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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권선희 시인

부흐고비 2022. 6. 9. 09:08

권선희 시인
1965년 강원도 춘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포항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구룡포로 간다』, 『꽃마차는 울며 간다』와 르포집 『예술밥 먹는 사람들(공저)』, 『구룡포에 살았다(2인 공저)』, 국토해양부 선정 해안누리길 도보 여행기 『바다를 걷다, 해안누리길』, 항해기 『우리는 한배를 탔다』, 해양문화집 『뒤안』 등이 있다. 제1회 대한민국해양영토대장정 기록작가로 참가, 2.100km 바닷길 항해. 한국작가회의 회원, 포항예술문화연구소 회원, 포항문인협회 사무국장. 푸른시 동인


 

집어등 / 권선희
집어등을 하나 얻었다/ 망망대해에서 삐끼질 하는 놈/ 수천 촉 아찔함을 쏘며 오징어떼 후리는 놈 치곤/ 참 순하게 생긴 녀석이다// 저녁이 오자/ 오두막엔 잘 잘한 별들이 내려앉고/ 축항을 치는 파도소리 크다// 백열등 알전구라도 빼고/ 끼워보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대갈통만한 녀석을 끼울 똥꼬는 없다// 결국 시든 꽃을 뽑고 꽃병에 꽂았다/ 꽃병은 맙소사 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투명한 등을 환하게 떠받들더니/ 오색 깃발 펄럭이며/ 멋지게 출항했다//

아내의 서랍 / 권선희
일요일 아침/ 아내는 목욕탕 가고/ 밖엔 비 내린다/ 손톱깎이 하나 처박힌 곳 모르는/ 내 집이 낯설다// 서랍 안에 서랍 있다/ 내심 뒷돈이라도 꼬불처둔 것이기를 바라며/ 서랍을 연다/ 십 년이 된 크리스마스카드/ 첫차 구입 영수증/ 군복무 확인서와 해약한 적금통장/ 마른 오징어처럼 쩌억 눌러 붙어있다/ 제 굼을 옳게 꼬불치지 못하고/ 아내는/ 내가 훌훌 벗어던진 것들만/ 주워 담고 살았구나/ 드응신/ 손톱깎기도 전에/ 살점을 뜯겼다// 아내 슬리퍼가 빗소리를 끌고 온다/ 떨어진 마음 한 점/ 얼른 서랍 속에 넣고 돌아앉는다//

추석 / 권선희
아고야, 무신 달이 저래 떴노/ 금마 맨키로 훤하이 쪼매 글네/ 야야, 지금은 어데 가가 산다 카드노/ 마눌 자슥 다 내뿔고 갔으이/ 고향 들바다 볼 낯빤디기나 있겠노 말이다/ 가가 말이다/ 본디 인간으로는 참말로 좋았다/ 막말로 소가지 빈 천사였다 아이가/ 그라믄 뭐 하겄노/ 그 노무 다방 가스나 하나 잘못 만나가 신세 조지 삐고/ 인자 돌아 올 길 마캐 일카삣다 아이가/ 우찌 사는지럴/ 대구빠리 눕힐 바닥은 있는지럴/ 내사 마 달이 저래 둥그스름 떠오르믄/ 희안하재, 금마가 아슴아슴 하데이// 우짜든동 처묵고는 사이 읍는 기겠재?/ 글캤재?//

탁주 / 권선희
제수씨요, 내는 말이시더. 대보 저 짝 끄트머리 골짝 ​팔남매 오골오골 부잡시럽던 집 막내요. 우리 큰 시야가 ​내캉 스무 살 차이 나는데요. 한 날은 내를 구룡포, ​인자 가마보이 거가 장안동쯤 되는 갑디더. 글로 데불고 ​가가 생전 처음으로 짜장면 안 사줬능교. 내 거그 앉아가 ​거무티티한 국수 나온 거 보고는 마 바로 오바이트 할라​했니더. 희안티더. 그 마이 촌놈이 뭐시 배 타고 스페인 꺼정 ​안 갔능교. 가가 그 노무 나라 음식 죽지 몬해 묵으면서 ​내 구룡포 동화루 짜장면 생각 마이 했니더. 생각해 보믄 ​울행님이 내 보고 샐쭉이 웃던 이유 빤한데 내는 그 촌시럽던 ​때가 우예 이리 그립겠능교. 마 살믄 ​살수록 ​자꾸 그리운기라요. ​그기 첫사랑 고 문디가시나 ​그리운 ​것에 비할라요. 내 품은 가시나들 암만 이뻐도 울 행님 ​그 웃음 맨키야 하겠능교. 뭐시 이리도 급히 살았는지 ​내도 모르요. 참말로 문디 같은 세월이니더. 제수씨요, ​무심한 기 마 세월이니더. 우예든동 한 잔 하시더…//

라면 / 권선희
하루가 퉁퉁 불어터졌다.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에서 꼬들꼬들 익어가는 라면에 찬밥 한 덩이 미련 없이 던져 넣는 어머니. 푹푹 개죽처럼 끓어 가난이 쟁반 위로 오르면 우리들의 그 절제된 여인은 오목한 국자로 침묵을 퍼올렸다. ‘살자’는 두 글자가 길게 올랐다가 그릇에 담겼다. 주둥이를 내밀고 당겨 앉아 도대체 얼만큼 살아야 제대로 된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숙희이야기 / 권선희
구룡포발 대구행 아성여객 차장이었을 때/ 숙희는 한 마리 비둘기였다지요/ 빨간 명찰 말년 병장 숙박계 날려쓰던 겨울 밤/ 싸나이 팔뚝에 머리 파묻고/ 처음 날개를 벌렸다지요/ 헐거운 여인숙 그 방을 두고/ 머리채 질질 반장 손에 끌려간 새벽은/ 세찬 바람으로 오래 울었다지요/ 태광호도 중심 잔뜩 부풀어 돌아오는데/ 아무튼 포장치고 회 뜨는 쉰 살 숙희/ 세꼬시 썰리듯 살아도/ 첫차처럼 올라탔던 싸나이는/ 여적 내려오지 않는다지요/ 명치끝에 아예 눌러 붙었다지요//

