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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민정 시인

부흐고비 2022. 5. 19. 07:30

김민정 시인, 출판인, 문학편집자
1976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가 있으며 산문집 『각설하고,』가 있다. 제8회 박인환문학상, 제17회 현대시작품상, 2018년 이상화시인상을 수상하였다. 랜덤하우스코리아 편집장 역임, 문학전문출판사 '난다'의 대표.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 김민정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가 다리 두 개가/ V자 안테나처럼 돌의 양옆 모래 속에 꽂혀 있었다/ 눈사람의 몸통 같은 돌이었다/ 야호 하고 만세를 부르는 돌이었다// 물을 채운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담그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냈는가 하면/ 물을 버린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놔두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먹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밤이었다가 낮이었다가/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네게 던져진 적은 없으나/ 네게 물려본 적은 있는 돌이었다/ 제모로 면도가 불필요해진 턱주가리처럼/ 밋밋한 남성성을 오래 쓰다듬게 해서/ 물이 나오게도 하는 돌이었다// 한창때의 우리들이라면/ 없을 수 없는 물이잖아, 안 그래?//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냄새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 / 김민정
장미만 파는 꽃집 옆 분식 포장마차에서/ 잘게 썬 돼지 살점을 이쑤시개에 꽂아/ 자요, 먹어요, 식어요,/ 맛보라던 아줌마의 앞치마가/ 노랗게 찌들어 있었다/ 노랑이 쩌들면 누런 더러움인데/ 쪄들어 깨끗해지는 건 노란 옥수수라/ 솥에서 펄펄 익고 있는데/ 간만 먹는 내가/ 소금은 털고/ 남의 간이나 씹는 내 앞에서/ 아줌마가 레모나 빈 껍데기로 이를 쑤시었다/ 이가 썩었나 이 사이에 뭐가 꼈나/ 잇새를 파는데 끼룩끼룩 소리가 났다/ 종이컵으로 입 한 번 헹구라니/ 아줌마가 레모나 빈 껍데기로 다시금 이를 쑤시었다/ 레모나 빈 껍데기 그 끄트머리에/ 뾰족한 압침처럼 박혀 있을 냄새여/ 혹여 짐작이나 하시려나/ 당신이 이 쑤시던 이쑤시개를/ 내 코에 갖다 대지만 않았어도/ 자요, 식어요, 나요,/ 당신과 자주는 일쯤은//

가위눌리다 도망 나온 새벽 / 김민정
나를 잠재우는 낯익은 약병들, 태양약국 약봉지들/ 선반 위에 그대로 멈춰 있네/ 물컹물컹 녹아내리는 나른한 시간/ 괘종시계의 굉음은 꼭 한 박자씩 더디 울리지/ 그래도 걱정 없네 나 이제 영원히/ 추수 때의 들판처럼 황금색의 잠을 잘 터이니/ 계산된 알람일랑 끄거나 내던져도 좋아// 손톱이 없는 손가락 손가락이 없는 손/ 손이 없는 팔목을 휘두르며 시방/ 보이지 않는 잉크가 편지를 쓰고 있을 거야/ 언젠가 내가 부탁했던 일이지/ 내 꿈은 지상 모든 꽃모종에 껌을 씹어 붙이는 일/ 내 꿈은 세상 모든 인큐베이터에 사제 폭탄을 장착하는 일/ 설사 내 자궁에서 근종 덩어리 하나 자라고 있다 한들,// 밤새 쓰레기통을 뒤지던 쥐들과 그/ 뒤를 쫓던 고양이들 죽어 나자빠져 있네/ 쥐약을 놓다 때론 그 약을 먹고/ 거품을 문 사람도 있어/ 핑계 없이도 사방천지 무덤들은 늘어가고/ 저벅저벅 나는/ 저들끼리 참 사이좋은 무덤,/ 무덤들 사이를 걸어보네/ 형체 없는 꽃향기에 취해 드라이플라워,/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가는 육신과 ...... 오오/ 욕정처럼 끝끝내 말라붙지 못하는 머리카락/ 내 몸을 담요처럼 둘둘 말아주네/ 칼집에 들어가는 칼처럼 꼭꼭 껴안아주지// 나 여기서 살면 안 돼?//

반투명 / 김민정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눈으로 그가 벽시계를 보고 있다./ 오래 보느라 노려보는 거/ 그렇다./ 한쪽은 어느 하나의 기면이라/ 신은 아침을 믿고 아침은 그를 믿어/ 그는 아직 신을 믿는다./ 다만 아침은 아름다우니/ 그는 혼잣말을 내뱉는데/ 침대 아래로 손에 쥔 둥근 붕대가 미끄러진다./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팔로/ 휘적거리면서 그가 잡으려는데/ 집까지 굴러가는 테니스공이라 하고/ 십자로 칼집을 내었다 하니/ 식탁 의자는 여섯/ 다리는 넷씩이니까/ 도합 스물네개의 테니스공/ 하루 스물네시간 의자 발에다가/ 신겼다 벗겼다 하는 아홉살 자폐이 소년이 있어/ 저녁이면 그의 턱에 흰 수염이 새로 자란다./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발로/ 차는데 그의 이불은 흘러내리지 않고/ 걸쳐진다./ 헤이 거기 모자 바이 여기 모자/ 허공중의 모자는 아직 제 얼굴을 못 찾아/ 쀼루퉁한 입을 부풀려가며 기다리는 함박/ 눈./ 그게 뭐나 되는 것처럼 밤새/ 눈이 내린다./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에/ 눈이 추위로 점점 커진다./ 흰 침대보를 사물함에서 꺼내 터는 새벽/ 누구일까,/ 들었는데 팔이 긴 가면만이/ 저 눈을 감길 수 있다 한 이였는데,//

