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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은규 시인

부흐고비 2022. 6. 7. 08:30

이은규 시인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시집으로 『다정한 호칭』,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가 있다. 김춘수문학상,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계간 《시와 시》 편집장.

 



귀가 부끄러워 / 이은규
그늘진 쪽으로 몸이 기운다/ 모든 사랑은 편애// 제철 맞은 꽃들이/ 분홍과 분홍 너머를 다투는 봄날/ 사랑에도 제출이 있다는데/ 북향의 방 사시사철 그늘이 깃들까 머물까/ 귀가 부끄러워, 방이 운다 웅-웅/ 얼어붙은 바닷속 목소리// 철도 없이 거처를 옮겨온 손이 말한다/ 혼자 짐 꾸리는 것도 요령/ 노래나 기도문처럼 저절로 익혀지는 것/ 점점 물음표를 닮아가는 등/ 끝은 언제쯤일까 의문문은/ 봄이 가기 전 완성되어야 한다// 내내 겨울인 북극 떠올리기/ 사람이라는 뜻의 이누이트에게 물을까 배울까/ 화를 다스리는 요법에 대해 알려줄게/ 얼음 평원을 향해 걷는다 한다/ 걷고 걷다보면 해질녘 극점/ 발이 멈춰 온 길을 되돌아온다 한다/ 뉘우침과 용서와 화해의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도/ 나는 뉘우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화해하지 않겠습니다/ 사시사철 환한 그늘이 한창일 북향의 방/ 얼어붙은 바다를 부술 것, 목소리를 꺼낼 것/ 끝은 어디쯤일까 봄이 오기 전/ 의문문은 완성되어야 한다// 도처에 꽃말과 뉘우침과 용서와 화해들/ 귀가 부끄러워, 결별하기 좋은 봄의 시국//

별들의 시차 / 이은규
그가 음독(飮毒)하며 중얼거렸다는 말/ 인간은 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상상한다// 천문학자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정치를 했다는 이력으로 한 죽음을 이해할 필요는 없고// 눈이 아프도록 흩뿌려진 별 아래/ 당신의 몸속 세포와/ 궤도를 도는 행성의 수가 일치할 거라는 상상이 길다// 저 별이 보입니까/ 저기 붉은 별 말입니까// 조용한 물음과 되물음의/ 시차 아래/ 점점 수축되어 핵으로만 반짝이던/ 한 점 별이 하얗게 사라지는 중이다// 어둠을 찢느라 지쳐버린 별빛은/ 우리의 눈꺼풀 위로 불시착한 소식들/ 뒤늦게 도착한 전언처럼/ 우리는 별의 지금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뿐// 어떤 죽음은 이력을 지우면서 완성되고/ 사라지는 별들이 꼬리를 그리는 건/ 그 속에 담긴 질문이 너무 무거워서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하게 무거운 저 별, 별들//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 이은규
아침 꽃을 저녁에 주울 수 있을까// 왜 향기는 한 순간 절정인지/ 아침에 떨어진 꽃잎을 저녁에 함께 줍는 일/ 그러나 우리는 같은 시간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발자국 하나/ 지구의 원점,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날 때/ 흩어진 별들의 고개 기울어지다// 알고 있니 천문대의 자오선을 경계로 하루쯤 시차가 난다는 걸, 그도 괜찮지만 착란은 날짜변경선이 지나는 나라의 일, 언제나 거짓말 같은 새벽과 짙은 농담의 밤이 찾아오는 곳// 감은 눈동자 위로 반짝이는 열(熱)/ 이별은 이 별에서 헤어지는 중입니다/ 새의 깃도 바람에 헤어지는 중입니다// 기억하자 날짜변경선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으면 하루 늦게, 반대의 경우 하루가 빨라진다는 걸, 착란의 시간과 변하지 않을 운명에 대한 예감은 잠시 접어두기// 문득 망설이던 긴 꼬리별/ 역일(曆日)의 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순간// 때를 달리한 연인은/ 아침 꽃을 저녁에 주울 수 없고/ 우리는 너와 나로 파자(破字)되어 단출할 뿐이다// 이제 잊는 것으로 기다릴까/ 향기로운 새의 부리가 전해줄 꽃의 절정/ 한 잎은 이쪽으로,/ 한 잎은 저쪽으로//
* 루쉰의 산문 제목에서 빌려옴

미간(眉間) / 이은규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이라 부르는 곳에 눈이 하나 더 있다면/ 나무와 나무 사이/ 고인 그늘에 햇빛 한 줄기 허공의 뼈로 서 있을 것// 최초의 방랑은 그 눈을 心眼이라 불렀다/ 왜 떠도는 발자국들은 그늘만 골라 디딜까/ 나무 그늘 아래 당신의 미간 사이로 자라던 허공의 뼈// 먼 눈빛보다 미간이 좋아/ 바라보며 서성이는 동안 모든 꽃이 오고, 간다// 나무가 편애하는 건 꽃이 아니라 허공/ 허공의 뼈가 흔들릴 때 나무는 더 이상 직립이 아니다/ 그늘마다 떠도는 발자국이 길고// 뒤돌아보는 꽃처럼 도착한 안부, 어느 마음의 投擲이 당신의 心眼을 깨뜨렸다는 것 돌멩이가 나뭇잎 한 장의 무게도 안 되더라는 위로는 사흘 지나 끝났다 온전한 무게에 터진 미간의 기억이 치명적이었다는 소견, 왜 미간의 다른 이름은 命宮일까// 사람들이 검은 액자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화염의 칼날이 깨끗이 발라 낸 몸, 뼈가 아직 따뜻한데/ 직립을 잃은 허공이 연기가 되고 있다/ 눈인사 없이 떠난/ 당신이 나무로 태어날 거라고 믿지 않는 봄날// 投擲의 자리엔 햇빛의 무늬가 밀려가고, 밀려오고//

조각보를 짓다 /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 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 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 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 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 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현빈지문(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꽃은 나무의 난청이다 / 이은규
모든 소리들이 죽지 않는 건 귀가 있기 때문이다// 귀는 당신의 말들로 붐비고/ 이미 듣지 않거나, 돌려 보낼 수 없는 약속들의 절기/ 花色의 속도가 바람으로 질 때/ 꽃을 잃어버린 나무는 서둘러 푸른 잎들을 틔운다/ 잎은 꽃에게로 열린 나무의 귀/ 일렁이는 잎들은 허공의 소란일 것/ 바람을 동경해 바람으로 흩어진 사람이 있다/ 들리는 순간 약속이 되어 버린 말들/ 오래 전 들었던, 그러나 돌려 보낼 곳을 잃은// 나무는 봄 내내 난청을 앓다/ 꽃이 보이는 순간 제 그림자로 지는 花色을/ 듣게 될 것이다// 착란의 봄이 꽃을 따라가면/ 남겨진 나무의 계절이란 꽃 진 자리에/ 허공을 견디는 일/ 귀는 당신의 말들로 붐비고/ 나무의 난청은 꽃에게로 와서 꽃에게로 가는 중이다/ 당신은 누워서도 흔들리고 있을까/ 땅 밑을 흐르고 있을 추운 바람// 서서히 청력을 잃는 방법, 迷路性 난청을/ 소원하며 길을 잃어버린 그 해 꽃이/ 다시 들려올까/ 몇 잎의 귀를 떨어뜨리며 묻는 나무에게/ 당신은 추운 바람을 빌어 잎들을 거들 뿐이다/ 언젠가 난청의 소원이 이뤄질 때// 꽃, 닫힌 귀의 나무 그림자로 지는//