복자 언니 / 권선희
“어으·· 어으”// 오전 내내 자맥질한 복자 언니가/ 내 손목 끌고 제집으로 간다// “어으·· 어으으·· 어으”// 툇마루 쓸고 어깨 툭툭 쳐 앉히고는/ 반쯤 벗은 물옷 차림으로 수돗가에 앉아 소라를 깬다// 누구는 시집갔다가 돌아왔다고 하고/ 누구는 가지 않았다고, 누구는 가지 못했다고 하는 복자 언니에게도/ 어디엔가 아들이 하나 있다는데// 저녁마다 비파 청동검을 품은 고리족처럼/ 방파제 끝에 큰 키로 서는 언니// 귀도 막고 입도 막은 복자 언니 복은/ 어디서 어떻게 불어나고 있을까//

매월여인숙 / 권선희
나 오늘 기필코/ 저 슬픈 추억의 페이지로 스밀라네/ 눈 감은 채/ 푸르고 깊은 바다/ 흉어기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목단꽃 붉은 이불을 덮고/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새벽이 올 때까지/ 은빛다방 김양을 뜨겁게 품을라네/ 작은 창 가득/ 하얗게 성에가 끼면/ 웃풍 가장 즐거운 갈피에 맨살 끼우고/ 내가 낚은 커다란 물고기와/ 투둘투둘 비늘털며/ 긴 밤을 보낼라네//

방생일화 / 권선희
향일암에서 내려와 온양서 오신 보살님들과 셔틀버스 탔지요/ 정월대보름 방생법회 왔다시는데요 미꾸라지 풀고 돌아가는 길이라데요/ 동백나무에서 톡톡 달아나고 피어나는 꽃 보며 그러시구나 끄덕이다/ 가만있자 바다에 미꾸라지라, 괜찮겠냐고 물었지요// 괜찮을겨유 찝찌름하니 아마도 좋아할겨유// 방생放生인지 방사放死인지 공양供養인지/ 뻣뻣하게 죽은 미꾸라지와 훨훨 헤엄치는 파도 사이가/ 암만 생각해도 갸우뚱한데요/ 보살님 한 분 두 분 졸기 시작할 무렵, 글쎄/ 아홰나무 너머 고단한 남해는 왜 그리 푸르던지요//

숙주宿主 / 권선희
괄약근 푼 똥꼬는 새집 같았다/ 비닐장갑 낀 둘째손가락으로 살살 똥을 주웠다/ 오목한 새집에서 알이 굴러 나왔다/ 손바닥에 안기는 까만 어머니는 작고 귀여웠다/ 낡아 허물어질 때마다 보수 기회를 놓친 몸에서/ 똥은 칠십구 년이나 잘 살다 갔다//

누가 더 불쌍한가 / 권선희
손 없는 집, 첩 들였다/ 영감 하나에 큰댁 작은댁 함께 살았다/ 작은댁 새끼를 큰댁은 여섯이나 받았다/ 영감이 병들었다/ 큰댁은 젖도 안 뗀 막내까지 여섯을 업고 끌고 부산으로 가버렸다/ 작은댁은 자맥질하며 살았다/ 큰댁은 광주리장사로 새끼들 키웠다/ 막내가 장가들 때도 만나지 않았다/ 영감은 죽지 않고 누워 있다//

노을 / 권선희
사내는 자고로 화끈해야 한다고/ 말끝마다 노래하던 사내/ 놀음판 개평 챙겨/ 가끔은 쫄깃한 슬픔도 시켜 먹었다/ 삶은 이미 계약 만기였으나/ 수천 번 구르다 보면 분명코 땡 잡을 날 온다고/ 배짱 하나 꼬불치고 뻥치고 등치며/ 머릿기름 확실하게 발라 넘겼다/ 흰 운동화만큼은 눈부시게 빨아 신었다/ 긁으면 긁을수록 부풀어 오르는/ 가려운 저녁일수록/ 잃고 따는 법칙 좆나게 읽었다/ 사내는 자고로 화끈해야 한다고/ 말끝마다 노래하던 사내/ 시원하게 그었다/ 생의 카드깡// 용두산 너머 붉은 손목/ 화끈하게 탄다//

뜨거운 말 / 권선희
영기가 면도칼로 손목 세 군데나 긋고/ 수술에서 깨어났을 때/ 큰형 팔뚝 움켜잡고 했다던 말/ 나 좀 살려줘, 형// 둘째 영기가 이제는 맘 잡겠다고/ 오른쪽 새끼손가락 자르고/ 퇴원하던 날/ 두 손을 두 손에 가두고 했다는 엄마 말// 니는 죽은 니 아부지와 내가 만든/ 고귀한 선물이다 이 상노무 새끼야//

꽃마차는 울며 간다 / 권선희
산전수전 다 지나온 말 한 마리/ 산전수전 다 지나온 노부부 싣고/ 하필이면 해맞이공원에서 꽃무덤 끈다// 잘린 시야 측면은/ 가리개 너머 신神들은 무고한가// 추진推進을 촉구促求하는 고삐/ 재갈을 자극하며 키스하는 모퉁이/ 절벽 아래 수심은 터무니없는데// 채찍이 긋는 이 오후는/ 이승인가, 저승인가//

