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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만灣, 만滿, 만晩 / 윤정인

by 부흐고비 2022. 6. 7.

제12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만灣 - 만나고 굽어지다

​ 물마루가 밀려온다. 둥근 띠를 이루는 파도의 능선이 아래로 꺼졌다 위로 솟구친다. 바람을 따라 공중으로 물보라를 뿜어 올리다, 방파제에 부딪쳐 포말로 흩어지기도 한다. 사납게 내달리던 파도는 만灣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진다.

파도는 과감하게 경계선을 넘어온다. 무방비로 서 있던 해안선은 뒷걸음치며 물러나지만 소용없다. 바다는 기어이 빈틈을 찾아내 자리를 만들어간다. 물굽이의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역동적인 바다는 제 몸피를 육지의 가슴속 깊이 밀어 넣었고, 망설이던 육지는 둥글게 몸을 말아 껴안았을 것이다. 만의 탄생이다.

어느새 훅 들어왔더라는 지인의 말처럼 그도 그렇게 내게로 왔다. 처음 만난 건 친구의 하숙집에서였다. 같은 학교 다니는 몇 년 동안 존재조차 몰랐는데 알고 나니 자주 마주쳤다. 테니스장과 생맥주집에서 몇 번 어울렸을 뿐인데 얼마 안 가 캠퍼스 내에서 사귄다는 소문이 났다. 얼떨결에 우리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기수지점에 이르면 둘은 하나로 섞인다. 바다가 육지 안쪽으로 점차 휘어져 굽어지는 것은 그때다. 파도의 구애는 거침없고 지칠 줄 모른다. 물러서는가 싶으면 다시 밀려오고 멀어졌는가 하면 눈앞에 서 있었다. 선을 그어놓고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들기를 바랐던 나는 그의 넉살에 매번 밀리기만 했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는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을 말한다. U자 모양의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와 만들어진 협만峽灣이다. 지극한 시간으로 빚어진 안온한 풍경을 보면 왠지 마음이 고요해졌다. 세상이란 너른 바다에서 빈 배처럼 부대끼고 흔들릴 때, 만처럼 든든한 곳이 있다면 거기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싶었다.

미완의 만 안쪽으로 거센 물결이 밀려와 자주 요동쳤다. 거기엔 튼튼한 방파제도, 등대도 하나 없었다. 우리는 요령 없이 삐걱댔고 가끔 비틀거렸다. '여기까지'라 말하곤 다시 돌아섰던 날들. 암초지대를 간신히 벗어났지만 나아갈수록 잦은 바람이 불어왔다. 참을성 없는 나는 연거푸 밀려오는 파도에 무너졌다 일어나길 반복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것은 오랜 관계의 비결이었는지 모른다. 싫증 날 때까지 머물지 않았고 소원해질 때쯤 다가왔다. 밀물과 썰물처럼 가면 오기를 바랐고 다시 만날 예감으로 손을 흔들었다. 만남, 이별, 재회, 다시 별리의 지루한 반복 끝에 결혼에 이르렀다.

​ 만滿 - 비우고 채우다

​ 결혼생활은 풍랑이 그치지 않는 바다 위 부표 같았다. 바람 따라 흔들리고 물결에 쓸렸다. 서로의 의견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그나마 의기투합이 되어도 최종적인 순간에 아귀가 맞지 않아 잘못 쌓은 테트리스처럼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의 체면이, 나의 자존심이 한 치 양보 없이 살아서 펄떡거렸다.

망망대해 해무에 가려진 앞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함께 그물을 당겼지만 방향이 달랐고 힘 조절이 서툴렀다. 서로 상대방 탓만 했다. 현실을 중시하는 남자, 멀리 봐야 한다는 여자는 팽팽하게 맞섰지만 결국 현실이 이겼다. 반대의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기싸움은 오래갔다. 두 걸음 물러나 주었지만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천명을 지났을 즈음 나도 그도 차츰 목소리를 낮췄다. 날카로운 모서리로 서로를 찔러대던 우리는 파도에 수천수만 번 쓸리며 천천히 몽돌이 되어갔다. 격랑의 몸짓들이 유순해지면서 채우는 것보단 비우는 게 마음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에 조금씩 상대방을 들였다. 만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바다는 쉴 새 없이 해변으로 달려온다. 하루 이틀엔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한 달, 일 년, 수십 년이 흐른 뒤에야 몰라보게 해안선이 바뀐 걸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그건 비움이 아니라 충만이었다. 미세한 변화와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함께 꿈꾸는 만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팽팽했던 그와 나의 얼굴엔 어느새 나이테 같은 주름이 자잘하게 새겨졌다. 예리했던 눈매의 힘은 빠졌고 한결 부드러워졌다. 검은 윤기가 흐르던 머리엔 서리가 내렸다. 듬성해진 머리카락을 보면 측은지심이 들기도 한다. 마치 오래된 풍경 앞에 서 있는 듯 고요해졌다. 그때부터였을것이다. 도보로 만을 여행하게 된 것이.

​ 만晩 - 저물며 깊어지다

​ 그와 함께 해파랑길을 걷는다. 길은 바다와 뭍이 헤살거리는 해변에서 깎아지른 절벽 위로 이어졌다가 좁다란 골목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몽돌을 밟으며 좁쌀 같은 모래밭을 걸었다. 이기대, 해운대, 감포, 영일만을 돌아 월포, 후포…. 크고 작은 물굽이를 돌 때마다 둥글고 고요한 해안선이 우리를 따라왔다.

걷기를 끝내고 만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잠시 앉는다. 하루를 뿌듯하게 채운 덕에 나른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해변에는 조깅하는 사람들, 팔짱 낀 여인, 공을 던지는 남자와 그걸 따라가는 개가 유리창 프레임 속에서 움직인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 사이로 어선 한 척이 들어온다. 한 남자가 벼리에 배를 끌어맨다. 기다리던 아낙네가 생선 상자를 받아 수레에 싣는다. 갈매기들이 낮게 날다 부두에 내려앉는다.

만이 저문다. 물굽이에 바닷물이 한껏 들어온다. 만조의 바다 위로 노을이 잠긴다. 가파르게 올라온 내 삶도 이제는 내려가야 할 때다. 모퉁이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여행자처럼 심호흡을 해본다. 자연은 페이드아웃 하려는데 생의 무대에 새로운 불이 밝아오는 것 같다.

보랏빛 노을이 수면 위를 드리운다. 바다는 은결을 반짝이며 고요해진다. 수평선 위로 천천히 만월이 뜬다. 저녁은 또 다른 시작의 시간, 깊어가는 만의 어깨에 슬쩍 마음을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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