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읽기

풍장風葬 / 김정태

by 부흐고비 2022. 6. 14.

바람이 봄 꽃잎들을 데려가 흙에 재운다. 더러는 바람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흙과 포개지기도 한다. 꽃잎이 그들 삶의 끝을 바람에 맡길 때, 꽃잎은 생의 절정을 맞는다. 장엄하되 소란스럽지 않고 기시감旣視感이 들되 늘 새롭다. 바람에 꽃잎이 지는, 생애의 끝이 절정이라니 무슨 역설인가. 찬란한 꽃잎의 죽음 의식, 풍장風葬이다.

매화나 벚꽃은 생의 끝을 바람에 맡긴다. 가지에 붙어 있다가 자신의 몸에 남은 마지막 온기를 바람에 실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낙엽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꽃잎의 처연한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꽃잎 곁을 스치는 요란스럽지 않은 바람소리는 차라리 처연한 만가輓歌로 들린다. 이 때 꽃잎은 데려가 줄 바람을 순하게 맞이한다. 순간의 이런 풍경의 끝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화梨花도 그러하고 연분홍 도화桃花가 그러하다. 꽃잎 한 개 한 개가 개별적으로 바람에 실려 산화散華한다. 이파리도 없는 가지에 잠시 붙어 있다가, 바람에 실려 공중에서 사선을 긋는 동안이 매화나 벚꽃처럼 개별적 죽음을 맞는 꽃잎의 절정이다. 그래서 그들의 끝은 애달프나 순결하다.

꽃잎은 잘게 쪼개져서 분산된다. 쪼개진 꽃잎은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잠시 날아가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같이 피어난 누구를 부르려고 까불대지 않는다. 다만 바람에 감기어 흙에 포개진다. 흙에 눕기 전에 잠깐 흙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꽃잎이 질 때, 나는 누군가를 불러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럴 땐 차라리 혼자서 외로움을 즐기는 것이 좋을 듯하다. 살아있는 모든 삶의 끝은 외롭다. 그렇다고 슬픈 외로움만은 아니다. 끼적인 졸시 <꽃잎 질 때>에서 나는 이렇게 노래했다.

가끔 저 지는 꽃잎을 보며
누구와 함께 봤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다

가끔은 바람에 떨어져 날리는 꽃잎 땜에
손끝이 떨려 누굴 불러내고 싶을 때가 있다

--------------- <중략>

바람이 꽃잎 되고 꽃잎이 바람이었단 걸
맨 살이 알아버렸을 때

불러낸 누굴 돌려보낸 것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바람에 지는 꽃잎과 나만이 홀로일 때, 그런 홀로임이 깊은 황홀감에 빠질 때를 한 시인은 자신의 사전에만 기록된 ‘홀로움’이란 말을 썼다지만 그 시인과 나의 느낌이 같은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봄의 꽃잎들이 모두 바람을 기다려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동백이 그러하고 목련이 그렇다.

동백은 가늘게 불어오는 봄바람을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무게만을 의식한 채 기다릴 뿐이다. 한 송이 한 송이가 지극히 개별적이어서, 개별적으로 피어나고 개별적으로 땅에 누울 시간을 정한다. 마지막임을 알릴 때도 그들은 혼자여서 옆의 것과 두런거리지 않고 주접스런 몸짓 따위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있다가 문득 진다.

운 좋게도 처가가 이 땅의 남도에 자리하고 있어, 이른 봄날이면 눈치 볼 일 없이 남도를 여행하며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여행길에서 온통 붉게 멍든 동백을 마주한다. 홀로 피어 있는 동백도 아름답지만, 동백은 역시 군락을 이룬 무리가 절경이다. 모두가 '기다림에 지쳐서 빨갛게 멍든' 자국들인가.

바람도 없는 날, 동백의 무수한 무리 앞에 서본다. 벼랑으로 떨어지듯, 느닷없이 아래로 향한다. 길을 잃고 두려움에 울지도 못하던 아이가, 저만치서 달려오는 엄마를 문득 발견하고 후드득 흘리는 눈물처럼 뚝 떨어져 버린다. 문득 있었던 것이 순간 문득 없어진다. 이 땅의 남도에 자리하고 있다가 명멸한 백제의 마지막처럼, 벼랑으로 떨어지듯 하는 것이다. 어느 핸가 제주도의 해안가에서 만난 동백의 무리 앞에서, 뜬금없이 제주도에서 있었던 옛 사건이 떠오른 것도 동백꽃이 지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해 사월에도 까닭 없이 스러져간 덧없는 민초들의 죽음처럼 동백은 지고 있었을까. 동백꽃의 짐은 차마 소리 낼 수 없는 고통이고 비애에 가깝다.

목련의 꽃잎이 떨어짐은 동백의 그것과 같은 듯 다르다. 꽃잎이 존재의 중량감은 같을지 모르나 그들의 끝은 전혀 다르다. 목련은 동백처럼 문득 떨어지지 않는다. 백목련의 꽃잎이 시들어갈 때면, 마치 궁색한 집안 대주의 무명 저고리를 닮아 있다. 누렇게 변색되어도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웬만한 바람에도 지지 않고 제 몸의 무게만으로 지기를 고집한다. 그들은 풍장을 거부한다. 자목련의 끝은 더 추레하다. 꽃잎의 겉과 속이 다른 색깔인지라, 시들어가며 처진 꽃잎은, 손님 발길 뜸해진 늙은 무당 집 앞의 색 바랜 깃발처럼 펄럭이며 냉큼 떨어지지 않는다. 든적스런 몸짓이다. 참으로 느리고 무거운 죽음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 끝에 죽음이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생각해 보곤 한다. 문득 지는 것은 아쉽고, 추레한 모습으로 오래 버티는 것은 추하다. 꽃이 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굳이 꽃을 보러 나들이를 하거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말라가는 목련의 꽃잎처럼 끝이 너절함으로 남아있다면.

매화나 벚꽃의 꽃잎이든, 또 동백이나 목련의 꽃잎이든, 그것들이 나고 죽는 흐름은 인생의 그것이나 별반 다름은 없으리라. 매화나 벚꽃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생애의 끝을 맞이하는 동백이나 목련도 그와 닮은 인생이 왜 없으랴. 한 때의 영화榮華도 때가 되면 스러지게 마련이다. 여느 나라든 그랬고 앞선 모든 인생들의 삶이 그러했다.

잡고 있던 가지를 놓으며, 바람이 데려갈 때를 아는 가루 같은 저 꽃잎들이 순하게 풍장에 순응함을 바라보는 봄날의 하루가 간다.

내 삶의 끝이 순장을 맞는 꽃잎처럼 가지런하고 순하게 날렸으면 좋겠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의 전화 / 박범수  (0) 2022.06.15
보험 / 김근우  (0) 2022.06.14
노적봉의 소나무 / 김경자  (0) 2022.06.13
엇갈림 / 김창수  (0) 2022.06.13
어머니의 장醬 / 변종호  (0) 2022.06.1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