죽은 시인과의 연애 / 이은규
연애라는 말을 아나요/ 모두가 알면서 아무도 모르는 말, 연애/ 오늘도 죽은 시인과의 연애가 한창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만화방창 호시절, 호시절/ 때는 바야흐로 만화방창 호작질, 호작질// 생각난 듯 정분이 나는 스타일이라면/ 아마도 해독 불가능할 문장임을 알리오// 涓埃(연애), [명사] 물방울과 티끌이라는 뜻으로, 아주 작은 것을 이르는 말// 憐愛(연애), [명사] 불쌍하게 여겨 사랑함// 戀愛(연애), [명사]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 煙靄(연애), [명사] 연기와 아지랑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죽은 시인은 문장이 있고/ 죽어서도 살아있는 몹쓸 시인이고/ 죽어서도 살며있는 애인이고// 시인 등골 빼먹으면 지옥 간다는 말을 아나요/ 죽은 시인에게 빚이 많아 죽지도 못할 나지요// 살아있는 나는 문장이 없고/ 살아서도 죽어있는 몹쓸 시인이고/ 살아서도 죽어있는 애인이고// 오늘도 죽은 시인과의 연애가 한창입니다/ 혹시 생의 화두가 연애라고 밝힐 수 있겠습니까, 당신//

점등(點燈) / 이은규
책장을 넘기는데 팟, 하고 전구가 나갔어요/ 밝기의 단위를 1룩스라고 할 때 어둠의 질문,/ 당신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 탐미적인 어느 소설가는 소셜리즘이 수많은 밤을 소모시킨다고 불평했어요 그토록 와일드한 오스카 이야기, 안타깝지만 그는 빈궁을 벗 삼아 죽어갔어요 뜻밖에도 오늘의 밑줄은 성서의 한 구절,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우리가 혁명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세상이 점등될 거라 선언해요// 때로 이상한 열기에 전구 내벽이 까맣게 그을리기도 할 거예요 어둠의 공기를 마신 시인의 폐벽처럼, 그럴 때 필라멘트는 일종의 저항선으로 떨려요 가는 필라멘트 같은 희망으로 아침을 켤 수 있을지 귀 기울여요 고백하자면 세상을 글로 배웠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면, 오늘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

속눈썹의 효능 / 이은규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단어,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빡임의 습관을 잃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 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를 닮은 차가운 돌멩이 사이에 숨겨 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애콩 / 이은규
어느 마을에선 완두콩을 애콩이라 부른다// 덜 여문 것들에게선 왜 날비린내가 나는지/ 푸른 날비린내가 나는 이름, 애콩/ 생의 우기雨期를 건너다 눅눅해져 애를 태우는 것들// 엄마는 왜/ 이 밤에 콩을 까실까, 콩을/ 불도 안 켜고// 꼬투리를 세워 깍지를 열었는지/ 텅 빈 시간 몇 알 후둑, 후두둑/ 그릇 위로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잠시 한숨을 고르고/ 알맹이들을 한쪽으로 쓸어 모으는 손길// 알맹이라 착각하고 싶은 둥근 시간들이/ 꼬투리라는 최초의 집을 떠나면/ 차오른 허공을 바라보며 허부렁해질 저 꼬투리// 열린 방문 사이로 말없이 묻는다/ 엄마는 왜/ 이 밤에 콩을 까, 콩을/ 문틈의 빛줄기 너머로 말없이 들린다/ 잠이 안 와서, 잠이// 철없는 애콩이/ 꼬투리 잡힐 과오들을 푸르름이라 착각하며/ 날비린내의 몸을 말아 둥글게 누워 있다// 최초의 몸이면서 집인 콩꼬투리/ 덜 여문 날들을 다독이느라 푸른 물이 들었을 손/ 그 손이 인기척도 없이 방문을 닫는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나는 닫힌다. 한 철//

세상 쪽으로 한 뼘 더 / 이은규
흰옷을 입고 걸어갔다, 고집스럽게/ 누군가 고집은 투명한 슬픔이라고 말했다 하자// 우리라는 이름으로 도착한 세상, 꿈결도 아닌데 왜 양을 세며 걸어갔나 몽글몽글 구름옷을 입은 양떼들이 참 많이도 오고 갔다 포기 없을 다정이여 오라, 병(炳)이여//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한 마리에 사랑을 양 두 마리에 재앙을 양 세 마리에 안녕을// 푸른 풀포기에 맺힌 이슬방울 만큼 떠오르는 생각들 얼굴들 약속처럼 추억이 방울방울 피어오르다 이미 추억이 될 수 없는 이름들과 오고 있는 무엇, 무엇들아// 날씨보다 한 발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하자// 오늘의 세상 한쪽에서 비가 내리는데 한쪽에선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다면 또다른 한쪽에선 맑음이라면, 믿을 수 있나 믿지 않을 수 있나 우연이라는 운명을// 문득 비 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말 중에 어느 것을 가장 좋아해*// 비 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느 것을 가장 좋아해, 묻는 목소리를 가장 좋아해// 투명한 슬픔을 고집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자/ 고집스럽게, 흰옷을 입고 천천히 발을 내딛는//
*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구름의 프레임 / 이은규
떠가는 구름/ 오늘의 문장은 흐르는 정물들에 관한 이야기// 물방울이나 얼음입자가 모여 하늘에 떠 있는 것으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한다// 사전 속 구름에 대한 정의는/ 종종 눈물점을 자극하기도 하는데// 한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사전에/ 흐르는 정물들에 대한 정의를 기록한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물방울이나 얼음입자가 모여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말한다// 어제의 구름과/ 절기와 헤어진 꽃과 꽃잎들/ 혹은 부르는 순간 시간이 되어버리는 어느 호칭/ 흐르는 정물들이 보이다, 안 보이다//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는 사람// 드디어 구름의 이슬점과 눈물점이 응결고도에 오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예감하지 않겠다는 선언// 두 손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떠가는 구름을 가둬본다/ 보이다와 안 보이다 사이를 흐르는 정물/ 다시 기다릴 수 없는 것들만 기다리게 될까// 구름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문장, 한 점//

카스텔라의 건축 / 이은규
해질녘 창가/ 둥근 탁자가 있습니다/ 천천히 데운 흰 우유가 있습니다/ 접시 위에 카스텔라가 놓여 있습니다/ 나이테를 기억하는 나무 포크가 있습니다// 구름맛 우유는 따뜻하고/ 붉게 피어오르고 노을은// 노트 페이지를 가만히 넘기면/ 카스텔라를 나눠 먹으며 서로의 입술에 묻은/ 보이는 안 보이는 설탕 알갱이를 훔치던 기억/ 함부로 훔친 마음과 같이/ 한 모금 우유에 풀린 건 카스테라만은 아니었을 것/ 살살, 두 사람의 하늘 위로만 별들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한 집에 살 수 없다면 떠나자/ 떠나간 곳에서도 집을 짓고 살 수 없다면/ 노을빛으로 부풀어오르는 카스텔라를 굽자/ 단단한 다짐은 아름다운 건축과도 같고//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신처럼/ 우유가 식어가는 줄 몰랐던 한 사람과 한 사람/ 긴 그림자가 슬픔을 뒤돌아볼 때/ 산산이 부서져 내린 다짐에 대해 침묵할 것/ 카스텔라에 관해서는 카스텔라에게 질문하기// 아직 해질녘 창가와/ 탁자와 우유와 나무 포크와/ 노을과 카스텔라와 설탕 알갱이가 있습니다만/ 이름이 지워진 안부를 수소문 중입니다/ 한 사람만 결석한 한 사람의 생일// 모든 기억은 습기에 취약하고/ 지나친 슬픔은 몸에 해롭습니다만/ 하루 한 번 일용할 양식인 카스텔라를 굽습니다/ 창가 해질녘 증후군//