화두냐 화투냐 / 김민정
눈이 먼 뒤에도 할머니, 손에서 화투장을 놓지 않으시다/ 자거나 먹너나 쌀 때면 살짝 꼭 쥔 주먹이시고/ 보통은 가부좌를 틀고 패를 쫙 펼친 채 살짝 꼭 졸고/ 계시다 어디 어디 보자 그렇게나 뒤집혀 내게로만/ 빤한 패라지만 할머니. 이매조냐 풍이냐 임이 곧 근심이거늘/ 할머니, 흑싸리냐 빨간 싸리냐 죽음이 곧/ 천복이거늘 ㅛ숨이 멎은 뒤에도 할머니, 끝끝내 손에서/ 화투장을 놓지 않으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김민정
장어를 회 뜨다 손을 떠버린 엄마/ 응급실로 데려가 침대에 누이는데/ 담당 의사 이름이 글씨 ‘김근’ 이시다/ 어머, 뿌리 근을 쓰시나요?/ 성함이 제가 아는 분이랑 같아서요/ 그는 바느질로 바빴다/ 시인 중에 있거든요. 金根이라고……/ 바느질로 바쁜 그는 아무 말 없었고/ 그런 말이 있었다./ 비호감이라고//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 김민정
1// 자물쇠 단단한 철창 안에서만 잠들 줄 아는 날 내다 팔기 위해 오늘도 아빠는 포수로 그림자를 갈아입는다 나는 도망치지만 발빠르게 허골아가는 외발자전거는 땅속 깊이 층층 계단으로 쌓아 내린 뼈 마디마디를 뭉그러뜨리며 또 다른 사각의 메인 스타디움 안에 발 빠진다 끝도 없이 페달을 감아대는 페이스 끝에 홈스트레치에 접어들자 관중석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던 나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로 내 나침반을 겨냥한다 어서어서 속력을 더 내렴, 너만 도착하면 완성된 퍼즐 속에서 우리들 되살아날 수 있을 거야 숟가락 들어 한 입 떠낸 아이스크림 같이 희게 휜 등뼈로 사격용 표적 하나 전광판에 부조되어 있다 포물선을 타 넘어가는 장외 홈런볼에 올라탄 내가 엿같이 찰싹 하고 내 실루엣 위에 달라붙는 순간, 탕! 소리와 함께 아빠의 눈알이 10점 만점의 놀라운 타격 솜씨를 자랑하며 과녁 중앙을 홉뜨고 들어온다 아빠가 마스카라 칠해 달군 속눈썹 깜빡거릴 때마다 내 몸에서 부서져 내리는 퍼즐 조각들이 까만 섬유소의 꼬임 안으로 쏟뜨려진다 그러나 낄낄거리며 인조 속눈썹을 떼어내는 아빠, 그걸 방비 삼아 내 키만 한 007가방 안에 나들을 싹싹 쓸어 담고는 자물쇠를 채워버린다//
2// 아빠가 도끼로 007가방을 내리찍는다 아야, 아야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저들끼리 자꾸만 부둥켜안으려는 퍼즐 조각들을 아빠는 시침 가위로 잘게 더 잘게 오려낸다 고춧가루처럼 매콤한 근육가루들이 아빠의 베게 옆에 잠들어 있던 발가벗은 마네킹의 몸 위로 솔솔 뿌려진다 코끝을 간질이는 제 피 맛에 재치기를 안으로 삼키느라 마네킹의 젖퉁이와 엉등이가 부풀고 있는 풍선처럼 똥글똥글해진다 고장난 수도꼭지에서 새어나오는 끈적끈적한 물풀로 손 버무린 아빠가 허겁지겁 마네킹의 몸에 퍼즐 조각들을 갖다 붙인다 잠깐만요 아빠, 설사를 참을 때처럼 뜨거워지는 입이 내 목젖을 쥐락펴락하고 있어요 눈을 뜨니까 난소 뚜껑이 벌어지고 코를 푸니까 피범벅인 태반이 뭉클 쏟아져 나오는 걸요 살 썩고 난 부엉이 같은 내 얼굴에서 솟고라지고 있는 이 털들 좀 보세요 대체 이게 뭔 일이래요?//
3// 지하에 계신 음부와 음모가 침봉으로 내 얼굴에 난 털을 벗긴다 나는야 털북숭이 라푼젤, 짜다 푼 목도리의 털실같이 꼬불꼬불한 털을 발끝까지 내려뜨린 채 울고 있다 울음을 짜보지만 눈물은 흐르자마자 냄새나게 덩어리지는 영일 뿐, 에이 더러운 년 킁킁거리며 내 얼굴을 냄새 맡던 음부가 빨간 포대기같이 늘어진 혀로 내 털 한 가닥 한 가닥을 싸매 핥는다 조스바를 빨던 입처럼 음부의 혀끝에서 검은 색소가 뚝뚝 떨어진다 이제부터 이게 네 머리칼이야, 알았어? 음모가 스트레이토용 파마약을 이제부터 내 머리칼인 털 한 가닥 한 가닥에 찍어 바르더니 참빗으로 쭈쭉 펴 내린다 물미역같이 홀보들한 머리칼을 부르카처럼 치렁거리며 나는 음부와 음모의 손에 잡힌 채 시장으로 끌려간다//
4// 장터에 도착하자마자 껍질 벗겨 통째로 삶은 계람처럼 맨송맨송한 머리통들이 내 주위에 둘러선다 수많은 볼링핀들이 저 먼저 머리 쪼매고 싶어 그 굵은 허벅지로 서로가 서로에게 허벅지후리기를 해대더니 눕자마자 발딱발딱 잘도 일어난다 십자가에 날 뚜드려박는 아빠의 망치질이 다급해지고 엄마가 떨어뜨린 대못이 구경 나온 아이들의 발등을 찍는다// 꼬아 내린 검은 밧줄을 타 오르고 싶어 질금질금 오줌 지리고 있는 오뚝이들에게 이런 젠장, 염병할 놈의 요강 같은 평화 있으라!//
5// 아빠가 나눠준 족집게로 오둑이들 차례차례 내 머리칼을 뽑아댄다 나이스 풀러, 예 좋아요 그치만 한 번에 딱 한 가닥씩이오 머리칼이 뽑혀나가 입 벌어진 모공 속에다 엄마 색색의 셀로판지로 깃대 단 이쑤시개를 꽂아 넣는다 쑥쑥 잘 크거라 내 나무야 엄마가 물조리개로 물을 뿌려 주자 나는 화살이었다가 우산이었다가 낙싯대였다가 장대높이뚜기용 장대로 키 자라는 한 마리의 거대한 고슴도치가 되어 쀼쭉쀼쭉한 털들을 비벼대기 시작한다 울울창창한 가시숲에서 색색의 단풍이 물들어 나리자 여기저기 달아든 담뱃불로 지져진 내가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쏘여진다 색색의 꽃방석을 뒤집어 쓴 채 날으는 고슴도치 한 마리, 사방팔방 불붙은 가시를 발사한다 땀구멍마다 날아든 가시로 아빠는 밤송이가 되어가고 밤송이 브래지어와 밤송이 팬티를 주워 입은 엄마는 간지러움을 참다못해 숨이 꼴깍 넘어간다 밀고 난 겨드랑이 털의 흔적처럼 까슬까슬한 오뚝이들의 정수리 위로 시뻘겋게 달궈진 철골 한 줄 선 굵게 내리꽂힌다 얼굴에 금이 간 핫도그들, 서둘러 몸에 박힌 프랑크 소시지를 먹어치우려 하지만 끝끝내 가시지 않을 탄내를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있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 / 김민정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이니// 어쨌거나 우리 쥐면 한 손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빨면 한 입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썰면 한 접시라는 공통점//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저마다의 심장을 향해 도넛처럼/ 완전 도-우-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 두 짝의 불알// 어머 착해//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김민정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오빠라는 이름의 오바 / 김민정
서울역 계단에서 다다다다 굴렀던 날 일으켜준다더니 그 손으로 자빠뜨리는 오빠를 만났다. 안 그러면 뼈가 상한단다. 이 오빠만 믿어. 코맹맹이 소리로 지나가는 세 번째 앰뷸런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오빠, 자꾸 부르니까 코 막히는 오빠, 오빠는 붕대 대신 두루마리 휴지로 깁스를 해 준다고 풀럭거리는데 비가 와 퉁퉁 불은 휴지들이 고름처럼 내 몸에서 솟아나잖아요. 안 그러면 뼈가 상했을 거야, 이 오빠만 믿어. 코맹맹이 소리로 지나가는 다섯 번째 앰뷸런스, 달이 뜨기 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오빠, 자꾸 부르니까 코막히는 오빠, 오빠는 식염수 대신 정액으로 소독해준다고 싸대고 앉았는데 빨아들이지 말아요 그날의 둘째 날이라 창자가 내 피로 흥건하잖아요 안 그러면 뼈가 상해버렸을 거야, 이 오빠만 믿어. 코맹맹이 소리로 지나가는 일곱 번째 앰뷸런스, 수만 별이 떴다 지기 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오빠, 자꾸 부르니까 코 막히는 오빠, 오빠는 목발 대신 제 허벅다리로 내 다리가 되어 준다고 도끼를 들고 설쳐대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이라더니 아이쿠 무거워라, 지게처럼 내 등뼈가 휘고 포대기 같은 내 자궁이 터지려 하잖아요. 안 그러면 뼈마저 상해버리고 없을걸, 이 오빠만…… 에그 철딱서니야 믿긴 뭘 자꾸 믿으라는 거야. 아무도 찍어먹지 않아 배달시킨 그대로의 춘장처럼 시꺼먼 살점의 오빠가 왕따 당해서는 안 돼 절뚝거리며 사막 너머 아프리카로 향해 가는 길 위의 나는 벌써부터 극성스런 엄마라는 무한대.//

우수의 소야곡 / 김민정
뭐해?/ 칼 갈아/ 무슨 일 있어?/ 칼 간다니까/ 내가 뭐 잘못했어?/ 칼 가는데 뭔 헛소리야/ 칼을 간다니까 그러지/ 나는 숫돌에 칼도 갈면 안 돼?/ 숫돌 산 거 왜 나는 몰랐을까/ 호미랑 낫이랑 개줄도 사왔다 어쩔래/ 안 물을게 마저 칼이나 더 갈아라/ 안 갈리는데 가서 칼이나 더 사오든가// 타고난 끼냐 장기냐 숨은 재능의 여부를/ 어쩌다 식칼 가는 데서 되찾아버린/ 그녀가 그년으로 불리기까지/ 딱 한 사람/ 딱한 사람만/ 지졌다가/ 지쳤다가// 우리 이러지 말자//

저녁녘 / 김민정
1/ 파미르 고원 배후도시인/ 카슈가르에서 돌이 왔다./ 그 돌을 씻었다./ 얼마나 씻은 돌은/ 다 씻었다 할 얼굴이 되는가.// 칫솔로 돌의 얼굴을 솔질한다./ 진한 흙탕이/ 그리 진하지 않은 흙탕이기까지/ 돌은 물을 먹는다./ 물은 돌로 달아난다.//
2/ 마른 수건으로 닦은 돌을/ 재 수건 위에 올려놓는다./ 돌 씻을 때 끼고 있던/ 일곱 개쯤 되는 실반지를/ 그 돌 위에 올려보기도 하였는데// 가두는 일로의 원이라는 등긂에/ 방울방울 왜 갇히나 싶다가도/ 새삼 들어와 앉은 심중이란 게 있어/ 내 배꼽 같은 데가 잘 있나/ 후비게도 되는 공연함으로/ 사람을 참 서글프게 만드는 재주가/ 그 돌에게는 있었다.//
3/ 얼마나 말려야 돌은 애저녁의 돌이 되는가./ 돌을 팰 수는 있어도 돌을 짤 수는 없어/ 드라이어로 살살 말리는 사이/ 돌에 기우는 궁금함의 곤궁함.// 돌이 움켜쥔 물의 무게라 할 때/ 물이 뱉어낸 돌의 온도라 할 때/ 저울을 사고 온도계를 수리하는 부지런함/ 그 바지런함은 왜 쉽사리 부질없어지나.// 집으니 손을 데고 잡으니 돌을 놓치는데/ 검지에 잡힌 물집과 엄지발톱에 든 멍/ 부풀었는데 쓰라린데/ 눈금 저울 속 빨간 바늘의 녹슮이여./ 온도계 알코올 구의 잦은 깨짐이여.//
4/ 잊으셨겠지만 서로의 집에/ 데려다주기 바쁜 시절의 연인들./ 잊고 싶으시겠지만 서로의 집에서/ 안 데리고 나가기 바쁜 시절의 연인들.// 서로 손을 잡고 잡았다 한들/ 잴 수 있었을까 서로의 온도를./ 서로 등에 업고 업혔다 한들/ 갤 수 있었을까 서로의 무게를.//
5/ 우리가 떨어뜨린 것도 아닌데/ 가라앉아버린 돌이 저기 있다./ 목욕물 속에 던져진 비누처럼/ 그럴 흥도 없이/ 시무룩해져버린 돌이 저기 있다.// 저 돌이 아니라 그 돌을 갖고/ 말마따나 말려보는 재주가/ 둘의 둘에게는 필수일지 모른다./ 아침녘의 돌은 참으로 차지고/ 차져서는.//

