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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김경인 시인

by 부흐고비 2022. 6. 10.

김경인 시인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가톨릭대 국문과 졸업. 한양대 국문학 박사. 200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가 있다. 제7회 형평문학상, 제1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창의융합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감자', '배따라기'를 쓴 소설가 김동인의 손녀이기도 하다.



최선의 삶 / 김경인
그는 제법 잘 걷게 되었다/ 무릎 아래를 잡아당기던/ 길이 모두 사라진 후에// 지갑을 열고 하루치의 어둠을 지불했다/ 너는 누구냐? 매번 같은 질문으로/ 뒤꿈치를 끌어당기는 그림자에게// 오늘은 쑥쑥 낳는다 하루치 계단을/ 맘만 먹는다면 백 개도 이백 개도 낳을 수 있단다/ 그로부터 집을 멀리 떨어트려 놓기 위해// 고개를 높이 쳐들면/ 오르막 저 끝에서 집이 묻는다// 너의 최선은 무엇인가?// 아침이 되면/ 물어보리라, 집요하게 유리창을 찌르는 햇빛처럼./ 침대 위 곤충으로 바르작거리는 회사원에게// 가령,/ 사람으로서 아니 곤충으로서 최선은 무엇인가?/ 문득 돋아나는 여러 쌍의 다리를 활용할 직업의 세계는?/ 여러 개의 손바닥으로 아니 발바닥으로 최선을 다해/ 거울을 닦아보자, 사람의 얼굴이 어른거릴 때까지// 목구멍에는 밤이 걸려 있다/ 토사물과 함께 영영 엎질러질 밤이// 벽에는 제멋대로 박힌/ 못이 하나/ 바짝 마른 살가죽이 걸려 있고// 한 권의 책이 나동그라져 있다/ 꿈의 내장과 살덩이를 잘 도려낸 후/ 흠씬 맞아 비로소 푹신하게 평등해진/ 소파 위에//

두 사람 / 김경인
모든 것을 잊고 그는 읽기 시작했다. 김종삼 좋지? 좋아. 김춘수는? 그도 좋지. 봄이군. 전봉래도 전봉건도 다 좋아. 그는 담배를 물었다. 산등성이에 왜가리들이 하나둘 돌아와 앉았다. 산이 드문드문 지워지고 있었다. 죽은 왜가리 소리가 들렸다. 미래의 소리 같군. 그러나 새들에게 영혼을 물을 수는 없어. 나도 알아. 한 단어와 다음 단어 사이에서 그는 잠시 숨을 멈춘다. 왜가리가 활짝 날개를 폈다 접었다. 그렇지만 새들에게 영혼은 없다고. 비유가 익숙한 세계에 그는 있다. 그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들은 어쩐지 아름다워. 그래. 그렇지만 이제부터 물의 비유는 절대 쓰지 말자. 그래. 그래. 아무것도 잊어서는 안 돼. 정말 봄이라며? 응. 우리는 여기에 있지? 그래, 여기에 있지. 산으로부터 어스름이 몰려온다. 봄이군. 그가 울기 시작했다.//

반반 / 김경인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은/ 가장 아름다운 조합/ 모가지와 다리가 평등하게 잘려 버무려지고/ 바싹하게 튀겨져 목구멍 너머로 꿈결처럼 사라지는 날개들/ 반반은 내가 아는 최초의 얼굴/ 자정에 얼굴을 가리면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라는/ 반반은 내가 아는 가장 유쾌한 비밀/ 오른뺨은 어둠으로/ 왼뺨은 희미한 빛으로 서로를 향해 아코디언처럼/ 부풀다 터지는 울음 주머니/ 반반은 그러니까, 제법 슬픈 주름/ 내려가도 끝이 없는 계단/ 오른쪽과 왼쪽 사이좋게 닳아가는 무릎들/ 1월과 7월의 달력에서/ 따로 따로 죽은 채로 발견되는 너무 작은 신들의 이름/ 정성껏 고를수록 실패하는 선물들/ 그러니까 반반은/ 내가 출근 할 때 두고 오는 그림자들/ 너는 정말 시인 같지 않아,/ 동료들이 이런 말로 나를 칭찬할 때/ 나대신 술 마시고 욕을 하고 울며 시 쓰는 하찮은 마음들/ 한 짝은 고독 쪽으로 한 짝은 환멸 쪽으로 팽개쳐버린 구두/ 반반하게 낡아가는 심장들/ 너는 정말 시인 같지 않아,/ 내가 무심코 시집을 펼칠 때//

여름의 할 일 /  김경인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풍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또하나는 허공이라는 투명한 벽을 깨며/ 죽음을 향해 날아오르는 낡은 구두 한 켤레 속에,// 그가 준 불꽃을 식은 돌의 심장에 옮겨 지피는/ 여름, 꿈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러니까 올여름은 꿈꾸기 퍽이나 좋은 계절// 너무 일찍 날아간 새의/ 텅 빈 새장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여기에 남아/ 무릎에 묻은 피를 털며/ 안녕, 안녕,// 은쟁반에 놓인 무심한 버터 한 조각처럼/ 삶이여, 너는 녹아 부드럽게 사라져라// 넓은 이파리들이 환해진 잠귀를 도로 연다// 올여름엔 다시 깨지 않으리//

 

여름 아침 / 김경인
그저 눕고 싶은 거지/ 반질반질 윤이 나는/ 정갈한 대청마루 그런 데는 말고/ 나무 무의를 흉내낸 끈끈한 장판에 그저/ 빛에 미쳐 파닥거리는 미쿡 태생의 선녀벌레나/ 평생을 굴러다니는 줄도 모르다 뭉텅이로 버려지는 먼지와 함께/ 눌어붙는 거/ 내게는 그런 게 딱이지/ 숲은 울울 짙어지겠지 새는 목소리를 가다듬겠지/ 내가 누구인지/ 장판의 세포인지 나무의 세포인지/ 그딴 고뇌는 하지 말고/ 가렵다고 다 날개인 건 아니야, 나는 퇴화된 적도 없지/ 책을 펼치면 가끔씩 "시인에게" 로 시작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인사말이 눈물나게 고맙지/ 아무것도 아닌 마음이라 고맙지/ 어여쁜 글씨체의 사람이 좋아/ 육필로 전해주는 무정한 인사가 좋아/ 육필(肉筆) 육친(肉親) 이런 말들을 떠올리면/ 이 세계는 그저 고깃덩어리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고/ 나라는 고깃덩이가 내내 이어놓은 피의 무늬를 생각하면/ 어제 태운 지상의 재는 더 대수롭지 않게 차가워지겠지/ 어쨌거나 숲은 더 짙어지겠지 능소화는 환하게 타오르겠지/ 여름은 도돌이표/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도록/ 다정도 병이라니 미쳐 돌아가겠지/ 햇볕은 영영 따갑고//

우리는 겨울 / 김경인
1./ 분명히 남은 게 있을 거야, 저 아래에// 나는 바짝 엎드려/ 바닥에 귀를 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2./ 저 멀리 양팔 없이 펄럭이며 걸어오는 여자,/ 텅 빈 소매를 파고들어 서서히 부풀리는 바람처럼/ 불안이 온다/ 깨진 술항아리에서 데굴데굴 쏟아지는 노란 매화열매를 씹으며//
3./ 향을 피우고/ 두 번 절을 한다/ 향에는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스며들어 있다//
4./ 한 접시의 전을 나누어 먹으면서/ 예의를 연습해야지/ 향을 피워야지/ 근사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도록//
5./ 창밖, 캄캄한 밤하늘에 적어둔 아름다운 시구들/ 부서져 분필가루로 흩날린다//