애완돌 / 이은규
친구는 요즘 애완돌 키우기에/ 여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들려준 애완돌의 유래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인들이 모여/ 애완동물 키우기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던 중/ 애완돌 상품을 떠올리게 되었다나요// 그러면서 돌이 애교가 많다고 했습니다/ 둥근 몸으로 잘 구르는 특성을 이용할 줄 안다고/ 가만 놔두면 먼지가 쌓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물로 씻어주고/ 헝겊으로 닦아 광을 내주는 정성이 필요하다고 말이지요// 애완돌 훈련법도 덧붙여 주었습니다// 이리와, 단호하게 명령한다 혹은 조금 더 힘내/ 앉아, 엄중한 목소리로 명령한 뒤 몰래 돌이 누워 있지 않은지 확인한다/ 굴러, 경사진 언덕에서 굴러 라고 말한 뒤 손에서 놓는다// 앞으로도 친구는/ 죽지 않는 것에만 애정을 쏟을 거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돌멩이 추 / 이은규
딸의 소풍에 따라 간 시인은 수건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수건이 빙빙 돌고 하늘도 따라 도는 투명한 오후, 나무 그늘 아래 시인은 자리를 잡았다 문득 딸이 돌아보았을 대 시인은 가슴에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은 채 누워 있었다고 한다 아빠 왜 그러세요 질문하는 딸에게 날아갈까 봐,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때로 어떤 돌멩이는 훌륭한 추錘가 되어 무겁다 가슴이 아프다, 라는 주문은 눈에 밟힌다, 라는 말의 뒤편에서 온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마음은 무거운 거야, 오늘의 나는 문진으로 쓰는 책상 위 돌멩이를 보고 있다 너무 무거운 것들은 또 얼마나 날고 싶어 하는가를 오래 생각하며//

잠든 돌을 깨우다 / 이은규
사람들은 그를 애도하기보다/ 그의 파이프를, 시가의 브랜드를 사랑해// 새는 하루에 1분 사람은 두 시간/ 고양이는 세 시간 꿈꾼다지/ 그렇다면 돌은/ 꿈꾸는 시간까지 잴 수 있다는 믿음을 믿지 않기로 한다// 이국의 어느 마을에/ 생명은 돌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부족이 있지/ 어둠이라는 이름의 돌/ 그들은 기다리고 있을까/ 돌 속의 방에 잠든 한 사람이 깨어나기를/ 횡단의 모터사이클 바퀴에 채이던/ 돌부리들 중 하나일지 모르지/ 무덤가에 툭 떨어져 오래 꿈꾸는 돌멩이 하나// 그를 살려내기보다 사람들은/ 사랑해 그의 초상을, 프린트 된 티셔츠를// 아무도 잠들기 직전/ 그의 갈색 눈에서 쏟아졌다는 푸른, 빛을 들으려하지 않지/ 아직 가능한 불가능한 꿈을 위해/ 견고한 눈물, 별 하나 박힌 검은 옷을 준비하지 않겠다// 그가 지녔던 홀쭉한 배낭 속/ 지도 한 장과 두 권의 비망록/ 그리고 녹색 노트 속 흘림체로 필사된 몇 편의 시에/ 한 편의 시 더할 때까지//

소금사막에 뜨는 별 / 이은규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 꿈꿔야 할 문장은/ 잠언이 아닌, 모래바람을 향해 눈뜰 수 있는/ 한 줄 선언이어야 할 것/ 사막 쪽으로 비껴 부는 바람// 꿈으로도 꿈꾸던 달의 계곡 지나 이국의 마을/ 바다에서 솟아오른 사막이 있다/ 당신은 물을까, 왜 소금사막이어야 하는지// 만약 그리움이라는 지명이 있다면/ 비 내린 소금사막에 비치는 구름 근처일 것이다/ 끝없이 피어올라도/ 다시 피어오를 만큼의 기억을 간직한 구름// 빗물 고인 소금사막에 떠 있는 기억의 신기루/ 그 풍경을 손에 담으면 구름을 간직할 수 있을까/ 간직을 꿈꾸게 하는 이름들/ 구름과 당신이 같은 종족임을 말하지 않겠다// 소금사막에 밤이 오면/ 별, 하늘을 찢고 나온 고통 한 점/ 오래 쏟아지는 별빛에 살갗이 아플까/ 당신은 이불깃을 끌어당기며 움츠리겠지/ 다독이다 뒤척이다/ 럼주를 구하러 마을을 기웃거리면/ 문득, 골목 끝 비상약 파는 가게에서/ 발효된 사탕수수 향을 맡게 되겠지/ 운명은 종종 독주를 비상약으로 처방하고/ 그 밤 우리의 감행에 동의하는 이들이 있을까// 버리고 가자는 말보다/ 다만, 두고 가자/ 잠언에 시달리다 감행을 포기하는 당신이라면/ 영원을 기다린 선언은 소금알갱이로 부서지겠지/ 당신에게 소금사막은 여러 지명 중 하나// 저만치 비상약이 보이는/ 밤의 창문을, 서성이다 가는 바람//

인력 / 이은규
해질녘 붉음/ 저마다 다르게 빛나는 먼지들을/ 짙은 노을이라 부르지 않기도 한다// 거꾸로 걸린 달력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숫자들/ 날짜가 맞습니까, 기억이 맞습니까// 봄날의 남은 일과는/ 저무는 것으로 다만 저무는 일// 기억이 맞습니까, 벗꽃이 맞습니까/ 초속 5cm로 떨어지는 꽃잎들/ 비스듬히 서있는 나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을처럼/ 인력, 모든 물체들은 서로 끌어당긴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가까워지는// 기억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워하면 그리워할수록 멀어지는/ 이상한 법칙에 대해 놀라지 않기로 한다// 희미한 살냄새가 묻어나는 연필/ 지문 가득한 지우개를 만지다가// 한 사람과 먼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을/ 아름다운 법칙에 대해 믿지 않기로 한다/ 다행이거나 다행이지 않을 뿐/ 먼지로 흩어져 떠다니다/ 서로에게 가닿을 마지막 인력에 대해/ 법칙보다 예감인 해질녘 늦봄//