꽃에 대하여 / 권선희
칠칠에 사십구/ 여자 나이 마흔 아홉이믄 말이요/ 길바닥에 내뻔져놔도 아무도 안 줍어 갈 나인기라요/ 팔팔에 육십 사/ 남자 나이 예순 넷캉 같은 기지요// 무신소리 하노/ 내 아는 찬모는 올개 예순 셋인데 애인이 예순 다섯인기라/ 그란데 마 이틀만 연애로 안하믄/ 온몸띠에 좀이 쑤시고 열이 화득화득 난다카드라// 아고 그기 귀신들이재 사램잉교/ 뭐시 볼끼 있겠능교/ 택또 읎는 소리 마소// 이보게 동상/ 삭신이 옥신옥신 한다카믄 하마 오십이요/ 새북에 비실비실 한다카믄 그기 육십 줄 넘는기고/ 마눌이 불쌍해지믄 그기 칠십인기라/ 니가 우예 세월이라카는 기를 알겠노// 행님요/ 벌레벌레 하믄 다 꽃잉교/ 말씨 솜씨 맴씨 쫀득쫀득하니/ 찰떡맨키로 찰기가 있어야 그기 꽃이지요// 아고 이 답답은 자슥아/ 세월이 다 데불고 가는 거로 안즉은 모리나/ 개떡 아니라 찰떡도 세월 앞에서는 심이 읎다/ 늙으믄 늙은 것들끼리 살포시 눈 맞아가/ 맴이라도 몸처럼 부비고 살라꼬/ 조물주가 다 맹글어 놨으이/ 젊은 니는 쓸담읎는 꽃타령 말고 술이나 퍼묵그라//

수장(水葬) / 권선희
모로 누운 등 뒤에서/ 껴안는 낯선 바다/ 밀고 드는 물기둥에서/ 간지러운 치어 떼와/ 수초들이 풀려 나왔다/ 숨죽인 귀로/ 눈송이처럼 터져 심해로 간 사람과/ 산란 향한 뱀장어 긴 유영과/ 검은 해류 지나는 푸른바다거북의 안부가/ 흘러들었다/ 금빛 복숭아 들고 돌아오는 저녁처럼/ 비로소 붉어진 나는/ 눈 감은 채 젖을 무는 바다/ 이마를 쓰다듬었다//

빈집 / 권선희
누이가 입덧을 했다/ 고추 모종 심고 저녁답에 돌아온 어머니는/ 뒤란 풍로 위에 약탕기부터 올렸다/ 누이는 울 밖 복숭아나무 아래까지 나가/ 노란 똥물을 게웠다/ 사람 안에 사람 생기는 일/ 사람이 사람 하나 세상에 내어놓는 일에 대해/ 복숭아나무는 어린 복숭아들에게 소곤거렸다// 누렁이가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았다/ 장에 다녀온 아버지는/ 화덕에 솥 걸고 북어대가리를 끓였다/ 누렁이는 누렁누렁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검고 희고 얼룩덜룩한 새끼들이/ 퉁퉁 불은 젖 물고 빨며 토실토실 야물었다//

어떤 환갑 / 권선희
작년 봄에 혼자 된 친구가 얼마 전 선을 봤다 캅디다. 죽은 마누라 생각하면 애간장이 녹지만, 너른 과수원에 죽자사자 복숭꽃은 피고 손은 달리니 새봄이란 것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더랍디다.// 우예 알고 붙은 중신어미가 내놓은 여자 역시 사별한 촌댁이라 크게 맘 없어도 일단은 보자 캤답디다. 먼데서 고만고만하게 사는 자식들 걱정도 덜 겸요.// 그런데 조

건이라는 게 현찰 1억을 통장에 꼽고 다달이 월급택으로 몇 십 만원씩 넣으라 했답디다. 호적에도 못 오를 몸, 밤낮 없을 밭일에 늙은 새 영감 치닥거리까지 하다 덜컥 죽고 나면 버려질 생은 누가 책임지냐고요. 그 말도 맞지요.// 혼자 살다 비틀어져 죽어도 이런 거래는 아니지 싶어 결국 파토 낸 친구가 마누라 무덤에 엎어져 술 부어주며 꺼이꺼이 이랬다 캅디다.// 여보게, 자네가 1억도 넘는 줄 왜 내는 여적 몰랐을꼬. 참말로 미안했네//

팔자 / 권선희
복숭아 값 좋아 잘만 하믄 빚 싹 다 갚겠다캤드만 자식 놈 사고 쳐가 말아 묵고, 집 나간 큰년 돌아오이 마 셋째년 나가삐고, 천 날 만 날 소 새끼맨키로 일만 하던 마누라는 수술도 몬하고 죽아삣는데 뒷산 텃밭은 와 인자서 저래 값이 오리노 말이다//

 

봄 / 권선희
물장화 고무장갑 냅다 던지고/ 고무줄바지 낡은 버선 돌돌 말마 처박고/ 꽃내 분내 관광 간다/ 굼실굼실 떡도 찌고/ 돼지머리 꾹꾹 눌러/ 정호반점 앞에서 버스 한 대/ 씨바씨바 출발이다/ 소주도 서너 박스 맥주도 서너 박스/ 행님아 아무야 고부라지며/ 구룡포에서 하동까지/ 자빠질 듯 자빠질 듯/ 흔들며 흔들리며/ 간다. 매화야 피는 동 말든 동/ 간다. 빗줄기야 치는 동 개든 동/ 쭉쭉 뻗은 길 따라/ 술 마시고 막춤 추며/ 씨바씨바 봄은 간다//


돌림노래 / 권선희
니끼미 시발 지랄났다고 내가 수그리나 시발/ 사람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시발 야마가/ 확 돌아뿌네 시발 타고 싶아 탔나 시발 목구녕이/ 포도청이라 시발 자존심 콱 꾸기뿔고 시발 선금 땡겨/ 오줄없는 짓 안했나 시발 문디 지랄 같은 기 마 화딱/ 디비 엎아뿔고 시발 에이 시벌컥벌컥벌컥벌컥컥 컥// 아지매요 도루묵 없는교/ 감자 삐지 옇고 벌겋게 해다 주소 퍼특// 니끼미 시발 지랄났다꼬 내가 수그리나 시발/ 사람 나고 돈 났지 시발 돈 나고 시발 사람 났나.//


툇마루 / 권선희
에고 이 여편네야/ 니 지금 내한테 데모하나/ 문디 이기 뭐꼬?/ 돼지괴기 한 디이 사다 볶아 묵을 생각 말고/ 빤쓰나 하나 장만하그라// 살믄 을매나 살끼라꼬 이라노 어이?/ 이기 말이다 이양 니끼 아잉기라/ 내 맴 쪼매 짼하라꼬 수 쓰나본데/ 됐다마 당장 날새믄 가가 사뿌라/ 난닝구도 아이고/ 구녕이 이래 크기 난 빤쓰로 보믄/ 내 맴이 우야켓노/ 퍼뜩 틀어 막그라/ 알긋나//