그럼 쓰나 / 김민정
만나보라는 남자가 82년생 개띠라고 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핏덩이인데요. 이거 왜 이래 영계 좋아하면서. 젖비린내 딱 질색이거든요. 이래 봬도 걔가 아다라시야, 아다라시. 두툼한 회 한 점을 집어 우물우물 씹는데 어느 대학의 교수씩이나 하는 그가 내게 되물었다. 아나, 아다라시? 무슨 쓰키다시 같은 건가요? 일본어 잘 몰라서요.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그들은 웃었고 그들은 소주잔에 젓가락을 찍어 숯이니 숫이니 히로키에게 써 보였고 얌전한 히로키는 빨개진 얼굴이더니 고개를 푹 숙여 버리는 일로 그들과의 대화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동경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와 공부를 했다는 동갑내기 히로키와는 가끔 만나 커피 마시며 시 얘기를 하는 사이인데 그는 윤동주의 시를 나보다 더 많이 외우고 나보다 더 많이 베껴본 터라 내가 모르는 윤동주의 시를 토론의 주제로 삼곤 하여서 내게 반강제적으로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을 사게도 하였는데 그런 그가 한국에 와 처음 배운 단어는 밤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자지라 했다. 자라고 할 때는 자지, 보라고 할 때는 보지. 그렇지. 그건 맞지. 그래서 우리말 번역이 어렵다는 얘기지. 누가 저 문장을 히로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웃음기 없이 술자리도 아닌 데서 듣는 아랫도리 사정이다보니 참으로 거시기하여 거시기하구나 하는데 그 거시기가 뭐냐 물으니 그러니까 나는 합치면 자보자라 하여 권유형의 자보지가 된다며 뻘쭘하니 한술 더 뜨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모텔코리아의 窓 / 김민정
사정 후 덜 싸맨 콘돔을 창에 던지는 건/ 그 남자의 오랜 투구법/ 창을 만나 창에 안겨 창을 더럽히는 계란 흰자/ 축농증의 콧물로 마사지하는 건/ 그 여자의 오랜 미용법// 남자의 어깨 근육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만큼/ 오그라들었다 벌어지는 여자의 모공 속에서/ 싹이 났다 잎이 났다 썩어 문드러지는 감자/ 창 밖으로 툭 던지는 안녕을 기념이나 할까// 서로 마주한 채 쪼그려 앉은 그들이/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오줌을 누기 시작한다./ 누가 더 노랄까 누가 더 지릴까 김을 내며/ 오롯이 합이 되는 유일한 찰나,// 엊저녁 스포츠 신문 한 장 위로 덮인다./ 그들의 얼굴이 차츰 우리로 번져 가듯.//

벙어리… 장갑 / 김민정
사랑할 때 우리의 입은 늘 한목소리였다 사랑할 때 우리의 손은 늘 한 손깍지였다 그로부터 벙어리장갑 한 짝이 내 것이라 배달되었을 때 나의 두 심장은 박수 치는 심벌즈처럼 골 때는 콤비였다 이는 내 것 이 아니었으므로 아나 개야, 개나 물어뜯을 놀잇감 준비하느라 오래도록 당신 참 수고하셨겠다, 죽어라 그니까 개 줄라고//

민정엄마 학이엄마 / 김민정
방 아랫목에 여자 둘이다/ 웃는데, 서로의 등짝을 때려가면서다/ 30분 거리 슈퍼에 가 투게더 한 통을 사서는/ 아이스크림에 숟가락 3개 꽂아올 때까지/ 웃는데, 서로의 허벅다리를 꼬집어가면서다/ 순간 나 터졌어 하며 일어서는 여자 아래/ 콧물인 줄 알고 문질렀을 때의 코피 같은 피다/ 더 아직도 하냐? 징글징글도 하다 야/ 한 여자가 흰 양말을 벗어 쓱쓱 방바닥을 닦으며/ 웃는데, 피 묻은 두 짝의 그것을 돌돌 말아가면서다/ 친구다//

고등어 부인의 윙크 / 김민정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밤의 푸른 냉장고는 고장이 났고 나는 거기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둠으로 불 밝히는 캄캄한 대낮, 갏퀴 달린 내 손톱은 빙산처럼 희게 빛나는 검은 저 삼각주를 박박 긁어대는데 내 음부에서 철철 피 흘렀다. 달콤 쌉싸래한 시럽, 붉은 고 촛농에 젖어 살빛 카스텔라는 곰팡 난 매트리스로 푹 번져가는데 그 위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꿈틀, 꿈틀거리는 이봐요 고등어 부인 씨…… 그녀는 한창 자위중이었다.// 대지의 손을 빌려 뜨거운 혀와 같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속속곳 속곳 속에 물살을 일으키는 그녀…… 출렁출렁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를 이불처럼 덮어쓰고도 푸들푸들 살 떨어대는 그녀…… 그녀가 내게 윙크하는데 새까만 그녀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오더니 가속도가 붙은 볼링공처럼 삽시간에 날 쓰러뜨리며 말했다. '너 하고 싶지?' 네? '에이 하고 싶으면서 뭘.' 아뇨, 나는 아냇. 순간 나는 하이힐 벗어 그녀의 양쪽 뺨을 후려찍고 말았다. '거짓말! 분명 넌 하고 싶은 거야!' 이런 씨발, 아니, 아니라잖아. 참다 못한 내가 그녀의 알주머니를 싹둑싹둑 가위질하자 김말이 속 당면처럼 빼곡히 들어찬 그녀들이 잘린 입 밖으로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이봐 고등어 부인 씨, 난 단지 갑갑증이 나서 살짝 따고플 뿐이라고!// 나는 브래지어를 벗어던졌다. 나는 팬티도 벗어던졌다. 나는 콘택트렌즈와 치아교정기에 인조 속눈썹까지 자꾸만 벗고 또 벗어던졌다. 곤약같이 껍질 벗긴 흰 살점 덩어리, 이마저도 체증이 일어나는 펄펄 끓는 기름 솥단지 안으로 다이빙해 들어갔다. 백살 노파의 미주알처럼 겹겹의 허물이 벗겨졌다 입혀지고 까졌다가 딱지 앉더니 유면 위로 샛노란 튀김옷의 그녀가 솟구쳐오르는 것이었다. 그녀가 딸깍, 층층서랍으로 계단이 난 제 문을 따고 들어가자 화살표처럼 질주해나가는 앙상한 들개들이 있었다. 그녀가 출렁, 젖꼭지를 새순 삼아 양팔 벌린 젖나무가 되었을 때 가지마다 치렁치렁 늘어진 포대자루처럼 젖을 빨아대는 투실투실한 들개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손이 없는 고등어 부인이 날개 같은 지느러미로 비질을 끝냈을 때 쓰레받기 위에는 말린 고추처럼 꼬부라진 황금빛 열쇠들로 수북하였다.//

나비중독자, 프롤로그 / 김민정
누군가 퉤 하고 내뱉은 가래침이 찍 하고 창문에 달라붙는 순간 그러니까 어떤 최초의 발설이듯 팔팔 끓는 사골국물이 내 각막 위로 끼얹어지는 순간,// 설사한 아기의 기저귀는 반쯤 접혀 있었는데 땋아내린 아이의 갈래머리 끝에서 팔랑이는 나비의 발길질은 시작되었는데 이미 나는 나방이 타전하고 간 얼굴 하나 스티커처럼 창문에 새겨놓은 뒤였다// 바라보면 0.1 디옵터씩 시력을 훔치고 만지면 0.1 킬로그램씩 그림자를 먹어치우는 아-만두피같이 썩은 이빨을 감춘 눈먼 아가리의 뻥튀기 맛이라니!// 너와 나를 번갈아 타며 교성을 질러대던 그가 까짓것 찾아주지 뭐, 붓 끝에 검은 헤나를 찍어 죽어도 까기 싫어, 내 엉덩이에 대고 그렸다 지웠다 몽타주를 뭉개는 동안 나는 뒤집개 잃어버린 프라이팬, 그 위에서 고아가 된 계란 흰자처럼 부들부들 떨었는데 떽-떼-구-르-르 굴러떨어지는 쥐눈이콩 두 알// 날마다 유리병 속 쥐눈이 콩은 쌓여가고 틈틈이 펜촉처럼 뾰족한 입매로 벽을 긁는 더듬이가 자랐으니 아침이면 뚜껑을 꿰뚫고 괄약근을 찢으며 트림하는 코 막힌 트럼펫들, 바야흐로 詩!//

나비중독자, 에필로그 / 김민정
책받침을 앞에 두고도 살아 있는 과녁, 나비들은 망각의 환각자여서 날아들고 또 날아들어요. 날갯짓 깊숙이 푸른 멍이 무거워 나비들은 날개를 자르라는 하느님의 고문에도 복종하는 가루받이, 눈꺼풀에 올라앉은 가루처럼 부서진들 품엣 자식으로 행복해요. 나비가 말해요. 살랑, 사랑하니까요.//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지젤, 샛노란 단발머리를 호박색 스카프에 감춘 그녀와 내가 찜질방에 가요. 외항 선원인 지천명의 남편을 따라 스무 살 잔디 같은 나이에 열일곱 제초제 같은 소년의 마미로 칠순 노파의 요강이 된 지젤, 잡년과 썅년과 빌어먹을 년은 그녀만의 한국식 애칭, 살짝 물기 젖은 줄넘기로 채찍질당하는 건 그녀만의 한국식 마사지, 아직도 그녀의 서울은 산후안, 여전히 그녀의 치맛자락은 봄바와 플레나에 감겨 지구 저 반대편에서 땀 흘리는 황금빛 라틴슈즈, 또그닥거리며 그녀가 말해요. 살랑, 사랑하니까요.// 마사이족의 진흙집처럼 졸린 돔과 같은 황토불가마 안에서 나는 그녀만의 한국식 교본, 동요책을 읽어줘요. 자, 따라 해봐,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나비야? 나비는 고양이? 고양이는 야옹이? 야옹이는 나빠요. 지젤은 인천시 만석동 후미진 뒷골목 고갈빗집에서 고등어를 구워요. 석쇠 위의 고등어가 바삭 바싹 연기를 내뿜을 때면 검은 선글라스를 낀 야옹이들 어슬렁어슬렁 밤의 텐트를 치고 랜턴을 켜면 창살 너머 창살 같은 석쇠를 긁으며 임신 칠 개월의 그녀, 지젤이 울고 있어요. 나 뚱뚱해서 안 물어요. 나 요기 애기 있어요.// 태양의 원적외선은 땡볕이었고 속절없이 익어가는 자두 속에서 꿈틀, 나비의 입냄새를 기억하는 애벌레가 생겨먹다 만 꽃대롱으로 삑 소리를 내요. 장님의 엑스선같이 안 보이는 사닥다리를 딛고 오늘도 하느님 저리 안녕하시다니 나 참, 참 평화인 거 맞죠? (어서 그렇다고 해줘요.) 개나리 노란 꽃 그늘 아래 땀 흘리는 책장들은 한 장 두 장 옷 벗느라 한창이고 지방 없이 날렵해진 나비들이 방 한가득 퍼드덕거리며 나침반을 응시할 때 그러나 도무지 잡히지 않는 나비, 그래 다시 시작하는 나비.*//
* '잡히지 않는 나비'는 김상미 시인, '다시 시작하는 나비'는 김정란 시인의 시집 제목.

