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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류경무 시인

by 부흐고비 2022. 5. 26.

 

류경무 시인
1966년 부산 동래 출생.

1999년 《시와반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양이나 말처럼』이 있다.

 

 



양이나 말처럼 / 류경무
나는 쉽게 벗겨지는 양말을 가졌다 쉽게 벗겨지려 하는, 양말의 재단사인 나는/ 양말을 위해 두 발을 축소시키거나 길게 늘여보기도 하는데// 나는 양말에 내 발을 꼭 맞춘다 나는 양말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다 원래 나의 생업은 양말이었지만/ 양말은 너무 쉽게 벗겨지므로 양말은 이제 스스로 양말이 되려고 한다/ 이쯤 되면 양말은 그냥 양말이 아니라 양, 말이라는 전혀 새로운 동물로 변이된 것이어서 언젠가/ 해가 반쯤 저물던 저녁, 양말이 한 마리 야생 숫양처럼 두 발을 까짓것 들어올렸다가/ 온 뿔을 밀어 다른 양말을 향해 돌진하는 걸 보았다 그러니까 양말의 재료는 캐시밀론이 아니라 숫제,/ 양이나 말처럼 단백질로 이루어진 한 마리 초식동물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과연 나는 이제 그 숫, 양말을 어떻게 신을 것인가/ 양말은 뜨거운 피를 가졌고 딱딱한 뿔을 가졌고 이내 발가락 끝에서도 뿔이 자랄 것이므로/ 뿔은 양말을 뚫고 자라서 걸음을 뗄 때마다 누군가가 돋아난 뿔에 찔리거나/ 개중에는 스스로 부딪혀와서 피 흘릴 것이므로// 지금은 한밤,/ 지금은 양말,/ 늙은 사냥꾼의 체중을 견디고 있는,/ 이제 막 예민한 사유를 시작한 한 마리의 동물인 양//

에둘러 오는 / 류경무
이런 저녁이면 나는/ 애가 닳아서/ 애가 다 녹아서 가령,// 밤고양이들 저이들끼리 모여서/ 뭔가 오늘 있었던/ 재밌는 얘기를 할 때// 나는 애가 닳아서/ 마침 끼어들고 싶기도 한데/ 얘들은 당최 나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해서// 얘들아 너희들 얼마나 애가 닳았으면/ 여기까지 나온 거니/ 예서 다 쏟아붓는 거니 시원한 거니/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지만 웬걸/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밤고양이들의 애가 가득/ 둥글게 담겨 있다// 에둘러오는 저녁 무렵//

벌거숭이 새 / 류경무
새 한 마리/ 유리창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때 나는 새의 알몸을 보았다// 유리창에 찍힌 한 줌 먼지가/ 자꾸만 유리를 통과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나는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거기에 손을 가져다댔다// 만져지지 않는 새의 부리가/ 창밖에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벌거숭이 새를 보았다/ 새가 벗어놓은 한 벌 창공이 나를 감쌌다//