끝내주는 것 / 권선희
처녀 고래 한 마리/ 어판장 바닥에 누워/ 여러 사내 받아내고 있다/ 긴 칼 든 사내가 먼저 목덜미를 깨물었다/ 꽃잠처럼 감미로운 신음 출렁이고/ 몸 속에서 풍경이 쏟아졌다/ 범람하는 붉은 강/ 고무호스 든 사내가 그녀를 씻겨 주었다/ 세찬 물줄기에 드러나는 흰 뼈/ 발라내는 사내 등이 흠뻑 젖었다/ 놀라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혀가 없는 그녀는 말이 없었고/ 입술을 찾지 못한 사내는 끝내 잇몸을 도려냈다/ 칫솔처럼 빽빽하게 울타리 친 방어벽이/ 통째로 들려나와 얼굴 옆에 떨어졌다/ 갈증 난 사내가 우무냉국을 벌컥벌컥 마셨다/ 입 없는 그녀가 잠시 웃었다/ 용을 쓰며 달려드는 곳마다 지워졌다/ 미처 그녀를 만지지 못한 사내들은/ 살점을 부지런히 냉동 창고에 넣고/ 물줄기 뿜어 쌍무지개 띄웠다// 끝내준 사내들이 돌아갔다/ 한 여자가 말소된 자리/ 깨끗했다//

 

사램이 고래만 같으믄 / 권선희
고랫배 타고 반평생 싸돌았다마는/ 살라꼬 온 데로 설쳤다마는/ 금마가 을매나 자슥들로 물고 빨매 애끼는지/ 내는 안다// 반들반들하니 시커먼 눔 만나믄 말이재/ 가슴이 벌컹벌컹 뛰는 기라/ 금마가 을매나 이쁜지 모르재?// 내하고 금마하고 똑같이 울렁울렁/ 지칠 때꺼정 파도 타매 가는데 말이다/ 금마 옆구리에 몽실하니 새끼가 붙은 기라/ 우짜겠노 내는 사램이고 지는 괴기니/ 놓치지 않을라꼬 가기는 간다마는/ 맴이 억수로 씨는 기라// 그래그래 가다보믄/ 새끼가 고마 처진다 아이가/ 그라믄 우짜는 줄 아나?/ 요래요래 지 한쪽 팔에 새끼로 얹아가꼬 간다/ 포 쏠라꼬 배는 달라붙재/ 새끼는 깩깩 울재/ 가슴팍에 피멍인들 앤 들겠나 말이다// 어미 고래 질질 끄잡고 온 날은/ 난리가 난데이/ 울 마눌 입은 째질 대로 째지고/ 온 동네 사램들 마카 모딘 판장은 그야말로 굿판이재// 그라믄 모하겠노/ 술 한잔 묵고 든 집구석 온천지/ 새끼 델꼬 도망치던 금마 오락가락 하지럴/ 깩깩거리메 에미 찾을 새끼 오락가락 하지럴/ 내 그런 날으는 한 숨도 몬잤데이// 새끼 내삐리고 소식 읎는 둘째 놈/ 검둥고래만도 몬한 놈/ 고래 새끼만도 몬한 내 손주 놈이 가여버가꼬/ 잠든 볼때기만 조물락 조물락/ 날밤으로 씨꺼멓게 샜데이//

죽변 효자 / 권선희
봐라, 김양아. 울아부지 오시거들랑 *씨븐 커피 말고 비싼 걸로다 팍팍 내드려라. 영감쟁이가 *요단새 통 잡숫질 않는다. 뱃일도 *접었지럴 *몸띠도 시원찮지럴, *할마시까지 갖다 묻고 적막강산 같은 집구석에 *죙일 *들앉아 있으믄 부아 밖에 더 나겠나. 그래도 김양 니가 아부지요, 아부지요 하니 *여라도 가끔 들락거리는 기재. 돈이 없구나 싶으면 니가 한 턱 쏜다 카고 두 잔 *내와가 같이 마시라. 손도 *쪼매 잡혀 주고, *궁디도 슬쩍 들이대고, 한 번씩 오빠야라고도 불러라. 복 짓는 맘으로다가 모시믄 그 복 다 니한테 간다. 돈은 *을매가 되든 내 앞으로 달아 놓고.//
* 씨븐 커피; 쓴 커피 * 요단새; 요즘 들어 * 접었지럴; 끝냈고 * 몸띠; 몸 전체 * 죙일; 종일 * 할마시; 부인 혹은 어머니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 * 들앉아; 들어앉아서 * 여라도; 여기라도 * 내와가; 내어 가지고 와서 * 쪼매; 조금이라도 * 궁디; 엉덩이 * 을매가; 얼마가 되든지

풍경 / 권선희
어판장 한 켠/ 살았다고, 싱싱하게 살아있다고 외치는/ 늙은 여자와/ 죽은 고동이/ 있다//

풍경 / 권선희
산전수전 다 지나온 말 한 마리/ 산전수전 다 지나온 노부부 싣고/ 하필이면 해맞이공원에서 꽃무덤 끈다// 잘린 시야 측면은/ 가리개 너머 신神들은 무고한가// 추진推進을 촉구促求하는 고삐/ 재갈을 자극하며 키스하는 모퉁이/ 절벽 아래 수심은 터무니없는데// 채찍이 긋는 이 오후는/ 이승인가, 저승인가//

북어의 노래 / 권선희
낯선 동지와/ 서로 입을 꿰고 한 줄에 걸렸다// 내장은 모두 발라내고/ 영롱한 의식은 바다에 남겨두고/ 헛것인 몸뚱이만/ 펄럭인다// 동해 비릿한 바람이/ 불어오면 올수록 나는/ 나를 잃어야 한다/ 꾸득꾸득 밀려드는 안타까운 삶/ 우두커니 밤바닷가에서/ 눈알도 없는 내가/ 안주로 국거리로 가야 한다// 너희들이 가져가는 건 빈 몸뚱이/ 저 깊은 바다 속 집에서는/ 내 아이들이 성실하게/ 살다간 아비의 전기를 읽고 있다//