동지 / 김민정
나는 너를 피해 달아났다. 숨이 가빠 헐떡거리는 사이 너는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좋은 친구 사이가 되었고 네 옆에는 자기 개를 발로 차는 여자가 있었다. 개의 목줄을 쥐 건 너였다. 발로 걷어차이면서도 너와 여자 곁으로 자꾸만 개가 왔다. 최대한 몸을 웅크려 제 살집을 딤섬처럼 오그려 빚긴 하였으나 원체 개가 컸다. 들통에야 들어갔겠지만 끓여서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이 겨울 팥죽처럼 환대받을 국물 이 되기에 들깨는 지난여름의 향이었던 것이다. 큰 개가 짓는 작은 울상 앞에서 평화는 욕실 욕조에도 거실 천장에도 안방 이불장에도 부엌 개수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오늘 저녁엔 조용해질 것이다. 옆집 남자의 전기톱 소리가 낮부터 엔진에 시동을 걸고 있으니 체크 모포를 두른 채 연신 귤이나 까먹는 나여, 무엇을 기다리나, 싸구려 연애소설 속 야한 페이지에나 끼워넣던 피비 케이츠 책갈피보다 더 납작 엎드려서는,//

고비라는 이름의 고비 / 김민정
고비에 다녀와 시인 C는 시집 한 권을 썼다 했다 고비에 다녀와 시인 K는 산문집 한 권을 썼다 했다 고비에 안 다녀와 뭣 하나 못 읽는 엄마는 곱이곱이 고비나물이나 더 볶게 더 뜯자나 하시고 고비에 안 다녀와 뭣 하나 못하는 나는 곱이곱이 자린고비나 떠올리다 시방 굴비나 사러 가는 길이다 난데없는 고비라니 너나없이 고비라니, 너나없이 고비는 잘 알겠는데 난데없이 고비는 내 알 바 아니어서 나는 밥숟갈 위에 고비나물이나 둘둘 말아 얹어드리는데 왜 꼭 게서만 그렇게 젓가락질이실까 자정 넘어 변기 속에 얼굴을 묻은 엄마가 까만 제 똥을 헤쳐 까무잡잡한 고비나물을 건져 올리더니 아나 이거 아나 내 입 딱 벌어지게 할 때 목에 걸린 가시는 잠도 없나 빛을 보자 빗이 되는 부지런함으로 엄마의 흰 머리칼은 해도 해도 너무 자라 반 가르마로 땋아 내린 두 갈래 길이라는데 어디로 가야하나 조금만, 조금만 더 필요한 위로는 정녕 위로 가야만 받을 수 있는 거라니 그렇다고 낙타를 타라는 건 상투의 극치, 모래바람은 안 불어주는 게 덜 식상하고 끝도 없는 사막은 안일의 끝장이니 해서 나는 이른 새벽부터 고래고래 노래나 따라 부르는 까닭이다 한 구절 한 고비, 엄마가 밤낮없이 송대관을 고집하는 이유인즉슨이다//

열쇠魚 / 김민정
밤마다 나는 어항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요/ 들리거든요 금붕어들의 반짝거리는 수다// 이리와,/ 이리로 와서 우리랑 함께 뻐금거려보자/ 우와, 정말로?// 나는 주걱으로 죽어라 내 입술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밤마다 학의 긴 부리 끝에 한 꿰미로/ 똥구멍에서 주둥이까지/ 한 큐에 꿰어버리고 마는 금붕어들// 매일 나는 새로 산 금붕어를 삶아 어항 속에 풀어두어요/ 때때로 플라스틱 금붕어들이 산란하기도 한답니다//

봄나물 다량 입하라기에 / 김민정
있을 때 사둔다/ 무침으로도 버무리고 국으로도 끓이고/ 죽으로도 불린다/ 봄이 가면 냉이는 잡초 따위라지 않는가// 봄처녀도 아니면서,/ 나물 이름 보고 나물 이름 따라 읽는/ 한글 떼는 중에 아이도 아니면서,/ 애나 개가 생기면 아꼈다 불러야지/ 지천으로 나물 향이나 퍼뜨릴 욕심으로,// 냉이는 왜 냉일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부르면 명찰이지/ 냉이야 쑥아 달래야 두릅아/ 개중 씀바귀는 씀바귀야 씀박아/ 호명으론 좀 쌉싸래해서 별로다 싶고/ 손맛보다는 이름 맛이 나물 맛이라/ 국산 냉이 두 움큼 크게 집어/ 달아주십사 하니 2960원// 산에 가 뜯어봐야 알까나/ 장에 가 팔아봐야 알까나/ 싼 건지 비싼 건지 도통 가늠이 안 되는/ 냉이 더미를 놓고 나물 값을 매기는/ 플러스마트 나물 코너 아저씨가/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 적에// 냉이는 그냥 냉이라요/ 한자로는 제, 체재라 부른다는데/ 보니까 겨잣과 식물이라대요/ 겨자는 노랭인데 냉이 어디가 노란가/ 아무리 봐도 그건 나도 모르겠소// 계산대 뒤로 줄 선 나를 끝끝내 찾아와/ 휴대폰 속 동아백과사전에 뜬 냉이를/ 굳이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러한/ 아저씨의 친절이 내일의 시나 될까 싶었는데/ 저기 저 참으로 간 아저씨의/ 손으로 코 푸는 소리 들린다//

이별 장면 / 김민정
우리는 남자와 여자여서 함께 잠을 잤다/ 방은 하나/ 침대는 둘/ 양말은 셋/ (여자는 손수건 대신 양말 한 짝으로 코를 풀었다지 아마)// 잠은 홀수여서 한갓졌다/ 발이 시리니 잠이 안 왔다/ 깨어 있으려니 더 추웠다// 호텔 체크아웃을 누가 할 것인가/ 숙박 요금이 3일 치나 쌓였으니/ 이쯤 되면 폭발적인 곁눈질이다//

선우일란, 빵의 비밀 / 김민정
순간의 어떤 스프링 같은 용솟음을 치기 어린 허기로밖에 말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먹었다 가라앉지 않는 체증으로 날마다 삶을 증거로 하는 재미, 쓸쓸하여 전봇대마다 속을 게워낸 흔적 동그마니 개와의 영역 다툼에 혈안이던 어느 날, 종아리에 난 이빨 자국을 보았다 너덜너덜 남은 살점을 떼어 먹기 위해서라도 넌 또 오리라, 피 흘리며 흘린 피 마를까 머큐로 크롬을 부어가며 빈혈의 내가, 쓰러지는 척의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주둥이만 남은 비루먹은 개로 어디론가 업혀가고 있었다 야! 왈! 왈? 이봐! 왈왈! 왈왈? 말은 곧 짖음이었고 밀가루를 옴팡 뒤집어쓴 누런 러닝셔츠의 사내가 대나무발을 헤치고 윔블던 베이커리로 들어서는데 아픈 개 소리로 신음하는 그녀, 선우일란이 퇴주 그릇같이 넘데데한 젖퉁이를 출렁이며 텔레비전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갓 구워낸 빵들은 땀내도 참 향긋하구나 효모의 숨쉬기 운동으로 부풀 대로 부푼 사내의 자지가 빵 밖으로 삐져나오는 소시지인가 싶더니 자이로드롭에서 떨어지며 질러대는 사내의 비명에 오우-마이-갓! 튜브용 마요네즈를 흔들어 짜듯 사방팔방 슈크림이 튀었으나 순간의 어떤 닻 같은 드리움을 허기 어린 치기로 밖에 말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굶었다//

흔해빠진 레퍼토리 / 김민정
약속이나 한 듯 수십 대의 러닝머신 위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뛰고 있다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의 시선은 정면에 달려있는 LCD 모니터에 꽂혀 있다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은 한국시리즈 두산과 삼성의 플레이오프 1차전 경기를 보고 있다 약속을 못 했기에 나혼자 야생대탐험을 보고 있다 붉게 구운 점토처럼 화면 가득 신열로 빚은 쌍봉낙타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쌍을 이뤄 교미를 하고 있다 나 몰라라 주저앉은 암놈 위로 나 먼저야 수놈 두 마리가 올라탈 때 밀려난 한 마리가 봉긋한 슬픔의 가슴 두 짝을 출렁이며 화면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뭐야, 나, 나? 주춤 뒤로 물러날 때 저기요 러닝머신 멈췄거든요, 줄을 서 기다리던 여자가 내가 내린 러닝머신 위에 올라타자마자 나 잡힐라 채널을 돌려버린다 약속이나 한 듯 야심만만을 보며 히죽거리는 여자의 엉덩이께로 슬금슬금 다가서는 낙타의 꼬리를 안 돼, 끌어당기자 쌜쭉하니 웃는 낙타의 입에서 똥 냄새가 난다 너도 그처럼 도통 씻을 줄 모르는구나… 사우나 온천수는 돌에 넘쳐흐르고 보글보글 뀌어대는 물방귀로 너의 허기를 이해할 때 나는 말랑말랑한 내 젖꼭지를 물려 널 잠들게 한다 꿈을 꾸는 너는 차곡차곡 접힌 튜브인 양 오그라들어 풍선처럼 가벼이 내 손에 쥐여지고 순간 나는 두둥실 날아오른다 더 깊은 밤 속으로 보다 어두운 송장처럼 안 보여야 들리는 목소리들 가운데서 나는 네모를 그리고 관을 열어 네가 씹다만 육포를 찾아낸다 기억의 짭짤한 마우스피스는 병 앓는 잇몸처럼 냄새에 곯는구나 고린내 나는 집게 핀을 머리에 꽂았을 때 너 이전의 너는 이빨의 얼굴로 환히 웃고, 에구 구려라 하품하며 깨어나는 꿈 밖의 낙타는 너 이후의 너인지라 눈뜨자마자 변기 위에서 변기야 무너져라 아침을 맞는다 화면 너머로 본방처럼 재방송되는 야생대탐험을 보며 어느새 낙타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 교미 직전의 어제로 오늘을 사는 너, 약속을 못 했기에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시론(詩論) / 김민정
선 본 남자에게 꼭 한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더 지난 번 터미널 지날 때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네, 버스들이 밤이 되니까 집으로 다 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시 쓴답시고// 네?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지난 번 '두사부일체' 볼 때 한 번도 안 웃었지?/ 네, 한 번도 안 웃었어요, 안 웃겨서// 더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날 밤 나는 남자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안 맞아줘서 고마워요.// 안 그랬음,// 시를 몰랐을 테니까요//