추문(醜聞) / 류경무
1/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모래알같이 많은 나날을 어쩌자고/ 겨우 연명하는 것인가// 그때 고개를 넘을 때 따라오던/ 자꾸만 같이 가자고 보채던/ 여우를 따라갔어야 옳았다.// 그래도 사랑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이제부터 진지하게 살 거야 두고 봐/ 그럼 지금부터 밥값은 네가 평생 책임져라/ 어디 가서 감자탕이나 마시고 가지?// 그네들은 내 등뼈를 사정없이 발라먹었다//
2/ 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꾐에도 빠지지 않았겠지/ 비릿한 입맞춤 때문에/ 우리는 이미 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더러워졌다// 혹시 나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사는 것일까/ 오래된 칼을 벼려서/ 마지막 비수를 들이대기 위해//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에게나/ 붙어먹기 위해 사는 것일까//
3/ 어쩌다보니 나는/ 망태를 들고 십 리 밖까지 걸어갔다 온 사람/ 광물을 져 나르는 사람이었다// 기억하건데 소는 참 소 같은 사람/ 어쩌다보니 나는 소를 잘 모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끝에서 이 끝까지 오랫동안 달음박질한 사람// 돌아보니 그건 단지 한 발자국이었고,// 내가 몰랐던 것은 아무도 몰랐으므로/ 나는 나를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지/ 이 오래 묵은 소문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조방앞 / 류경무
고모들은 조방앞에서 다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이 정류장은 깊은 소(沼)처럼 고모들을 삼켰습니다 그 조방앞이 이 조방앞이 아니라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여기만 오면 나는 자꾸 넘어집니다 고모야 고모야 오버로크 고모야 핏물 새나가지 않게 바람 들지 않게 제발 날 좀 예쁘게 꿰매줘, 나는 배 밖으로 삐죽이 나온 바늘을 억지로 밀어넣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방앞은 조방앞, 고모들 때문에 무릎병이 또 도지려 합니다 나는 조방앞에 앉아서 구름과자를 한입 베어먹습니다 고모들 후르르 흩어집니다//
* 조방앞 : 부산 동구의 옛 조선방직 앞 버스 정류장.

누구나 아는 말 / 류경무
그 말에는/ 그 말의 냄새가 나지/ 오래 묵은 젓갈같이 새그러운// 그것은 구걸의 한 양식/ 그것은 마치/ 몹시 배가 고플 때/ 내가 나에게 속삭이는 말과 비슷해서// 그 말은/ 냄새의 한 장르이기도 한데// 여름날 내가 바닷가에 누웠을 때/ 햇빛이 내게 오는 것과 비슷한 일이거나/ 피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속삭임 같기도 해// 묻지 않아도 아는 건 아무도 묻지 않듯이/ 그게 어떤 냄새인지 누구나 알 듯이// 너를 사랑해//

새잎이라는 짐승 / 류경무
한 아이가 긴 하픔을 하며 돋아난다/ 솟구친다 사자처럼,/ 쫓기는 가젤처럼 솟아오르는/ 새잎이라는 짐승// 너무 푸르러서 슬플 때도 있었지 아마?/ 새잎의 새로운 빛은 저렇게 빛난다/ 모든 목숨이 그러하듯/ 새잎아, 라고 불러주면 깔깔 웃던/ 한 덩어리 초록/ 제가 제 모가지 툭 자르고 싶은 새잎들은/ 내심 이쯤에서 그만 멈췄으면, 아니라면/ 이렇게 돋아나는 것만이/ 최선일까 생각하겠지만/ 과연 옛날에도 이런 적 있었나// 이 맨발의 유릿조각/ 이 맨살의 먼지 쪼가리들/ 입술 꾹 다물고 걸어가는 비 그친 날 밤// 오늘은 낮술이 내지르는 호통도/ 그저 견딜 만하다우/ 낙엽이 지면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제발 때려치워요,/ 저기 잔뜩 짱그린 얼굴로/ 날 내려다보는 저 남자는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대답해줘요// 이제 그만하자/ 오늘은 너희들 푸른 모가지 툭툭 끊으며 걸어가는 봄날이잖니// 여기 한 아이가 긴 하품을 하며 돋아난다/ 새잎의 짐승들이 마구 솟구쳐오른다//

팬지 / 류경무
비를 기다리며 팬지를 심었지 흙의 자물쇠를 따고/ 나는 팬지를 거기로 돌려보내지// 팬지는 위로만 꽃, 아래는 흙의 몸뚱이를 가졌지/ 나는 꽃을 움켜쥐고 아래를 쓰다듬었지// 나를 만진 건 당신이 처음이야/ 옛날이었지 말미잘처럼 붙어살던 때/ 거긴 아주 물컹한 곳이었고/ 토악질하듯 갑자기 쏟아져나왔던 순간과// 처음의 빛으로 구워지기 시작했던,/ 빛의 날들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팬지도 지금 그럴까// 나는 수많은 팬지를 실어나르지/ 팬지는 색색의 여린 잎을 벌려 다른 나라의 말로 조잘거리고/ 나는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해주네/ 팬지를 심으며 나도 팬지라는 이름을 다시 얻고 싶었지/ 참 좋은 어딘가로 팬지와 함께 땅에 붙어서 가고 싶었지// 팬지는 자꾸 줄어들고 있었네/ 하나둘 팔랑거리며 팬지는 내 손을 떠나갔네//

