혼이 따라온다. 몸아, 간혹 걸음을 멈추어 영혼을 기다려다오. 이것은 인디언의 사고이기도 하지만, 길 위의 고독한 누군가는 제 뒤를 따르는 영혼의 기척을 느낀다. 걸음을 늦춘다.// 깊은 밤, 잠에서 깨었다. 꿈에 전쟁이 났다는 암시와 함께 사람들이 한 통로로 휩쓸려 피난을 갔다. 구석진 방에 홀로 남은 나는 그들을 망연히 바라보았고, 잠시 막막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무리로부터 이탈한 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잠은 다시 오지 않는다. 고요한 중에 텅 빈 공간을 듣는다. 보다 큰 질서의 잔물결이 다가와 헤적인다. 고요는 굉음에 다름 아니고 정지(停止)는 가장 빠른 위치이동에 다름 아닌 이런 영역. 사랑하는 일, 헤어지는 일, 웃고 우는, 모든 삶의 리듬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안에 ‘나’라고 고집할 나도 없거니와 나 아닌 나도 없다는 통일감이 들어선다. '나'라는 존재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는 각자(覺者)의 말은 참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실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이에 스친 손가락에 살짝만 피가 비쳐도 신경이 그쪽으로만 쏠리는 게 '나'라는 실감이므로. 밤의 정적 속에 휴면하던 도시의 신경세포가 더듬더듬 깨어난다. 새벽 푸른빛이 일렁인다. 점점 확장되는 푸른 꽃 한 송이의 고요, 혹은 소란이.//

꽃 속에 출렁이는 일만 파도 / 조정인
하지만 내가 사랑을 주문했는데, 어째서 식은 포르투풍/ 내장 요리를? 가져다 준 거냐고,/ 차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데,/ 차게 가져다줬다고./ 나는 불평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찼다고,/ 절대 차게 먹는 게 아닌데, 차게 나왔다고.// - 페르난두 페소아, 「포르투풍 내장요리」 부분//
영혼은 찢어지는 물성인가, 금가고 깨어지는 물성인가, 하는/ 물음 사이로 잠시 벚꽃이 다녀가고 대부분이 악천후였지/ 발 딛으면 안 되는 대륙, 만지면 안 되는 살이 내 안에는 있었어/ 영혼은 젖어 찢어지는 물성이었어/ 그랬어. 나는 사랑을 주문했어. 그런데, 너는/ 슬픈 바다를 가져왔구나./ 시간아.// 마다가스카르 섬의 어떤 나방은 잠든 새의 눈물을 마신다고 한다. 나방에게 스민 새의 눈물은 누대를 거쳐 나방의 날개에 비문처럼 발현됐을 것이다. 상호 침투의 얘기다. 여기에 세계라는 불수의근不隨意筋, 자율적 구조의 비밀이 있다. 너와 내가 스친다. 아니 관통한다. 천천히 고개 돌려 너를 본다. 쓸쓸한 옆얼굴, 낯익은 듯 낡은 어깨. 지난 생의 어느 한 시절,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흘렸던가. 서로의 눈물을 나눠 베고 잠들었던가. 우리는 눈동자 속, 서로가 아파 눈시울이 뜨거웠지. 따스한 밥을 지어 질그릇에 담고 나물국을 올린 나무 소반을 놓고 마주했지. 서로에게 스미어 하루를 백 년처럼 살았지. 우리의 뜨락엔 시간의 붉은 꽃이 만발했지./ 바람이 분다. 돌아보면 저 바람 속, 천 개의 방을 나는 지나왔다. 서로 연기緣起하지 않는 존재란 없다. 네가 나를 여닫는 천 개의 문소리로 잠 못 드는 밤, 내 안의 타자의 음성, 타자의 체취가 우글거린다. 나라는 한 개체를 이루는 데는 천 년을 기준으로 어림잡아 10억 6천만의 타자가 관여한다고 한다. 얽히고설킨 인연법 안에 나와 네가 있다는 얘기다. 그 업과 습. 그 막대한 유전자의 총체를 나는 나눠 가진 것이다. 이 '나. 너'는 그러므로 얼마나 장엄한 카오스가 관여한 가냘픈 질서인가. 나와 나 사이 너, 너와 너 사이 나여. 폭설인 동시에 꽃구름인 내 사랑, 나를 관통해가는 한 시대여. 길섶에 흔들리는 흰 풀꽃 한 송이여. 꽃 속에 부서지는, 일만 은빛 파도여.//