과메기 / 권선희
가는 생이다/ 지느러미 흔들고 흔들리며/ 삶을 부린 저 바다/ 노대바람 뚫고 명주바람 건너온/ 아비처럼 어미처럼 돌아가는 길이다/ 서글픈 속내일랑 뒷산에 묻고/ 그리운 사랑일랑 가슴에 묻고/ 시누대에 눈을 꿴 몸뚱이들/ 덕장마다 환원의 문장을 쓰고 있다/ 화르르 비늘 돋는 구룡포/ 차디찬 겨울 빛나는 율동(律動)/ 샛바람이 읽고 있다//

멸치 / 권선희
사진하는 이선생이 탁배기 안주로 딸려 나온 멸치 한 줌 보더니/ 앗따, 이 태평양 똘마니 짜아식들 하면서/ 고추장에 냉큼 찍습니다/ 그 넓은 바다에서 쥐알통만한 몸으로 혼자선 안 되니까/ 떼로 몰려다니며 어깨에 따악 힘준다는 얘기지요/ 그 말 재미있어 한 놈 집어 들고 빤히 봅니다/ 바짝 말라도 당당히 지킨 똘마니의 눈/ 어디 멸치뿐인가요/ 미주구리, 씨뚝이, 삼식이 덩치 큰 곱생이까지/ 닮은 얼굴끼리 바라보다/ 닮은 마음끼리 연애하다 생겨 난 뜨뜻한 것/ 무더기의 힘이 살만한 날들 몰고 다니는 거겠지요// 살구꽃 피어 분내 나는 봄날/ 운두봉 막걸리집 뒷방에서/ 태평양 똘마니와 맞짱뜨는 우리 똘마니들/ 소복이 둘러앉은 눈알도/ 모처럼 반들반들 합니다//

충분한 슬픔 ㅡ머구리 성평전 씨 / 권선희
구석 탁자에 검은 물고기 한 마리/ 막걸리 한 사발로 숨 고르고 있다/ 반 쯤 벗어 내린 슈츠에서/ 뚝 뚝 바닷내 나는 오후가 떨어지고/ 마른멸치 똥 발라내는 문 밖에서/ 자전거는 기울고 있다/ 일흔 생 만조로 차오르도록/ 장가 한 번 못 가고/ 포구에 붙어 사는 목숨이지만/ 바다만은 옳게 접수했노라 호기 부렸으니/ 궂은 날 물질도 겁낼 수 없었다/ 까짓 거 이판사판/ 촌 다방 가스나 하나 들러붙지 않는 몸이지만/ 실마리 아득한 바다/ 와락 안고 뒹굴다 나와도 살만했다//

덕수씨 / 권선희
과메기 덕장 경비 덕수씨는/ 짤막한 다리에 긴 허리/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나만 보면 겅중겅중 뛰는 눈 검은 사내다/ 얼큰이 감자탕집에서 회식한 날/ 돼지등뼈 싸들고 와서/ 덕수씨, 덕수씨, 부르면/ 꼬리 탈탈치며 자빠졌다 일어날 때마다/ 쇠사슬 끌리는 소리/ 언 땅에 뼈다귀 쏟아주면/ 달빛 가득한 눈으로/ 뼈다귀 보고 나 보고 뼈다귀 보고 나 보고/ 꼬리만 더 세게 친다/ 덕수씨 먹어 어여 먹어/ 그제야 뼈다귀 한 번 핥고 나 한 번 핥고/ 돼지등뼈와 덕수씨와 내가/ 삼각형으로 이어지는 밤/ 덕장 위로 달이 뾰족하다//

목포집 덩실이 / 권선희
주점 문 밀고 들어서니/ 흰털에 노랑무늬 두렁두렁 박힌 개 한 마리/ 누워 비키지 않습디다/ 피해가려다 괘씸하여/ 버릇없다 툭툭 차며 나무랐지요/ 꿈쩍도 않습디다/ 들썩도 못합디다// 올해 스무 살이랑께/ 서방으로 새끼로 왔당께/ 살아도 너무 살아 죽은 만 못하네만/ 죽을 때를 못 붙잡아서 저 모냥잉께/ 타박 말랑께, 말랑께// 한때는 덩실덩실 앞발 들고/ 짓이 나서 핥아대며 새끼처럼 굴었겠지요/ 엄한 놈 수작 떨면 물어뜯을 기세로/ 당당하게 서방 노릇도 하였겠지요/ 산 사람 덕분에 죽을 수 없는 개/ 털썩 누운 생이 저릿저릿합디다//

택배 / 권선희
염창골 골목이 리무진 엉덩이를 쿨렁쿨렁 흔들며 간다/ 희고 노란 국화 온몸에 달고/ 하필이면 징하디 징한 여름 한낮을 골라/ 저리 흥겹게 가나/ 백일홍 뒤에서 흘레붙는 개는/ 혀를 댓자나 빼고/ 타고 오르는 강낭콩 줄기도/ 붉은 물방울무늬 콕콕 꽃으로 찍는데/ 상고머리 계집아이 하나/ 돌가자미처럼 납작하게 붙는 담벼락 지나는 저것/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것일까/ 음담을 활활 부채질하는 고물상 간이의자를 지나/ 만장도 없이 흔들리며/ 뜨겁게 배달되는/ 꽃 속의/ 꽃//

구룡포로 간다 / 권선희
나 오늘 기필코/ 저 슬픈 추억의 페이지로 스밀라네/ 눈 감은 채/ 푸르고 깊은 바다/ 흉어기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목단꽃 붉은 이불을 덮고/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새벽이 올 때까지// 은빛다방 김양을 뜨겁게 품을라네/ 작은 창 가득/ 하얗게 성에가 끼면/ 웃풍 가장 즐거운 갈피에 맨살 끼우고/ 내가 낚은 커다란 물고기와/ 투둘투둘 비늘털며/ 긴 밤을 보낼라네//