흰 밭 / 류경무
호박잎 달팽이 지나간다/ 부지하세월이다/ 새하얀 길// 그런 치마를 입고 앞차기를 하다니/ 어쩌면 좋니 접시꽃아/ 입술이 하얗게 부르텄다// 부추꽃 위 흰나비/ 제 머리 속 다 비우고 가만히 내려앉듯// 하지의 밭에 앉으면 말갛게 하얘진다// 상추 꽃대궁 꺽으면 흰 피 하여튼/ 흰 피,를 가진 이네들이란// 민들레며 엉겅퀴며 심지어/ 씀바귀조차 !//

내력(來歷) / 류경무
1/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상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냄새의 영역이든/ 자기장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나는 오래 전에 그것들로부터 도망쳐 왔다/ 절인 고기라든지 광주리에 담긴 꽃게로부터 당도를 모르는 소금과 유향으로부터//
2/ 누군가 나를 밀어냈듯 전혀 새로운 냄새가 나를 당겼다 그들은 북쪽 루트를 따라 내려왔다/ 애초에 우리가 계산법을 몰랐듯/ 증명되지 않는 출생도 있다 기억난다,/ 그 저녁의 한 때 아무다리야 강가에 다다른 그들이 내게 일러주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냄새에 대해서/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어떤 꼴림과 끝도 없는 아리아,/ 더 이상 다루기 힘든 냄새에 대해서//
3/ 우리는 너무 많은 길을 걸었다/ 모래언덕에 길게 누운 한 상인이 내게 말했다// 너는 원래 사람이 아니었다 밤이면 눈 덮인 산꼭대기에 올라 하초를 드러냈었지/ 생의 끝장을 아는 듯 사막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다가/ 짐승을 만나면 마구 올라타곤 했지 그랬었지// 참 좋았겠다 냄새만으로 그걸 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니 꽃들아 검둥이들아//
4/ 날인하지 말아야 할 문서도 있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상업의 영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 걸어야 할 길은 없다 중요한 건// 저기 모래언덕 위에 뜬 별/ 그중에서 처음으로 반짝이는 별/ 저 곳에서 정말 필요한 게 뭘까 뭘 팔아야 될까 쯤의 궁리 정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항문 / 류경무
한 번도 본 적 없는 항문이다/ 완연한 구더기 떼 부글부글 끓는 냄비밥처럼 척,/ 길 바깥에 안쳐진 고라니가 실실 웃고 있다// 아래로부터 훑어 속을 완전히 비워내는 일/ 이렇듯 수승한 죽음도 몹시 가려울 때가 있다는 듯/ 웃음을 참으려 송곳니를 앙 다물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변신하는 중이다, 고로/ 죽어서 참 다행이다; 라고/ 이 좁아터진 콘크리트의 약사(略史)에 길이 새겨질 고라니는/ 한껏 끓어 넘치는 미소를 내게 쓱 날려주는데// 저수지 부근을 전속력으로 뜀박질하며 되뇌노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항문이여/ 이제 한 마리의 전혀 새로운 얼굴이여 말해다오/ 언제쯤이면 멸족할 것인지/ 이곳의 재생산은 언제쯤 끝날 것인지// 갓 태어난 돼지며 망아지며 송아지들아/ 저기 다 닳아빠진 광물들처럼 아프면/ 이제 여기서 그만 뒹굴어도 된다//