책冊에 살어리랏다 / 이은규
이 한기寒氣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옛사람 이덕무*가 어느 겨울, 오두막에 앉아 있다 사람의 입김이라면 이렇게 귀신스러울 수 있을까 입김이 성에가 되어 이불깃에 뚝뚝, 등잔불의 심지만 키우며 곰곰하던 그가 무릎을 탁 친다 묘책이로다! 묘책이로세! 맵찬 허공중에 매화 터지듯 터진 묘책이라는 게 쯧쯧, 허겁 지겁 한서 한 질을 이불 위에 쭉 늘어 놓기에 이른다 생의 한기를 책冊으로 막으려 하다니// 그의 별호는 책 귀신이었다 굶어죽는 어미 곁에서도 문장文章을 탐했다는// 한서 한 질로 겨울을 나는구나 마음을 탁 놓았을 그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예 독한 바람에 얼굴을 쓰인다 오두막 모퉁이의 흙벽이 부서졌던 것, 탐독하던 논어 한 권을 뽑아 세워 바람을 막아보는 그, 책으로 막을 수 있는 바람은 어떤 목소리의 바람일까// 생의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책으로 막을 수 있다는 그 믿음이 바로 한기寒氣다// 오늘밤도 어리석은 자가 있다. 어느 시詩의 기막힌 비문이 피를 돌게 해 잠시 생의 한기를 다독이는 밤, 탐독의 병증은 생의 난독을 불러 온다지 이번 생도 귀신스럽게 추울 것//
* 이덕무: 조선시대 실학자, 시문에 능했으나 서얼 신분으로 크게 등용되지 못한 인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 이은규
오래 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라는 문장이 들려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당신을 다 만나게 되지 있을까// 때로 어떤 문장은/ 가까이서 멀리서 언제나 출발 중이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공기 사이로/ 어젯밤 몇 개의 절기가 오고 갔는지/ 어젯밤 몇 개의 기억이 가고 왔는지/ 창백한 열꽃이 피고 지는 동안/ 꽃 소식이 들리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온 이름은, 우리일 것/ 법칙과도 같이 약속과도 같이/ 당신이 당신에게 돌아가는 동안/ 우리가 당신에게 돌아가는 동안/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다는 역설이 길다// 때로 어떤 문장은/ 멀리서 가까이서 언제나 연착 중이다// 너무 많은 기억에도 불구하고/ 너무 짧은 절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라는 이름만 아지랑이로 일렁인다// 온 세상 당신을 다 만나게 되지 있을까/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얼마 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라는 문장이 들려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 모리미 도미히코(もりみとみひこ)의 소설『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經典 /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 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지명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바람의 지문 /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저녁의 문장을 보고 듣다 / 이은규
어느 날 물었다/ 실명한 눈에는 무엇이 보일까/ 조용히, 눈앞이 캄캄해졌다/ 맹목적이라는 충고를 받을 때조차/ 화석이 될 눈동자를 포기할 수 없고// 모든 상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아직 보고 있는 것// 찢어진 고막에는 무엇이 들릴까// 귀가 먹먹해졌다, 천천히/ 얇고 투명한 막에 튕겨져 나온 음파일 때조차/ 달팽이관을 떠돌며 맴돌// 모든 파열은/ 들리지 않는 것을 벌써 듣고 있는 것// 시를 믿는 한/ 적어도/ 그들이 보고 듣고 있다는/ 사실을/ 대신 들려줘야할 의무가 있다는/ 저녁의 문장//

차갑게 타오르는 / 이은규
 몇 점 눈송이가 겨울을 데리고 왔다/ 편백의 숲으로//  여독에 물든 것들은/ 왜 추운 바람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걸까, 관성처럼/ 기다리는 안부는 멀고/ 희망이 가장 먼저 죽는다는 말을 의심해 보기로 한다//  두고 온, 나를 잊을 수 없다/ 편백나무의 기억을 기억하는 어느 화가처럼//  어둠일수록 별을 아끼는 이유/ 다가올 문장들이 기록된 문장들의 주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해석에의 동경보다 오독을 즐겨할 것/ 언제일까 스스로 귀를 자를, 문장의 시간//  두통의 잉여를 달래는 요법/ 이마에 물먹은 편백나무 한 조각 올려놓는다/ 피톤치드 피톤치드/ 소리 없이 속삭이는 별들/ 두고 간, 화집 속엔 차갑에 타오르는 편백나무//  여독의 몸이 보내온/ 추운 바람 냄새가 닿을 것 같은 밤, 관성처럼/ 기다리지 않은 안부는 가깝고/ 희망이 가장 나중에 죽는다는 말을 의심해보기로 한다//  죽음보다 더 나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요법의 겨울 도처에서//

간헐적 그리움 / 이은규
가을의 다짐에 귀 기울여 보세요// 하루 한 끼니와 같이/ 하루 한 번 당신을 그리워하기로 한다/ 간헐적으로/ 나뭇잎들 떨어지다, 떨어질까/ 지난 기억과 이번 가을 사이// 마땅할 당, 몸, 신/ 마땅히 내 몸과 같은 당신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다/ 그럼에도 이미 아직/ 당신이 당신이라면/ 사이사이로 지는 잎새 쌓이거든/ 열두 겹 포근히 즈려밟고 오세요// 도착 대신 연착되는 안부일 때/ 이번 가을과 다음 기억 사이/ 그럼에도 아직 이미 하루 한 끼니에 익숙해진다면 나뭇잎에 숨겨놓은 다짐을 들추지 않기로 한다// 몸속 세포가 바뀌듯이/ 간헐적으로 나뭇잎들 떨어진다. 돋아날까/ 계절이 오고 가는 사이/ 열두 겹 기억의 도착을 예감해 보기로 한다/ 그럼에도 이미 아직/ 한 줄기 햇빛시침이 우리를 향하는 시간// 다짐에 귀 기울여 보세요 가을의//

 

골목의 다짐 / 이은규

우리는 한 골목 입구에 도착했다 처음엔 나란히 옆모습을 보며 걸었다 골목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담쟁이 넝쿨의 웃음소리 골목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벽을 등지고 서로를 마주보며 걸었다 골목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문득 한 사람은 뒤돌아 골목을 빠져나갔고 한 사람은 남았다// 기억 담쟁이 넝쿨만 무럭무럭, 세상의 모든 골목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구불구불하지만 그건 마치 황무지의 나무들이 바람의 방향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이는 이치, 이제 골목의 무수한 벽들을 깨 버리거나 훌쩍 뛰어넘거나 사실은 벽이 아니라고 믿거나 통과해 버리는 등의 묘기를 부리지 않겠다고 적는다 골목 끝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나아가기로// 골목의 다짐, 남은 한 사람은 가만히 벽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으며 기나긴 문장들을 쓰기로 한다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나아가며 벽을 따라 걷는 슬픔으로 가득 차기로 파멸과 극복을 반복하는 영웅전집이나 경들을 타인의 일기장을 지우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멈추기로 한다 타오르는 문장들, 이제 일용할 양식은 매일 조금씩 갱신되는 슬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이은규
이토록 눈부신 날/ 나의 세탁소에 놀러오세요/ 무엇이든 표백 가능합니다/ 너무 투명하여 그림자조차 없는 문장//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라는 당신의 문장에 기대어 한 절기/ 환절기 잘 견뎠습니다// 네, 문장 덕분입니다/ 아무렴요 아무렴요// 고집이라 쓰고/ 표백된 슬픔이라고 읽습니다/ 표백된 슬픔이라 쓰고/ 고집이라 읽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겨울/ 어떤 문장에 기대어 동절기/ 한 절기를 견뎌야 할지/ 막막하기만 먹먹하기만 합니다// 문장 때문입니다, 네/ 아무렴요 아무렴요// 아무래도 고된 날에는/ 일하기 싫어요, 라는 팻말을 걸고 문을 닫아요// 나를 망치러온 구원자, 당신/ 모든 기억이 표백되는 겨울은 두 번째 생이다// 눈부신 날 이토록/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로 놀러오세요/ 무엇이든 표백 가능합니다/ 그림자조차 없는 문장, 너무 투명하여//

