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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주원익 시인

부흐고비 2022. 5. 31. 07:35

 

주원익 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7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있음으로』가 있다.

 

 



미래의 책 / 주원익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다/ 책장을 펼치면 나는 소리없는 번개처럼/ 흘러가버린다/ 지금 막 열리고 있는/ 행간 밖으로/ 쓰여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당신은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건너왔다 나를 펼칠 때마다/ 당신은 시간처럼 넉넉한 여백이 되었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순간의 페이지들/ 잿빛 구름을 뚫고/ 버려진 왕국의 미래가 펼쳐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당신의 문장들을 가로지른다/ 내가 책장을 덮는 순간/ 당신은 이미 흘러가버린 침묵//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는/ 그 아득한 지평에서/ 당신은 처음 나를 건너왔다/ 읽혀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한 권의 책이 미래처럼 놓여 있다/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고/ 당신이 나를 건너가는 동안/ 미래는 이미 흘러가버린 문장들// 침묵은 침묵 속에서 지속된다//
* 2007년 《문학동네》 등단작


뱀파이어의 노래 / 주원익
내 피를 마셔요 아름다운 당신 내가 드릴 것은 창백하고 순결한 영혼의 방탕일 뿐 보이지 않는 저 안개의 유형지에서 까마귀들은 버려진 종탑을 종일 선회하며 낡고 두꺼운 울음을 흘리고 있어요 불길한 구름이 박쥐떼처럼 몰려와요 황금빛 광기의 철문이 봉쇄되는 소리가 들려요 우리의 심장을 결박하는 상징들 녹물 맺힌 사슬에 감긴 금욕의 십자가들 죽음보다 깊은 불멸의 잠에서 당신이 깨어나도록 내 피를 마셔요 검은 양복을 걸친 사도들이 죽어도 눈감지 않는 눈동자처럼 꿈속에서 우리의 헐벗은 그림자를 추적하고 있어요 눈깔 없는 개들이 몰려와 짖어대고 출구 없는 환상의 미로 속으로 환상을 가두고 있어요 어서 눈을 떠요 내 몸 안에서 불행한 당신 내 팔다리 없는 혼을 통째로 들이마시고 이 황량한 부재의 시간들을 거슬러가요 까마득히 멀어지는 핏빛 구름의 성채들을 꿰뚫고 당신을 기다리는 무덤은 내 안에없으니 몸 밖의 어둠이 우리를 배반하기 전에 내 피를 마셔요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새벽빛의 서늘함으로 당신의 시선을 온통 불살라버리고, 나는 영겁의 목마름에 헐떡이고 있어요 내가 드릴 것은 지옥의 성수처럼 투명하고 차디찬 영혼의 방탕일 뿐 내가 천 년을 살고 당신이 단 하루를 살아도 당신에게 흡수되고 싶어요//
* 2007년 《문학동네》 등단작

시계바퀴 세공사 / 주원익
그는 아침이면 이 분주한 도시를 움직이는 커다란 시계탑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 시계는 드넓은 광장이 복판에 솟아 있어 길을 가는 누구라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세공사는 그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기다란 초침에 매달려 하루 종일 걸레질을 한다 거인의 그림자처럼 광장을 건너가는 불순한 시간들, 세계는 한 뭉치의 망가진 시계인 것이지 그는 매시 정각마다 뻐꾸기처럼 중얼거리며 시계탑이속에 황혼 속에 늘어지는 오후를 맞는다 하늘로 열린 돔에서 계시처럼 떨어지는 함 줌의 금빛 가루들을 올려다보며 그는 이제 시계탑의 우람한 기둥을 감아도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시계의 중심추가 박혀 있는 꼭대기의 방으로 올라간다 그는 모난 톱니바퀴들을 세심히 관찰하면서 가끔 시계의 온전한 체계를 일탈한 몇 개의 나사들을 두들겨팬다 곧장 구리스를 치고 빠진 자리를 채우고 나니 세공사는 슬슬 머리가 무거워진다 초승달이 초저녁의 시간을 가리키면 탑 꼭대기에 걸터앉아 잠시 쉬던 세공사는 비로소 번쩍이는 금속 연장을 내려놓는다//
* 2007년 《문학동네》 등단작