1월 1일 일요일 ㅡ곡두* 1 / 김민정
낮에는 도끼와 톱을 봤고/ 밤에는 꿩과 토끼를 봤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 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눈 내렸다./ '머리'로 가 붙을 수 있는 대목은 다/ 덮이었다./ 더도 덮일 것이었다.// 쑥차 마시면서/ 쑥대머리 들었다.//
* 곡두: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실체가 없는 헛것, 환영.

사발이 떴어 ㅡ곡두 2 / 김민정
일곱 살 때 집 마당에서 키우던 개의 목덜미를 쓸고 있는데 난데없이 옆집 기승이 아줌마네 집 안방에서 흰 사발이 뒤집혀 허공중에 뜨는 것을 보았지. 국 먹을 때 흰 사발을 내려다만 보았지, 뒤집힌 흰 사발을 올려다보기는 처음이라 내 머리 어디쯤 젖지 않게 그 흰 사발을 우산으로 쓰자면 쓸 수도 있겠구나 목을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눈이, 희지도 않게 뿌옇게 쏟아지는 함박눈이 너무 더러워서 내 입은 차마 못 벌리겠고 눈을 떠서 눈이나 피하는데 연탄집게로 연탄 대신 쥐를 집어갖고 광에서 나오는 엄마에게 사발이야 사발이 떴어 사발 맞다니까, 사발 타령이나 하는데 그 낮에 기승이 아줌마 혼자 떡국 한 그릇 자시고 주무시다 주무시던 그대로 상여 타고 나갔다는 거지. 그 상여 꽃상여 되게 예뻤는데 상여 나갈 때 광목으로 된 어깨끈이 느슨해지면 추어올리던 아빠의 폼이 꼭 코 훌쩍대로 아이 같았는데 여직도 침대 매트리스 고를 때마다 그 상여의 두께가 이만큼이었나 저만큼이었나 재게 된다는 거 뭐 내가 가늠하는 깊은 수면의 질은 언제나 속곳 그 속속곳인데 상여 같은 침대면 수면제 없이도 술 없이도 잠이려나. 돈이겠지. 개뿔 돈일 거야, 아마 혼자 드신 점심상이었으니 고명은 안 해 올렸을 거야. 깨끗했거든 흰 사발. 불어 흰 사발에 붙은 떡은 잘 떨어지지도 않으니 누가 알겠어, 그 흰 사발의 속사정. 근데 그 흰 사발에 목숨 수(壽) 자 같은 거 퍼런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을까. 그랬을까. 그날로부터 20년도 더 지나 한국은행 취직해서 배 한 상자 들고 집에 인사 온 기승이 오빠에게 아무리 물어도 흰 사발은 뉘 집 사발이냐 하는 표정으로 얘 왜 이래요 어머니 하고 우리 엄마나 쳐다보는데 요즘 얘가 사발 모으잖니 요즘 얘 사발에 미쳤잖니, 엄마는 왜 사발도 모르면서 사발 안다는 뉘앙스를 풍기냔 말이지. 포인트는 사발이 아니고 상여고 소창인데 두 필 사서 그 한 필은 황현산 선생님 1주기 추모식 때 밟고들 들어오시라고 2층에서 입구까지 층층 나무 계단 물 흘리듯 깔았고 남은 한 필은 옷장 속에 넣어두기만 한 참인데 결혼한답시고 함 띠로 두를 것도 아니고 애 있어 기저귀 오릴 것도 아니고 행주로나 들들 박아야지 하는데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게 사람이니까 그치 그 흰 사발, 리틀엔젤스예술단 어린이합창단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캐럴 부를 때 쓰던 모자 같은 그 흰 사발, 뒤집혀 있어서 뒤집혀 있음으로 이날 입때껏 살아 있나 그거 뒤집을 작심에 그거 뒤집어 떡국 담아 먹을 욕심에 사들인 흰 사발이 얼마 전 부엌 찬장 세 칸을 넘겼다는 얘기지.//

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시인들 ㅡ곡두 3 / 김민정
핸드백 정리를 하는데 가방을 열고 속 지퍼를 열면 꼭 생리대가 한두 개씩은 들어 있는 거지. 무엇이 불안할까. 아직은 늘 불안이지. 불안한 게 좋은 거야. 불안해하지 않으면 꼭 불행한 일들이 닥치던 거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 소수 속의 극소수로 만나 라멘 먹기 전에 아멘 하면 알아먹던 사이들. 웃자고 만난 사이들, 안 웃겨서 죽자고 헤어지는 사이들, 함께 쓰는 사이들, 각자 지우는 사이들, 쓸 건 안 쓰고 지울 건 너무 지워 젖은 백지처럼 밀리는 사이들, 얇아지는 사이들, 비치는 사이들, 덧대지 않는 사이들, 그 사이에 새들, 새다 하면 어느새 시들, 사랑은 쫓아가는 사람이고, 사랑은 좋아가는 사람이고 사랑은 놓아주는 사람이고 사랑은 날아가는 사람이고, 사랑은 그걸 후에 혼자 아는 사람이고, 안녕 오늘의 새, 네 새, 내 새, 그 새는 안 보고 그새 시는 안 쓰고 수만 쓰는 사람들, 시들해지는 시들, 그 시는 안 쓰고 심만 심는 시인들, 시심이 진심일까? 시심은 변심이지. 나 알죠? 내 시 몰라요? 모르는데, 요. 나를? 내 시를 모른다고? 죽은 시인은 따로 있는데 장례식장에서 제가 죽은 것도 아니면서 저를 묻고 제 시를 말하는 좆같고 엿같은 사이들. 그래봤자 잊고 들어봤자 잊힐 사이들, 징그러 아주 그냥 지긋지긋해 집에 와 김치 넣고 고추장떡이나 부치며 소주나 따르면서 왜 훌쩍 떠나버렸을까, 그게 그러니까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어떤 들림이 절로 등을 들어 올리기는 했을 것 같은데 그 족집게 같은 게 그 삽 같은 거 그 포클레인 같은 거 어디 가서 사나 어디 가서 찾나 영 가버렸으니까 내가 사는 동안 안 오는 게 맞을 테니까 작년에 죽은 수경 언니의 전화 목소리나 반복 재생하여 듣는데 왜 다 태어나서 이 고생일까? 뚜뚜 끊어지는 전화…… 그래 미친놈은 어딜 가나 있다는 소리, 미친년은 찾을 것도 없이 나란 소리, 찬물이 덥다는 소리, 무거움이 가벼움을 못 듣는다는 소리, 말 좀 하자면서 마스크 안 벗고 숨만 쉬는 소리,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워지다가 가까운 사람과 멀어지는 소리, 낌새를 씹새로 읽는 소리, 소금 항아리가 온대서 지금 못 나가요. 바쁨을 못 숨기는 소리. 고백은 숨기고 고백하는 소리, 투명한 바람 소리와 투명한 바람기의 소리, 서랍을 열 때마다 서러워지는 소리, 내상이 깊을수록 내성이 깊어지는 소리, 그만도 못할까 하는데 그만도 못하다는 소리, 오늘 포도 따러 가자 하니까 다 잊고 또 당장에 설레어버리는 소리, 소리 하다 소리 듣다 머리카락 같은 걸 흘렸는데 제멋대로 구부러져 바닥에 느닷없이 하트 같은 게 그려질 때가 있지. 무조건 져서 이기게 하는 하트, 『17080 불후의 명곡』 앨범 속 「피버스」를 "열기들"이라고 번역한 게 귀여워서 이어폰으로 듣고 가는 총알택시 뒷자석 내 품에는 막 퍼 담은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안겨 있지. 끓여 두어 시간 식힌 비지가 담긴 봉투처럼 말랑하고도 따뜻한데 먹을 수는 없는 음식물 쓰레기봉투. 봄밤도 아닌데 창문 열고 바람아 와라 그러고 보면 저 달이 저 별이 내 목에 걸리고 내 귀에 걸리지. 달랑달랑 액세서리 좋아하니까 버티는 나날이란 얘기지.//