가을, 구룡포 / 권선희
그물과 그물 사이로/ 고통을 지나온 여자와/ 슬픔에게 걸어가는 고양이/ 고양이 뒤쫓는 개와/ 개를 쫓아내는 남자가 오가는 동안/ 노랗게 햇살 까고 모퉁이 휘어진다/ 우기와 땡볕 사이/ 군용담요처럼 깔린 바다로/ 척척 화투장만 던지는 사람들/ 난파된 선박 관절 조이고/ 스쿠류 타고 노는 아비로/ 돌아가는 길이다// 가슴 쫙 편 수부와 수부 사이/ 서너 근 돼지고기 정도는 우습게 끊는/ 대목장 설 거기/ 포기와 망설임과 설렘은/ 한 항아리에 담겨 있다는 편지/ 당도하는 거. 기//

생선상자를 꿰매며 / 권선희
마누라 가슴에/ 평생 대못 치던 재주가/ 방파제 끝에 나와 있다/ 소형자망어선 늘어진 가슴/ 물컹물컹 주무르며/ 물결은 물결답게 일렁이는데/ 녹슬어 구부러진 못의 허리 두드려 펴며/ 젖은 상자를 꿰매고 있다// 꽃다지 같던 아내는 노란 꿈 하나 피우지 못하고/ 못자국 숭숭한 구멍으로/ 핏덩이만 콸콸 쏟고 져버렸는데/ 죽자고 살아 온 뒤늦은 날들// 왼손 망치질로 매무새 다잡을수록/ 어긋나는/ 낡은 사각의 틀은/ 좀처럼 기워지지 않는다//

춤추는 바다 / 권선희
파도가/ 오래된 포구나무 사는 마당까지 밀려와/ 창문을 두드리면/ 목젖 부풀리며 열리는 아침// 허파꽈리처럼 오종종 매달린 골목은/ 아홉 살 사내 아이들처럼 바다로 달려 나가고/ 물빛 깊은 눈망울 모여든 어판장에는/ 비늘 돋는 삶이 뛴다// 돛을 찢는 노대 바람* 당당하게 넘어서면/ 상처 깁는 명주바람* 불어온다고/ 팽팽하게 당겼다가 느슨하게 놓아주며/ 춤추는 바다// 고래가 새끼를 낳고/ 은빛 새가 날아오르는/ 푸른 경전(聖典)의 음절들 타고 넘으며/ 살아라 살아라/ 온 몸으로 살아라/ 춤추는 바다// 다시 만조(滿潮)에 붉디붉은 석양을 풀고/ 새들 무리져 둥글게 날아가는 그곳에/ 해바라기처럼 둘러선 사람들/ 깊고 너른 장단(長短) 따르며/ 바다처럼 살고 있다//
* 노대바람: 내륙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강한바람으로, 24, 5~28, 4 m/s(48~55 kn)의 속력으로 분다. 나무가 뽑히고, 상당한 건물의 피해가 발생한다.
* 명주바람(명지바람) :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

작곡재에서 / 권선희
어두워짐은/ 소멸이 아니라 침엽수 창끝 세우고/ 능선을 일으키는 반란이다/ 사람들의 영혼은/ 비로소 자유로이 달을 띄우고/ 먼데서 들려오는/ 그립다 그립다 그립다/ 어둠은 결코/ 잠식이 아니라/ 부레를 부풀리는 힘이다/ 가야 할 시절이 가면/ 와야 할 시절은 반드시 온다고/ 그렇게 어르고 달래며/ 터질 듯 피는/ 꽃이다//

끝물 / 권선희
세월이 눌러 놓은/ 촌로의 허리춤으로/ 검은 열매가 익어간다// 단내는 벌써 큰놈이 빨아가고/ 신내는 둘째가 훑어가고/ 남은 몇 송이 농익어 봤자/ 내다 팔 손도 기력도 없는데/ 마음만 밟힌다// 줄어드는 햇살/ 꿈뜬 손놀림 비웃으며 달아나고/ 등 떠미는 어둠에// 물기라곤 없는 두 노인/ 앞서거니 뒤서거니/ 찬밥덩이 기다리는 낮은 지붕/ 무덤으로 걸어간다//


골방 블루스 / 권선희
자작나무 모텔과 항구다방 사이 골목에 부영식당 있는데요 그 식당 명물은 획 돌아앉은 골방이지요 사내들 지퍼 열며 드는 변소 앞이지만요 호마이카 접이상에 눅눅한 미주구리 한 접시, 얼음 서걱한 콩나물국, 늙은 호박 두툼하게 삐져 넣은 도루묵찌게 오르면요 들추는 겨드랑이마다 핀 하얀 소금꽃, 긁을수록 부풀어 오르는 슬픔도 말입니다 팽팽히 울대 세워 진한 농 한 배만 돌리면 다 엉기는// 보일러 잘잘 끓는 겨울밤, 새큰한 신참이 빨간 보자기 펴고 보온병 물커피 뽀얀 김 팍팍 올리면요 낡은 꽃 만발하는 벽에 기대어 무능한 지느러미나 난무한 속설 젓가락질하던 사내들 죄다 무너지구요 불알 떨어진 시계만 아찔하게 익어가는//

