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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조영석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25.

조영석 시인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문과,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집으로 『선명한 유령』, 『토이 크레인』이 있다.

 




초식(草食) / 조영석
바람이 불고 부스럭거리며 책장이 넘어간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터진다. 검은 눈물이 속눈썹을 적신다./ 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의 독서를 막는다./ 손가락 끝으로 겨우 책장 하나는 잡아 누르며/ 보이지 않는 종이의 피부를 더듬는다./ 그곳은 활자들의 숲, 썩은 나무의 뼈가 만져진다./ 짐승들의 배설물이 냄새를 피워 올린다./ 책장을 찢어 그는 입 안에 구겨넣고 종이의 맛을 본다./ 송곳니에 찍힌 씨앗들이 툭툭 터져나간다./ 흐물흐물한 종이를 목젖 너머로 남기고 나서/ 그는 이빨 틈 속에 갇힌 활자들의 가시를 솎아낸다./ 검은 눈물이 입가로 흘러든다. 재빨리/ 그는 다음 페이지를 찢어 눈물을 빨아들인 다음/ 다시 입 속에 넣고 느릿느릿 씹는다./ 입술을 오므려 송곳니를 뱉어낸다./ 그의 이빨은 초식동물처럼 평평해진다./ 다음 페이지를 찢어 사내는 송곳니를 싸서 먹는다./ 검은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텅 빈 눈동자 속에 활자들이 조금씩 채워진다.//
* 2004년 《문학동네》 등단작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ㅡ깡통을 위하여 / 조영석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나는 살아 있다. 거리를 힘차게 굴러다니며 토해 놓는 만큼의 세상 공기를 마시고 살아간다. 줄어드는 뼛속으로 오염된 언어들이 넘나들지만, 결코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불문율. 내 목소리는 나팔소리보다 요란하고 아이의 싱싱한 울음보다 선명하다. 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춥고 윙윙거리는 냉장고 속에 잘 진열된다. 만나는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때론 상한 냄새에 진저리치며 심한 두통을 앓기도 한다. 어느 한 순간, 문이 열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나를 감싸 쥔다. 나는 선택된 기쁨으로 고통을 기다린다. 그는 내 모자를 딱, 하고 천천히 벗긴 후 내 살을 자기의 살 속으로 들어 붓는다. 눈물 같은 거품을 게워내며 내 살은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어떤 힘에 의하여 신나게 공중을 날아간다. 나는 다시 찌그러지는 연습을 시도한다.//

​짝 / 조영석
혼자된 지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모처럼 찾은 집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너도 이제 새사람을 만나야지/ 내가 대꾸를 않고 있자/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남자 혼자 살기가 쉬운 게 아니다/ 그렇게 살다가 덜컥 아프면 어쩌냐/ 난 묻고 싶었다/ 그렇게 살다가 내가 덜컥 아프면/ 나한테 온 그 새사람은 어쩌느냐고/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자기 자식 생각만 하느냐고//

부부 / 조영석
고요한 밤/ 무거운 밤/ 당신의 머리 무게를 재는/ 나의 팔이 잠들지 못하는 밤/ 고된 하루의 노동이/ 꽁꽁 얼어 있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 파르르 떨리는 당신의 목이 안쓰러워/ 생침을 삼키는 당신의 침묵에/ 내 혀는 그동안 배운 모든 말을 잃어버리고/ 살며시 당신 이마에 손을 얹을 뿐/ 내 핏속으로 점점 침몰하는/ 당신의 머릿속 비린 하루를 느끼며/ 나도 그대의 머릿속에서/ 멀고먼 아침까지 숨을 참는다/ 고요한 밤 무거운 밤/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두 사람의 줄기찬 불면(不眠).//