꿈에 나는 스리랑카 여자였다 ㅡ곡두 5 / 김민정
등에 업은 포대 자루에 의지한 채/ 찻잎을 땄다./ 할당량이 주어져 있으므로/ 있는 대로 땄다./ 닥치는 대로 땄다./ 빠르게 땄다./ 많이 땄다./ 따기밖에 더 할밖에, 그러니/ 죄다 땄다./ 다 땄다.// 잎을 따면 그 즉시로 새잎이 돋았다./ 징글징글한 녹색의 횡포였다./ 무서운 건 노동이 아니라/ 나무였다./ 나무가 많으니 사라지는 건/ 손이었다./ 20킬로그램을 채우면 2천 원을 건네는/ 것도,/ 손.// 포대 자루를 탈탈 털었을 때/ 잘린 여자들의 손이 우르르 쏟아졌다./ 정육점 빨간 대야 위에/ 다소곳이 쌓여 있던 돼지 발들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소리처럼/ 와르르/ 꿈이랍시고 깨어났는데,// 네트 사이로 흰 배구공이 오가고 있었다./ 통 하면 통 하는 흰 배구공의 랠리/ 까무잡잡한 피부에 바싹 올려 묶은 곱슬머리에/ 금빛 링 귀걸이를 한 스리랑카 선수들이/ 스파이크로 내리꽂히는 흰 배구공에 자꾸만/ 맞고 있었다./ 한 템포 빠르게 뻗지 못하고/ 두 템포 느리게 갖다 대던 그이들의 손/ 것도,/ 두 손에/ 손들.// 게임 스코어 3 대 0/ 제19회 아시아 여자 배구 선수권 대회에서/ 퍼펙트 승리를 기록한 한국 선수들이/ 손에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쳤다./ 내미는 손들이 모여 원이 되는 함성/ 그 너머로/ 굽슬굽슬하고 시꺼멓고 긴 제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따다,/ 닥치는 대로 따다,/ 빠르게 따다,/ 따기밖에 더 할밖에. 그러니/ 죄다 따다,/ 그 즉시로 풀기만을 반복하던/ 스리랑카 선수의/ 것도,/ 손.//

쾰른성당 ㅡ곡두 8 / 김민정
우리 둘의 이름으로 초를 사서/ 우리 둘의 이름으로 초를 켜고/ 우리 둘을 모두 속에 섞어놨어./ 모두가 우리를 몰라./ 신은 우리를 알까./ 우리 둘은 우리 둘을 알까./ 모두가 우리가 우리인 줄 알겠지./ 우리 둘도 우리가 우리 둘인 줄만 알겠지./ 양심껏 2유로만 넣었어.//

이제니가사람된다 ㅡ곡두 10 / 김민정
살아가는 사람이 먼저일까, 죽어 있는 사람이 먼저일까. 시는 나일까, 내가 시일까, 시란 나는 누구이기에 “이제니가사람된다”라고 누군가가 갈긴 메모를 “이제 니가 사람 된다”와 “이제니가 사람 된다”로 갈라 읽으며 낄낄대고 앉았나, 웃긴 걸 좋아하는 나. 웃긴 사람을 편애하는 나. 누군가 더럽게 웃긴 년이라고 할 때 그 말을 칭찬으로 알아먹는 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 친구가 닭집을 개업했을 때 애들은 그런 데 가는 거 아니다 하는데도 시루떡 쪄서 가는 엄마 손 모자라다며 엄마 지갑 들어주겠다는 명목으로 거길 졸졸 따라간 데는 체인점 홍보대사가 코미디언 엄용수라는 얘기를 미리 들어서였다. 그때 그 시절 코미디와 개그의 차이를 아는 정의로 엄용수는 연기란 걸 했을까. 알았던들 우리에게 설명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겠겠지.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에서 김형곤과 함께여야만 무대가 무대였겠지. 코미디언 엄용수를 사이에 두고 양옆에 앉아 사진을 찍은 엄마와 아줌마는 1952년생 용띠. 사진 뒷장에 엄용수 아저씨와 함께라는 메모는 둘 중 누가 쓰신 거라니. 이제 와 검색해보니 엄용수는 1953년생 뱀띠. 그러고 보면 1988년 10월 17일에 찍힌 이 사진은 어쩌다 31년이나 흘러 파주 사는 내 집 건넌방 서랍에서 내가 다닌 인천남부초등학교 졸업 앨범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게 된 걸까//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 ㅡ곡두 18 / 김민정
미주알이 빠져 미주알을 넣어주는 병원에 가니 의사 이름이 김태형인 거라. 아랫도리 까는 게 끝이 아니고 아랫도리 까는 게 시작인데다 모로 누워 무릎을 턱에까지 붙이고 공이 될 요량으로 공처럼 몸을 마는데 느낌 좀 이상할 겁니다, 쑥 하고 들어가요, 자자 숨 참으시고, 금방 끝납니다, 네, 끝났어요 하시는데 순식간에 오므린 입처럼 쫀쫀한 아랫도리인 거라. 소의 볼깃살이라 할 그 살점이 대체 뭐라고 앉으면 풍선처럼 터질세라 서면 바지 밖으로 삐져나올세라 어찌어찌 모범택시 불러 서교동 SC제일은행이 1층에 자리한 병원 건물에 내리기는 하였으나 새삼 내가 여기 왜 왔나 이제 와 능청이나 떨고 싶은 거라. 개업한 남편 친구 병원에 뭐 책잡을 삐뚤어진 액자라도 없나 째진 눈의 아내 친구처럼 사정없이 두리번거리기나 하는데 책상 위에 피케티 얼굴을 띠지로 두른 「21세기 자본」이 놓여 있는 거라. 어머 이 책 읽으시나 보네요, 저 다니는 회사의 계열사에서 나온 거거든요, 참, 저희 사장님도 이름이 태형인데 성이 달라서 성이 강이긴 한데. 누가 물어봤나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저 혼자 계속 씨부려대는 가운데 시 쓰는 김태형 선배도 불러냈다가 희곡 쓰는 김태형 출판사 제철소 대표도 불러냈다가 프랑스에서 조향 공부하고 온 김소진 소설가와 함정임 소설가의 아들도 김태형이라며 그 조카 이름도 불러냈다가 엊그제 일산 백병원 응급실에 위경련으로 실려 갔는데 유난히 친절했던 의사 이름도 김태형이라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세상 아는 이름 태형은 죄다 불러들이기에 바빴던 나는 대장항문과 김태형 씨가 보라는 대로 정지된 화면 속에 시선을 두기나 하는데 그 안 가득 너무 붉음이고 그 한가득 죄다 붉음이라 빨간 토마토 반 갈라 숟가락으로 속 퍼내서 모으면 딱 이 색이라는 둥 믹서에 빨간 피망 넣고 갈다 잘 갈렸나 들여다보면 딱 이 색이라는 둥 딴청에 능청이나 부리는데 있죠, 너무 피곤하게 살지 마세요, 과로하면 이거 또 빠집니다 하시는 대장항문과 담당의 김태형 씨에게 일순 얻어먹은 게 일명 감동이라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또 올게요, 곧 올게요, 단골인 철원양평해장국집 나설 때처럼 그리 말하는데 이리 살짝 덧붙여주시기를, 다행히 치질은 없으세요.//

수경의 점 점 점 ㅡ곡두 22 / 김민정
“빽빽하고 촘촘했던 것들이 슬쩍 의뭉하고 슬픈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간 듯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네가 온통 그러하더라…” 그래주니 대낯에 막걸리 몇 통을 비울 수밖에요… 거나하게 취해서는 구두 양손에 들고 맨발로 아파트 14층까지 계단을 걸어… 내 집 아닌 누구의 집도 아닌 그 먼 집에서 누구세요? 아 누구네 집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올라갈 때의 행방은 왜 내려올 때면 불명이 될까요… 휘청휘청 현기증 짚기 허적허적 허방 딛기… 살이 오른 꽃들에 허리 휘는 가지처럼 유연한 몸의 곡선을 섬기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그저 눈물만 났던 오늘… 지겹다는 느낌이 슬픔인 걸 알아버린 오늘… 언니가 멀리 있어 언니에게 부릴 수 있는 엄살… 언니가 가까이 있으면 내게만 부리고 말았을 몸살… 언니는 왜 내게 슬픔을 온몸으로 입어라 해서 이렇게 날 슬프게 할까… 딱히 힘에 부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봄이어서 봄인 탓에 언니에게 부렸을 투정… 봄이 전부여서일까 봄만 빼고 전부여서 그랬을 것도 같은데 그건 다 언니가 가르쳐줘서 내 안에 허용하게 된 말줄임표 때문이라고 떼를 쓴 적도 그러고 보면 있었다 언니야… 마침표라는 땅. 쉼표라는 하늘, 그 사이에 온전치 못한 우리니까 해보다 아니면 말든가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든가 할 수 있는 능동의 자유로움이, 그 천진이 우릴 시인이게 하는 걸 거라고 맘껏 찍게 했던 점 점 점 여섯 개… 교과서대로라면 그다음에 마침표 찍는데 교과서대로가 아니라서 나는 그다음에 마침표 안 찍는다 언니야… 점 하나에 추억과 점 하나에 사랑과 점 하나에 쓸쓸함과 점 하나에 동경과 점 하나에 시와 점 하나에 언니, 언니 * 언니야… 혼자 갔을 먼 집에서 검은 바둑돌로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귀 두 개 놓아가며 먼저 놀고 있어라 언니야...... 그거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리다 만 얼굴로 배지 만들어 내 오늘 가슴에 달았으니 뾰족하여라 배지의 핀이여 넘어지면 찔려버릴 심장이기에 꼿꼿하게 직립하게도 만드는구나 언니야… 나는 귤 박스를 앞에 놓고 귤껍질을 벗기는데 한 번에 열두 알도 족히 먹었던 굴인데 나는 먹지 못하고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는 먹을 수도 없어 귤의 껍질을 벗겨 한 짝만 남은 한 짝의 커피색 스타킹에다가 귤껍질이나 모으는데… 향이네 언니야… 향이라서 피워 나누고 향이니까 피워 가진다 언니야… 사람들의 수다스러운 음성 무엇 하나 접시에 담아다 줄 수 없으니 나 혼자 가진다 언니야… 욕조를 채워가는 뜨거운 물속에 던진 망 굴 망 퍼져가는 망 맺히지 않는 망 잡히지 않는 망의 망 속 물을 낚아채는 손 물도 꿰맬 수 있는 어리등절한 사기… 밤새도록 여린 짐승 하나가 창밖에서 서성거리기에 성냥에 불을 붙였는데 커져서는… 번져서는… 더는 쓸 수가 없겠다 언니야… 침침해서…//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 ㅡ곡두 24 / 김민정
민정아 하셨다./ 네 하였다./ 보리다 하셨다./ 네 하였다./ 고양이다 하셨다./ 네 하였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겪은 것들을 좀 생각해라.// 시간 나면 여 와서/ 며칠 있다 가거라./ 아무 생각 안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즐거운 일을 네가 다 한다./ 숨 쉬어가면서./ 뭐 드러 급하게 하냐./ 한 박자 늦춰가면서.// 봄이니까./ 꽃 피잖아./ 바람도 불고./ 새도 울어.// 민정아 천천히 일해라./ 성질대로 하지 말고./ 서둘 것은 없다./ 대략 알면 된다./ 책이 중헌 게 아니다./ 알았쟈?// 거미줄만 보러 다닌다 하셨다./ 네 하였다./ 김용택 선생님은 전화를 끊고/ 거미줄을 보러 또 나갈 거라 하셨다./ 네 하였다.//

