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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토렴 / 백송자

by 부흐고비 2022. 6. 10.

소면은 뜨거운 물을 만나자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어낸다. 앞다투어 구부러지며 곡선의 여유로움이 넘친다. 달라붙지 않게 연신 휘휘 저으며 동심원을 그린 후 얼른 찬물에 담근다. 흐르는 물에 두 손으로 면을 비비고 또 비빈다. 뿌연 물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헹궜다가 건져 올린다. 한 손으로 국수를 사려 채반에 담는다.

동그랗게 말아 놓은 사리는 어느새 수분이 빠지고 말라간다. 투박한 면기에 사리를 얌전히 앉히고 팔팔 끓는 육수를 부었다가 따라내기를 반복한다. 물은 온 힘을 다하여 면 사이사이로 들어간다. 뭉쳐있던 면은 풀어지면서 국수 가닥이 탱글탱글하게 살아난다. 토렴 중이다.

집에서 잔치국수를 해 먹을 때는 고집스럽게 꼭 토렴한다. 서두르면 국숫발이 냄비 안으로 쏠리기가 일쑤다. 또한, 천천히 하다 보면 국물이 텁텁해진다. 동작이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토렴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맛의 동화작용이다. 토렴을 거쳐야 서로 달랐던 사리와 육수는 하나가 된다.

토렴하면서 사랑을 배운다. 토렴은 퇴염退染이라는 염색의 용어에서 유래되었다. 천이 가지고 있는 색을 도로 빼내는 작업이 퇴염이다. 사랑은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색으로 물들어가기 위해 나를 지우는 것이 먼저다. 토렴이야말로 사랑을 이루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국수 가닥 하나하나가 서로 등을 맞대고 가슴을 끌어안고 달라붙어 있는 게 사리다. 남편도 아내를, 아이들을 보듬고 있다. 가족을 이끌어 가야 하기에 남편은 늘 세상의 고단함에 노출되었다. 말랑말랑한 면을 사리로 만들어 놔두면 겉은 속의 것을 보호하느라 마른다. 남편도 가족의 안위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내느라 거칠어졌다. 젊었을 때는 남편의 이런 거친 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남편은 시골집 장남이다. 아버님은 몸이 허약하여 농사일을 거의 못 하셨고 대신 어머님이 앞장서서 들일을 하였다. 늘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는 어머님을 지켜본 남편은 아버님 몫의 일을 감당해야만 했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학교가 파하면 한눈팔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숙제는커녕 가방을 마루에 던져버리는 날은 계속되었다. 소 풀을 베러 다니고,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모내기하고, 밭을 매는 어린 농사꾼이었다. 그러했던 남편은 중학교 삼 학년이 되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가.’ 또래들보다는 많이 뒤처졌지만, 밤을 새워 공부하였고 두메산골에서 제1호 대학생이 되었다. 남편의 대학 진학은 이웃들에게 교육의 지표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동네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어른들은 더 많이 일했다.

남편은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선 사람이다. 반면에 나는 뜨거운 감정을 가진 여자라고 우기며 산다. 얼음 뭉치도 내 손아귀에 들어오면 스르르 녹아내린다고 착각하며 사는 나를 두고 남편은 동조하는 눈치다. 자신에게는 매섭고 차갑지만, 아내에게 쏟는 마음만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돌아보면 나는 온도를 100℃까지 올리지 못하며 살아온 날이 많았다. 더구나 다양한 맛을 낼 줄 아는 지혜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사리에 육수가 제대로 깃들지 못한 국수, 깊은 맛은 고사하고 무덤덤함이 대부분이었다.

사리와 육수를 하나의 그릇에 담은 세월이 이제 삼십 년이다. 나 혼자 살아온 날들보다 함께 산 시간이 더 길다. 같이 물들며 서로가 색을 지운 것이다. 그리고 부부라는 색으로 동화되었다.

정년이 코앞인 남편은 두루뭉술해졌다. 하지만 가정의 경제적 짐은 혼자서 지고 있다. 100세 시대를 앞두고 노후가 걱정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가장으로서 여전히 세상과 맞선다. 세찬 비바람에 말라가는 사리를 나는 육수로 품는다. 내가 만드는 육수는 일품요리라고 하기는 어림도 없지만, 다양한 맛을 나름대로 내고는 있다. 간장 하나만으로 담백한 맛을 살리기도 하며 각종 건어물과 채소를 우려 진한 맛을 뽐내기도 한다. 육수에 따라 국수는 맛이 다르다. 이제야 여러 맛으로 팔팔 끓는 육수가 되어 토렴할 때마다 사리를 보듬는다.

오늘도 면식수행자麵食遂行者처럼 서로 코를 맞대고 후루룩거린다. 건져 올리는 국숫발이 우리네 인연처럼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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