지하드 / 조정인
포인세티아 손톱만 한 속엣것이/ 이상하다 바닥에 뚝. 선혈처럼 진다/ 어제 밤새에도 뚝뚝 앳된 꽃잎을 흘려놓더니// 초겨울 임시보호텐트 새우잠에서 눈뜬/ 차도르 속 겁먹은 검은 눈동자 젖어온다/ 새로 깐 요 홑청을 적시던/ 초경의 아침은 그렇듯 문득 찾아오질 않던가// 오늘 무슬림의 한 소녀 홀로 해 뜨나보다/ 울컥울컥 꽃잎을 쏟아내다 보다// 꽃을 통과하는 한 발 총성// 펄럭, 들쳐지는 지구의 속엣것에/ 점점이 붉은 체온 번진다//

조선인 ㅡ진흙 장미 서른 송이 / 조정인
조선인 위안부 학살을 증명하는 영상이 최초로 공개 됐다. 학살 현장 몇 걸음 뒤에서 병사의 카메라는 시간의 가역성에 대해 골몰히 궁리했을 테다.// 흙구덩이 속의 알몸들은 서로에게 잇대 엎드려 있다. 죽은 물이 채워진 흐린 수조에 고개를 박고 잠든 자매들, Korean giris. 카메라의 눈이 고스란히 보아 낸 진흙 장미 서른 구. 전쟁의 허구에 쓸려 시취와 풋살내를 동시에 풍기는 흙의 꽃.// 조선의 늑골 아래 안치된 시간의 석관엔 입 없는 비명들. 흙이 받아 안은 열 손가락 뼈, 왼쪽 광대뼈에서 어깨뼈, 흉골 아래 컴컴하게 지워진 복부와 홀로 초승달이 뜨던 검은 생식기, 왼쪽 대퇴부에서 무릎, 정강이를 지나 복숭아뼈에 이르는 희미한 인체도, 흰 그림자가 수면 위로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죽음을 직감하는 건 어떤 공포겠는지, 공포 앞에 무릎 꿇리는 일은……순간 확장된, 다시 갈아 끼울 수 없는 두 눈동자와 퍼지지 않는 무릎이란.// “살고 싶어요, 살고 싶습니다.” 사체의 펄럭이는 성대가 고막을 두드려 오는, 말의 뼛조각을 주워 띄엄띄엄 맞춰보는 이런 일. 호수(號數)가 너무 큰 어떤 비극에는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1944년 9월 기록자의 필름*엔 터진 창자가 울컥울컥 밀어 올린 말의 검은 담즙, 감은 눈꺼풀 아래 번진 갈변된 얼룩, 벗겨진 양말 한 짝. 어느 것 하나 지워지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다.// 홑이불 한 장 덮지 못한,// 침묵하는 현장.//
* 1944년 9월 중국 윈난성에서 촬영한 19초 분량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 영상

함박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 조정인
당신은 여전히/ 오늘의 눈송이가 불어오는 곳// 어떤 필자는 부지불식간 독자를 부른다.// 책을 읽다가 한 페이지를 깊숙이 접게 되는 거기, 한 단락/ 문장이 검은 탕약처럼 엎질러져 있는 경우// 바닥없는, 손바닥이 목덜미에 놓이는 일// 발 없이 방으로 들어서서… 없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혀 없이 혀를 감는… 환하게 불 켜진 심장으로… 아득히/ 초원이 펼쳐지고 흰 망초무리가 들어서는// 문장이 하는 이런 일들// 그날 밤, 책의 한 페이지를 깊게 접은 나는 책을 떠나 창가 쪽으로 갔다/ 한 세기 전에 죽은 자가 한 말은 놀랍게도 어느 봄날 당신이 나에게/ 무연히 흘린 말과 일치하고 있었다// 죽은 자의 영혼은 어떻게 시공을 되돌려 이곳, 익명의 독자에게 돌아와/ 밤의 밀서를 건넨단 말인가// 그리운, 무수한 당신들.// 누군가 멀리서 한밤의 나를 따라한다 읽던 책을 덮고 창유리에 이마를 댄다/ 두 번, 마른기침을 하고 식탁으로 돌아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천 년 바깥에선 듯 그의 등 뒤, 검은 유리창에도 흰 눈송이의 소요가/ 떠오르다 갈앉는 이곳 마치도 오늘 내가 배회하던/ 문장들의 혼령인 듯//