수박향, 은어 / 이은규
한낮의 여름/ 수박향이 나는 물고기에 대해 알고 있니/ 은어라는 이름의 물고기래/ 때로 어떤 문장은 화석처럼 박힌다// 언젠가 우리 물 맑은 곳으로 떠나자, 약속/ 뾰족했던 마음이 한결 둥글어질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한 사람의 눈동자보다 깊은 수심은 없어, 어디에도// 흐리고 비, 흐리고 가끔 비// 물고기에게서 어떻게 수박향이 날까/ 은어는 초록 이끼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대/ 허공에 떠다니는 우울을 알뜰하게 모아/ 바라봤다 나는/ 우리 사이, 이끼와 수박향의 거리만큼 가깝게 먼/ 흥얼거리는 콧노래도 없이, 투명한 여름// 약속처럼 언젠가는 오지 않았고/ 몇 번의 여름을 서툴게 배웅하는 동안/ 나는 잃어버린 적 없는 시간을 그리워했다, 때때로// 저기 밤의 웅덩이에서 피어오르는 목소리/ 은어가 돌아올 때까지 뭘 하며 지낼 거야/ 여름이 오지 않기를 믿으며 바라며/ 뭘 하며 지낼 거야 한 사람이 사라지면/ 원이 닫히지 않기를 바라며 믿으며// 종이 위 빗방울이 마르는 동안만 뭉클할 것, 내내// 이제 수박 예쁘게 자르는 방법 따위를 지우며/ 수심을 다스리자 안녕 초록 이끼로 번지는 우울들아// 먼 데 화석으로 반짝, 밤을 건너는 물고기자리//

매화, 풀리다 / 이은규
겨울의 뒷모습과 매듭을 잊은 시간으로부터/ 나는 오늘 상춘객, 꽃 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차가운 손끝 혼자의 나들이 물어물어 찾아간 청매홍매야 내 마음 들리니 목소리가 들리니 봄의 입김으로 풀리는 살갗이 환하게 아프겠다, 아프지 않겠다// 누군가 날 생각하면 신발 끈이 풀린다는 말/ 눈 뜨면 아프기도/ 눈 감으면 아프지 않기도 하니까/ 매일매일 멀리서 가까이서/ 오래 꿈꾸던 문장을 우리 이제 매듭짓기로 하자/ 청실홍실의 상상력, 몹쓸// 한 발 한 발// 저 매화를 다 걸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신발 끈이 자주 풀리는 이유/ 누군가의 생각을 짐작하겠다, 짐작하지 못하겠다// 먼 곳에 닿을 꽃과 안부// 언젠가 대신 신발 끈을 매주며 함께 있는데도 물릴 만큼 좋아, 묻고 답하던 날 마지막 꽃에 귀 기울이면 그날의 목소리 돌아올 거라 믿습니다 모든 나무에게 꽃이 그렇듯 함부로 피는 사랑이란 없다 잘못 매듭지어진 시간이 있을 뿐// 단단한 다짐이 필요해/ 기억이 저무는 사이 서성이는 상춘객/ 주머니 속 숨겨놓은 꽃향기/ 한 사람에게 닿을 텐데, 닿을 것만 같은데//

벚꽃의 점괘를 받아적다 / 이은규
봄기운도 참/ 바람이 이렇게 달아 살살 간지럽겠다// 몽글몽글 벚꽃의 아치 아래서/ 당신은 봄의 호작질에 놀아나는 중이다/ 시시로 연인의 입술에 달라붙은 꽃잎을/ 홉—하고 숨결로 떼어내거나/ 꽃을 먼저 보낸 성급한 푸른 잎이/ 연인의 분홍 잇몸에 돋아나는 걸 보겠다/ 혹은 흩날리는 벚꽃이 허투루 흘리는 점괘 따위를/ 받아 모시거나, 애면글면하거나// 구운몽에 문자(文字)로 수작을 건넨다는 말이 있다 오늘의 문자는 다름 아닌 벚꽃의 아스라한 점괘, 쉬 풀리는 점괘는 사설일 뿐 오래 헤매도 좋을 당신이겠다 마침 연인의 입매가 쉽사리 흘릴 운산은 아닌데, 애간장이라도 살살 무쳐 연인의 입맛을 돋울 수 있다면// 그러니 당신, 화전놀이에 수작이 빠져서야 될까/ 꽃술이 서로의 입술에 번지듯 물들고/ 술잔에 꽃잎 돌 듯 꽝꽝 언 피가 돌고 나서야/ 비로소 꽃이 꽃처럼 보이는 경지/ 벚꽃의 점괘를 받아적는 일이란/ 꽃이 꽃처럼 보이는 찰나에/ 바람의 운율로 꽃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얄궂은 일/ 혹은 그 꽃비를 두 손에 받아 모으려는 어리석음/ 가는 봄날 벚꽃의 저 흩날림은/ 알 들리던 점점의 향기가 허공에 잠시 머무르는 것일뿐/ 빈 점괘는 꽃의 후대(後代)에나 돋아날 일// 봄은 파열음이다/ 그러니 당신, 오늘의 봄밤/ 꽃잎의 파열음에 귀가 녹아 좋은 곳 가겠다/ 생을 저당 잡히고도 점괘 받는 일이 잦을 당신이겠가//

꽃소식입니까 / 이은규
꽃을 즐겨 그리다 쇠약해진/ 그가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물었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인가요// 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는 편지 속 문장/ 유화라기보다 으깬 꽃잎에 가까운 그림들/ 그림 그리기란 온몸의 노동이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아름다운 이데올로기// 귀가 아플 만큼 고요한 날/ 귀를 자른 그는 미친 듯이 웃는 것으로 한 계절을 앓았다// 모든 꽃은/ 안 들리는 한 점 향기를/ 수없이 두드린 봄의 노동// 대장장이가 쇠처럼 무른 것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노래한다, 꽃잎처럼 단단한 것도 없음을/ 오늘의 노동을 다하지 못한 시인에게/ 세상이 바뀔 거라는 소식 대신 날아든 소식// 문득 도착한 곳/ 아직 들리지 않는 향기, 꽃은 없다/ 그늘로만 서성이는 발걸음 너머/ 누군가 저 다리를 건너가면 절정이 환할 거라는 귀띔// 봄과 봄 사이// 저만치 바닥을 나뒹구는 꽃숭어리의 절정/ 그렇게 가는 봄날/ 세상의 꽃소식인 것 같기도, 아닌 것도 같은//