그림자는 저녁을 모르고 / 김경인
모든 빛이 돌아눕는 저녁이었네/ 방안에는 늙은이처럼 중얼거리는 낡은 테이블과/ 주파수가 맞지 않는 꿈의 라디오 뿐/ 내 곁에 남은 그 희미한 빛들 뜨거운 입술을 다 버리는 저녁이네/ 나는 걷네, 그늘막을 따라 보랏빛으로 타오르다 마침내/ 무너지는 등나무처럼/ 나를 어루만지며 무성히 자라나는 주름들이/ 내 얼굴을 조금씩 흩어놓는 걸 바라보면서/ 장롱 속에 처박아둔 어릴 적 처음 덮고 자던 이불과도 같이/ 낡고 해진 순한 마음을 찾아/ 아이처럼 토닥이며 돌아오는 길/ 누군가의 빛바랜 금빛 공단 주름치마처럼 펼쳐진/ 저 하늘이 녹아 사라지는 줄 모르고//

마흔 / 김경인
거울 속에는/ 길고 긴 복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절룩절룩 걸어가는 사람의 뒤통수/ (끝내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거울 속에는/ 향나무 그네를 타고 노는/ 어린 그림자 두 마리/ (끝내 얼굴을 가지지 못한)/ 거울 속에는/ 꼬물꼬물 죽음의 어여쁜 발가락들// 함께/ 흰밥을 먹는 시간/ 넝쿨 줄기처럼 나를 친친 갈아 오르는 그들과,/ 밥상에 다정히 둘러앉아//

에우리디케 / 김경인
나는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요/ 둥근 무늬로 두근거리던 나무 테두리로부터/ 흰 모슬린 커튼처럼 부드러운 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으로부터/ 가득한 두 손 흘러넘치던 치맛자락/ 풍성한 꿈, 그 가지런한 주름으로부터// 올페여, 나를 연주하지 마세요/ 나는 나에게서 버려진 악기,/ 검게 물결치는 강의 입술이 흘려보내는 희미한 글자랍니다// 시간의 연한 뒤꿈치는 스스로 잘랐죠/ 슬며시 내 곁에 선, 조그맣고 차가운 고통 옆에 주저앉히려고요/ 눈은 이제 죽은 이들의 고독한 창문을 향해서만 열려요// 나는 슬픈 뱀처럼 길을 끌고 다녀요/ 밤하늘을 헤아려 내일을 점치는 대신/ 우울한 낯빛으로 평생 뒤척이는 흙을 어루만집니다// 이곳엔 갈 곳 없는 울음들 뿐/ 작디작은 포자로 떠다니다가/ 누군가의 습기 가득한 생에 내려앉아/ 텅 비고 메마른 얼굴마다 번질 때/ 한꺼번에 흐느끼는 음악을 듣기 위해/ 나는 여기 저기 버섯처럼 돋아나는 귀를 주워요// 당신은 딱 한 번 뒤돌아보는 자/ 슬픔으로 절룩이게 나를 등 뒤에 두세요/ 내가 디디는 세계가 깊이 저물 때까지// 올페여,/ 당신과 나는 영원히 등을 맞대고/ 각자의 방향으로 내달리는 음계/ 나는 기꺼이 사라지는 당신의 악기// 나는 나로부터 겨울입니다/ 눈보라로 흐느끼며 떠돌아요/ 누군가의 뺨에 얼룩질 차가운 눈송이/ 나는 끝내 아름답지 않을 노래//

라푼첼의 방 / 김경인
긴 치마 그림자 너울지는 방/ 목 없는 화병이 꽃 그림자를 훔쳐보는 방/ 화로 잿더미 속엔 두근두근 타다 만 심장 하나/ 치마 속엔 나오다 만 피투성이 머리가 하나/ 죽음을 잊은 소녀는 낡은 털실을 풀어 환상을 짜고/ 첨탑 아래에선 내일이면 막노동하러 도시로 떠날/ 눈먼 왕자가 마지막 세레나데를 쥐어짜는 방/ 꿈은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뿔뿔이 달아나버린/ 나성형 계단 모양으로 꿈틀거리며 늘어지는 긴 혀의 방/ 지칠 줄 모르고 자라나는 흰 머리카락의 연주, 어지러운 화음/ 앵무새 깃털을 꽂은 무구의 마법사가 눈을 감고 날아가다 멈추는 방/ 땅에 뒹구는 흙투성이 혀가 주절주절 써 내려가는 방/ 흰 우유 가득 담은 항아리를 인 처녀처럼/ 슬픔이 조마조마하게 창문을 두드릴 때/ 꿈에 빼앗긴 얼굴만이 절대로 늙지 않고/ 남아 환대하는 그 방//

그레텔 / 김경인
숲에 갔다// 아버지가/ 하룻밤 내내 만들어준/ 흰 빵을 찢어 버리면서/ 검은 돌처럼 구르면서// 나뭇가지처럼 뻗어가는 길과/ 나를 안고 달리다가 쓰러진 길이/ 안 보일 때까지// 무너지지 않는 집을/ 크래커인 양 이빨로 부스러뜨리면서/ 짙은 어둠으로 만든 지붕을/ 다크초콜릿처럼 핥으면서// 집으로 가는 길을 영영 잊어버릴 때까지// 내 속에서 꺼낸 낯익은 얼굴 하나/ 푹 고아서 흐물흐물 사라질 때까지//

안식도서관 / 김경인
서가에 너는 꽂혀 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몸 밖으로 줄행랑치는 풍경을 좇던 눈동자와/ 갑자기 멈춘 박동에 난처해진 심장을/ 난해한 페이지처럼 꼭 봉한 채/ 오늘의 에디터는 소문과 살의의 수완 좋은 설계자/ 굿바이, 아방가르드한 망상이여/ 작은 상자에 꼭 들어맞게 갈려 바스러지는 슬픔이여/ 이런 식의 출간은 상상한 적이 없다/ 너라는 상징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향기와 살기는 구분되지 않는다/ 내가 좀 더 상징을 잘 이해했더라면/ 네가 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제법 친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나는 말하고 싶다, 도서관 앞 도로에/ 슬픔이 가로수에 수제비반죽처럼 뭉쳐 있다가/ 죄다 떨어져 내리더라고/ 구조할 틈도 없이 초록빛 글자들이 길에 쓰러지더라고/ 너는 이런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너는 재능이 없구나/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내년에도/ 시인이 되기는 글렀어/ 너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 스푼 떠 넣으면 완성되는 빨래처럼/ 얼룩진 시간을 한 스푼 떠 넣으면/ 새하얀 내일이 오겠지/ 지하철에서 꼬박꼬박 졸며/ 지독한 꿈을 꾸어야지/ 읽을 수 없는 책들의 안식처에서/ 푸드덕거리는 생의 뒷덜미를/ 날쌔게 뛰어올라 물어뜯는 위대한 자들에게/ 걸작을 보았다라고 말해주려고/ 금빛 벼랑으로 남은 너의/ 쓰다듬을 어깨가 어디쯤일지 생각하면서//

미래의 가로수 / 김경인
어제와 오늘을/ 똑같은 질량으로 섞어/ 자주 걷는 길에 뿌려 두었다// 가까운 사람이 알려주길/ 아파트 장에 가면 싸고 싱싱한 사랑을 판다고/ 물만 주어도 잘 자란다고/ 몇 그루 가져다 심으면 제법 그럴듯할 거라고// 가로수는 언제 무성해지나/ 어제와 오늘이/ 비극과 희극 사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 말하길/ 너와 나랑 같이 걷자,/ 마지막 나무와 걷지 못한 나무 사이에/ 거울처럼 빛나는 미래가 걸려 있다고// 가로수가 무성해지면// 토르소처럼 모양 좋게 자를 수도 있다고/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알게 될 거라고// 나와 무 사이에/ 누군가 있다// 만화경을 돌리듯이 무한하게 번지는 가능성들// 잘 안 보여,// 안경을 쓰면/ 잠이 찾아왔고/ 벗자 다시 잠이 달아났다//