목을 매다 / 류경무
이런 식으로는/ 이러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나는/ 내 몸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갈 것임을 알고 있다/ 빛이 오는 그 순간/ 나는 잠깐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긴 한숨을 쉬며 말하겠지/ 네가 올 줄 알았다고/ 결국 너일 줄 알았다고/ 괴물처럼 울부짖을 것이다/ 모든 빛들이 나를 막아서고/ 모든 빚쟁이들이 나를 막아서고/ 그때 나는 천천히 줄을 당겨서/ 모두 다 정리됐다는 듯/ 묶인 줄의 매듭을/ 다시 힘껏 조일 수밖에/ 공중에 매달린 나를 보고/ 웃어줄밖에/ 이런 식으로는/ 이러해서는 안 되는 날이,/ 결국엔 오고야 말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와 함께하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돌배나무 아래 / 류경무
찬바람 불던 그 여름/ 내겐 모든 것이 과분했던 남반구에 큰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돌배나무 아래 누워 있나 하긴, 어슴푸레 생각날 듯도 하다/ 그러니까 이 나무 아래 누운 저녁에는/ 나는 전 생애를 걸고 냉장고처럼 밤새워 노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흔들리는 돌배나무,/ 떨어지는 돌배에 이마를 내어주며/ 어떤 세기는 꽤 익숙했으나/ 어떤 세기는 몹시 위험했으므로 넘어가기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곧, 당분간, 잠시라면, 견디겠다 여기서 노래하며 견디겠다/ 흔들리는 돌배나무 아래/ 나는 지금/ 밤을 꼭 지새고 말겠다는 어떤 작정과/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그 눈빛들과 싸우는 중이다// 마치 제가 내 입이라도 되는 양/ 모든 나무들이 나를 대신해 노래하고 있다//

움직이는 중심 / 류경무
이것은 그릇에 담긴 자두/ 쫙 펼쳐놓고 먹기 좋은 자두/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라 내 것인 자두// 그런데 방금까지 왕왕거리던 초파리들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나 참 미묘한,// 커다란 그릇에 좀전까지 담겼었는데/ 이렇게 감쪽같이 줄거나 느는 식구들은 또 어떤가// 가령 이웃의 조무래기들이 왁자하게 집안을 뛰어다니다가/ 한꺼번에 놀이터로 몰려나간 뒤 남은 텅 빈 거실/ 이런 걸 어쩔 줄 몰라 하는/ 이게 진짜 문제다/ 그게 초파리였든 아이들이었든// 내 눈에는 방금까지 여기에 있었다는 거/ 확실히 담겨져 있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이 빈 그릇 속에 버려진 것일까// 저곳에서 이곳까지/ 잘 움직이는 중심이 너무 많다//

편통 / 류경무
왼쪽 다리를 바닥에 쓱쓱 갈면서/ 걸어오던 풍 맞은 김씨/ 왼쪽으로 말라붙은 이파리 달고/ 악착같이 겨울을 견디던 나무/ 그리고 평생 왼편이었던 어머니/ 생각하면,/ 갑자기 왼손이 먹먹해져서/ 왼손으로 밥 먹거나 악수를 청할 때/ 자꾸 숟가락을 놓치거나/ 사람들의 손등이 먼저 만져진다/ 내가 편애했던 것들은/ 모두 왼편에 서 있었다/ 나와 친해지려 했던 것들은/ 모두 왼쪽을 앓고 있었다/ 이제 이곳의 바람에게 뺨 내어줄 때/ 아무 뺨이나 갖다대기로 한다/ 누굴 편애할 마음도 없이/ 양쪽이 다 아프거나/ 씻은 듯 낫거나//

봄밤 / 류경무
당신 생각나기는 할까/ 뭐니 뭐니 해도 그 봄밤/ 노릇하게 데워진 바람의 무릎이/ 세상 모든 창을 타넘는 봄밤/ 당신 이 언약 알기나 할까/ 막 뛰어내리고 싶은 망루에 서서/ 가끔 당신을 읽다가/ 가끔 당신을 덮다가/ 나 아직 한 번도 가지지 못한 당신/ 내 코끝을 지나갈 때/ 당신을 넘기는 내 손가락/ 자꾸 바스러지던/ 점점 녹슬어가던 봄밤//

