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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세 남자 / 남정언

부흐고비 2022. 5. 27. 08:30

아내가 카페에 앉아있다. 학과 동기와 머리를 맞대고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 어학사전을 찬찬히 훑는다. 중요한 무엇을 찾는 중이다. 아무래도 문학적인 이름이 좋겠지. 백석 시詩에 나오는 갈매나무가 좋은데. 점잖은 드레.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은 어때. 알차고 잘 자란 소나무 찬솔도 있네. 아름다운 우리 사이를 예그리나라고 한다네. 고르고 골라 예비 후보로 몇 개의 단어를 저장한다. 유독 예그리나에 관심이 높았는데 알고 보니 짝퉁 우리말이다. 학습동아리에 어울리는 산뜻한 말은 없을까. 생각지도 못한 것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때를 초월할지도 모를만한 단어가 없을까.

“있다! 사부작사부작”

아내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계속 가볍게 행동하는 모양”의 부사라고 설명한다. 아내는 이름을 정하기 위해 거듭 생각하고 고민한다. 궁극적으로 섬세하게 움직이다 보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공모전에 낼 이름도 아니지만 사소한 일에 열정을 곁들인 해석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사부작사부작 책 읽고 공부하다가 사부작 졸업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바로 그때, 아내의 동기 1이 전화를 받는다. 남편이 몸살 기운에 홀로 병원 가서 링거를 맞고 집으로 가는 중이란다. 남자는 몸이 피곤한데 외출한 아내에게 언제 오는지 궁금하다고…. 어이구, 못살아. 동기 1은 하필 내 모임 날에 아픈지 모르겠다며 투정을 부린다.

마주 앉은 동기 2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사실 자기 남편도 지금 병원에서 링거 맞고 있단다. 모두 눈빛이 왜 왜 왜? 하고 묻는다. 남편이 퇴직하고 나서 잡다한 일로 바빴는데 역병에 외출이 줄었다. 이 시기를 이용해 안검하수 성형을 했고 수술은 성공이었다. 다만 남편이 모범 환자라 실밥 뽑을 때까지 냉찜질을 하라는 의사 처방을 완벽하게 실천하다가 그만 지독한 코감기와 몸살이 겹쳤다. 냉찜질을 그만두지 않았던 남자에게 질린단다. 동기 2는 사랑과 용서의 비율은 10:90%라며 남자가 건강해질 때까지 참는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동기 3의 연락이 왔다. 오늘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가 또 남편 때문이다. 남편이 새벽에 술 마시고 귀가했는데 언제 어디서 부딪혔는지 모르지만 이마가 찢어졌단다. 어젯밤 일찍 잠이 들어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얼굴 상태가 심각하더란다. 급히 외과 응급으로 상처를 꿰맨 의사가 성형외과 재수술을 권유하여 다시 병원을 찾는 중이다. 남자는 술이 깨자 디귿자로 찢어진 상처가 아프다며 엄살을 부려서 얄밉지만 간호해야 할 아내이기에 슬픈 웃음이 나온단다.

아내는 순간 놀란다. 공교롭게 세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동아리 이름을 잘못 지었나? 남편들은 혼자 견디지 못하는 사람일까. 사부작거리는 남편에게 바랬던 어른스러움은 본래 없었던 것일까. 날숨이 새어 나온다. 세 남자 모두 자유로운 영혼의 조르바는 아닐 터, 아내를 걱정하게 만드는 습관성 관심종 특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바야흐로 시대에 따라 남자도 변해야 한다.

아내는 감정이입의 귀재다. 남편이 은퇴하고 집에 돌아와 냉정하게 쉬고 있을 때 아내는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진중하게 열어두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가 덕임’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내가 마냥 드라마를 즐기며 정조의 사랑 이야기만 본 게 아니다. 아내는 왕비와 후궁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궁녀의 당당한 직업관을 인정하고 덕임의 사랑과 자유를 지지할 뿐이다. 나이, 배경, 성적 불문율을 지키는 아내는 학업이라는 에움길에서 헤매면서도 동기와 더불어 자기 계발을 하고 싶다. 가정과 나라 경제는 물론이고 스스로 담숙하기 위해 행동반경을 넓혀간다.

세 남자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나 할까. 아내의 사부작거림엔 반드시 남편의 조용한 외조가 필요하다고. 근사한 곳으로 데려다주는 자가용 전용 기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진부하지 않은 남편이 진보하는 아내의 성장을 위해 자동차 열쇠를 넘겨줄 시기가 찾아왔다고. 아내에게 칭얼대는 남편보다 아내를 응원해 줄 내 편이 필요하다고 줄곧 말했는데….

오래전 박물관에서 보았던 무덤 속이 떠오른다. 남편의 입장이 바로 무덤 속 순서였다. 열린 무덤을 통해 뜻밖의 어긋난 순서를 짐작해 본다. 언제부터인가 반짝이던 안방에 굳건한 장롱이 시들해지고 다정했던 자리가 식어 가면 사랑하던 사람의 순서도 뒤바뀌게 마련이다. 본처보다 먼저 발견된 후처 미라는 생전에 차지한 자리였던가 아니면 맨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의 마지막 모습인지도 모른다. 지고지순한 아내의 입장은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순서에 몸서리칠 수도 있는 일이다.

아내가 카페를 나선다. 봄바람이 푼푼하다.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며 도란도란 걷는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와 여자.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소의 균형은 어울리지 않는 불편이다. 행복은 손에 잡고 있는 동안에는 작게 보이는 법.

긴장하라. 남편들이여.

세상의 아내는 세 남자가 아니라 사부작사부작 아내를 지지하는 새 남자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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