서로 / 권선희
문거재 아래 후송당 고택지나 오래된 고샅 휘도는데/ 다 드러난 겨울 숲에서 고라니 한 마리 펄쩍펄쩍 내 쪽으로 뛴다/ 순간,/ 들이받을 지도 모른다, 나는 쓰러질 것이다, 누군가 달려와 경찰을 부르고 고라니는 사살될 것이다, 낼 아침엔 포항사는 50대 여인이 대낮 야생 고라니 습격을 받아 중상이라는 뉴스가 나올 것이다// 뒤돌아 뛰면서 뒤돌아보았다/ 고라니가 한 무더기 억새 덤불로 몸을 날린다// 녀석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꿈일 뿐이었을까 / 권선희
당신은 저기 녹음 속 추녀 겨우 보여주는 미소사에 짐풀고 나는 사하촌 여인숙에 몸 맡겼지요 그 거리 이승과 저승처럼 닿아있어도 밤새 잡을 수 없었소이다만 아, 다행히도 혼몽 지나며 뜨거워진 영혼이 몸뚱 몰래 일어나주더이다 나는 그 새벽 유령처럼 산으로 향하고 당신은 내려오고 그러다 솔향기 아래 우뚝 멈추었을 때// 그렇소 실은 당연한 거였소 당신과 내가 아무리 꽁꽁 동여매고 따로 누워도 영혼은 겨우 잠든 사이를 절대 놓치지 않았을 것이오 결국은 지름길 가로질러 끈끈한 새벽 누리고야 말 것이었소 몸 튼 소나무 아래를 스님 혹여 지나신다 해도 새벽이 멈추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더욱 정갈한 템포로 익을 것이라 확신하오// 그래봤자 꿈일 뿐이라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고 당신은 우길지 모르나 천만에, 나는 아오 이 편지만으로도 당신에게 미소사(微笑寺)는 더 이상 절이 아니라 새벽임을, 흐흐//

부적(符籍) / 권선희
아내는 떼로 몰려온 우환 겨우 치르고 삼재가 들었다는 말 한 마디에 뱀띠 부적 똘똘 말아 끼운 단풍나무 목걸이 걸고 다니다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는데요 다시 재앙의 복판에 선 듯 불안을 안고 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떠난 밀양 어딘가 그 절// 나 참, 대단한 큰스님이 써준 것도 아니고 십이지신마다 수십 개 수백 개씩 복제되어 걸린 불교용품점에 그걸 구하러 간 것이 한심하다가 ‘깊고 간절한 마음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네’ 벽에 붙은 한 구절에서 그만 붉어지데요// 눈밭 뚫고 가는 그 길이 바로 부적입디다요//

소낙비 / 권선희
나흘 못 채운 만 19년, 살다 갔다/ 머리맡에서 하룻밤 재우곤 아침 일찍 바닷가 기슭 곰솔 아래 묻었다/ 흰 돌 주워 무덤에 울타리 쳤다/ 수선화 세 뿌리 옮겨다 심었다/ 꼬리 자르지 못한 채 들여보내고 무변광대(無邊廣大)한 봄/ 돌아 나오며 주문 걸었다// 개가 죽었을 뿐이다/ 개가 죽었을 뿐이다//

쨍 / 권선희
방울이 할머니 댁 돌복숭아나무 새끼 다닥다닥 달았다/ “아고야, 이기 그래 좋다데예”/ “올갠 마캐 쌍둥이다”/ “무르팍에도 직빵이라카데에”/ “내는 고븐 꽃 실컷 봤다. 열매는 니해라”/ 배냇귀 잡순 할머니 말씀, 샛길로 날려도 직진이다//

 

11월의 저녁식사 / 권선희
뱃공장 언덕 조광상회 검둥이 눈매 깊은 국/ 끄므리한 먼 산 지느러미 조림/ 덕장 시누대 비늘 볶음/ 수평선 총총 오징어배 집어등 무침/ 제일 먼저 불 켠 제일교회 첨탑 위 벌건 십자가 구이// 그러고도 빌어먹을,/ 그리움 한잔//

저녁을 위한 변명 / 권선희
가지 마라/ 그렇게는 가지 마라/ 지금은 비리고 썩은 채 드러누운/ 막다른 골목/ 맞다// 급경사 버티는 나무들 사이로/ 왔다가 급히 가버린 베트남 처자를 따라/ 돌박이 준수가 넘어야 할/ 고빗길/ 맞다// 무녀 집 대문에 조등(弔燈)이 걸리고/ 마지막 아이가/ 접시꽃으로 붉게 지고 있지만/ 낮은 지붕을 들춰 보라/ 짓무르는 중이다/ 검은 비닐봉지 속 감자처럼/ 썩어가는 귀퉁이마다/ 토실토실 살 오른 구더기들/ 뽀얗게 눈을 뜨며/ 세상을 열고 있는/ 그것도/ 맞다//

충분한 슬픔 / 권선희
구석 탁자 머구리 한 마리/ 막걸리 한 사발로 숨 고른다/ 반쯤 벗어 내린 슈츠에서/ 뚝 뚝 바닷내 나는 오후가 떨어지고/ 마른멸치 똥 발라내는 문 밖에서/ 삼천리를 달리고 싶던 자전거는 기운다/ 일흔 생 만조로 차오르도록/ 장가 한번 못 가고/ 포구에 붙어사는 목숨이지만/ 바다만은 옳게 접수했노라 호기 부렸으니/ 궂은 날 물질도 겁낼 수 없다/ 까짓 거 이판사판/ 촌 다방 가스나 하나 들러붙지 않는 몸이지만/ 실마리 아득한 바다/ 와락 안고 뒹굴다 나와도 살만하다//

문디 / 권선희
그 무렵/ 엄마도 나도 문디였지/ 오빠도 문디였어// 며칠째 배는 묶이고/ 아버지 애꿎은 양철밥상 냅다 던지면/ 마당 한복판에서 뒹굴던 허연 국숫발들/ 뛰쳐나가는 오빠의 어깨 너머로/ 파도는 참 지랄맞게도 짖어댔지/ 흙범벅된 저녁을 쓸어 담던 엄마도/ 아버지가 죽기를 기도 했을까// 어두워질수록 가라앉는 오두막/ 눈알 부라린 아버지는/ 잠들지 않았어// 아무 말 하지 않았지/ 바람이 가슴을 막 때리며 몰려다녀도/ 아버지의 문디들은/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길을 보면 가고 싶다 / 권선희
천천히 걸어가는 길의 뒷모습이나/ 황급히 사라지는 길, 치마꼬리를 향해/ 서 있었다/ 오랜 배웅의 시간// 간혹 길은 바다로 첨벙 뛰어 들기도 했다/ 그럴때면 얼음공장 벽에 기대어/ 물살 가르고 튀어 오르는 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아무꽃도 피어나지 않는 시멘트 바닥에서/ 비린내 쪼아대는 햇살/ 햇살을 물고 한떼 새들이 날아오르면/ 다시 뭍으로 오른 젖은 길들은/ 숲으로 걸어갔다/ 길이 지나는 자리마다/ 겟멧꽃이 피고 마늘순이 노랗게 말라갔다/ 종꽃이 지고 뱀딸기가 익었다/ 할배는 먼 산으로 가고 아이는 더디 걸었다/ 그렇게 나는 길을 보내고 있었다/ 너른 등짝이 모퉁이를 돌아가는 내내/ 돌담이 붉었다/ 꽃을 주고 길이 또 간다//