어떻게 양말을 / 류경무
나는 쉽게 벗겨지는 양말을 가졌다 쉽게 벗겨지려하는, 양말의 재단사인 나는/ 양말을 위해 두 발을 축소시키거나 길게 늘여보기도 하는데// 나는 양말에 내 발을 꼭 맞춘다 나는 양말이 이끄는 데로 살아왔다 원래 나의 생업은 양말이었지만/ 양말은 너무 쉽게 벗겨지므로 양말은 이제 양말 스스로가 되려고 한다/ 이쯤 되면 양말은 그냥 양말이 아니라 양, 말이라는 전혀 새로운 동물로 변이된 것이어서 언젠가/ 해가 반 쯤 저물던 저녁, 양말이 한 마리의 야생 숫양처럼 두 발을 까짓것 들어 올렸다가/ 온 뿔을 밀어 다른 양말을 향해 돌진하는 걸 보았다 그러니까 양말의 재료는 카시미론이 아니라 숫제,/ 양이나 말처럼 단백질로 이루어진 한 마리 초식동물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과연 나는 이제 그 숫, 양말을 어떻게 신을 것인가/ 양말은 뜨거운 피를 가졌고 딱딱한 뿔을 가졌고 이내, 발가락 끝에서도 뿔이 자랄 것이므로/ 뿔은 양말을 뚫고 자라서 걸음을 뗄 때마다 누군가가 돋아난 뿔에 찔리거나/ 개중에는 스스로 부딪혀 와서 피 흘릴 것이므로// 지금은 한밤,/ 양말은 지쳐 축 늘어져 온갖 냄새를 부둥켜안고 말라가고 있다/ 늙은 사냥꾼의 체중을 견디고 있는, 이제 막 예민한 사유를 시작한 한 마리의 동물인양//

내 입 속에 그득히 담긴 / 류경무
죽은쥐나무// 죽은쥐나무에 다다른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거기엔 홍조류가/ 그득했으므로 굶을 까닭이 없었다, 아프리카 잉어는 한 때 이 강가까지 도착했다/ 가끔 낮은 피아노 소리 들린다/ 거기 아름다운 붉은 꽃 아래, 새카만 아이들이 시소를 탄다/ 나는 호수에서 막 걸어 나오는 중이다,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악어들이 몰려온다//
벨라루스의 새끼곰// 푸른 그림자 저 푸르러 가는 외국의 말, 그래서 지금 남은 건 저기 바다 뿐이다, 사실/ 구체성을 잃어버린 바다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맛있는 사과가 잘 보인다 도대체 어떤 짐승이 이 동굴을 버렸나/ 나는 거침없는 새끼곰들과 함께 벨라루스까지 한달음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침 젖을 굶었다 형제여 이 꽃을 먹어라 그리고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자/ 날지 못하는 큰새가 처음 보는 넓다란 풀밭을 가로 지른다/ 신선한 고기 한 조각이 그립다//
동굴에서// 그네들은 무척 위험한 종이다 그들은 눈을 멀게 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가루를 지녔다, 하지만/ 자꾸 들어오겠다는 걸 어쩌겠니 밖은 눈보라,/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된 저녁이다/ 우리는 이제 누구나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다/ 한번 들어온다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저 종잡을 수 없는 성채 또한// 날이 새면 모든 게 끝나 있겠지,/ 그리고 모두들 까맣게 잊어버릴 거야/ 다시 말하지만 너희들은 항상 너무 심각하게 잠을 청하는 게 버릇인 게로군/ 사실 이번 잠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야// 내 입 속 그득히 담긴 새끼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점점 추워지던 마지막 별이었다//

