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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바람의 제물 / 이은희

by 부흐고비 2022. 6. 3.

회오리바람이 집을 에워싸는 듯하다. 강도 높은 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사계절 바람이 부는 바람골. 가는바람에서 된바람까지 바람의 종류를 셀 수가 없다. 더위가 여러 날 지속하더니 태풍을 부른 것인가. 태풍은 고온에서 일어난다고 하는데, 기상에 관하여 깊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바람의 제물이 될 나의 소중한 식물들을 단속하는 일이 중요하다. 아파트 복층에 머물며 겪은 산 경험으로 바람을 맞을 채비를 서둘러야만 한다.

나뭇잎은 나무의 소중한 일부분이다. 인간은 그저 봄바람에 현란할 정도로 눈부신 이파리의 몸짓과 오색으로 물든 고운 단풍잎을 기억한다. 살아보니 바람의 몸짓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늘이 노한 것처럼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고 강한 번개와 태풍을 몰고 오면, 나무는 단호히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험한 날씨를 견뎌내고자 작은 제물로 자신의 일부분을 내주어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강풍은 가혹하게 나무둥치를 부러뜨릴지도 모른다. 지난해 태풍 링링이 하늘정원에 남긴 처참한 광경이 떠오른다.

묘시에 참혹한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수십 그루의 해바라기의 꽃송이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동백꽃이 스러지듯 꽃의 목이 잘려 바닥에 나뭇잎과 함께 잔해로 뒹군다. 어찌 그뿐인가. 바닥에는 수국과 가침박달나무의 생생한 이파리와 줄기가 너저분하다. 인정사정없는 가혹한 처사다. 꽃들이 보기 좋은 시절에 꽃밭을 초토화해 버린 것이다. 실망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동백꽃은 나무 발치에 꽃을 떨어트려 보기라도 좋지, 해바라기의 꽃송이는 어디론가 날아가 헤매는지 모른다. 날바닥에 추레한 꽃송이만 서너 개 나뒹굴고 있다. 간밤의 바람 소리에 스산한 광경을 예감했어야 했다. 정원에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한동안 나가기가 꺼려진다.

해바라기는 여름내 불볕을 먹고 자라는 식물이다. 무더위 속에서도 물만 주면, 불평 없이 키를 장대 같이 키우고 꽃을 환하게 피운다. 꽃대가 멀대 같이 큰 것이 꼭 나를 닮은 것 같아 해마다 씨앗을 심는다. 해바라기는 무엇보다 해를 바라기 하는 일편단심의 순수와 노랗게 활짝 핀 꽃의 표정이 밝아 기분이 좋아진다. 하늘정원을 꾸린 장소가 24층 옥상층이라 그런가. 하늘이 가까워서 그런지 새벽과 저녁 무렵에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들이 더위를 견디지 못한다. 여름휴가도 식물들 걱정에 멀리 가지 못하고 당일치기로 다녀올 정도이다. 그렇게 애지중지한 꽃과 나무가 싹쓸바람에 상처 입고 흩어지니 그 상심을 어찌 말로 다 하랴.

해바라기가 바람의 제물로 바친 것이 꽃이라 마음이 불편하다. 자연이 보낸 태풍 앞에선 어쩌지 못하는 마음만 애달프다. 꽃송이는 해바라기의 목숨이다. 자신의 온몸을 바쳐 사수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뒤늦게 돌아본다. 그맘때쯤 정원에 정답게 어우러졌던 더덕꽃과 나팔꽃 덩굴, 수국과 백일홍, 푸른 잎만 무성한 국화 등속이다. 그들은 태풍을 맞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버젓이 생을 유지해가는 걸 보면, 해바라기가 제물이 된 덕분이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부유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사회생활을 하며 느낀 것은 갑부는 혼자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기업도 당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성심껏 일을 해줘야만 성장할 수가 있다. 자산이 사유재산인 양 마음대로 부리다 물거품이 된 기업이 여럿이다. 또한, 인간을 인간같이 대하지 않고 당연한 듯 수족처럼 부리며,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인 양 허세를 부리다 감옥 행한 기업인이 어디 한둘이랴. 이런 기업에 청춘을 묻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사랑과 열정을 쏟은 무수한 시간은 또 어쩌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죽하면 우리네 삶이 빚진 인생이란 말이 나올까.

문득 희생의 삶을 살다가 하늘로 돌아간 친정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당신의 몸을 보살핀 적이 없다. 첫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늘 분주했던 어머니시다. 남편과 자녀, 시어머니까지 열 식구를 돌보며 수십 마리의 가축을 기르셨다. 어디 그뿐이랴. 동네에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머리도 깎아드리고, 어려운 사람을 그냥 보고 지나치질 못하여 몸과 마음이 분주하셨으리라. 세월이 흐르고 보니 어머니의 선한 행동이 나에게 돌아와 번듯이 사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우리는 소신대로 전설처럼 걸어간 선인에게 빚진 자들이다. 그들도 삶의 제단에 제물로 내놓은 것들이 상당하리라. 부모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다하셨고, 해바라기도 자신의 심장을 내놓고 스러졌다. 나는 과연 삶의 제단에 무엇을 내놓았는가. 제물이라고 하기엔 미미한 것들이라 부끄럽다. 창밖에 나뭇잎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바람 속에서 온몸이 흔들려야 새싹도 돋고 꽃도 피어나는가. 우주 만물은 대가 없이 얻어지는 건 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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