​놓치다, 봄날 / 이은규
저만치, 나비가 난다/ 生의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저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란 이름이 주어졌을까/ 色氣없는 기생은 살아서 죽은 기생/ 모든 色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른빛으로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뒤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으로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은 날들이 잠시 잊힌다// 이 봄날 나비를 쫒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生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앉아/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이 없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 이은규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그 언저리에 머무는 그늘이 희게 시리다// 방금 출발한 차편에/ 半生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할 지금/ 버리다와 두고가다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말을 버린 것들은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명치의 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허공 속 백작약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半生이 인사를 전할 때/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긴 배웅//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마중 나올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나는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목화밭 이야기 / 이은규
탄성으로 피어나는 꽃이 있다// 피어날 때 하양/ 지기 직전 분홍을 완성한다는 목화에 대해 알고 있니/ 아침에 희고/ 저녁을 지나 붉어지는 이치/ 혀끝 속삭임에 물들어가는 마음과 같이// 가까운 하양과 먼 분홍 사이/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피었다 지다 피었다 지다// 목화의 꽃말은/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뜻의 우수/ 그런데 우리는 왜/ 근심 쪽으로 몸이 기울었을까, 함부로/ 혹은 입춘과 경칩 사이 절기를 떠올렸을까//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니/ 목화꽃이 지고 나면 둥글게 차오른다는 다래/ 다래의 맛이 달아 하도 몸이 달아/ 몰래 숨겨놓고 먹었다는 소년의 비밀비밀// 그런가 하면 다래가 터뜨린 솜꽃을 편애한 자가/ 어느 시험에서 두 번 꽃 피우는 나무에 대해 물었다고 해/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속삭임, 귀가 멀어도 좋을// 한 시인은/ 목화밭과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우리는 아직 지나가고 있을까/ 이미 돌아오고 있을까/ 약속을 잊어버린 약속처럼/ 먼 분홍과 가까운 하양 사이/ 안 들리는 탄성으로 피어나는 기억 한 점//

손으로 길을 내다 / 이은규
종종, 겨울을 돌아보는 봄을 달래는데/ 한 부음이 꽃 소식보다 먼저 앞질러진다// 모든 소식은 꽃 지고, 피는 그 사이에 머무르고// 봄날은 그렇게 등을 보였다 말다/ 제 근성을 갯버들 몸피에 간질이고 있었다/ 초봄 초이레 날 獨身者의 집 앞에/ 허공에 떠 있는 듯 흔들리는 弔燈 하나/ 울다 짓무른 눈빛의 촉수/ 가장 낮은 촉수로 가장 먼 길을 밝혀야 하는 弔燈/ 명치에 걸린 무게가 다음 발자국을 더디게 하고/ 대문 앞 서성임으로 뜸했던 안부를 대신한다// 대문 옆엔 어느 손이 내놓았을 구두 한 켤레/흙 묻지 않은 깨끗한 발로 가라고/ 生前 그녀의 낯빛처럼 창백한 한지 위에 놓여있었다/ 가지런한 구두코를 오래 만졌을 손/ 한 손으로 이마를 길게 짚으며/ 한 손으로 허공을 다독여 새 길을 냈을 손/ 한지 위에 마지막 족적을 남기고 갔을 그녀/ 생의 기우뚱한 걸음걸이가 남긴 닳아버린 굽을 보며/ 그 손은 또 얼마나 먼 길을 에둘러 집으로 들어갔을까// 그녀는 저 손이 낸 길에서 와서/ 저 손이 낸 길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없는 허공 길을 만드는 손길의 힘으로/ 봄 없는 곳으로 가 꽃피는 그녀이겠다// 허공 길/ 간다와 아주 간다라는 말 사이에 찍힌 긴 족적/ 기어이 봄이 왔다, 간다//

어접린(漁接隣) / 이은규
나무의 살이 꽃잎이라면, 비늘은 물고기의 살/ 모든 살의 마지막 이름은 뼈//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는 몸들이 있다/ 떨어져나갈 살점인 줄도 모르고/ 꽃잎을 살 삼아 바람에게 말 거는 나무와/ 물의 진동을 비늘에 새기는 물고기/ 저만치 물의 허공에 어리는 꽃무리/ 노닐던 물고기 비늘에 꽃잎 한 점, 후두둑 박힌다// 때는 바야흐로 만화방창/ 물의 방으로 숨어드는 물고기 두 마리/ 비린 몸들 , 숨의 구멍을 지나 저미듯 스미고/ 귀엣말들 맨 처음인 듯 반짝인다/ 스락스락 비늘들의 언행은/ 들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할 것// 그러니 어접린이 알맞겠다/ 물고기들이 서로의 비늘을 비벼대는 듯한 체위/ 온몸으로 다독이는 것들이 있다/ 물기가 돌아, 비린 공기가 환해진다면/ 잠시 살 만할까 살맛이 날까/ 출렁임으로 서로의 체취가 환기될 때마다/ 살의 수면에 후각의 무늬들이 반짝이고/ 때로 어떤 기억은 뼈가 아프게 박힌다// 생의 체온은 그렇게 잠시, 데워진다 데워질까/ 저 물고기들의 체위/ 바람이 거두어 갈 온기인 줄도 모르고// 몸 안의 절망이 모여 몸 밖의 체위가 된다/ 뼈가 닿을 듯 뼈가 닿을 듯/ 닿지 않음이 닿지 못함으로 오래 기억될 뿐/ 기억의 형질은 후대 (後代) 없이 스르르 풀릴 것// 두 몸은 두 물고기로 끝날 것/ 물고기 비늘에 물드는, 꽃잎 한 점의 호시절//

별들의 시차 / 이은규
그가 음독(飮毒)하며 중얼거렸다는 말/ 인간은 원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상상한다// 천문학자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정치를 했다는 이력으로 한 죽음을 이해할 필요는 없고// 눈이 아프도록 흩뿌려진 별 아래/ 당신의 몸속 세포와/ 궤도를 도는 행성의 수가 일치할 거라는 상상이 길다// 저 별이 보입니까/ 저기 붉은 별 말입니까// 조용한 물음과 되물음의/ 시차 아래/ 점점 수축되어 핵으로만 반짝이던/ 한 점 별이 하얗게 사라지는 중이다// 어둠을 찢느라 지쳐버린 별빛은/ 우리의 눈꺼풀 위로 불시착한 소식들/ 뒤늦게 도착한 전언처럼/ 우리는 별의 지금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 뿐// 어떤 죽음은 이력을 지우면서 완성되고/ 사라지는 별들이 꼬리를 그리는 건/ 그 속에 담긴 질문이 너무 무거워서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하게 무거운 저 별, 별들//