삼월 / 김경인
늙은 도공의 탄식처럼/ 깨지길 기다리는/ 항아리들처럼/ 일생의 이야기들 속에서 달린 발 빠른 말이/ 지나간 자리/ 백 년 동안의 흙먼지처럼/ 자화상을 기다리는 검은 프레임처럼/ 텅 빈 깡통 속 홀로 반짝이는 은화처럼/ 내려앉는 햇살처럼/ 강 한가운데로 흘러온 노래의 조각배/ 검은 머리털을 덮어버린/ 흰 머리카락처럼/ 아침마다 무너지는 세계/ 담벼락 아래 깔린 비밀 위로/ 가벼이 떠오르는 민들레처럼/ 그 물음표처럼/ 점점 작아지는 휘파람처럼/ 분노와 슬픔으로 촘촘히 짠/ 주머니를 찢고 나오는/ 어리둥절한 돌멩이처럼//

24시 편의점 / 김경인
우리가 만난다면/ 너의 눈 한복판/ 검고 아름다운 저수지/ 거기는 아닐 거야/ 튼튼히 쌓아올린 제방,/ 공들여 정비한 마음이 무너지는/ 거기도 아닐 거야/ 우리가 만난다면/ 이십사시 어둠을 켜놓은/ 편의점에서 일 거야/ 일회용 생활을 쌓아둔 창고 문을 닫고/ 캔 뚜껑을 따듯이 허겁지겁/ 서로를 열겠지 황금빛 거품처럼/ 흘러넘치는 너를 우그러질 때까지/ 한 방울 남김없이 마시겠지/ 심장에 넣을 열쇠만큼 작아질 때까지/ 단숨에 들이킬 거야/ 내가 온통 너로 출렁이도록/ 그러다가 왈칵 토해내겠지/ 서로의 인생을 마구잡이로 뱉다가/ 결국은 나를 줄줄 흘리다가/ 구겨진 채로 쓰레기통에 처박힐 거야/ 죽음 같은 잠에 빠질 거야/ 만일 우리가 만난다면//

인간 연습 / 김경인
성실하고 유능한// 구인 공고가 났습니다/ 나는 성실한 수강생입니다/ 밤에는 잠꼬대로 진실을 흘려보내고/ 어제에서 갓 딴 악몽 한 컵으로/ 아침을 시작합니다// 낙관, 희망, 혁신, 미래...눈앞에/ 펄럭이는 단어들은 얼마나 위생적인가요/ 내년에는 더 유능해질 겁니다// 정사각통에 차곡차곡 담긴 티슈처럼/ 내면을 숨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흰 테이블보에 스민 얼룩을 감쪽같이 지우듯/ 슬픔의 귀퉁이를 솜씨 좋게 잘라내는 건 서툴지만요// 나는 실용을 좋아합니다/ 새나 구름을 키우지 않고/ 불규칙 동사를 외우듯 인생을 이해하지요// 퀴즈는 다 풀지 못했어요/ 공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그만 오늘에 늦게 도착하고 말았거든요// 반복과 위생을 좋아합니다/ 이불을 탈탈 털어/ 지난 내가 떨어뜨린 부스러기 절망을 깨끗이 정리하고/ 아침에 도착한 퀴즈의 답을 달달 외우면서/ 무럭무럭 새로운 세포로 분열합니다// 네모난 종이처럼 반듯하며/ 나무 연필처럼 구르다 잠시 멈출 수도 있지만// 사람을 모집합니다// 아무렴요, 내년에는 꼭 사람이 될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조금 좁아진 고요 주변을 돌며 운동을 하고/ 성실하게 배가 고프겠습니다// 쏴아, 변기 구멍으로 빨려 내려가는 구겨진 얼굴/ 대신/ 웃는 얼굴을 뒤집어쓰고// 성실하게/ 들숨과 날숨을/ 차례대로 멈출 것입니다//

거룩한 밤 / 김경인
웃음을 위해서는 몇 개의 근육이 필요한가/ 당신의 차가운 핏줄을 돌다가/ 잘못 빠져나온 것 같다/ 이 밤엔 슬픈 귀가 아홉/ 꿈이 남기고 간 이명에 사로잡혀/ 돋아나는 귀들을 잘라내는 밤// 울음을 멈추기 위해서는 몇 개의 손이 필요한가/ 배낭 속엔 더럽고 맛있는 열매/ 미로 상자 망상들/ 굴을 파자, 굴을 파자, 굴속에/ 파묻힌 도토리들 찢어버린 자서 혼자 발광하는 글자들이/ 다시는 나를 열독하지 못하게//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말자/ 빙빙 돌다 내게 불시착한 까마귀떼, 날개, 그림자/ 빙빙 돌다가 까막까막 이름을 물고 날아가겠지// 몇 개의 밤이 필요한가 이 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신의 차가운 핏줄을 반대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는/ 내 안에서 동시에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이좋은 밤이다//

종이 상자 / 김경인
상자를 만들어요. 십 년 됐어요. 당신에게 주려고요./ 상자는 잔디밭에 있어요. 흔들리지 않는 잔디 풀 옆에. 혼자 흔들리는 잔디 풀 옆에. 아니, 흩어지는 구름 아래. 매애애애 하나로 뭉쳐져 똑같은 모양이 되는 양 떼들 아래. 아니, 올라가는 층계, 아니, 내려가는 층계. 그곳에 상자는// 없어요. 아름다운 잔디밭에 잔디가 없어요. 안녕, 엄마, 안녕, 동생아. 이제 자러 갈 시간이야. 다 버렸어요. 새 장난감들로 채웠어요. 아니, 아니, 상자 말구요. 상자는// 말이 없어요. 당신은 다 알고 있지요? 나는 칠월의 무성한 포도 넝쿨, 상자에 묶인 어여쁜 빨강 리본을 그리워해요. 상자에 빨갛고 기다란 싸구려 노끈, 노끈 아래에 물고기 시체. 혹시 울어요? 물속같이?// 종이가 금방 찢어질 것 같아요. 상자를 만들어요. 십 년 후에요. 당신에게 주려고요. 오직 당신을 위해 찢길 상자 하 | 나를, 당신도 알지요? 십 년 전에.//

염소 생각 / 김경인
벗긴 껍질을 차복차복 기저귀처럼 접어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가는 장사꾼 뒤를/ 목줄 없이도 부지런히 따라가는 어린 염소*처럼/ 희망을 졸졸 따라가보려고 해요/ 그러다가 알뜰한 심장이 되어 누군가의 잇새에 낀 삶의 지독한 냄새를 따라가보려고 해요/ 작은 염소의 더 작은 뿔이 되려고 해요/ 어린 날 만화경 속 수상하게 빛나는 도형들처럼 머리 위로 삐죽 솟은 단단한 낙담이 되려고 해요/ 무한대로 늘어나는 밤의 꼭짓점을 세다가/ 영영 잠에서 추방된 사람의 등에/ 끈적끈적하고 비릿한 한 컵의 그림자로 매달리려고 해요/ 매애애애, 오늘의 목책 너머 뛰쳐나오는 털 북슬북슬한 희망 말고/ 잠자코 붙들려 매일 죽고/ 그저 매일 태어나는 착한 염소의/ 더 야무진 이빨이 되려고 해요/ 한 겹 두 겹 싱싱한 백지 위에/ 포개지는 나라는 지겨운 악몽/ 양배추처럼 아작아작 씹어먹는/ 착한 염소 하나 되려고 해요//
* 윤오영의 수필. 「염소」에서