그 나뭇가지에 도착한 푸른 기억들 / 조정인
모과나무에는 꽃이 더디게 왔다// 꽃 피고 열매 맺는 일이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는/ 먼데 문장들만 같다// 꽃나무 둘레를 느리게 배회하는 발걸음은 하느님의 발걸음을 빌리는 일,// 봄날 며칠을 그토록 맑은 세계를 머리에 이고 한 줄 문장을 품고/ 꽃 핀 나무 아래를 서성이고는 했다.// 그 나뭇가지에 착지한 작은 기별들, 동쪽이 싹 트고/ 동쪽이 축적되고 동쪽이 자라나// 잎사귀 사이사이, 모과 엉덩이가 보인다/ 7월 모과는 작고 파란 새들이 날아든 것 같다// 첫 나뭇가지엔 듯, 첫 의혹인 듯 대답인 듯/ 빛의 광원으로부터 와 있는 둥그런 기억의 진동// 모과는 꽃의 분홍 강보에 싸여, 그 향긋한 어둠에 안겨/ 눈을 떴을 것인데, 첫, 저의 둥긂을 더듬어 그 나뭇가지에/ 그런 약속이 있었다는 듯 돌아왔을 것인데// 파동으로 가득한 침묵 한 그루// 나무는 꽃과 어둠의 협업, 혹은 협연으로 있다/ 절반의 빛과 절반의 어둠으로 쓰인 밀서로 거기// 언제부터인가 모과나무는 모과나무라는 그런, 기어이 지켜지는/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내 실종되는 기억으로,//

이 벽보는 제가 뗄게요 / 조정인
강아지를 찾습니다.// 이름은 슬기, 나이는 여섯 살./ 슬기야, 부르면 자다가도/ 귀를 쫑긋, 졸린 눈을 뜹니다.// 지난 토요일 저녁 일곱 시쯤, 아주 잠깐/ 천사약국에서 마스크를 사고 나와 보니/ 온데간데없어졌어요.// 이사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돼서/ 혼자서는 집을 찾아올 줄 모를 텐데요.// 전체적으로는 흰 털이지만 등 한가운데/ 한 움큼만 까만 털이 났고요./ 오른쪽 뒷다리를 절름대고요./ 겁이 무척 많은 강아지./ 눈은 눈물이 고인 듯이 보여요.// 누가 이런 강아지 보시면/ 부디 연락 주세요./ ○|○ ○○○○ ○○○○.// 그리고 부탁합니다./ 이 벽보를 떼지 말아 주세요./ 우리 슬기 찾으면 제가 바로 떼겠습니다.//

새가 되고 싶은 양파 / 조정인
바구니에 거꾸로 박힌/ 양파가/ 가물가물 잠들었다.// 이따금/ 거친 숨을 내쉰다./ 이마가 뜨겁다.// 퍼렇게 곪은 살을 비집고/ 노랑 부리 내밀었다.// 양파는 어서/ 날개를 꺼내고 싶다.// 머지않아/ 아기 새 한 마리/ 젖은 날개 말리러 나오겠다.//

환승역 —르네 마그리트, 「Listening Room」에 부쳐 / 조정인
이것은 운두 높은 모자. 당신의 천사가 즐겨 쓴다.// 한 개 풋사과 속에 웅크려 빗소릴 듣는다. 기억들이 들이닥친다. 들이닥친 기억들은 날개를 퍼덕인다. 사과가 부푼다. 사과는 지금 검푸른 밤하늘 한복판에 걸렸다.// 나는 지금 풋사과 속 건기를 횡단하는 사과애벌레. 세상 모든 발걸음 속 당신 발걸음을 구별해. 처음엔 선로를 구르는 지하철 바퀴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어. 뒤이어 지하도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 세상 모든 발걸음 속, 조용한 산문의 보폭으로 걸음을 떼는 당신. 우리는 노선이 다른 전철을 타고 서로에게 가고 있어. 불의의 사고 같던 그날 이후, 삼백년을, 우리는 줄곧 서로 다른 노선 위를 달리는 중이지. 어떻든 삼백년 후 어느 봄날, 우린 J환승역에서 보기로 했어. 당신은 우리가 보기로 한 플랫폼 5-3 나무의자 앞에 멈춘다. 나는 한 시간 정도 늦을지 모른다는 문자를 띄웠어. 당신은 배낭에서 책을 꺼내 읽던 페이지를 편다. 책장들은 마른 잎 부스럭거리는 소릴 내. 책장을 넘길 때 쏟아지는 활자들의 침묵과 활자들의 그림자가 내는 소리는 정오의 나뭇잎이 그림자를 떨어뜨릴 때 내는 소리처럼 잠깐씩 환해. 나는 이 모든 걸 한 시간 정도 늦을지 모르는 시점에서 듣고 보고 있어.// 이슬람의 어떤 밤에는 천국의 비밀 문들이 활짝 열리고, 항아리에 담긴 물은 평상시 밤보다 달콤해진대.*전철 문이 열렸어. 의도한 적 없이 바로 5-3 앞이었어. 붉은 밑줄이 그어진 읽던 책을 덮는 당신이 눈앞에 있었어. 커다란 날갯죽지가 솟아있는 고독한 천사. 그때 눈으로 흘러든, 시간의 글라스에 출렁이던 물보다 달콤한 물을 나는 알지 못해. 그러니까 강철로 된 천국의 비밀 문은 5-3 앞에 나를 내려놓았어. 5-3이란 태초에 주어진 기호. 나는 예정론을 믿는 사람.// 이것은 한 채 침묵사원. 다시 푸른 알 속이야. 심장과 뇌와 자궁의 삼위가 하나인, 두근거리는 집. 들려온다. 창밖 벚나무 잎사귀를 밟아오는 비의 발자국 소리, 귓속 미로를 저벅이며 멀어지는 당신. 삼백년 바깥으로 끝없이 갈라지는 두 선로, 선로를 구르는 지하철 바퀴소리 사이사이, 천국의 비밀 문 열리는 소리. 그때 지상의 실과들은 더욱 단맛을 낼 거야. 기다려 줘. 나에게도 희고 커다란 날개가 생길 것 같아.// 기억이 부푼 만큼 사과도 부풀어. 기억의 백악기 사과나무는 흰 꽃을 터트렸고 호르히헤르…… 노래를 물고 새 한 마리 높이 날아올라. 백악기 바깥으로 던져진 사과는 지금 검푸른 밤하늘 한복판에 걸려있어. 아니, 그것은 눈먼 물고기. 그것은 홀쭉한 고독의 왼뺨.//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에서.