그 들통 ㅡ곡두 27 / 김민정
장석남 시인이 형과 둘이 나무를 해다/ 산속에 작은 집* 하나 지었다 해서/ 슬렁슬렁 가보게 된 셈이다.// 닿고 보니 컴컴하고도 깜깜함이/ 무언지경만 같았는데/ 개가 있었던 것도 같고/ 그 개가 없었으면 하는데는// 아무려나 들통/ 그 들통이/ 내 손에 들려 있기도 했거니와// 푹푹 고더라고/ 찌그러지고 우그러진 들통에다/ 엄마가 새벽부터 내내 끓이더라고 그/ 들통/ 여럿이들 밤부터 아침까지 퍼 먹더라고 그/ 들통/ 아무려나 들통// 그 빈 통을 가져간다니까/ 웬만하면 놓고 가라 하고/ 왜 안 갖고 왔냐 해서/ 놓고 가라 했다니까/ 별나라 그 못난 걸 어따 쓴다니 하고// 10년도 더 지난 얘기임서도/ 들통 안 준대?/ 여적 되묻는 것이 강화도 여자인 엄마고/ 그 들통 버릴 리는 없고/ 어디 골동품이 되어 있으려나?/ 여적 답하는 것이 덕적도 남자인 시인이고// 그 들통을 섬처럼 드문 멀리에 두고/ 안부를 묻는 새로운 방식이다 할 적에/ 인천 섬것이나 꼭 인천의 섬것만은 아니다 하는/ 두 사람의 말본새는 용케도 닮은 데가 있다.//
* 시인은 그 집을 용슬제라 한다.

다른 이상함은 없다 ㅡ곡두 28 / 김민정
“개새끼 못 잊어”* 라고 하셨는데 나는/ “못 잊어 개새끼”를 제목으로 올려 붙였다.// 저녁참으로 만둣국을 끓여 먹고/ 개수통에 담아둔 놋대접 위로/ 수전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 그러했는데 그대로 놔둔 참이었다./ 저 스스로는 도저히 소리를 못 내는/ 물방울/ 작금의 내 저간에서 들을 방도는/ 수전을 덜 잠그는 일 말고는 없어서/ 객기일지언정 그 헐거움의 미덕/ 써보면 알리라 가만히 지켜보던 참이었다.// 책상 위 스탠드를 끄지 못한 채로/ 책상 아래 스탠스를 1도 두지 못한 채로/ 잠이 들어서는 두 다리가 저려서는 그래서는/ 김민정 씨, 나 최승잔데요./ 나 최승자라고요./ 내가요, 책을 읽고 있었는데요……// 전화기를 들고 벌떡 깨어나서는/ 쌀뜨물같이 뿌옇던 유리창을 바라보고서는/ 개수통 밖으로 넘쳐흐르던 개숫물/ 수전부터 왜 잠갔는지는 알 수가 없어서는//
* 최승자 시집 『즐거운 日記』(문학과지성사,1984)속 「Y를 위하여」에서.

 