구름 속으로 / 김경인
천천히 사라지고 있군/ 나는 조금 가벼워진다고 생각해// 미끈거리는 꼬리를 싹둑 잘라내고/ 뒤죽박죽 흩어져볼까/ 지독한 냄새를 흘리며// 나무는 이파리에 숨어 초록을 견디는데/ 나는 여전히 초록이 두렵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복면을 뒤집어쓴 새는 지겹지도 않나 봐/ 오래전 목소리를 흉내 낸다네/ 또 무엇을 고백하려고// (앵무새야, 불룩한 주머니를 뒤지지 말아다오/ 성대가 잘리기 전에, 어서!)//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당신은 자꾸 태어나지/ 그림자놀이 따윈 다 끝장난 줄 모르고// 고백했다고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야/ 새끼를 가득 품은 눈먼 주머니쥐처럼// 그물 속 새는 변성變聲을 거듭하며 새 이야기를 낳고/ 열 개의 손가락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다네// 나는 냄새를 풍기며 부드럽게 스며들지/ 가장 낯선 얼굴 속으로//

기대어 앉은 오후 / 김경인
햇살이 거리를 아득히 지우고 있었지/ 거리가 다 사라질 때까지/ 우리 걸을까, 그래,/ 질문이 다 사라질 때까지 걸을까, 우리/ 흰 담과 푸른 대문과 빨갛게 흔들리는 꽃들/ 저 풍경을 다 합치면 무엇이 되나, 흰 빛이 되지/ 어둠의 삼원색은? 어둠에도 색이 있나?/ 그럼, 연둣빛이 켜켜이 쌓이면 어둠이 되지/ 이 검은 비닐봉지 속에는 무엇이 들었나?/ 스타우트, 이슬, 처음처럼, 혹은 하루치의 불안,/ 그거 아니면 말고,/ 저만큼 멀리 달아나다가 밀려오는 골목이/ 우리의 발자국을 함부로 지우고 있네/ 이 골목은 어쩌자고 아침부터 여태도 비틀거리나/ 우리는 털이 승승 빠진 지친 여우처럼/ 담을 뛰어넘어 잠속으로 달아났네/ 큰 개에 쫓긴 어린애가/ 되어 어릴 적 셋집 대문을 두드렸데/ 햇살아, 뒤척이지 말아줘/ 살 아래에 흐르는 불안은/ 옥양목 흰 빨래처럼/ 쨍쨍 말려줘/ 알코올이 뛰는 핏줄을 착하게 재우듯이/ 양철 태양 아래 자글자글 끓는 평화야,/ 누군가의 지붕 위에 흘러내려줘/ 죽은 가수의 목소리에/ 아직 죽지 않은 가수의 목소리가/ 기대어 앉은,/ 어릴 적 마당에 내놓은 말간 계란 두 알 같은,/ 흰 꿈의 오후//

잘 자 / 김경인
지는 해 성큼 자란 꼬리에게/ 가을볕 빨간 잠자리처럼 빙빙 돌다가/ 이윽고 사그라지는 말의 발가락들에게/ 무감한 건물들, 앙상한 뼈 아래 만져지는/ 희고 단단한 벽들에게/ 벽돌의 질서정연한 분노에게// 세상 모서리에 달콤하게 떨어지는 단팥들에게/ 한 줌 밭과 한 줌 설탕과/ 다 녹았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설탕 아닌 알갱이에게/ 질문을 쓰레기처럼 토해내는 거리에서/ 새벽길에 한없이 쓸쓸해지는 토사물, 내 언젠가의 꿈에게// 초록...... 먼....../ 빛 일렁이는...// 캄캄하고 긴 회랑 속에서/ 푸른 잎사귀만 먹다 눈이 먼/ 통통해진 흰 애벌레 같은// 청춘의/ 쓰다듬다/ 툭, 납작하게 눌러 터트리는/ 문득 잔인해지는 손가락에게/ 하루치의 친절을 다 소비하고도/ 칭얼거리는 풍경을 재우느라/ 뭉개져 사라지는 구름에게// 잘자,// 슬퍼서 더욱 녹지 않는 눈사람처럼/ 오늘 꿈은 더 단단해져도 좋으리.//

낮잠 / 김경인
찬송가를 들으면서 나는 멀리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친척 곁에 앉아 찬송가를 따라 부르다가 나는 도무지 모르는 마음이 되어/ 잠깐 갔다 올게. 흔들흔들 친척의 손을 잡고 따라간다. 내가 모르는 산책길 희뿌연 먼지와 해 질 무렵 담벼락, 후미진 골목 재 따위로 얼굴을 부지런히 더럽히면서/ 아주 잠깐이면 돼. 어느새 친척은 재봉틀 앞에 앉아 희미한 빛을 들들 박아 모자를 만든다. 기다릴 수 있지? 모자가 완성될 때까지/ 얘야, 내 어머니는 가난한 모자 장수였지. 반쯤 잘려나간 말을 꿰매어서 만든 얼룩덜룩한 이야기, 무질서하게 이어지는 조각보 같은 이야기를 뒤집어 쓴 채 엄마는 나를 낳았단다./ 나는 듣는다. 스며든 빛이 제법 환해서 다시 눈이 감길 때까지. 하루 중 가장 길다는 그림자의 길이를 생각하면서/ 아주 잠깐인 것 같았어. 삶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구나. 친척은 내게 모자를 깊이 눌러 씌운다. 검푸르게 상해가는 저녁, 저무는 이파리와 제법 좋은 냄새를 풍기는 불행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듯/ 나는 반짝 눈을 뜬다. 어제보다 더 하얗게 늙은 모자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서,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꿈이 사라지면 안 될 텐데, 걱정한다.//

잠의 해고 목록들 / 김경인
초록이거나 빨강인 채로 바랜 활자들/ 기름진 기억의 쌀알을 부지런히 퍼 올리는 숟가락/ 덮을수록 푹신해지는 아침이/ 차례로 추방되었다// 잠의 벤치에는/ 네가 버리고 간 기이한 농담이 가로수 이파리처럼 무성하다// 나는 속수무책 흘러내리는 밤에 주둥이를 박고/ 촘촘히 짜인 흰 천에/ 작은 구멍을 내는 좀벌레처럼/ 여러 개의 희미한 다리를 허우적대며// 그 벤치에 뒤집혀 누워 지낸다/ 어제부로 나는 해고되었으므로// 주인이 도망간 적산가옥/ 식어버린 구들장처럼/ 차가운 심장을 문지르면서// 오, 평온한 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포로작/ 이 사소하고 절실한 구원//

빛과 함께 / 김경인
봄은 어둡고 커다란 교실 안에 있었다// 닫힌 블라인드 사이로 이따금 햇살이 파고들었다 빛이 강의실로 스며들어와 길고 희미하게 퍼지면서 누군가의 눈썹 위에 잠시 내려앉으면서 사라진다//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질량의 밀가루로 낮과 밤을 빚으면서 지루한 문장과 그다음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더 지루한 주어처럼 강의 기계의 녹슨 스위치를 켜고 다시 끄고//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젊어서 죽은 시인의 시를 읽어주면서/ 그는 젊음 아닌 것은 영원히 모르겠구나 질투하면서// 뒷문으로 하나둘 빠져나가 듬성듬성해진 강의실 안에서/ 블라인드 내려진 창문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쌍둥이 무채색 건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마음의 견고함에 대해// 누군가는/ 쓰고,/ 듣고,/ 떠들고,/ 영원히 자고,// 남은 아이들과 함께 나는 물속에 잠긴 듯 견딜 수 없이 긴 잠의 복도를 함께 걷다가, 허우적거리는 아이들과 죽은 듯이 빠져 있는 아이들을 깨우면서, 얘들아, 이제 강의 끝났어.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짝. 나는 되돌아와서.// 강의가 끝나고/ 한 아이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저 왔어요, 조금 늦게요."// 출석 체크가 끝나고/ 그애가 불쑥 말했다.// "선생님, 저는 이년 전에 처음 배를 탔어요. 마지막 배를요. 예상보다 긴 여행이었죠. 그리고 거기에서 너무 많은 걸 보았어요."// 누군가 블라인드를 열었다 순간 빛이 교실 가득 퍼졌다./ 그애는 거기 잠시 머물러 있었다.//
* 윤동주, 「팔복(八福)」에서.