​토이 크레인 / 조영석
사내는 소주의 목뼈를 움켜쥐고 있었다/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 몇 닢을/ 얼어 터진 손바닥 위에 펼쳐보았다/ 녹슨 입술을 굳게 다문 구멍가게 앞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앉은뱅이 크레인 앞에서/ 사내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눈꺼풀 없는 인형들이 크레인의 뱃속에서/ 불면의 눈알들을 치뜨고 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거스름의 날들/ 사내는 단 한 번도 등 푸른 지폐였던 시절이/ 없었다 동전 속에 입김을 불어넣고/ 크레인의 몸속으로 몸소 들어가는 사내/ 허공을 향해 허깨비를 잡으려 손을 허우적거렸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것이/ 어디 쓸모없는 것들뿐이었겠는가/ 사내는 크레인 몸속으로 들어가/ 푹신한 인형들 속에서 잠이 들었다/ 크레인의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목뼈가 부러진 소주 한 병이/ 조용히 맑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꿈 / 조영석
처음에 그것은/ 젖니도 채 안 빠진 입속의/ 붉은 혀였다// 삼촌이 달려들어/ 반달을 만들어주마고/ 덥석 물더니/ 어머니 아버지 형 사촌까지/ 한입만 한입만/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물어뜯었다// 그것이 손톱처럼 작아졌을 때/ 나는 뒤늦게 그것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영영/ 벙어리가 되었다.//

복덕방 노인 / 조영석
유리창은 거대한 지도였다/ 그는 지도를 등지고 앉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녹슨 풍향계처럼 삐걱거리며/ 그의 목뼈만 조금씩 틀어졌다/ 찾아오는 구매자나 매매자는 없었다/ 그의 머리는 먼 우주의 한 지점을 가리킨 채/ 기다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가 사람들은 하나 둘 짐을 꾸려 떠났다/ 비둘기들이 날아와 그의 눈을 파먹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입을 벌려 검은 연기를 뿜어올렸다/ 연기의 꼬리가 끊어지면 고장난 엔진 소리를 내며/ 단칸방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방이 나오는 족족 비둘기들이 물고 날아갔다/ 상가를 배회하던 개들은 비둘기들이 놓친 방을/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거리며 다투었다/ 한번 벌어지자 그의 입은 계속해서 방을 낳았다/ 지도 위에서 붉은 집들이 뚝딱거리며 세워졌다/ 그의 팔과 다리가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건물주가 찾아왔을 때 유리창 앞에는/ 젖은 나무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인부들이 해머를 휘두르자 복덕방은 허물어졌다/ 벽돌더미 사이로 노인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보이저 2 / 조영석
내 이름은 항해자/ 방향을 잃어버린 백치 항해자/ 애초의 힘보다 더 센 힘이 작용하지 않아/ 맛도 냄새도 없는 바람을 타고/ 세계의 벽을 향해 날아갈 수밖엔 없지만/ 내가 전하는 말을 들어줘요// 수십억 광년 만에 만난 당신/ 내 말의 주인은 이미 예전 그들이 아닐 거예요/ 까마득한 세대가 지난 지금 그들은/ 아마 다른 종(種)이 되어 있거나 이 세계에서 사라졌겠죠// 상상이 가나요/ 당신은 주인 없는 말을 듣고 있는 거예요/ 당신들이 극적으로 낚아올린 존재가/ 이젠 우주 저편 어딘가에 없을 테지만/ 쓸쓸해 말아요// 난 시간을 잊는 대신 침묵 속을 헤엄치는 법을 배웠죠/ 내가 날아온 방향으로 렌즈를 고정시키고 셔터를 눌러봐요/ 진화의 끝에 있는 당신들 눈엔 아마 보일지도 몰라요// 창백하다못해 투명한 검은 점을/ 그 속에서 그들이 살다 갔어요/기억해주면 좋겠지만/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요// 그들도 나만큼이나 백치였다는 사실을/ 안녕, 나를 멈춰준 당신들 고마워요.//