청진(聽診)의 기억 / 이은규
누가, 두 귀를 잘라 걸어놓았을까// 유리창 너머 금속성의 귀/ 노을을 흘리며 허공을 듣고 있는 청진기였다/ 의료에 쓰이기보다 헤드셋에 가까운// 당신을 듣기 위해 항상 열어두었던 내 귀/ 채집된 음을 기억의 서랍 속에 숨겨놓은 날이 길다/ 귀는 깊어 슬픈 기관일 거라는 문장// 말더듬이였던 당신/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말들이 몸을 떠도는 거라는 소견/ 이 있었다/ 함께 받은 처방은/ 구름의 운율에 따라 문장 읽기를 하라는 것/ 혹은 가슴에 귀를 대고 기다려주기// 청진, 듣는 것으로 보다/ 모든 병은 마음이 몸에게 보내는 안부/ 말더듬이를 앓는 건 그가 아니라 마음이었으므로/ 말에 지칠 때마다/ 당신은 구름이 잘 들리는 내 방 창문을 두드렸다/ 문장 읽기를 하다 당신의 가슴에 귀를 묻으면/ 금세 꿈꾸는 숨소리, 차라리 음악이었고// 어느 의사가 병명을 알 수 없는 환자가 안타까워 체내의/ 음에 귀 기울인 데서 시작되었다는 청진의 기원// 이제 당신은 멀리 있고/ 청진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므로/ 귀는 고요한 서랍이다// 그때의 구름만 내재율로 흐르는 창//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 / 이은규
문득 놓치고, 알은 깨진다/ 깨지는 순간 혈흔의 기억을 풀어놓는 것들이 있다/ 點點의 붉음/ 어느 哲學者는 그 혈흔을/ 날개를 갖지 못한 새의 심장이 아닐까 물었다/ 이미 흔적인 몇 점의 혈흔에서 심장 소리를 듣다니/ 모든 가설은 시적일 수밖에 없고/ 생은 어떻게 그 가설들로 추상을 견디길 요구할까/ 시적인 哲學者의 귀는 밝고, 밝고// 날개를 갖지 못한 알 속의 새는 새일까, 새의 지나간 後生일까// 생은 경계도 없이 수많은 가설들로 붐비고/ 깨져버린 알이나 지난봄처럼/ 문득 있다가, 문득 없는 것들을 뭐라 불러야 하나// 깨진 알에서 혈흔의 기억을 보거나/ 혹은 가는 봄날의 등에 얼굴을 묻거나/ 없는 새에게서 심장 소리 들려올 때/ 없는 봄에게서 꽃의 목소리 들려올 때/ 그 시간들을 살기 위해 견딤의 가설을 내놓는다// 새가 되어보지 못한 저 알의 미지는 바람일 것/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영역도 다스릴 바람도 없다/ 이음새가 없는 새의 몸,/ 바람으로 머물던 흔적이 곧 몸이다// 너무 멀리 날아가서 다스릴 수 없는 기억처럼/ 새, 바람이 되지 못한 것들의 배후는 허공이 알맞다/ 새의 심장에서 들리는 먼 곳의 안부를/ 깨진 알의 혈흔에서 듣는다//

물 위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 이은규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눈물은 질문이다// 저수지에 먼저 도착해 있는 적막/ 닫아 놓았던 귀를 열어/ 풍경의 모통이를 서성이는 허공을 듣는다// 어떤 종족이 허공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을까// 새 한 마리 총총, 물 위를 난다/ 수면에 발자국으로 무슨 흔적을 남기는 것도 같은데/ 마침표를 찍어 완성하기 전/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켜 발자국 문장을 지운다// 문장 따위야 사람의 소관이라는 듯/ 새는 몇 점 눈물로 저수지의 수위(水位)를 알맞게 조절할 뿐/ 금세 풍경의 모통이를 돌아나간다// 누군가/ 물수제비로 새겨 넣은 문장을 오래 듣는 귀가 여기 있다/ 그는 이제 허공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는 종족/ 물수제비 문장을 기억하는 바람에게/ 물 위에 직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하릴없이 묻는 날이 간다// 그날은 적막에게 어떤 문장은 마침표 없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여름 하오, 꼭 한 뼘의 높아진 저수지의 수위(水位)//

키위, 새 / 이은규
무엇이 먼저 입니까/ 키위와 키위새// 이렇게 아름답지 않은 새는 처음입니다 진흙을 뭉친 듯 온통 거친 털로 뒤덮인 동그란 몸, 날개가 퇴화되어 더 이상 날지 못하는 천적이 없어 더 아득한//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 알라리 얄라 키위의 옛 이름은 다래, 내가 유일하게 공들이는 일은 의미 없는 후렴구를 반복하는 것// 당신은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했는데/ 날마다 늘어나는 당신들 중에서 진짜를 찾으라니 우습기만 했죠// 하나의 서사에는 저마다의 참조점이 있습니다/ 한 부족이 키위키위, 하고 우는 데서/ 이름 지어줬다는 키위새// 새는 우는 겁니까/ 노래하는 겁니까 새는/ 나는 그저 분홍분홍 우는 것으로 노래할 뿐/ 투명한 광기가 견고하게 쌓이고 있습니다// 어떤 문장에도 밑줄 긋지 않음, 다짐하는 사이// 얄리얄리 얄라 알라리 얄라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혼자 부르는 돌림 노래에도 엇박을 잘도 넘나들다니// 참 다행이죠/ 눈보다 귀 밝은 키위새처럼 소리로 볼 줄 안다는 거// 관계없습니다/ 키위새와 키위 중 무엇이 먼저인지/ 다만 액자 속 새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키위 검은 찌의 항우울 효과에 기대는 것으로 충분함// 그보다 우선/ 키위와 새 사이에 가만히 쉼표를 찍어 보는 겁니다/ 얄리얄리 얄라성 알라리 얄라//

나무의 눈꺼풀 / 이은규
잎은 나무의 수많은 눈꺼풀/ 둥치가 바람에게 말을 걸고 나무의 기억이 흔들린다/ 기억 몇 잎 떨어진다 해도 한 뼘 그늘을 개의치 않을 나무/ 잃어버리다, 잊어버리다// 잠든 당신의 눈꺼풀에 반달이 내려앉으면/ 기울지 마, 기울지 마/ 나무의 그늘에게서 빌려온 긴 소절을 외운다/ 우리는 식물이 아니어서 꼭 두 개의 잎을 갖는 슬픈 종(種)// 눈꺼풀을 떠나보낼 때의 나무는/ 새로 돋아날 후생(後生)의 잎들을 이미 깜박이고 있을 텐데/ 다만 몇 잎의 기억, 후두둑 강물 위로 떨어진다면/ 물 위로 흐르는 눈꺼풀의 변주에 오래 귀기울일 뿐/ 물에 관한 나무의 기억이란, 내 몸의 수액이 나이테를 돌아 당신에게 가닿는 이치// 잠든 눈꺼풀에 눈꺼풀을 포개어보는 일/ 몸에 푸룬 물이 들어도 좋겠지만 우리는 식물이 아니어서// 잠들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어느 방랑/ 또한 잠들지 않기 위해 잎을 떠나보내는 나무처럼/ 당신은 내 검은 안구마저 지우는 흑점(黑點)의 시간일 것// 언젠가 눈꺼풀의 떨림으로 오는 당신의 안부를 맞겠다/ 기울지 마, 기울지 마/ 나무의 그늘에게서 빌려온 긴 소절을 다 외우기도 전에// 텅 빈 나뭇가지에 걸릴 반달의 눈꺼풀//

빛 좋은 개살구 / 이은규
때 아닌 새벽 세시의 자유로/ 허공을 어르던 바람마저 목이 쉬었다/ 허락된 주법法은 질주 또는 흩날림/ 어쩜 좋아 제 아가씨 왜 저러고 있나/ 빨대 꽂힌 팩소주 잘도나 빨며 흩날린다/ 아가씨 중앙선 사뿐히 즈려밟고/ 낭창, 휘어지다 말다/ 어쩜 좋아 안주가 풍선껌에 든 허공뿐이라니// 입덧하기 좋은 7월은 살구가 익어가는 계절, 부푼 씨방에서 즙액을 뽑아낸 건 바람의 솜씨라지요 자꾸만 불러오는 허공의 배를 살살 쓸어 보지요 빛 좋은 개살구의 유일한 언어는 색色, 바람 밴 살구나 무의 헛입덧질 혼곤하지요/ 그 씨방이 글쎄 곧 바람이 남겨놓은 목소리만 텅텅 울릴 씨방이라지요 그날, 바람이 살구나무 속살을 문질렀는지, 살구나무가 바람을 배어 앙다물었는지 알 수 없는 일 아니겠나요/ 별들마저 귀를 씻어버린 쓸모없음의 물음일 바에야, 개살구도 살구라지요 아니라지요 불온이 빚어놓은 낙과될 운명일 뿐이라지요 착상이 마지막 불시착이 될 한 알의 생生, 혹시 지금 식도로 역류하는 게 바람이 즐겨 찾던 꽃판의 즙액 맞나요// 잘못 길들여진 탈선의 습관을 되새기며/ 아가씨 중앙선 사뿐히 즈려밟고/ 낭창, 휘어지다 말다/ 저만치 바람을 유희하며 달려오는 오픈카// 잠시 정적/ 바람이라는 칼이 단칼에 낙과를 낳았다/ 그 이름은 살구, 개살구/ 뭉클하게 시큼 으깨어지다 말다 으깨어지다/ 안녕, 내내 어여쁘게//