쇠 / 조정인
깊은 밤,// 칼을 치우다 치명적으로 고독한 몸뚱어리에 손을 대고 말았다// 그는 별들의 연안을 떠나온 어족(魚族)일지 모른다 싱크대 서랍에는/ 검은 고독에 흰 고독을 부어 주조한 회백색 합금 영혼이 몇, 더 있다// 고백해 봐, 네 찬 몸뚱어리가 숨긴 영혼의 담즙을// 너는 녹슬 수도 없는 너를 벗고 싶다, 목구멍에 걸려 소란한/ 어제의 규격과 책무를 뱉고 싶다 너는 지금 칼날로 벼려진/ 네가 많이 아프다// 지상의 무른 것들이 옆구리를 내주며 모로 쓰러지는 곳에서 너는, 네 안의 머나먼 광물을 향해 날카롭게 울부짖지 않았던가 혼자서 감당 못하겠는/ 견고한 고독과 거세된 사랑을// 골조와 외곽을 견뎌야 하는 아비의 삼엄한 세계를// 어둠의 지층에 쇠의 영혼이 흐르고 있다 천지창조 셋째 날, 홀로/ 생각의 해일 속을 거닐던 신의 위험한 상상이 방류한/ 질료들의 맏이// 쇠를 심어 놓고 부레 벌떡이는 물고기를 기다리는 자폐의 날들/ 그날, 차갑게 제련된 침묵의 기질에 손을 대고 말았다/ 쇠락을 꿈꾸는 어느 먼 별빛에//

먼지야, 그때 너 왜 울었니? / 조정인
벽과 창틀이 만나는 구석, 밀교의 행자처럼 정적에 든/ 쐐기나방 날개의 갈색 파도무늬, 먼지로 짠 섬유에 새겨진/ 정교한 비문이 나를 창가로 불렀을 것이다// - 네 사랑을 펴봐// 그대에게 내민 빈 손바닥 같은, 햇살 비낀 허공이 사금처럼/ 떨고 있는 하오// 물병은 견고한 묵음으로 창가에 있다 낡은 정형외과 병실 흰 커튼은/ 침묵의 추종자, 물병 속에는 수평선이 걸쳐져있다// 재의 수요일, 사제는 이마에 재의 성호를 그었다/ 재를 받고 자리로 와 손끝에 묻혀본 부드러운 침묵// 오래전 먼지의 내부 열점 하나가 나를 꿈꾸었다 하는,/ 없는 것의 자질이 번식하는 허공이다// - 내 어디에 자리를 내드려야 되겠습니까?// 나는 울먹이는 진주조개처럼 부드러운 속살 가장 안쪽을/ 열여 그 큰 음성을 껴안으로 했다// 조개에게서는 사라져가/ 두팔의 번형으로, 사라져가/ 두 귀의 번형으로//