비밀들 / 주원익
나는 그대에게 말합니다/ 그대의 비밀을 놓아버리세요/ 비밀이 듣지 못하도록/ 그대는 나에게 말합니다/ 숨길 수 없는 마음의 고독/ 그대는 텅 빈 상자를 열어/ 나의 말들을 가두네요/ 침묵이 갇히네요/ 폭풍 한 점 그대의 정수리 위로 지나가고/ 불타는 하늘의 재들을 바라봅니다/ 잿더미 속에 빛나는 보석들/ 그대의 비밀은 타오르지 않습니다/ 비밀은 그대를 가두지 않습니다/ 나는 상자를 열고 재를 모아/ 비밀에게/ 내 것이 아닌 비밀을 보여줍니다/ 비밀 아닌 것이 없는 마음들을/ 말없는 그대에게 놓아버립니다/ 그대는 나에게 말합니다/ 나는 불꽃의 화환으로 봉인되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말합니다/ 비밀이 듣지 못하도록//
* 2007년 《문학동네》 등단작

죽음의 눈 / 주원익
나는 빛이다 입을 벌린 나의 눈/ (그는 너를 집어삼킨다)/ 전-깃-줄 타는 호랑이여/ 시선 속에 풍경을 구겨넣고/ 빛의 발톱이 세계를 할퀸다/ 호랑이 한 마리 정수리를 밟고/ 총총히 건너간다/ (너는 죽음이야 - 생 가운데)/ 너는 죽음이야 - 죽음 가운데/ 그리고 하얀 불꽃들 -/ 검은 심장의 꽃불 속으로 사라진다/ 정오의 태양은 목구멍 속으로 쑤셔박히고/ 잿더미가 입 안에서 출렁거린다/ 나는 죽음이야 죽음 가운데/ 그는 나를 집어삼키고/ 몸 안의 호랑이가 심연을 뱉어낸다/ - 너는 외눈박이였지/ 내가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전-깃-줄 타는 호랑이여/ 너는 이 구부러진 빛을 씹어먹는다//
* 2007년 《문학동네》 등단작

날개 감옥 / 주원익
나는 난다/ 날으는 것들은 내가/ 아닌 나라는 걸/ 안다// 나는 나른다/ 나르는 내가 감옥이/ 아닌/ 날개라는 걸/ 모른다 그러므로/ 난다// 창문은/ 감옥을 위한 날개/ 당신은 안다// 사라진 당신은 당신이/ 아닌 날개, 나를 위한 감옥// 날개는 그러므로/ 날지 않고/ 나는 당신을 위해 사라지는/ 틈,// 당신은 난다/ 날으는 것들은 내가/ 아닌/ 날개라는 걸/ 나른다.//

꽃 핀 나무 아래 / 주원익
우리가 마지막으로 내뱉어야 했던/ 관념의 오물들이 관념으로 뒹굴고 있다/ 흰빛,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그것은 때때로 달아나고 미소 짓고 불을 가져온다/ 강물은 낮을 가로지르고 밤을 위해 잠들었다/ 돌무더기를 끌고 발자국을 지우며 물소리/ 들리지 않는 그곳으로 우리는 쓰러져야 했다/ 쓰여져야 한다 버려진 문장들은 구름의 뼈를 부수고/ 세상의 빈약한 나뭇가지를 부여잡을 것이다/ 들판을 거닐다가 굶주린 갈까마귀처럼/ 우리가 마지막으로 더럽혀야 했던 오지에서/ 꽃 핀 나무들이 자라나고 흰빛,/ 헤매고 충돌하는 유령의 관념들아/ 우리가 처음 버려져야 했던 우리처럼 떨어진다,/ 그곳으로 떨어지고 있다//

 