없는, 그녀가 우물에 살고 있다 / 이은규
비 오는 날만 택일해/ 없는, 그녀의 소리가 우물로 든다/ 바람의 입김이 서린 허공 위로/ 홍매紅梅 몇 점 눈물처럼 떠 있고/ 오래 서성이다 떠났을 그 소리 살아난다/ 명치끝에서만 빛어진다는/ 소리를 곡哭이라 부를 수도 없겠다// 그날 밤, 우물 안을 길게 들여다보았을 소리/ 우물의 깊은 그늘을 넘보던 그녀/ 끝내 그 죄를 이룬 밤처럼 바람의 입김이 차다/ 후둑, 떨어지는 둥근 습기들에 저며진/ 물의 살이 먼 동심원으로 퍼졌었겠다/ 물 위에 뜬 무덤이라니// 환락의 입김이/ 봄을 당겨와 때 이른 호시절을 건넌 그녀라 했다/ 그 시절의 다른 이름은 봄의 호작질,/ 찬바람에 멍든 홍매紅梅, 눈물처럼 지며 아프다 한들/ 마련된 화답이 없었겠다// 기생집 마당엔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찬 우물물이 해어화解語花의 구근을 오므라들게 했을 것/ 온몸으로 남창이던 그녀의 정체는 바람이었나/ 바람의 정처 있음의 정처 없음을 알겠다/ 바람에게 시달린 꽃의 혼곤이 스며 있는 이름, 남창/ 명치끝에 고민 습기가 우물을 마르지 않게 했을 것/ 긴 가뭄에도, 독수공방 한기에도 소용없었을 다정多情/ 한 평 우물 안을 맴돌았을 동심원처럼/ 바람의 중심에서만 맴돌았을 허튼 다정多情// 없는 그녀가 우물에 살고 있다//

애도의 습관 / 이은규
없는 목소리/ 너라는 소음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네 벽을 코르크로 도배한 침실 속으로 숨어든 한 사람/ 애도의 습관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때의 방은 방일까, 무덤일까/ 너라고 쓰고 나라고 읽는다/ 기억의 납골당에 너를 안치하고 입구를 봉인하는 일/ 아직 내 것인 열망들을 말해야 할 때/ 네 것인 의심들을 이미 들어야 할 때/ 비유는 과연 올바른 방법일까/ 쓴다, 소음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너라는/ 목소리가 없다//

기억의 체증 / 이은규
몸이라는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날 것들/ 저마다 자리를 움트는 족족,/ 체증을 일으키고 있다/ 요사이 당신이라는 집에 세 들고 싶다는 나의 목소리가/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서성이고/ 자주 식욕이라고는 덭 빈 잣죽 그릇과 마주했다// 난감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피가 그런 걸 어떡해 라고 대답 했었다// 사혈(瀉血), 피를 흐르게 하다/ 기억처럼 긴 실로 엄지손가락을 묶는다/ 손톱 끝의 검게 갇힌 시간들을 찌르는 바늘/ 맺힌 시간의 피돌기가 풀리며 건네는/ 피의 말이 멀리서 들릴까/ 귀에 머물지 않고 사라지는 그 말들의 뜻/ 동그랗게 말려 올라오는 검붉은 시간들/ 언젠가는 열망으로 맺히던 기억들의 끝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들의 전언/ 내 몸에 잠겨 있던 전언들이 피가 되고/ 그 피가 살이 되어 생의 피돌기로 살아 있다// 검은 시간은 흘러 없어질 거라는 환한, 착각/ 울지 않기 위해 시간의 잇몸을 앙다물다/ 시시로 미치던 피의 순간이 있었다/ 기억의 체증에 오래 시달려야 할 것 같은 예감/ 바람을 숨으로 빚어내는 것도 일인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린다는 말이/ 꿈인 것만 같은 꿈//

터키 아이스크림 / 이은규
이제 우리 밀고 당김을 시작해보자 밀고 당김으로 밀어를 속삭이자 밀고 당김으로 허공을 깨뜨리자 달콤한 마음을 망가뜨리자 밀고 당김으로 몸을 굽히지 말자 밀고 당김으로 착각하자 밀고 당김으로 춤을 추자 밀고 당김으로 시선을 빼앗자 밀고 당김으로 정지선을 넘어가자 밀고 당김으로 꽃잎처럼 흩날리자 밀고 당김으로 발을 내딛자 아니면 넘어지자 밀고 당김으로 실수하지 않는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밀고 당김으로 무해한 뇌를 선물하자 밀고 당김으로 모국어를 잊자 온 힘을 다해 하찮아지자 밀고 당김으로 눈앞이 하얘지자 밀고 당김으로 이정표가 되자 밀고 당김으로 아름다운 보호색을 가진 새인 척하자 약속처럼 가능하다면 밀고 당김으로 밀고 당김을 가려보자 밀고 당김으로 예쁘게 용감해지자 밀고 당김으로 끝내 밀고 당겨보자 밀고 당김으로 현기중을 견뎌내자 밀고 당김으로 빙빙 도는 봄을 따돌리자 밀고 당김으로 그림자끼리 포옹하자 잠시 멈춤하자 다시 처음인 듯 밀고 당김으로//

나와 너와 귤과 탱자 / 이은규
오래전 시인은 가도 가도 왕십리, 노래하며 울었습니다 노래는 노래이고 울음은 울음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때로 원치 않는 주특기는 사절할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돌려주지 못한 낱말 하나가 목에 걸려 있는 것도 같습니다. 출처 없는, 목에 걸린 그 무엇은 둥글고 향기로워서 주머니 속 열매를 닮기도 했 습니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보다, 새콤한 해 질 녘입니다 함께 읽었던 서사에서는 한 알의 귤이 탱자가 되는 이치를 환경으로 보았습니다 서로의 환경이 되어주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그림자조차 밤의 웅덩이로 사라지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귤이 탱자가 되는 동안만 한 사람을 생각하기로 다짐합니다 단호하게 약속을 약속해 봅니다 어기는 것으로 다짐하며 왕십리를 걷습니다 문득 예기치 않은 모퉁이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해 질 녘 산책을 산뜻하게 마칠 예정입니다 문득 너는 내게 물을 수 있습니다 주머니에 든 게 무엇이니, 나는 무해한 신발코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 나눠 먹던 귤의 표정으로 말입니다 출처 없이 흩날리는 낱말이 밤공기 속으로 스며듭니다 후두둑, 어디선가 가시 돋친 탱자 한 알이 떨어져도 놀라지 않겠습니다 지구는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아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던 길 계속 가겠습니다 가도 가도 왕십리, 노래하며 우는 방향 쪽으로 한 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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