당신의 턱수염 / 조정인
당신을 들추고 당신을 밀친, 원시림이 들어섰다// 목 밑을 타고 오르는 검푸른 숲을 바라보는 동공으로/ 불빛이 번졌다/ 눈이 따뜻하면 영혼의 말초까지 온난기류가 흘러들어 내/ 안의 어린 계집애가/ 접시 위 푸른 풋콩을 엎질렀다 심장의 파안, 전신으로 웃을 때 늑골을 만져보라/ 기뻐 구르는 영혼의 발꿈치가 만져진다 심장의 즐거운/ 펌프가 온몸의 조도를 높인다// 난산의 산도를 뚫는 태아처럼 당신에게서 태어나고 싶던/ 아득한 옛날, 당신 등뒤에서/ 익히던 말의 배아는 어떤 몸을 얻고 있던 것일까// 식물의 향일처럼 오래 남쪽으로 휘어 찾아간 당신의/ 은빛 겨울 산채/ 성근 머리칼이 나는 아팠다 심연 같은 거리를 남기고/ 멀어져가는 당신을 뒤로/ s역사 대합실 유리문을 밀다가 마주친 늙은 앵무새, 또렷/ 하게 인화되는/ 시간의 얼굴// - 눈발 쏟아지는 겨울 저녁, 청색 창문을 가진 자는 달그락 돌아눕는 별 하나에/ 마음이 그어진다 흉관 근처 웅크린 움집 그을린 화덕에 환하게 살아나는 불씨/ 한 점 괜한 호주머니를 뒤적이며 길을 나선다 신발을 털고 불빛 안쪽으로/ 들어선다 불빛 너머 어룽지는 뒷모습은 모두가 당신이다//

알비노보호구역 / 조정인

물의 혼령들이 어슬렁거리는 새벽 나는 나에게서 유실되어 둑길을 흘러갔다.// 대기가 팽창했다 분사된 젖의 미립자, 안개 너머에서 폐활량을 키우는 저수지 심박소리가 들려왔다 젖의 유충이 눈썹과 머리칼, 귓바퀴와 목덜미를 하얗게 더듬어왔다// 안개는 천 겹 베일을 둘러주며 입속말을 흘렸다 나는 너의 애초의 입자 너의 정직한 총체, 너를 바라보는 텅 빈 눈동자...// 안개구역에는 귀가 순한 알비노들이 모여 살았다 목소리를 삼킨, 흰 속눈썹 아래 지워진 눈동자 그들은 서로의 눈과 귀를 핥고 서로를 먹였다 에돌고 흐르는 무리 거기서는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다// 베일을 풀며 안개가 쓸려가고 발등이 드러났다 백색교의 창백한 수도승처럼 자작나무가 도열해 있는 아파트 뒷길 연금술이 사라진 곳에 식은 태양 몇 닢 버석거렸다// 흩어진 신전에 관한 풍문// 내 혈관에는 안개포자가 서식중이다 나는 안개주의자 안개에 편향적이며 안개에 위독하다 안개에 몰입한다 어느 날 나는 알비노에 편입될 것이다.//