공백의 악보 / 주원익

나는 다시 이것을 가리킨다/ 사로잡힘,/ 음악이 사라진다는 말/ 이것은 사라지지 않는 말이다/ 타오르는 구름의 선율을 거슬러오르며/ 죽어 있고 죽지 않는 천사들/ 들리지 않는 합창이 흘러내린다/ 음악이 그친다 그치지 않는 공기의 떨림,/ 이것은 사로잡히지 않는 말이다/ 구름의 해일처럼 시선은 시선으로 밀려가고/ 들림, 이것은 여기에 없고 재를 흘리며/ 입을 벌린다/ 있음으로 떨리지 않는 말, 죽어 있고 죽지 않는 노래/ 지저귀는 동물들의 주검을 떨치고/ 날개짓이 송가를 거슬러오를 때/ 사라지지 않고 사로잡히는/ 이것으로 사로잡히지 않고 살아지는/ 낙원, 사라지는/ 있음으로//

메아리 광대 / 주원익
어릿광대의 눈물처럼//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무뎌진다 무너진다// 말문이 트이면 돌아오지 않는 말// 가고 가고 갈수록/ 오고 오고 돌아온다// 왕관에서 떨어진 핏방울/ 그 빛이 마르면 걸어가리라고,// 부서진다 부셔진다/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눈부심으로 태어나는 바깥/ 눈물은 믿음처럼 타오르고// 길 없는/ 길이 없다// 목발 없이, 목발도 없이// 말문이 사라지면/ 절뚝거리는//

하얀 돌 / 주원익
우리는 끝내 온전한 꿈이 되지 못한다/ 빛 속에서 말이 걸어나온다/ 우리는 그저 빛이라고 묵묵히 발음한다/ 잿빛 구름의 행렬 우리는 말없이 뒤따르고/ 오직 괴로움만이 우리를 꿈꾸게 한다/ 우리는 사랑하고 온순한 짐승처럼 두려워한다/ 재빠르게 우리는 움직인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그것에게로 달아난다/ 혀를 집어삼킨 듯 중얼거리면서 하얀 돌 속의 길을 따라/ 굳어간다, 침묵으로 침묵을 깨뜨린다/ 검은 말들이 뚜벅뚜벅 그림자 밖으로 사라지는 동안/ 내일의 바람은 내일의 발자국을 지우고/ 우리는 으스러진 허공의 파편이 되어 꿈을 꾼다/ 우리가 그것에게로 가는 꿈처럼/ 끝내 온전한 파편을 꿈꾸지 못한다//

검은 돌 / 주원익
나는 그것이라고 말해졌다/ 그것의 처음 잿더미를 삼킨 바람,/ 빛을 버리지 않는 달의 연인이라고 말해졌다/ 태양이 식을 때까지 그것의 눈먼 불꽃이라고/ 말해졌다/ 달빛 가득 고인 진흙 항아리, 망자들의 언덕에서/ 나는 그것의 부스러진 이름이라고/ 말해졌다 그을음을 뒤집어쓴 모음들/ 검은 얼룩이 말한다/ 선홍빛 장미의 성채를 휘감아오르는 공기의 속삭임으로/ 모든 세계는 말하여졌다/ 쇠사슬을 끌고 별들의 시궁창으로 쏟아지는 그림자,/ 눈물 먹은 돌들이 말해졌다/ 그것의 빛이 태양을 삼키는 암흑의 사랑이라고/ 말해졌다/ 검은 얼룩이 말하여졌다//

이름의 돌 / 주원익
포도주 머금은 돌// 자수정처럼 굴러 박혀들어온/ 이름은 아름다움을 응용한다// 용융,/ 돌의 혈관 속으로 녹아내리는/ 빛의 결정// 도래 없는/ 미래는 태고의/ 암반과 밀어에 다다르고/ 매장된 말들에서 밀려나오는 암석들// 수정 이데아의 살갗이 벌어지고/ 대지의 혈액은 녹아내린다// 굳어가는 어둠과 지상의 광물들/ 누군가의 동공 너머로 녹아버릴/ 피와 살,// 시선을 머금은 돌//