죽지 않았다 / 류경무
더러운 통점이 납작하게 엎드려있다/ 아스팔트에 눌러 붙은 껌처럼/ 방금 꼬리였으며 팔다리였던 돌이킬 수 없는/ 덩어리 하나가 잔뜩 웅크리고 있다// 핸들에 전해오는 작은 떨림 같은 것/ 마치 벙어리 수영선수가/ 해협을 횡단하면서 만드는 물결무늬/ 느릿느릿 모선으로 돌아온/ 뚱뚱한 우주인의 노크 소리 같은/ 그것을 나는 다시 읽는 중이다 강건한 어깨뼈와/ 방금 사냥을 마친 피 묻은 이빨과 발톱을// 내 목덜미를 쓰다듬는/ 조수석에 앉은 애인이여/ 지금은 조금 민망한 시간/ 그대가 이끄는 곳으로 서둘러 가기에는/ 저놈이 아직 죽지 않았다//

어제 / 류경무
캄캄한 방에 앉아 있었다/ 그 방엔 나밖에 없었다/ 구석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나는 그를 모른 척했다/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이만하면 됐잖냐고/ 그만하라고/ 나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 울만큼 다 울었다/ 울고 싶은 건 하나도 없다고/ 굳이 꼽으라면/ 당신밖에는 당신밖에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흠뻑 젖은 그가 말했다/ 그만하자고/ 나를 그만 용서하라고//

특별한 순간 / 류경무
1/ 김밥이 향기로우니 코가 살만하다/ 이제 마음껏 먹는 일만 남았다/ 식물성 섬유질과 동물성 단백질을 해초류에 말아먹는 이동식/ 어디든 움직여야 하니까 무엇이든 먹으며 견디는 거다/ 이렇게 매일 쫓기면서 겨우 연명하는 게 최선인가 싶지만// 지금은 난폭한 버스라도 타야한다/ 막차를 놓치는 것은 끔직한 일/ 길은 아직 멀고 날은 어둡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곳에서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니/ 어제는 집에서 불과 2만 km 떨어진 곳에서/ 서른 명의 아이가 죽어나갔다/ 정부군은 엄마를 먼저 그리고 아이들을 차례로/ 근접 사격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저녁운동을 할 것이다/ 끊임없이 질량보존되는 어린 것들을 생각하며//
2/ 내가 꾸는 꿈은 늘 같은 꿈이고 잠은 늘 선잠이다/ 모든 올라붙은 종아리들이 오후의 가랑이를 쩍 벌리고 누워있다/ 우리가 예전에 푸른 잎사귀를 함부로 따 먹었듯/ 발기한 개들은 그것들의 냄새를 따라가 짓이겨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겠지/ 누구에게든 추억을 기리는 날이 어김없이 당도할 테니까// 3/ 오디가 익는 계절이 와서/ 모든 새들이 일제히 검은 똥을 쏟아낼 때/ 나도 그만 정착할 것이다/ 나의 정치적 견해도 그때 밝혀질 것이다/ 방금 거대한 공간으로 쏟아져 나온 핏덩이 톰슨가젤이나/ 무리를 놓쳐버린 어린 누,/ 풀숲에 숨어서 어미를 기다리는 표범의 새끼와 작은 새들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모두에게 특별한 순간/ 누가 어찌되었든 서로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숲은 다시 무성해 질 것이다/ 이곳의 포럼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므로// 난폭한 버스가 지금 막 이곳을 빠져나가고 있다//

그때 아주 잠시 / 류경무
화장실에 갇혔던 술 취한 레지스탕스는 모든 걸 포기했다/ 점점 뚱뚱해져서 이제 저항조차 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곧 고백하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살마 있는 게 죄였으니까// 그렇다면 하나만 묻자 이후의 생은/ 모두 참혹해야만 하는가?/ 하찮고 우연한 것들이 불결한 모습을 가졌듯/ 요새는 살마남은 깡통 부스러기들이 딸랑거리며,/ 전범자의 얼굴을 하고 수시로 되묻는다// 여기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도대체 어떻게 나갈 수 있느냐고/ 그러면 당신은 씨익 웃으며/ 침묵의 거대한 미소를 던지겠지/ 그렇다고 하늘을 올려다볼 것까지는 없는 일/ 그건 순전히 이곳의 문제였으므로// 그때 나는 아주 잠시/ 늙은 몸을 한 어떤 짐승이/ 멀리서 이쪽을 향해 홀로 반짝이는 것을 본다// 밤의 등대가 캄캄한 바다에 자기의 얼굴을 묻듯/ 이제는 정말 내게 마지막인 당신/ 처음 왔을 때처럼 웃으며//