날개에 바치다 / 조정인
날아가라 날아가라, 11월의 잿빛 상공으로 새를 날려준 적 있다 새장 밖으로 밀쳐질 때 공포로부터 튀어오른 용수철 같은 첫, 날갯짓 표표히 새장을 버리는 새의 비행은 그때 한 줄 사라지는 기록이었다// 모든 사라진 기록은 출렁이는 심연을 거느린다. 생(生)이란 기껏 가슴속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달래어 집으로 가는 길에 바쳐지는 것이지만 나는 문득 말에서 내려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젖힌다// 영혼의 어떤 거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다그쳐도 듣지 않는 마음을 끌고 홀로 투숙한 모텔-Plus Ultra*가 있는 거리, 그레고리오 낮은 선율이 흐르는 그곳을 더듬어 내 모든 발걸음은 치렁치렁 긴 그림자를 거느린다// 개인이란 취향과 식음의 구별에 있다 편식이 심한 내 주요 식단은 흰 구름 또는 자색 구름에 버무린 날개요리와 화형대의 불꽃으로 빛은 붉은 술, 그리고 장미의 심장에서 길어올린 신선한 피를 뿌린, 검정 부재(不在) 한 조각// 저물 무렵, 쥐스긴트 1가 향수의 거리에서 나는 향기 진한 자두와 장식 깃털을 팔다가 그를 보았다 치마를 털고 일어나 뒤를 쫓았으나 사람들 사이 놓치고 말았다 그를 찾아 몇세기를 헤매는 중 기억하느니 한때 나는 맹인이었다// 새 한 마리가 방 한가운데 날아들었다 새의 날개가 머리칼을 스칠 때 나는 휘발되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냈지만 그것은 신의 검푸른 가윗날이었다 발아래서 벨벳 찢기는 소리가 났다 궁창이 내려다보였고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너될 수 있겠니?/ 무서워요// 녹슨 전로를 진입해오는 이 난폭한 기차는 어디로붙 떠나오는 것일까 길이 들어올려 진다 길 한 끝이 기운다 길이 품은 늙은 벽시계와 퇴락한 서당의 첨탑, 해쓱한 낮달과 까페 헤밍웨이 나무계단이 펄럭인다 물소리 먹먹한 지도 앞에 오래 망설이던 신발들이 펄럭인다// 9월의 습한 장미정원이었다 맨발인 나는 발이 시렸고 울 것 같았다 몇 세기에 걸쳐 정원을 산책하는 그와 마주쳤다! 그가 신발을 벗어 주었다 신발 속엔 새가 있었다 신을 신으려 하자 녹슨 철사로 옭매인 검푸른 새는, 그러나 놀랍도록 높이 솟구쳤다// 짧은 해후, 역사(驛舍) 앞 횡단보다 붉은 신호를 받고 그는 멀어져 갔다 잘 가라, 어둑한 손바닥이 내 왼쪽 어깨에 음각되었다 18:17발 용산행 기차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상의 문법과 하늘의 양식이 놓은 레일 위를 저물녘 기차는 창이 많은 모스크처럼 사색적으로 미끄러졌다// 훨관은 녹슨 핏물이 역류하느라 아우성이다 잔혹한 증세가 고개를 쳐들었다 늑골 안쪽에 날리는 깃털로 날개를 지었다 밤에 자라는 독초를 잘라 망또를 짰다 화형대 높은 장작더미를 기어오르는 내 무릎을 위해, 끔찍이 아름다운 연옥을 위해// 어깨에 유난한 통증이 있는 날은 어깨에서 조도가 밝은 구름을 꺼냈다 구름은 물방울의 꿈이 밀어올린 새하얀 날개, 새떼처럼 구름이 펄럭였다 날개? 하늘이 땅을 향한, 땅이 하늘을 향한 멀고도 처연한 구애의 몸짓, 공포에 매혹된 좌심실과 우심실에서 뻗어나간 양팔의 최대, 간극의 극복, 침묵의 심연과의 고독한 대면// 아침에 눈을 뜨자 두근대는 새 한 마리 만져졌다 오늘 메뉴 역시 흰 구름 날개요리, 새를 꺼내 새와 함께 식사를 준비했다 새를 위해 그러는 것처럼 가슴속 그 많은 접시를 씻어 얹을 때 접시와 접시 사이 지어질 듯 맑은 새소리가 끼어들었다// 한 줄 빛나는 모양으로 새가 날아간다. 험준한 기류의 능선을 차갑게 환기시키는 가벼운 듯 펄럭이는 노역, 새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공포를 건너는 중이다//
* '그 이상의 것': 신성로마제국 카를 5제의 문장(紋章)이며, 황제와 하녀 간의 자연적인 사랑과 결합시킴으로써 보다 존엄한 사랑으로 그려낸 G. 르 포르의 단편소설이다.

사라지는 건 없어 밤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짙어가기 때문* / 조정인
오늘은 비의 수신인, 가을이고 저녁이다. 종일 비를 듣는다. 추적이는 비의 발걸음 소릴 듣는다. 느리게 길게 나에게로 온 비는 저를 바닥에 누인다. 병색이 짙다, 이 비 다녀가면 뭇 초목도 따라 병색일 것이다. 감염이다. 비는 모든 계절을 관통한다. 모든 시간을 관통한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연장선으로 잇는다. 하지만 오늘 이 개별적인 비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오늘 이 빗속엔 지난여름 빗속으로 떠난 사람이 있다.//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김희준, 문학동네, 2020)의 제목은 완결된 문장이 아니거니와 쉼표로 마무리가 되어 다음에 올 말의 여지를 무한토록 남겼다. 쉼표 하나가 이토록 깊은 한숨이던가. 이토록 적막한 휴지(休止)이던가. 이토록 드넓은 대지 이던가. 이토록 막막한 침묵이던가. 이토록 돌올한 기표이던가. 그가 지어 놓고 떠난 언령(言靈)의 집에 들어 며칠을 묵었다. 그곳에서 그는 언제라도 현재형으로 속삭인다. 시집의 여백에 나는 이런 말을 적었다. ㅡ(나보다)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을 우리는 고인이라 부른다. 모든 고인은 생존해 있는 자들의 다가올 미래이며 스승이다// 2019년 〈지리산문학상>을 받게 됐을 때였다. 이 부족한 사람을 축하해주기 위해 통영에서 그가 와주었다. “꽃이 시들까봐 새벽에 꽃집에 들러 찾아왔어요.” 하며, 수줍게 내민 보랏빛 리샨셔스 꽃다발은 시인의 젊음처럼 풋풋하고 향기롭고 품위 있고 아름다웠다. 뒤늦게 찾아본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 이 보잘 것 없는 글이 갓 ‘첫’ 시집을 상재한 그에게 건네는 한 송이 '마음의 리샨셔스'가 돼주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김희준, 「머 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에서