숲 / 김경인
오래도록 여기를 걸었다/ 때때로 유령처럼 우는 없는 꼬리를 높이 쳐들고// 넓은 이파리들은 종 치듯 소리를 흘려보내고/ 순례, 꼬리가 완전히 나를 잊을 때까지// 나는 네 번 돌아온다, 세 번 실패한 후에/ 모든 걸음들을 기록하러/ 썩은 뿌리 냄새에 취해 구르는 돌처럼// 나는 꿈에서조차 뿌리가 자랄까 두려운 나무/ 영영 분실되지 않는 단추/ 나라는 이름을 달랑거리기// 꼬리가 잘린 자가 연주하는 무조의 밤/ 엉망진창 더 걸어야 하리/ 시드는 낙엽 얼굴을 무심히 쓰다듬으며// 헛간에서 혼자 썩어가는 쥐처럼/ 감정이 차곡차곡 죽어가는 밤// 너에게로 가는 기차? 망가진 뒤축처럼/ 진창에 처박힌 악취 나는 씨앗처럼/ 무덤 위의 상한 백합처럼// 흔들리는 숲// 산책, 더 많은 죽음에 실패할 때까지/ 내가 토해낸 끈적거리는 얼굴들/ 어떤 아름다움과도 무관하게//

벚꽃 / 김경인
그대의 손등에/ 밤새 맴을 돌다/ 끝내 녹지 못한/ 눈송이들이// 비로소 봄을 흔들어/ 겹겹 쌓인 마음 토해내다가,/ 가시 같은 햇살에 아프게 반짝이다가,/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휘청이다가,/ 하얗게 질려/ 실핏줄 같은 울음 울먹이다가,// 발 디딜 틈도 없이/ 우 쏟아져 버리는//

젖은 무화과 / 김경인
내가 많은 칼날을 낳았을 때/ 그러고도 접는 방법을 몰라서/ 피 흘리면서/ 간절히 두드릴 때// 스승은 내게 무화과를 건넸다/ 푸르기도 한 붉기도 한/ 카다란 눈물 하나를// 눈물 속에 속속 들어찬/ 누군가의 살을 꼭꼭 씹으면서/ 고통이 뿜어내는 향기가/ 여전히 남은 잇새를 부지런히 핥으면서// 보았다/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빛과/ 창문에 부딪혀 산란하는 빛이/ 스승의 얼굴에 남기는 아름다운 얼룩들//

오늘의 맛 / 김경인
하얀 접시에 무화가가 가지런히 담겨 있다/ 저건 포로의 잘린 머리 같다아, 너는 말하겠지/ 농담과 진담 사이 썰렁하니 낀 말들이 문득 먼지로 떠다니는 오후/ 구름은 이국어가 가득한 페이지처럼 느릿느릿하게 넘어간다/ 진득하게 잇새에 달라붙는 과일의 향기로운 피와 살을 씹으면/ 어느 행성에선 너의 살이 차오르는 소리 들리고/ 무화과는 이상한 표정으로 살아나 입안에서 생기를 뿜는다/ 지난 여름 여행은 정말 좋았지이,, 너는 또 말하겠지/ 그럼, 그럼, 돗자리를 펼치듯 환상이 펼쳐지고 그림 속 풍차가 돌아가듯이/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겠지/ 나무 곁에 누운 그림자가 긴 혀를 내밀어 나무를 핥는다/ 무화과가 여기에도 자라나아? 너는 눈을 뜨고 물어보겠지/ 누군가의 커다란 눈물방울과도 같은 그것을/ 포크로 쿡 찔러 삼키면서/ 나는, 죽지 않고 열리는구나/ 젖은 것들은 도대체 언제 죽나 생각한다/ 한 줌의 후추처럼/ 소금처럼/ 영혼을 얼굴 안에다 부어넣을 수 있다면/ 휘휘 저어 완성되는 수프처럼 얼굴이/ 다정한 냄새를 풍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열매는 잎의 겨드랑이를 열고 자란다/ 무화과 나무 그늘엔 좋은 사람들이 많대애,/ 오늘 겨드랑이에서 너의 말이 툭 떨어진다/ 마른 열매 안에서 씨앗 대신 바스락거리는 벌레들을 씹으면서/ 신비가 모두 사라진 껍질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우리는 알게 되겠지, 떠난 여행에서 비로소 자신이 사라졌음을/ 일곱 색깔 부스러기 사탕가루를 물에 녹여 아껴 마시듯/ 모르는 맛이 될 때까지 오늘을 핥아야지/ 네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허공에 얼룩을 남기는 햇빛/ 야, 바람이 분다아/ 너는 웃으며 말하겠지/ 야, 바람이 분다아아/ 나도 그러게 중얼거리겠지//

수련 / 김경인
연못 가득 수련 잠들어 있다/ 저토록 아름다운 잠이라니,/ 꽃의 이름을 질투하면서/ 나는 잠속으로 수련회를 떠난다/ 옛 친구들과 함께 동글고 착하게 않아/ 우리 한 명씩 돌아가면서 진심을 깨내자./ 호주메니 속 자갈이나 돌멩이를/ 우르르 털어서 듯이/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종이에 적어보자,/ 음, 음,/ 너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음, 음,/ 사실은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이미 너는 죽었으니까/ 죽은 친구에게 이건/ 무리한 부탁이니까/ 친구들은 너무 미안해서 웃으면서/ 한 명씩 잠에서 빠져나간다/ 꿈에서 영영 틀아오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것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저녁 위에 상처를 꾹꾹 눌러 적는다/ 저녁은 푸른 피를 떨구며 연못을 마저 훑고 지나간다/ 꿈속의 수련은 언제 끝내야 하나/ 진흙에 처박혀 하얀 다리는 무럭무럭 자라고/ 수련은 여러 개의 손으로/ 어둠을 붙들고 곤히 잠들어 있다//

사막으로 가는 길 / 김경인
봄부터 몸속에서 물소리가 들려왔어요. 나는 아직 사막을 가지도 못했는데 걸을 때마다 물이 찰랑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두 귀가 부풀어 올라 자꾸 몸이 아팠어요. 어느 아침엔 플랑크톤이 식도를 타고 목구멍 아래까지 기어 올라왔어요. 나는 사막을 저벅저벅 걷고 싶은데 무릎을 거쳐 두 귀까지 물이 넘쳐 가라앉는 난파선처럼 자꾸만 비틀거렸어요. 가슴에 가만 손 얹으면 물속으로 가라앉는 쇄골이 느껴져요. 나는 아직 사막에 가지도 못했는데, 눅눅한 내 몸을 말리지도 못했는데, 손끝으로 물이 번져 만지는 것마다 온통 젖어오네요. 나는 아직 사막 위에 뜬 달을 보지도 못했는데 몸속 수문이 열려버렸나, 물은 눈까지 차올라 두 개의 눈동자가 밖으로 쓸려가네요. 나는 흰 모래 아래 누워 바삭바삭한 꿈을 꾸고 싶은데 몸속, 물고기들이 내 심장을 파먹어요. 온몸이 수초처럼 풀어진 나는 아직도 사막에 가지 못했는데.//