잘 줄은 알고 할 줄은 모르는 어떤 여자에 이르러 ㅡ곡두 32 / 김민정 

의사는 더 진중해지고/ 여자는 더 자발맞아지고/ 의사는 모으고/ 여자는 조각내고/ 의사는 나아가고/ 여자는 주저앉고/ 그래서요/ 그래서일까요/ 의사는 궁금한 게 아니라/ 궁금한 척이고/ 여자는 오줌 마려운 게 아니라/ 오붓하고 싶은 척이고/ 의사는 말하라 하고/ 여자는 그린다 하고/ 그려보니/ 4층 옥상에 심은 공작단풍나무 아래/ 발가벗은 채로 웅크려 앉은 아이고/ 네가 사준다 하더니 안 사 줘서 결국/ 내가 사 입은 슬립은 어디 갔냐 하면/ 슈퍼맨 망토처럼 내 목 뒤로 내가 묶은 뒤고/ 살짝 여유가 있어 걸면 걸릴 거라/ 내가 걸릴 데를 내가 찾는 이 배려는/ 나무야 부러지면 너한테 미안하니까/ 다이어트를 부르짖는 당위가 되고/ 개미들 기어들어 거기로 내 거기로/ 떼를 지어 오글오글 내 거기가 따갑다고/ 씨발 꺼지라니까 이 개미 새끼들!/ 후지지 참 내가 꼬진 거 다 아는데/ 이렇게 작은 지랄들이 지지고 더 지져댄다니까/ 개미들이 뭐라고 근데 그 개미들이/ 뭐긴 뭐거든 그렇거든 그리고 이젠/ 내가 먼저 짓밟을 차례거든 더 이상 나는/ 내 어깨가 니들 엉덩이에 깔리도록/ 그날처럼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거든/ 나는 컸어 나는 더는 어리지도 않아/ 골무를 끼고 내 속을 후비고 싶다고 했지/ 그럼 내가 덜 아플 거라고/ 그럼 니들 손은 더 깨끗할 거라고/ 때가 탄 골무는 빠나/ 살 벗겨진 골무는 버리나/ 일상과 망상 사이/ 골무만 보면 쭈뼛쭈뼛하다가도/ 골무만 보면 또 환장을 하는 게,/ 고우니까/ 곱다고 색색 그거/ 길 건너 한복집 언니네 가게에서/ 꼬깔콘 먹는 시늉하며 훔쳐냈던/ 색동 입힌 골무도 내게 아직 있지/ 못 버리지/ 어떻게 버려/ 기억인데/ 기념 아니고/ 기록이어야 해서/ 통영 나전 반짇고리/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송방웅 선생 거/ 사 달라고 그래서 조르는 건데/ 모이니까/ 모을 수 있으니까 그럼/ 꺼내 볼 수 있으니까/ 안 잊으려고 절대/ 안 잊히려고/ 가만두지 않는 게 아니라/ 가만히 두고 보려고/ 보면 볼 수 있음으로/ 이기니까/ 그 골무와 이 골무는/ 태생이 다르다는 걸 아는/ 덤덤함을 덤으로,/ 이겨왔지/ 무던함의 무덤/ 그 둥글넓적한 얼굴로/ 자랐구나 잘 다 컸구나 너/ 그럼 니들만 자라고 나는 주냐/ 말 걸지 마라 입냄새 지독했으니까/ 쪽가위로 잘라내고 싶은 입이었으니까/ 죽으로 니들 주둥이들 닥치고 있어라/ 분다 니들 불까 니들/ 작은 개미여도 끼리끼리 날 무니까/ 날 무는 개미만 찾아 죽이는 집요 속에/ 내 거기를 물었던 너와/ 내 거기를 물렸던 나는/ 그렇다고 불구대천지원수까지 될 건 뭐니/ 국으로 약이나 타 먹게 된 사이라면/ 그건 뜻밖의 동지이고 환상의 파트너라/ 두고두고 남을 관계라는 흐뭇한 결말인데/ 그래서 그저 약이면 된다는 흔쾌한 결론인데/ 어차피 줄 거면서 느물느물 쥐고 안 놓으려 하니까/ 나는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파주 안 가고/ 거기 어디냐 홍콩이나 마카오 가잘 사람처럼/ 즉흥이라는 불균형의 식성을 자랑하고 있는 건데/ 식빵 한 장 위에 태양초 고추장 5백 그램짜리/ 네모진 통의 반을 퍼서 처발라 먹는 맛/ 별점은 별 하나의 반도 아까워 색 안 칠할 맛/ 무맛 맹맛 병맛 느낌은 흐느낌/ 폭식은 누가 가르쳤냐면/ 내가 깨우친 행동이고/ 내가 처음으로 취해본 적극성이고/ 먹어 조질 때의 쾌, 그 쾌라 하면/ 나는 이쾌대 상쾌환 다음에 꼭/ 박팽년이 오더라고요 이 선회/ 급선회 나한테 요 선회라 하면/ 연회라는 이름의 우리 아빠랑 항렬이 같은/ 안동 김씨 족보 속 아재일 것인데/ 그 집 아들 셋 중 둘째를/ 우리 집 양자로 들인다던 개수작들/ 종친이랍시고 우르르 몰려와서는/ 우리 집에서 우리 엄마가 차린 술상들/ 받아 처먹으면서 씨부리던 말들/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우리 엄마를 무릎 꿇리고/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우리 아빠에게 삿대질을 해/ 네 사주에 아들 없으면/ 네 각시라도 대신 나가 아들을 낳아 오든가/ 한쪽이라도 피는 이 집 피 아니겠냐/ 말이면 다인가 하는데/ 말이면 다인가 보는데/ 기어이 내뱉는 거지/ 밑도 끝도 없는 무지렁이 훈계를/ 피피거리는데 정작 무슨 형인지 아실까/ 그 혈액형 모르고 오로지 그 피만 운운인 게/ 젯밥 너 하나 못 먹어서 끝나는 게 아니야/ 그 잘난 고추 하나도 못 뽑을 거면서/ 저 천하에 쓸모없는 계집애들만 주렁주렁/ 다 어쩔 것이여 살림 들어먹을 년들/ 시방 혀 차기도 아깝다니까 쯧쯧 하시니/ 우리 할아버지도 아닌데 저 곰방대 할배/ 검은 갓 쓰고 옥색 두루마기 입고 와서/ 검은 갓 벗고 옥색 두루마기 벗고 나서/ 졸라 드시는 거죠 촵촵거리면서/ 저 같잖은 말도 말이라고 저 입에다가/ 아귀수육하고 민어 살 뜨고 육전 부치고/ 소갈비 재고 게장 담그고 새우 튀기는/ 엄마는 미쳤어 엄마는 미친 거야/ 그래 나 미쳤다 미쳤으니 네 아빠랑 살지/ 감 깎는데 양자 새끼 이 집에 들이기만 해봐/ 내가 이걸로 눈 다 후려버릴 거야/ 엄마가 아끼던 소반 끄트머리를/ 갉작갉작 과도로 긁어대는데 소리 좋아/ 연필도 아니고 지우개도 아니고/ 도루코 문구도 새마을 칼만 사서 모으던/ 5학년 663번 김민정 어린이는/ 발뒤꿈치 벗길 때 말고는 귀찮아서/ 깎아 먹는 과일은 사지도 않아가며/ 칼보다 칼집 모으는 마흔넷 김민정 언니로/ 뭐든 매달고 거는 취미로다가 오늘도 바쁜데/ 어느 날부터는 하도 징징거려/ 깨진 징 몇 개를 얻어 걸었지 뭐예요/ 그랬더니 그 즉시 고요 너무 고요 완전 고요/ 도망은 엄두도 못 내고 엄포도 못 놓을 고요/ 징채로 머리통을 맞은 것도 아닌데/ 의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지/ 나는 1인극 배우처럼/ 그 배우의 유일한 연출자처럼/ 즉흥인데,/ 아무도 안 볼 연기를 하는 거지/ 와이프가 혹시 현악기 안 하세요?/ 울림통인데 흠흠 나무 냄새 나는데/ 탄탄한 줄 몇 가닥 터진 굳은살인데/ 뭐 비올라 전공이기는 합니다만/ 내게 징을 준 건 김운태 선생님이신데/ 일명 자반뒤집기의 대가시거든요/ 자반... 뭐요?/ 아 모르시는구나/ 상모돌리기 보면 완전 지리실 텐데/ 하루 세끼를 위해 하루 천 바퀴를 도는/ 회전의 대가라고나 할까요/ 사람이 공중회전을 해요/ 우주 비행선처럼 제 몸을 띄워요/ 뜸요 아니/ 그 뜸 말고 그 뜸요/ 뜸을 뜰 때의 내 기분이란 게 있으니/ 뜸도 기분이란 게 있겠죠/ 우리 평생 그 뜸을 알고나 죽을까요/ 죽으면서 떠봤자 입이 없는 뜸이잖아요/ 뜸을 뜨고 뜸이 드는 그 두 뜸도 좋은데/ 앞 뜸이 더 좋다니까 혈액순환장애래요/ 스물셋에 속발성 무월경으로 근 7개월/ 피 안 흘려본 달 있었는데/ 피 나오는데 이 닦고/ 피 나오는데 맥심에 프림 넣고/ 피 나오는데 비빔냉면 비비고/ 피 나오는데 수금하러 신세계백화점 가고/ 피 나오는데 하이힐 사고/ 피 나오는데 전 자리에서 빙수 쏟고/ 피 나오는데 인상이 좋아 보이십니다에 팔 잡히고/ 피 나오는데 서울역 계단에서 구르고/ 피 나오는데 지하철에서 졸고/ 피 나오는데 집에 와 장구 치고/ 피 나오는데 아빠가 내 발톱 깎아주고/ 피 나오는데 얼굴에 요구르트 팩 하고/ 피 나오는데 일기 쓰다 책 읽고/ 피 나오는데 통화하다 잠들고/ 피 나오는데 가위에 또 눌리고/ 근데 나는 또 뜸을 이렇게나 잘 참는다니까요/ 배곱 여기 위에 살색 붉은 거 보이시죠?/ 다 뜬 뜸 안 건져서 자국으로 남은 뜸요/ 아 내가 왜 갑자기 여기서 배를 까고 그럴까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일주일치 약 더 주세요/ 출장이 열흘이라니까요 정말이라니까요/ 아껴 먹을게요 한 번에 안 털게요/ 하도 징징대서 그랬을 거야 안 주고는/ 못 배길 만큼 연기가 탁월해서 그랬을 거야/ 차 안에서 보는데 깜짝 놀랐다니까요. 큰 베개 하나 품고 나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누님/ 약을 큰 품에 안고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님/ 병원까지 날 데려다준 홍보부 이천희 대리가/ 회사까지 날 데려다주기로 한 이 대리가/ 그렇게 신이 나세요? 멀리서 봐도 너무 환하셔서요/ 약이란 게 그렇게나 좋은 겁니까? 묻는데/ , 하는 거야 내가/ 너무 어어, 하는 거야 내가/ 멀리서 봐서 그래/ 멀리서 보면 다정들 하잖아/ ?/ 그러니 잡지를 말아야 해/ 행여나 닿지를 말아야 해/ 잡고 싶으면 놓아야 하고/ 닿고 싶으면 달아나야 해/ 누님?/ 나는 벌받을 거고/ 나는 죄받을 거야/ 누님,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저 운전수로 따라왔을 뿐인데/ 왜 저한테/ 네가 오늘 재수에 털 난 날이라 그래/ 내가 그날 거기에 털 난 날인지 몰랐던 것처럼/ 있지, 천희야/ 화는 참아지는데/ 억울함은 왜 못 참아지는 걸까/? 내가 안 참는 걸까?/ 참으면 병 됩니다. 누님/ 걱정 마 죽어도 복수는 하고 뒈질 거니/ 복수가 별거겠어?/ 끝끝내 죽어라 살아남는 거지/ 마침내 해내고 마는 거 그거지/ 가다가 롯데백화점 잠깐 들러주면 고맙고/ 하이힐 봐둔 거 있거든/ 내가 모으잖니 그치? 내가 좀 많긴 하지 그치?/ 귓구멍 같은 데 똥구멍 같은 데 그런/ 구멍들에다 하이힐 뒷굽 쑤셔 넣고는/ 쑤셔대는 꿈 나는 왜 그리도 꾸나 몰라/ ? / 왜 드문히도 난 그렇게 전 부치는 꿈을 꾸어댈까/ 왜 이렇게 꿈에서 나는 전을 부칠까/ 전을 어떻게 좀 사 갈까요?/ 가자/ 갈까요?/ 갈 수 있다면 오죽이야 좋겠니/ 못 간다고 전해라 근데 그 가수 말이다./ 요즘 왜 안 보이는 걸까?/ 어디선가 노래하고 있겠죠/ 연예인 걱정은 할 게 아니래요/ 그러니까 누님 걱정이나 해요/ 파주에 목욕탕이라도 파주고서 그런 소리 해라/ 너 어깻죽지에서 때가 얼마나 나오는지 아니?/ 날개가 돋을 것도 아닌데/ 딱 날개 자리인 것은 맞는데 말이지/ “난다는 것은 여자의 동작”*/ 이 제목은 정말 멋지지 않니?/ 왜 나는 이런 제목은 또 짓지를 못할까/ 날개알지?/ 날개라 하면 나한테는 가수 허영란이거든/ 허영란은 <순풍산부인과> 허 간호사 아닌가요. 누님?/ 가수 중에서도 허영란이라고 있어/ 미국에서 목사가 되었대/ “‘날개의 허영란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세요./ 주께서 베푸신 은혜가 너무도 크고 깊습니다./ 복음의 날개를 달고 다시 일어나세요./ 어떤 절망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라면 일어날 수 있어요./ 희망을 향해 날아갈 수 있습니다.”* */ 믿으면 되나?/ 일어나면 되나?/ 되면 나나?/ 나나?/ 검은 나나의 꿈이 내 등단작인데/ , 여적 나 못 나는 거// 

* Fi Jae Lee: OI II,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잠실 에비뉴엘아트홀, 2019. 

** 이성원 기자, 「힐링송 '날개'처럼 다시 주님을 위해 날고 싶다」, 『아이굿뉴스』 , 2017년 7월 5일 자.


귀가 귀 가 ㅡ곡두 38 / 김민정
여전히 일본의 어떤 남자들은 스모용 선수로 태어나고/ 여전히 케냐의 칼렌진족은 장거리용 선수로 길러진다./ 1973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태어난/ 여자 체조 선수 스베틀라나 보긴스카야는/ 소비에트연방, 독립국가연합, 벨라루스/ 3개 국기를 제각각 유니폼에 새기고서/ 서울과 바르셀로나와 애틀랜타 세 올림픽에/ 3회 연속 12년을 대표로 뛴 전적이 있는데/ 그걸 제가 원했다면 정치인 팔자인 셈인데/ 미국 텍사스에서 피자집을 운영한다고/ 위키백과에 나와 있기에 그 인생 시네./ 수첩에 적은 것이 2016년 6월의 일이었는데/ 2019년 11월 17일 오후 1시 22분에 검색하니/ 미국 텍사스에서 온라인 체조 의상 소매업과/ 체조 선수 학생들을 위한 여름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고 나온다/ 있다 사라진 시가 있으되/ 서로 반짝이는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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