유리, 혹은 유리 / 조정인
한 마리 고양이가 다른 한 마리 안에 웅크려 죽어가는 걸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벌어진 입, 빈약한 아래턱에 가지런히 박힌 흰 이빨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죽어서야 죽어야 했던 사실이 드러난 노동자들이 한 노동자 안에서 반복해서 실족사 하는 걸 보여주었다. 컨베이어 벨트, 긴 혓바닥 아래로 감아드는 쳐들린 작업화를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발아래 미끄러운 어둠을 디딘 그를 도와 작업화는 벨트 바깥을 덮으려 얼마나 애썼을까. 삼백년 째 수감 중인 L은 느닷없이 1차 살인범행 후, 2차 3차...... 제14차 살인까지, 미제사건으로 남은 몇몇 범행까지, 모두 자신이 저질렀다는 진술을 했다. 그것은 고백인가, 조소인가. 수사 팀원들은 공소시효 지난 동일한 사건의 옆구리에 반복적으로 발이 걸려 넘어지고는 했다. 그것은 깨어진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창밖의 일들. 무성필름이 펼쳐지듯 벌어지는 일들을 더 자세히 볼 셈으로 창가로 다가갔을 때, 마리안, 당신은 무엇을 보았나요? 창밖은 겨울인가요? 안개가 자욱한가요? 황량한 벌판인가요? 벌판에 굶주린 개떼가 몰려다니고, 겨울이 방금 낳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성에 낀 돌멩이들이 나뒹구나요? 반복적으로 누군가가 던진 고양이, 아니, 새들을 보았다고요? 설마, 노동자 안에서 반복적으로 태어나는 노동자라고 말하진 않겠지요? 나는 궁금해요. 바르르 숨을 거둔 고양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세계는 어떤 표정이었을지. 그때 자줏빛 목련꽃잎이 그레고리오 성가 선율처럼 느리게 졌나요? 밖은 지금 사월이라는 얘긴가요? 아, 밤의 검은 피륙 한 트럭분이 부려져 펼쳐지는 중인가요? 마리안, 이제 잘 시간이에요. 우리는 아직 죽어본 적 없는 주검, 천년 째, 머리맡에 석탄 부어지는 소릴 듣습니다. 쉬잇, 스핑크스가 창 앞을 지나가는 자정입니다. 그런데, 깨진 유리는 언제 갈아 끼웠죠? 마리안, 당신의 따스한 고양이는, 눈물처럼 따스한 고양이는 어디에 두고......//

페이지들 / 조정인
생활 바깥으로 나가 생활을 간섭하는/ 죽은 적 없이 죽음의 내용을 출력하는 삶과 죽음의 얼굴 각도와/ 의상 패턴을 끝없이 바꿔가며 재배열하는/ 창문에 기댄 그 그녀들의 사소한 감정의 미풍과 회오리가/ 먼, 올리브 잎사귀를 흔들다가 해변의 검은 모래밭을 휩쓸고 지나가는/ 오타발로의 눈먼 샤먼 기도소리가 소나기처럼 들이치는/ 신의 폐허와 신생이 번갈아 출몰하는/ 고대인의 깨진 잠에서 빠져나온 그림자들이 도서관 열람실을/ 치렁치렁 배회하는, 혹간 그들의 어둑한 음성이 들려오는/ 늙은 수학자의 호주머니에 뒤척이는 에우클레이 데스의 돌멩이와/ 양서류와 식물들의 혼이 일렁이는 허수의 꿈을/ 사막수도원의 긴 회랑이 소실점 바깥으로 하염없이 이어지는/ 폐가의 마룻장에 내려앉은 먼지와 이제 막 도착한 햇살을/ 그곳, 깨어진 창유리에도 어김없이 분배되는 아침과 저녁을/ 테두리도 중심도 시제도 없는 대평원의 흑암을/ 그곳에서 발송된, 봄날 아지랑이 아련한 흔들림을/ 한 송이 꽃을, 꽃 속에 부서지는 일만 파도를/ 낱장으로 재단해서 차곡차곡 묶은 이것을, 누가/ 책이라 했나/ 모든 불가능이 적힌 신의 완강한 주먹을 펴려는/ 무례한/ 불굴을/ 엎질러진 밤의 검은 포도주에 다 젖어/ 농담처럼 뭉개진//