눈(眼) 속의 사막 / 김경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모래를 실은 트럭이 돌진해왔어요/ 이봐, 중앙선 침범이야!/ 핸들을 꺾을 새도 없이/ 내 눈에 모래를 붓고 달아났어요// 눈 속으로 부리를 들이미는 햇살이 망막 위를 마구 달음박질치고 눈꺼풀 안으로 모래가 촘촘히 박혀 각막이 조금씩 부서져 내려요 눈에 맺힌 풍경들이 와르륵 무너지고 몸 안 관다발에 한 줌 사막이 빨려 들어가고 머릿속 필라멘트에 잠시 불이 켜지면 몸 속 수몰지구가 온통 대낮의 사막처럼 타오르네요 아직 처녀인 엄마가 불길에 싸여 뛰어나오네요 한없이 뜨거운 그 길을 따라 아직 아기인 그림자가 뛰어나오네요 불타는 집을 따라 길가 은행잎들이 화들짝 놀라고 눈 밖으로 온 몸이 뜨겁게 흘러나오고 나는 잘 튀겨진 스낵처럼 바삭바삭하게 말라가네요// (그런데 여기는 도대체 누구의 눈 속이예요?)//

영화는 오후 5시와 6시 사이에 상영된다 / 김경인
오후가 밀려나는 순간 영화는 상영된다. 거리로 밀려온 노을은 나 혼자 관객인 영화관의 문을 두드린다. 영사기가 차르륵 돌기 시작하면, 스크린 위로 피멍 든 여자가 불쑥 솟아오른다. 노을보다 먼저 지는 어머니의 얼굴은 아름다워도 될까. 여자를 잡으러 남자가 뛰어간다. 얼음 살갗인 아버지가, 쓰다듬으면 고드름처럼 깨져버리는 아버지가, 나하고 놀아요 하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지는 아버지가, 너 죽어, 모두 죽자 하고 어린아이처럼 뛰어가고 문을 쾅 닫고 도망가고 아직 어린 언니가 누에고치마냥 문고리에 매달려 흐느끼고 그들이 버린 화분 안에서 우리는 목이 말라요 물 좀 주세요 씨앗 하나 갖고 싶어요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잉잉거린다. 화면 밖의 내가 스크린을 찢고 들어가 아이고, 얘들아 어린 나에게 물 한 동이 얼른 떠 주고 도망간 남자와 여자를 찾고 저녁을 차려주고 아직 어린 언니를 찾아 얼굴을 씻기고 울지 마 달래다 내 안의 수문이 터져버리는 순간 젊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쓸려나가고 감자줄기처럼 딸려 온 유년이 잠기고 아이고 이걸 어쩌나 내가 눈물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영화는 종영된다. 사방으로 번진 물길은 내 안의 집을 수몰시킨다. 영화관 밖 보트 위에서 한 아이가 흰 깃발을 흔들고 있다.//

거리는 안개를 키운다 / 김경인
언제부터인가 안개가 거리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방의 귀퉁이를 조금씩 갉아먹고 맑은 소리들을 먹어치운다 소리들이 사라지자 온 세상이 창백하다 모든 꿈이 창백하다 하얀 밤이 계속되고 안개는 잠 속에 촘촘히 박혀든다 나는 잠 속을 헤매인다// 나 걸어가네, 가파른 계단 아래로, 긴 골목을 거쳐, 한 걸음, 걸음… 뒤돌아보면 사라지는 집과 공원과 지나온 골목의 눈동자들, 골목의 끝에는 어떤 길이 나 있을까, 세상이 뿜어내는 부연 입김, 나는 피어나려는 꽃대궁처럼 자꾸 흔들려, 흔들려, 부딪히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골목의 한 켠에, 잠시, 반짝, 이는 불빛, 불빛의 등허리마다 내리꽂히는 안개, 반짝이며 박혀오는 유리조각들, 아파요, 아파요, 왜 나는 눈이 침침한지,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저 길 끝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네, 은박지처럼 날카롭고 환한 소리, 그러나 나는 자꾸만 안개에 숨이 막혀// 거리는 안개를 키운다/ 안개 속에 숨은 소리들은 그 언젠가/ 새가 되어 푸른 비명을 지를 것이다// 소리가 밤의 질긴 주름을 펼 때까지/ 이 거리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나는 일출을 꿈꾼다//

당신의 화원 / 김경인
1./ 작은 화원으로부터 초대를 받았어요. 램프를 켜고 나는 오늘밤 화원으로 가요. 엄마의 엄마와 또 엄마가 관상용 식물처럼 조용히 자라는 화원, 한 켠엔 무지개 빛 시계가 놓여 있고, 당신이 꽃씨를 뱉어내는 그 곳, 나는 쇼윈도의 비스크 인형처럼 딸각거리며 걸어가요.
2./ 필 때마다 검게 변해가는 꽃들, 이파리에 달라붙은 진딧물은 램프의 마지막 남은 노란 빛을 갉아 먹어버리고 화원 안에는 나와 어둠과 당신이 남네요. 자정의 종이 울리면, 박쥐처럼 날아오는 시간들, 시간은 시든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내 목을 조르네요. 당신은 나를 가만히 쓰다듬고 나는 숨이 막혀 와요. 당신은 가위를 들고 내 팔과 다리를 예쁘게 잘라주네요. 입과 혀와 머리카락이 여린 이파리처럼 잘려나가네요. 나는 요람에 든 아가처럼 화분에 담겨 잠이 들어요. 잘 자/ 라라, 꽃아. 당신이 웃으며 나에게 물을 주네요.//
3./ 똑똑,/ 누군가 또 당신의 화원을 두드리고 있나 봐요.//

지붕 위의 평화 / 김경인
구름, 더러운 배낭 안에 나를 넣고 떠나는 노동/ 여름, 내가 만든 좁고 지루한 들판 풍경 노역하던 말들이 하나 둘 목책을 넘어가다/ 나무, 죽은 나무에서 옮겨온 벌레가 눈을 파먹은 후 나는 드디어 벌레로서 미래를 보게 되고/ 안개, 옛 친구에게서 온 한 통의 편지/ 「나의 시집을 보낸다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인생에서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이 아름다운 시/ 들을 읽다보면 너는 진심으로 너를 뉘우치게 될 거야 가짜 날개를 달고 윙윙대는 한때에서 얼른 돌아오길 바란다」/ 더 벌레다워질 때까지 시를 읽고 수치심 속에서 드디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의 한 때를 뒤집어쓴 허물을 찾으러 안개를 헤치면서/ 오늘, 어떤 날들에서도 꿈꾸던 열매의 맛은 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순례, 공동체의 언어를 잊고 너무나도 잘 들리는 귀를 잘라 파묻다/ 불탄 숲, 축 늘어진 배낭 속에서 다시 나를 꺼내 떠나는 여행//