행인 / 주원익
투명히 감도는 햇빛 속에/ 이상하고 선명한 하늘 아래/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물소리가 귓가를 다녀가는 듯/ 세상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고/ 자매는 다정하고 형제들은 더더욱 아리다/ 눈앞에 잠시 햇빛이 흐르다가/ 먼지 떠다니는 그 거리에서/ 사람은 영문을 모른 채 서 있고/ 길은 어느새 모든 길을 지나,/ 하늘이 푸르고 투명하게 높아져/ 누구도 아닌 얼굴 구름 아래/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망각된 밤 / 주원익
당신은 말을 닫습니다// 그 나무들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꿈들은/ 밤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홍예처럼 구부러진 나뭇가지들 사이// 당신은 우리에게 남은/ 말을 닫습니다/ 그 나무들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입맞추던 시간들은 멀리 꽃을 피우고/ 열린 문 앞에서 우리는// 밤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당신을 위해 남겨진 공백으로 우리는/ 당신의 말을 닫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아닌 기억으로/ 당신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영원을 잊은 나무들이 밤을 꿈꾸고/ 흰빛 속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추억의 형식 / 주원익
파도가 밀려오면/ 잠 속에서/ 노래를 기르는 기계들// 익사체를 비추며/ 검은 물속에 흘러가는 하늘// 헤아리지 마라 헤아리지 마라/ 메아리가 귓구멍을 막아도// 얼굴이여/ 하얀 날갯죽지에 공중을 가둔/ 괴조를 본다// 갈라지는 파도소리,/ 잠 속에서 기계를 벗어두고/ 노를 저어라// 잠들고 잠들어도 물결은 사라지지 않고/ 그치지 않는 하혈처럼/ 사라지는 물결들//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메아리가 귓구멍을 막아도// 기계는 익사체를 밀어내며/ 노래부른다// 침몰하는 하늘이여//

그림책 / 주원익
모래가 녹아 유리로/ 시는 녹아 시간으로/ 적히지 않는 말은/ 그림이 되어/ 그려지지 않는 말은/ 여백이 되어/ 표제는 읽는 자를 읽고,/ 채색이 끝나면/ 그림 속 시간은/ 모래 눈물로 흘러내리는//

눈물, 항해자들의 별 / 주원익
성층권, 젖은 꽃잎들 잠겨드는 당신의 수면으로 바다는 꿈 없는 잠처럼 밀려온다/ 북쪽 하늘이 구름을 벗고 극지의 벌거벗은 땅들을 지킬 때/ 돌아오지 않는 외침 소리를 뚫고 흐르는 설원// 눈동자 속에서 수은처럼 구름이 끓어오른다/ 말라붙은 꽃눈 아래 잠든 대륙들/ 얼음의 늑골이 시야를 막으며 묵음 속의 투명함을 깨뜨리고/ 아직 발음되지 않은, 물의 반짝임으로 폭풍은 구름의 변방을 일깨운다// 말들이 혀끝을 떠났을 때 초록의 수면이 피어나고/ 미간을 덥히는 꽃잎들/ 붉고, 희디흰, 검정의, 금빛/ 하늘이 멀어지고 소용돌이치는 별,/ 바라보는 눈에게 흘러드는 거울의 바다에서 항해자들은 무언을 약속한다//

눈 속의 가을 / 주원익
소리가 증발하는/ 울음/ 잠에서 깬 저녁,/ 창 저 멀리 새들이/ 되돌아오는 무렵에서/ 어둠을 끌어당기는/ 몸 안의 동굴 물밀어오는/ 투명한 어둠,/ 새들이 다녀간 귓가에/ 하늘과 울음이 남아/ 보이는 메아리는/ 보이지 않는 눈동자라고/ 사이를 다스려 가는/ 가을이어서/ 글자들의 살이 들어차는/ 동공의 방/ 스러지는 그림자들을 담는/ 눈 속의 하늘//

