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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발 도장 / 황미연

부흐고비 2022. 6. 2. 08:35

무심코 보던 책 속의 한 문장이나, 영화 속의 한 장면이 가슴에 와닿을 때가 있다. 종일 그 생각에 발목이 흥건해질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이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여든네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적이다. 시간의 두께가 내려앉은 늙고 앙상한 손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자 맑은 소리가 공중으로 피어오른다. 입으로 뭔가를 주억거리는 표정이며 몸짓, 피아노 건반 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주름진 손은 참으로 아름답다.

보헤미안 출신인 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여 열두 살에 독주를 할 만큼 천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여든여덟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음악에 헌신한 순순한 영혼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노년의 모습에서 음악과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져 뭉클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가장 멋지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연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니 편안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그때 내 안에서 무언가 뜨겁게 솟구쳐 올라와 가슴을 흔들어댔다.

수업 도중이었다. 교실 뒷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누군가 불쑥 내 이름을 불렀다. 누가 먼저랄 젓도 없이 반 아이들은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친구 아버지처럼 젊지도 않은, 초로의 내 아버지였다. 검은 우산을 당신의 허리춤에 붙이고 엉거주춤 서서 커다란 눈으로 교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아버지의 우산 속으로 와르르 모여들었다. 나는 벌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촘촘한 웃음소리를 비집고 들어가 검은 우산만 낚아채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로 아버지의 초라한 몸을 접고 또 접었다.

교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머릿속은 온통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태연한 척 애를 쓰면서도 창밖으로 곁눈질했다. 운동장으로 걸어 나가는 아버지의 머리 위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젖은 바짓가랑이가 야윈 다리에 착 달라붙어서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비바람에 다리가 휘청거리자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했다. 씁쓸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걷는데도 물웅덩이만 골라 내딛는 걸음처럼 첨벙거렸다. 심장이 뛰었다.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내 모습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쏟아지는 빗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느린 걸음으로 운동장에 꾹, 꾹 발 도장만 남긴 채 사라지셨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오후 내내 아버지의 등에서 머물렀다. 한문 숙제, 일본어 숙제가 버거워 끙끙대면 밤잠을 주무시지 않고 도와줄 때는 최고라고 해놓고, 늙은 모습이 초라하다고 외면했다. 응석받이로 자라 자신밖에 모르는 내게 빗줄기가 세차게 들이쳤다. 아버지가 어떤 얼굴을 하셨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시면서 교실 밖으로 나가셨을 것이다.

제르킨은 자신이 피아니스트이기는 하지만, 피아노는 음악 자체에 비하면 내 관심을 별로 끌지 못했다고 했다. 절정에 이르러 감정을 밖으로 폭발하는 대신 내면에서 스스로 정화시키는 것은 지혜로운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했던가. 그때 얼굴을 들어 눈이라도 마주쳤더라면 아버지의 우산 속엔 꽃등이 환하게 켜졌을 것이다. 빗방울이 둥그렇게 퍼지는 날 여기저기 아버지의 발 도장이 찍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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