서랍을 닫으며 / 김경인
숲을 흰 빛으로 차오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라진 후에 온전하게 돌아오는 목소리는 무엇인가/ 숲을 노란 빛으로 뒷걸음질 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나무가 그림자를 잊으려 악착스레 저물 때/ 잎사귀를 칼날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의 목덜미에 떨어져/ 나를 빨강으로 밀어 넣는 숲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어둠의 살가죽을 벗겨내 어둠을 꿈틀꿈틀 죽어가게 하는 것은/ 단단한 허공에 밧줄을 매고 밤이 혀를 길게 늘어뜨릴 때/ 희미하게 깜박이는 나를 끌고 가는 들끓는 호수는/ 무엇인가, 호수바닥에 묻힌 두 발은/ 쓰기 위해 서툴게 돋아나는 손은/ 그 때 흰 등성이를 넘어 달려오는 검은 물결은 무엇인가/ 미풍 뒤에 도사린 돌개바람처럼 검정 뒤에 숨어 나를 조각내 흩어버리는/ 그리워할 수 없는 이름은 무엇인가/ 창문을 벗어날 수 없는 풍경이란 무엇인가/ 그럼에도 숲을 아무것도 아닌 빛으로 타오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초록의 바닥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색을 침묵하고 다시 흰 빛깔로 우는 숲은 무엇인가//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 / 김경인
너는 나를 뱉어낸다/ 다정하게, 아름답고 우아한 칼질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르는 채/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은지 모르는 채/ 어떤 의심도 없이 또박또박 나를 잘라내는/ 너의 아름다운 입술을 바라보며/ 나는 한껏 비루한 사람이 되어/ 아름다운 저녁 속으로 흩어진다/ 푸르고 차가운 하늘에 흐릿하게 별이 떠오르듯이/ 내가 너의 문장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글자로 돋아나듯이/ 귀는 자꾸 자라나 얼굴을 덮는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는 저녁에/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자/ 나는 나로부터 흘러나와/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열리지 않는 이중의 창문./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함부로 살해되는 모음과 자음처럼/ 아무도 죽어가지 않는 저녁에/ 침묵의 벼랑에서 불현듯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처럼/ 멸종된 이국어처럼/ 나는 죽어간다, 이상하도록 아름다운 이 저녁에/ 휴지통에 던져진 폐휴지처럼 살기로 하자,/ 네가 내게 던진 글자들이 툭툭 떨어졌다/ 상한 등껍질에서 고름이 흘러내렸다/ 네가 뱉어낸 글자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자/ 그렇고 그런 사람과 그저 그런 사람 사이에서/ 네 개의 다리가 돋아났다/ 개라고 부르자 개가 된/ 그림자가 컹컹, 팽개쳐진 나를 물고 뒷걸음칠쳤다//

서정 / 김경인
바닷마을에 갔었네/ 사랑하려고/ 겨울 한껏 낮아진/ 겸손한 지붕들을 돌아 나오다// 보았네// 멀리서/ 푸른 하늘 아래/ 순한 슬픔처럼 나부끼는/ 희디흰 빨래들을// 나는 천천히 다가갔지// 수백 오징어들이 줄줄이 꿰여/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네// 오장육부가 능숙하게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인//

초대 / 김경인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건 시인이었지/ 시인은 과장되게 몸을 흔들며 수백의 계절을 걸어서 왔다고 말했어/ 물론 너는 믿지 않겠지만 나의 스승과 친구와 후배와 자식뻘 되는 또 후배들의/ 무려 백 년 동안의 시상식에 참석하느라 나는 죽는 것도 까먹었지 뭐야/ 시인은 누구든 용서하기 싫어졌다고 말한 후/ 돌연 가방 속에서 한 뭉치 원고를 꺼내 읽기 시작했지/ 거울와의 비밀 연애 그 지루한 분노의 시를/ 백 년 동안의 독서와 필사적인 필사를/ 그동안 무처럼 갉아 먹은 기억을/ 무말랭이처럼 바닥에 쏟아져 말라가는 언어를/ 황금 재즈 시대 트럼펫처럼/ 무대 위에서만 빛나는 비유들을/ 다 버리고 나서도/ 겨울밤 두더지처럼 늘어나는 슬픔들에 대해/ 시인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 너는 하품을 참으며/ 상투적인 교양 소설의 독자처럼 차근차근 말해주었어/ 거울 속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물만 줘도 쑥쑥 자라 어른이 되지 않고/ 언어는 불평등의 얼음판 위를 날랜 스케이트 날처럼 휙휙 가르지 않으니/ 유사 낭만 시대의 별처럼 빛나지 않아도 좋아/ 나의 시인이여, 이제 그만 죽어도 된단다,/ 너는 다정한 사망선고를 내리고/ 그는 울면서 돌아갔지/ 내일이면 집이 조금 가벼워지리라/ 창밖엔 산뜻한 구름, 너는 허공에다 줄을 건다//

금요일에서 온 사람 / 김경인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는 않아요/ 나는 절룩거렸고/ 나는 뒤로 걸었고// 어제는 청어를 먹고 드라이브를 떠났어요/ 가시 많은 고슴도치처럼 껴안았죠/ 우리에겐 지도가 없었고/ 난 어제, 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건 오른쪽이나 왼쪽일 거예요/ 흙먼지 속에서/ 뿌옇게 지워진 내가 걸어왔다면 아마 거길 거예요// 사람들은 아주 가끔 신기한 듯 물었죠/ 너는 참 이상하게 걷는구나, 길을 끌고 다니듯/ 그건 아마 내 안의 길들이 무릎 아래로 끌어당기기 때문이겠죠// 당신이 걷는 길에 내 발자국이 찍혀 있다면/ 끝나지 않는 골목과 높은 담들/ 늙어서도 울고 있는 아이를 지나/ 그렇게 왔을 거예요/ 그건 긴긴 금요일의 길 위에서였을 거예요.//

일요일 / 김경인
마지막 페이지를 찢고 돛을 펼치러 가야지/ 말라붙은 강바닥에 길게 누워 할딱거리는 무지개물고기처럼//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의문의 아가미를 낚아채 수평선 너머로 날아가는/ 고래새의 푸르스름한 날개를 그려 넣고서// 나를 앞질러 뛰어가는 어여쁜 두 발은 잘라버려야지/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열 개의 손가락이 투명한 물처럼 흐른다면/ 거위의 무수한 깃털로 흩날린다면// 별을 배반한 별의 꼬리처럼/ 내가/ 빛난다면/ 잿더미 속에서 날아오를 책이라면// 손바닥에 뻗어 나온 가지를 자르러 달려가야지/ 그가 닦아놓은 하늘을 향해 모가지를 쳐든 불구의 테라스/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나를 닮은 인형들의 얼굴을 몽땅 박살내러// 한눈은 영원히 감긴 채로/ 한쪽 눈은 나보다 먼저 깨어나/ 응시한다, 진창 속에 처박힌/ 그러나 누군가의 실수로 꺼내질 동전처럼/ 곧 무너지고야 말 마흔 개의 계단 위로 굴러 떨어지는// 앞으로의 시간을,// 잔잔한 물결 아래 조용히 썩어가는 시체들을 꿰뚫어보는 밤의 두 눈과/ 구름에 홀려 벼랑에서 굴러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돌멩이소리/ 여러 겹 불안으로 달싹이는 노을의 입술// 네가 말해준 이 모든 것// 결국 나는 여러 개의 목소리로 남는다/ 명멸과 경멸로 수군대는 숲의 그늘 아래서/ 흰 빛과 검은 건반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액낭 안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쓰러 돛을 펼치러 가야지// 떠오르듯이/ 순례를 마치는 공손한 종이처럼/ 손톱과 발톱이 자라듯이//

