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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쪽지 이야기 / 김정읍

부흐고비 2022. 5. 13. 07:20

별 볼일 없는 듯, 별일을 하는 것이 쪽지이다. 쪽지는 단순하고 간편해서 좋다. 휴대폰이 쪽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요즘도 나는 볼펜과 메모지를 챙겨 다닌다. 무시로 신속하게 전할 수 있는 쪽지, 오발 전송 등의 문제는 예나 다름없이 돌발적인 해프닝이나 웃음을 자아낸다.

짤막한 한 마디라도 꼭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쪽지의 매력은 순수한 감동이다. 퇴직할 때 빨간 하트모양의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가볍디가벼운 상자, 너무 가벼워서 내용물이 더 궁금하다. 수수께끼를 푸는 마음으로 열어보니 알록달록한 쪽지들이 가득하다. 아 무슨 말들을 썼을까, 설레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당신, 맘 단단히 먹고 읽어야겠네.”

남편이 옆에서 겁을 준다. 퇴직하고 떠날 사람이니 무슨 말인들 못쓸까. 삼십팔 여년을 같이 근무한 사람도 있고, 저들의 입사 년도에 따라 각 기 다른 연륜으로 함께 근무한 자들이다. 그동안 내게 섭섭했거나 불만스러웠던 말들을 맘 놓고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나하나 펼쳐 읽어본다. 다행히, 그 동안의 수고를 치하하고 퇴직 후의 복을 빌어 주는 쪽지들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정신없이 분주한 응급실 근무에 지쳐 있을 때, ‘수고 많지’라는 내 한마디에 피로를 잊었다는 쪽지. 점심도 못먹고 동동거리던 분만실 근무 때 ‘얼른 가서 밥 먹고 오라’며 수축 재는 것을 대신해주던 그 날을 기억한다는 쪽지. 불과 보름 정도만 함께 지낸 신입 직원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다는 말과 함께 ‘야베스의 축복’의 글을 담아 놓았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복을 빌어 주는 쪽지들이 한 상자 가득하니, 퇴직 후의 생활도 새로운 보람이리라. 따뜻한 마음들이 담겨 있는 쪽지상자는 내게 귀중한 보물로 간직된다. 때때로 고적한 시간에 한 장씩 펼쳐 읽으며 생동감 넘치던 근무 현장의 열기를 추억한다.

쪽지의 또 다른 매력은 예상치 않은 해프닝으로 웃음을 선사한다. 아침나절에 경찰서에서 다녀가라는 전화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다는 딸의 전화에 나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무슨 일이었느냐고 묻는 그 찰나에도 머릿속에는 온갖 궂은 사건들이 떠오른다. ‘혜인이 지갑 찾아가라는 거였어요.’라는 딸의 대답에 일단 마음이 놓인다.

부랴부랴 경찰서에 도착 한 딸에게 손녀딸의 지갑을 건네주며 경찰서 안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단다. 지갑 안에 들어 있는 쪽지 한 장, ‘이 지갑을 주우신다면 꼭 읽어 주세요.’를 서두로 ‘안녕하세요. 저는 이 지갑의 주인입니다. 제가 만약 이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꼭 연락주세요. 소중한 지갑입니다. 정말로 소중해요. 학생이니까 제발~

돈 가져가지 말아주세요ㅜㅜ. 복 받으실 겁니다! 이 지갑을 주우셔서 찾아주시려면 00으로 전화 주세요.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정말로 감사해요! 2020. 고딩, 000 글.’

카톡으로 전해 진 그 쪽지를 읽으면서 나도 폭소가 터져 나왔다. 멈추어지지 않는 웃음 때문에 숨쉬기도 껄떡거렸다. 지갑을 발견한 택시 기사님도 그 쪽지를 읽고 한바탕 통쾌하게 웃었을까. 아이의 바람대로 그날 택시 기사님은 복 받은 하루였으리라.

제 딴엔 애착이 가는 소중한 것이어서, 언젠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쪽지를 써 넣고 다녔나보다. 초딩 같은 발상의 고딩이라 웃지 않을 수 없지만, 정작 이런 쪽지를 지니고 다녀야 할 사람은 할미인 나 자신이 아닌가.

쪽지의 온도를 아는 사람은 쪽지 남기기를 즐겨한다. 격식 차리지 않아도 무방한 글, 쪽지는 허물없이 주고받는 정표와 같다.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글로 남기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무게를 실은 정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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