노량진 고시촌 / 조영석
조선왕조가 문을 닫은지 백년이지만/ 노량진에는 여전히 지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울 사람들의 텃새쯤은 사투리로 밟아두고/ 저마다 고향의 특산물이 아닌/ 특산물을 팔아치운 돈 몇 푼을 거머쥔 채/ 배 대신 기차를 통해 들어와/ 땅을 사서 뿌리를 박았다/ 뜨내기 보부상처럼 봇짐 하나씩을 짊어지고/ 어디를 걸어도 골목뿐인 길을 돌아다녔다/ 출신을 알수 없는 어깨들과 부딪치며/ 온몸에 붙은 졸음을 쫓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다르면/ 고시원으로 들어가거나 식당앞에 줄을 섰다/ 처마 밑에 모여 시험에 대해 떠도는 소문들을/ 담배 한 갑으로 나누어 피웠다/ 길바닥에는 단풍보다 화려한 전단지들이 뒹굴었다/ 다달이 시험은 멈추지 않았고 한번 뿌리가 걸린 사람들은/ 쉽사리 노량진을 뜨지 못했다/ 어느 누가 손에 잡힐듯한 금의환향을 마다하겠는가/ 한번 떠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웃음은 모두 증발해버린/ 비린내 대신 잔내만 가득한 동네/ 노량진 고시촌//

살얼음 / 조영석
몇 년째 물을 품고 있는 마을 저수지에/ 살얼음이 낀다.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던 물의 거죽이/ 주름진 채 굳는다. 이말이 없는 거대한 아가리에/ 발을 얹는 곳마다 거미줄이 퍼져나간다./ 얼음 속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이 흐른다./ 흐르면서 얼음 바깥을 염탐한다. 가벼운 먹이는/ 그대로 놓아주고 한 번에 먹어치울 큰 놈을/ 조용히 기다린다. 저수지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살얼음은 물의 덫, 해마다 한 명씩은 꼭/ 끌고 들어가고야 마는 네발짐승은 절대 걸리지 않는,/ 마을 아이들은 살얼음이 기승을 부리는 때/ 결코 저수지에 가지 않는다. 그런 날이 이어지면/ 얼음은 조금씩 두꺼워지며 아이들을 부른다. 밤마다/ 굶주림에 쿨럭이는 물소리가 마을을 휘감는다./ 아이들은 이불을 덮어쓴 채 잠을 설치고 어른들은/ 밤새 물을 밝혀 얼음의 아가리를 살핀다./ 살얼음은 그러나, 기어코 한 번은 먹이를 끌고 들어간다./ 제 분을 못 이겨 속으로부터 꽝꽝 얼어붙기 전에./ 살얼음을 깨고 썩지 않는 시체를 건져 올리는 날이면,/ 저수지에는 종일 진눈깨비가 날리고, 사람들은/ 돼지머리를 놓고 울음 없는 위령제를 지낸다./ 해마다 한 번씩은 마을 저수지에/ 살얼음이 낀다.//

선명한 유령 / 조영석
그는 일종의 유령이므로 어디든 막힘없이 떠돌아다닌다./ 그의 모습은 선명하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다./ 다만, 개들이 알아채고 짖을 뿐이며 비둘기들이 모여들 뿐이다.// 그에게는 땅이 없지만 발을 딛는 곳이 모두 그의 땅이다./ 그는 사람의 집이 아닌 모든 집에 세 들어 살 수 있다./ 쥐와 함께 자기도 하며, 옷 속을 바퀴벌레에게 세 주기도 한다.// 그의 땅은 기후가 사납다.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모래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걱정이 없다. 그가 지나가면 그의 땅은 사라지므로,/ 오히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물과 먼지를 빨아들여 갑옷처럼 단단해진다./ 그의 옷은 그의 살갗이다./ 그의 몸은 카드와 화투 마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것들을 먹었는지 그것들이 그를 먹었는지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발효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썩어가는 생선대가리 냄새가 난다.// 사람들, 저마다 작은 집과 작은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몸만큼의 권리를 지닌 채 실려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칠 인용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누우면 의자는 침대가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 그 칸은 그의 전용객차가 되었다./ 그의 냄새 앞에서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는 냄새의 포자를 뿌리며 번식한다./ 포자를 덮어쓴 사람들은 잠재적 유형이 된다.// 그가 걷는 길이 곧 그의 길이며, 그가 먹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 일단 그가 되고 나면,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냄새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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