오고 있던 통증 / 조정인
우리는 새를 피해 뛰었다/ 박수처럼 딱딱딱, 주먹을 날리듯 퍽퍽퍽/ 새부리가 뒷목을 파고들면 아프다. 위험하다/ 우리는 뛰었다/ 다리 긴 초식동물처럼 겅중겅중// 재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양팔로 머리통을 감쌌다/ 두 팔을 내려/ 왼팔로 오른팔을 오른팔로 왼팔을/ 살갖이 드러난 데를 감싸고/ 뛰었다/ 날개를 퍼덕이며 맹렬하게 따라오는 새/ 새는 날개를 펴서 우리들 맨살을 감싸지 않는다/ 우리는 뛰었다/ 불량한 새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새에 에워싸여/ 새에 갇혀/ 우리는 이리저리 출구를 찾았다/ 우리는 너덜너덜 헤어졌다/ 사나운 새들을 피해서 갈 데가 없다// 건물 입구로 뛰어든 우리는/ 날뛰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모든 게 휩쓸리고 있었다/ 발아래 물의 깃이 쌓였다/ 정적이 쌓였다/ 두 그루 나무처럼 우리는 우뚝 멈춰/ 문득이라는,/ 우리 앞에 당도해 있는 시간의 낯선 창으로/ 생에 첫 사람들인 것처럼 서로를 보았다/ 흠뻑 젖은 너는 입술이 파랬다/ 너는 날아든 새/ 오래 전에 오고 있던 통증/ 생애라는 말에서/ 생피 냄새를 맡은 날이었다//

목격 / 조정인
눈썹과 눈썹 사이를 진흙달이 지나갔다// (잠든 자를 굽어보던 그림자 하나가 잠든 자를 걸쳐 입고/ 침대에 젖은 몸을 뉜다, 잠시만 머물다 가겠다한다)// 폐가가 된 자신을 끌고 한 여자가 지나갔다, 주검을 일으켜/ 걷게 한 것 같은 무거운 걸음걸이로// 수그린 옆모습을 어룽거리는 말들의 얼룩// 삼베를 끊어/ 말이 흘리는 검은 피를 받으려고 나는 꿈의 갓길에 서있었는데// ―달의 북쪽에서 붉은 재를 얻어와 인간의 전답에 뿌리니/ 이글이글 기근이 불붙는구나, 허기진 너희는 곧 부황이 들 테지/ 오라, 내 측은한 것들 곪아 흐르는 검은 젖을 물리마// 햇빛과 먼지에 그슬린, 땋아 내린 머리타래 흙 묻은 치맛단 아래 내보이는/ 때에 전 발뒤꿈치 자기 앞의 불운을 맞으러 가는 저토록 묵묵한/ 걸음걸이라니// 여자를 앞세우고 골목을 꺾으려던 남자 둘이 힐끗 내 쪽을 쳐다본다/ 타액 같은 웃음을 흘린다// 소리가 소거된 여자에게서 뻗어 나온 비명이 거미줄처럼 번지는/ 꿈의 뒷길, 이 꿈의 유일한 목격자는 혹독하게 외로웠는데// 흐려져… 흩어지려는… 양악을 두 손으로 붙들고… 조금조금 흘린/ 누군가의 퉁퉁 불은 말들이… 머리맡에 뒤척이는 새벽녘// 생면부지 거지여자가 나를 다녀갔다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아주고 갔다//

위반의 밤 / 조정인
길은 하나의 방향으로 집약적이다// 어둠 속 미열을 따라가면 어디쯤 아열대 실과처럼 내 풍요로운 원죄가/ 주렁주렁 매달렸을// 어둠을 한 홉만 받아다 창 아래에 붓자고, 열망의 안쪽 부스럭거리는 성냥을/ 그어 던지면 아침에 만개해 있는 죄의 목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나선// 길// 살이 더운 실과에 손이 닿기도 전 세 걸음 바깥에서 밀착돼 오는/ 어둠의 젖가슴, 가맣고 단단한 유두가 입 안 가득 물렸다// 금기와 위반이 창궐하는 계절 입술을 비집고 박하보다 환하게 수유되는/ 꽃잎, 꽃잎, 꽃잎… 이것은 언어로만 감각하는 신의 육체성// 이마에 죄 혹은 신의 얼룩을 묻히고 들어선 나의 집 정적으로 세운/ 북벽, 거울 속엔 반인반수를 감춘 꽃나무인간이 있다 뒤돌아서 인간의 창문을/ 아프게 닦고 있는 까만 밤이 있다// 빈 집에서 홀로 기도하는 밤아 너는 나를 용서하지 말라.// 파기의 충동으로 심장 근처가 가려운 봄, 꽃으로 성장한 한 마리 위험한 짐승을/ 기다리는 나는 미구에 다가올 무엇도 뉘우치지 않는다, 사랑하는 외로움이/ 너무 커버린 자에게 용서라는 의복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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