관계 / 권선희
과부꽃 담 너머 피는 봄날 골목/ 키가 훤칠한 젊은 사내와/ 자그마한 초로 여인이 간다/ 여인은 사내 새 양복 어깨깃 톨톨 털어주고/ 볼 쓰다듬으며 가다가 수그려 옷소매로 구두 쓰윽 문질러주고/ 그것도 모자라 사내 턱에 제 눈 콕 붙이고 간다//

휘어진 문장 / 권선희
사 년을 박혀 살면서도/ 저 휘어진 문장들 하나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무녀집과 읍사무소 담장 사이를/ 이가 누런 여자 아기를 잠재우려 업고 오가는 동안/ 이미 얼굴 세운 몇몇 낱말만을 표절하며/ 살아 온 것이다 서글픈 열정이 토막 낸 문장/ 골목으로 바람이 낮고 빠르게 불었다/ 텅텅거리며 저 혼자 뛰어가는 스티로폼/ 전봇대 중간 쯤에 기댄 매매 혹은 전세 광고/ 지난 여름부터 다리 절기 시작한 개와/ 만삭인 고양이까지도/ 내가 함부로 버린 그러나, 그리고, 그러므로를 알고 있었다/ 아. 늦지 않았다면/ 이 물렁한 칼 버리고 저 골목 끝/ 까맣게 온점처럼 서서 겨울 견디며/ 내가 휘어지겠다//

 

​담쟁이 / 권선희
새끼고 뭐시고 다 소용없는 나이가 되면/ 저 즐거운 공장으로 갈 거다/ 욕심 훨훨 풀어주고/ 펭귄공장으로 갈 거다/ 흰 가운에 위생모 쓰고 비린 생선 삶고 찌며/ 유쾌한 패설들 속으로 들어가 보고/ 쿡쿡 옆구리 찔러가며/ 그 여편네 흉도 좀 볼 거다/ 오래된 벽으로/ 담쟁이 걸어가는 점심시간/ 깔깔깔 웃음소리 겹벚꽃으로 피고/ 바람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가끔은 반장에게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항의도 하고/ 여럿이 작당하여 작업거부도 할 거다/ 월급 타면 돼지 목살 한 근 사서/ 묵은 김치에 들들 볶아/ 목청 좋은 여편네들과 소주도 한 잔 할 거다// 저녁이 길고/ 아침은 멀리에서 더디게 다가와도/ 비린내 밴 작업복 야무지게 빨아입고/ 마지막 행운번호/ 꼭 붙들고 살 거다//

미소사(微笑寺) / 권선희
그리운 절 한 채 있습니다./ 온달이가 살고 미달이가 살고/ 경희라는 이름의 처자가 사는 곳,/ 가끔 좋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계절마다/ 꽃 피고 지고 눈 쌓이는/ 거기 미소사./ 멀기도 하려니와 불쑥 찾아갈 구실조차 나에겐 없는 곳이지만/ 생각만으로도 싱긋이 미소가 번지는 곳이랍니다./ 그러니까 지난 가을, 딱 한 번 그곳에 갔었지요./ 누가 오라 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곳도 아니요./ 찾아가는 길은 더더욱 까무룩한 채/ 고창, 방장산 느낌만으로 더듬더듬 닿은 미소사./ 그러고 보니 법당에 앉아 공손히 두 손 모으지도 못하였고/ 해우소에서 볼일 또한 보지 못하였네요./ 해넘이 무렵 붉게 막을 내린 음악회를 함께 했을 뿐인데/ 고작 두어 시간 머이 이토록 오래갑니다.// 그곳에 어떤 꽃이 피는 지 어떤 비가 어찌 내리는 지/ 온달이 미달이는 어떻게 자라는 지 저는 알고 있답니다./ 도처를 쏘다니다 너덜너덜 돌아 온 저녁이면/ 파도소리 당겨 앉는 서재에서 우우~ 산이 노는 미소사로/ 나들이 갈 수 있거든요./ 좀처럼 익숙해 지지 않는 기계속이지만/ 근황을 ?고 답하는 사람들이 이웃해 사는 마을만은/ 마음에 돋은 가시들 다 접는 고요한 세상이지요./ 블로그를 열면 잘 지내냐는 인사가 다녀간 자리 따뜻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따라가서는 그곳 맑은 날들을 만나지요./ 경희 씨 풀어놓은 마당과 뒤안 몇 바퀴 돌고는/ 오늘 내 사는 바다는 꿀꿀하였다든가/ 귀가 크고 눈이 착한 멍멍이 한 마리를 사귀었다든가 하는/ 소소한 답장 남기고 클릭 클릭 쉬이 돌아서는 길이지만/ 편안한 소통 뒤에 오는 미소가 있어 편해집니다.// 앞뒷집이 이마를 맞대고 살지만 정작 좁혀 앉은 건물일 뿐/ 정작 사람들은 비비며 내는 상처에 상처 받는 일 잦은 세상,/ 마음 당겨 앉을 수 있는 절 한 채 있다는 건/ 참 다행입니다.//

시인의 말 / 권선희
방금, 바람이 다녀갔다/ 그물을 꿰고 만선기 꼽으며 채비했던/ 무수한 사연들이 출항했다/ 은빛 돛대를 세우고 귀환을 약속하는 갈매기떼/ 우루루 비상하는/ 여기 구룡포,/ 나는 시를 쓰지 않았다/ 축항을 치는 파도와 말봉재 골짝골짝 넘나드는 바람/ 그들의 이야기를 가끔 받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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