 

이 많은 모래알들 / 류경무
마침까지 이쪽으로 옮겨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다/ 한 아이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당신 입에서는 오래된 피냄새가 나는군요 그거 알아요?/ 그것 때문에 맨날 속마넘어가는 거/ 그렇다면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이 지독한 더위와/ 유모차를 밀고 가는 노파의 실룩거리는 엉덩이,/ 잊을 만하면 만나는 과속방지턱을// 그래 나는 지금껏 이재에 밝은 몸으로만 살았다/ 내가 이쪽으로 옮겨내는 아이들은/ 제각기 지난 생을 충실히 건너온 여자였거나 남자,/ 혹은 일찍 생을 마감한 청춘들이었다/ 새로운 몸을 얻어봤자 빤히 들여다보이는 다음의 생;/ 그걸 어쩌지 못해 맨날 속마넘어가는 거,/ 그 정도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좋으니 그게 좋아서 이렇게 뒹굴고 사는 거지/ 아이를 기다리는 집에 원하는 아이를 스윽 밀어넣고는/ 새파란 엉덩이를 찰싹 때려주는 거지/ 그러면 시치미 뚝 떼고 울음보를 터뜨리는 새로운 아이/ 정말 맨 처음인 양,/ 다시 시작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마냥 좋으니/ 어쩌면 좋나// 어찌 되었는 마침까지 이 아이들을 모두 옮겨야 한다/ 아니면/ 그것들은 상해버리거나 조금씩 녹아서 없어질 것이다/ 물론 나는 곧 망할 것이지만/ 이곳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호시절 또한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 입 크게 벌린 세계여!!// 지금부터 튼실한 아이들을, 내가 가진 아이들을 사가라,/ 상아보다 빛나는 혓바닥 속 유황보다도 귀한 아이들을!!// 저기 제가 낳은 새끼들을 모두 거둬들인/ 멀리 나갔던 가축들이 돌아오고 있다// 나는 아침까지 이 아이들을,/ 서걱거리는 모래알들을 다 옮겨야 하는데//

행락(行樂) / 류경무
가보지 않은 곳을 새로 추가한다 오직 즐거움을 향해 가는 일에 골몰한 나는 털이 다 빠져 슬픈 스트릿 보이// 아이를 안고 자동차 보닛에 반사되는 빛을 본다 여기는 처음 와본 곳이야 풀이 적당히 키를 키웠군 우리는 풀을 기다랗게 편 뒤 자 리에 누운 채 각설탕을 한 쪽씩 나눠 먹는다// 자동응답기가 말한다 상쾌한 공기를 마셔 보세요 햇볕은 200룩스로 고정하세요 보컬은 앨라배마 셰이크스가 적당합니다// 아빠 내가 꿈 이야기 하나 해줄까? 아이스크림 통에 빠진 꿈, 꿈속에서는 아무리 먹어도 몸이 가렵지 않아// 우리는 자리를 접고 일어섰다 얘야 너는 종일 먹는 걱정만 하는구나 그건 모두 가짜란다 여기 우리 앞의 어떤 징표가 보이지 않는 거니? 우리는 즐거움을 향해 가는 중이라서 아무것도 훔쳐선 안 된다 꿈속에서라도// 가슴 털이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연필로 글씨를 쓰기로 했다 단순함과 명료함이 우리를 이끌었다 빛이 오는 어떤 개념을 향해 우리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매순간 변화하고 휘어지는 선택을 하면서// 새로운 알람이 도착했다 우리는 풀을 다시 일으켜 세운 뒤 땅을 깊숙이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 하나를 그 자리에 파묻었다// 모든 것들이 도착한 봄이었고 행락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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