비의 일요일 / 김경인
일요일엔 오지 마세요/ 하얀 빵과 무염 버터, 라즈베리 쨈/ 이제 다 소용없어요/ 상자를 묶을 리본 끈은 자려서 영영 묻힌 걸요// 나는 겨우 터널을 빠져나왔어요/ 낮게 나는 새떼들이 차례차례 차창에 부딪혀/ 터진 심장을 허공에 가지런히 눕히는 걸 보면서// 늙은 거울처럼 몸을 떨면서 내부로 돌아가는/ 영혼이란 없다는 걸 안 다음에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 같죠/ 차는 영원히 무겁고 일요일은,// 나는 사각의 프레임 단단한 창문,/ 저 언덕 너머에는 하얀 모래의 사막/ 혹은/ 죽은 새의 더미들// 눈동자, 검은 연못에는/ 얼음이 얼고// 물경 얼룩 부서지는 소리/ 터진 심장을 깁는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 사라지는/ 일요일엔// 오지 마세요/ 항아리는 더 깊어져요/ 그 속에서 앙상해져 등뼈가 다 드러난 슬픔이/ 웅크려 운다 해도 그 부드러운 물결이/ 점점 커져 항아리를 깨뜨린다 해도// 항아리 바닥에 빠져 시간을 사는 사람은/ 삶도 죽음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테니까요// 한 사람을 안을 기쁨의 팔을/ 갖지 못했으니 나는/ 뉘엿뉘엿 저무는 고요를 어깨에 덮고/ 돌아오는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긴 잠을 잘 거예요//

듣는 사람 / 김경인
당신은 불 꺼진 밤거리처럼 꼭 닫혀 있습니다. 당신의 입술은 폭발 직전의 대합실 창문 같군요.// 이제 곧 당신을 부수고 당신이 걸어온 골목들이 터질 것입니다. 골목을 지날수록 자라나는 그림자와 그림자로 만든 집과, 집 마당에 도사린 사나운 개들이 소용돌이치듯 흘러나올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단정히 앉아 가까스로 당신을 끌어당기고 있지만, 한순간 골목을 활활 살라 버릴 불길처럼 혀는 유연하고 위태롭습니다.//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그림자들이 저마다 구깃구깃한 길을 끌어내 당신을 가둘지도 모르죠. 누군가는 달아나고, 누군가는 죽고, 지워지고, 절대 사라지지 않고, 그렇게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것들이 당신을 포위할 때,// 당신의 혀는 유연하고 매끈하지만 당신을 단단히 묶을 수는 없습니다. 당신에게서 흘러나온 말 속에 잠겨 당신이 허우적거리고, 나를 바라보는 두 눈만 남기고 휩쓸려 눈물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나는 도금한 어금니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당신의 입구에 앉아 있습니다./ 나는 영원히 듣는 사람입니다.//

K에게 / 김경인
너는 노래하지/ 첨탑 위에서 치렁치렁한 물음표를 늘어뜨리며/ 바깥으로 난 푸르고 작은 단풍나무 숲 산책로를 상상하면서// 목은 더 길어지지/ 너를 계단 아래로 데려다줄 하얀 말의 말발굽소리를 기다리며/ 들끓는 사막과 선인장을 찾으러 전서구(傳書鳩)에 암호문을 매달아 날리며// 그림자가 잣는 씨줄과 날줄을 사랑해./ 백조가 떨어뜨린 깃털을 모으지/ 머리카락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란 듯/ 공들여 나를 완성하려고// 그러나 나는 불타는 중이지 네가 버린 도시의 망루 위에서/ 심판대를 내리치는 망치에 으깨져 헐떡이는 열 개의 심장과 함께/ 그을려 뒹구는 두개골의 옆, 감길 줄 모르는 열 두 개의 눈과/ 핏자국 자욱한 펜대 위를 내달리는 여섯 개의 손가락과 함께/ 생매장당한 채 썩어가는 시간과/ 언어의 내장을 쪼아대는 굶주린 새떼들의 부리와 함께// 너는 오늘도 나를 찾아 헤맨다./ 네가 세운 마천루의 캄캄한 눈동자 위로/ 꿈꾸듯 흔들리는 오렌지 빛 손전등을 들고// 나는 쉽게 발각되지 않는다./ 너의 도시 속에,/ 뿌리에 얽매여 잘린 네 손의 식어버린 혈관 속에,/ 화롯가 잿더미 속 몰래 두근거리는 심장 속에.// 너는 피곤한 혀를 늘어뜨리고/ 나선형으로 꿈틀거리는 첨탑을 오르지/ 산책길에 주워온 두 손을 수건처럼 얌전히 걸어 두고// 그림자정원의 좁다란 길을 따라/ 구리거울 속으로/ 네 혈족의 모세혈관 속 갇혀 울부짖는/ 얼굴 없이 늙어버린 소녀를 따라 긴 치마를 끌며//

나는 오늘 고통스러웠으나 애쓰지는 않았어* / 김경인
창문 안에는 무엇이든 쉽게 읽을 수 있지/ 자욱한 밤이 통유리에 흘리고 간 진물과/ 관상용 화초처럼 가만 두어도 푸르게 자라나는 풍경을./ 네모진 창틀에 떨어진 부스러기 말을/ 하얀 두부처럼 뭉쳐 모양 좋게 부치면서,/ 얘야,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는 거란다./ 운이 좋으면 팔릴 수도 있는 누군가의 불행과/ 창문이 남몰래 흘린 눈물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지/ 그렇단다. 얘야./ 바퀴 아래서 흩어진 작은 물방울을 닮은 심장이나/ 이웃의 지붕을 부수고 영영 주저앉은 슬픔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창문 안에서는 무엇이든 쉽게 말할 수 있지/ 인생의 고독한 오후와/ 아스라이 어둠으로 빨려드는 황혼에 대해/ 지극히 서정적인 고통에 대해.// 오늘 창문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물결치는 무지개의 행렬이 창문을 넘어/ 네 얼굴을 어지럽게 물들였지/ 나는 그저 쉽게 말했어/ 모두 다른 눈송이들의 빛깔과 모양에 대해/ 눈보라처럼 사방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사랑의 각각 다른 모양에 대해/ 우리의 창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소음에 대해./ 두꺼운 이중 창문 앞에서/ 너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어/ 긴 여행을 끝낸 승객이/ 지상에 처음 발을 내딛듯이/ 시작이 곧 끝인 그런 이야기를/ 실은, 엄마, 나는.../ 나는 애써 웃었지/ 그런데... 엄마... 내가 만일/ 누군가를... 사라ㅇ/ 나는 창문에 커튼을 치고/ 쉿,/ 얘야, 무지개는 멀리서 볼 때만 아름다운 거란다./ 나의 그림자를 일으켜/ 창문 앞에 보초 서듯 세워 놓았지/ 그리고 나는 다정한 얼굴로/ 일곱 개의 돌을 단단히 뭉쳐서/ 네 한복판에 힘껏 던지고야 말았지//
* 에밀리 브론테, '나는 하루 종일 애썼으나 고통스럽지는 않았어’ 「하루 종일 애썼네」 중.

왕십리 / 김경인
가도 가도/ 당신의 눈속이더군/ 그치지 않은 눈이/ 내 눈에도 내려서/ 안간힘으로 겨우 한 발 내딛는 거로군/ 돌아보면 내가 새긴 모든 걸음들이/ 하얗게 지워지더군/ 아무것도 아니더군 가도 가도/ 달리거나 벗어나거나/ 멈추거나 떠나거나/ 당신의 국경을 끝없이 도는 기차더군/ 그러다가 무표정한 손바닥을 펼친 망상이/ 우연히 떨어진 눈 한 송이를 꼭 움켜쥔다해도/ 가도 가도/ 없는 당신이더군/ 그치지 않는 당신이/ 내 눈에만 계속 내려서/ 길이 나를 속수무책 지우는 것이더군/ 십리만 더 가다가/ 내리다가 얼다가 녹아서 물이 된 사람이/ 망상의 무심한 손바닥에/ 실금처럼 새겨둔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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