덫, 돛, 닻 / 주원익
덫, 나는 당신의, 돛/ 그러나 바람은 불지 않는다/ 녹물 흘리는 덫,/ 닻이 내려지고 눈물이/ 눈물의 심연에 정박하는 동안/ 당신이 붙들어 맨 돛/ 그러나 당신의 나는 덫/ 날아가는 덫 눈물 흘리는 닻/ 나는 떠밀려가고 돛을 밀며/ 떠내려가네 돛,/ 바람은 불지 않는다/ 덫이 사로잡은 구멍들/ 태양들,/ 검은 갈고리로 써 내려간 닻의 기록/ 덫의 첨단에서 미끄러지는/ 돛,/ 나는 당신의 기우뚱한 닻/ 그러나 바람도 불지 않는다/ 정박하는 돛 풀려나는 덫/ 말에 얽힌 몸의/ 닻, 나는 당신의,//

가슴속의 교회 / 주원익
잠과 꿈이 교차하는/ 눈 속에서/ 한 아이가 이름을 부르는데,/ 동생과 엄마 손을 붙잡고/ 낡은 교회당을 찾아 헤매던 밤들/ 회색 담장을 지나 철문을 밀고/ 잦아들던 흐느낌/ 새벽이 흘러드는 예배당에서/ 빛은 메마르고/ 저희의 잠 속에서 당신은/ 울고만 계셨을까/ 갈색으로 시들어가던 계절처럼/ 차갑고 긴 의자에 웅크린 채/ 아이는 엄마를 부르는데,/ 눈 속의 회랑 저편 꺼져가는/ 한 점의//

목소리 역설 / 주원익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신의 실패를 증명한다/ 그러나 물론 신은 실패를 모르는 완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항상 우리를 능가하는 우리가 존재한다/ 몸통을 능가하는 꼬리처럼 신은 신 자신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를 능가하는 실체이다// 따라서 이 목소리는 시를 능가하는 육체이다//

윤무 / 주원익
바닷가 민들레/ 달빛의 궁전 아래/ 약지에 반지를 걸고/ 빛의 고리를 이어나가듯/ 무르익지 않을/ 암흑 희미하도록/ 차가운 발등을 어루만지고,/ 금 간 진주들처럼/ 하나 둘/ 쓰러져가는 놀이/ 웅크린 그림자 곁에/ 잠든 모음들/ 열리지 않을 약속/ 한밤 스며드는 달빛처럼/ 남겨진 노래가/ 우리에게/ 없는 노래가//

재의 꽃 / 주원익
꽃은 밝혀질 수 없다// 밝을수록/ 당신을 밝힐 수 없다/ 당신은 다가설 수 없다// 한 송이 세계가 휴식하는 밤// 침묵이 밝혀질 수 없다 밝혀질수록/ 침묵을 밀어낼 수 없다/ 꽃이 멀어질수록 불의/ 꽃을 밝힐 수/ 없다// 당신은/ 타오를 수 없다/ 타오를수록/ 불꽃에 다가설 수 없다// 밝혀진 것이 아닌/ 침묵의 밝음이 사라지지 않고// 밤의 재로 번져가는 꽃 번져가는 불// 불길 바깥으로 물들어가는/ 사라짐을 적을수록/ 타오름을/ 적을 수/ 없다// 꽃을 밝힐 수 없다//

온실효과 / 주원익
파이프오르간 소리처럼 웅웅거리는/ 바람의 선율이 태양을 향해 솟구쳐 오른다/ 귀먹은 순례자들이 노래하는 황혼이면/ 황금 두개골이 피어나는 소리/ 만 년을 견딘 지상의 얼음들에 금이 가고 있다/ 자줏빛 오로라가 허공의 음계처럼 출렁거린다/ 얼음 속에 갇힌 눈동자 하나/ 빙하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람의 옥타브/ 들리지 않는 대지의 노래를 따라 새들이 날아간다/ 깊고 아늑한 소리의 구멍 속으로/ 소리 없이 세계의 어둠이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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