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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서대경 시인

부흐고비 2022. 6. 16. 09:18

서대경 시인, 번역가
1976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해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와 옮긴 책으로 『밥 딜런: 시가 된 노래들 1961-2012』, 『등에』, 『창세기 비밀』 등이 있다.

제20회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했다.

 



흡혈귀 / 서대경
흑백의 나무가/ 얼어붙은 길 사이로/ 펄럭인다// 박쥐 같은 기억이 허공을 난다/ 모조리 다 헤맨/ 기억이 박쥐로 태어났다// 나는 이간의 피를 먹지 않는다/ 내가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면// 박쥐가 내 어깨에/ 내려앉기/ 까지 한다//
* 2004년 《시와세계》 등단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 서대경
공장 지대를 짓누르는 잿빛 대기 아래로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고철 더미가 깔린 비탈길을 느릿느릿 오른다 사내는 담배를 물고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다 한쪽 팔이 잘려나갔는지 작업복의 빈 소매가 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사내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허공을 올려다본다 바람의 거친 궤적이 잿빛 구름을 밀어내면서 거대한 하늘 위로 새파란 대기의 띠가 몇 줄기 좁은 외길처럼 파인다 사내는 서리가 앉은 허연 머리를 허공을 향해 한껏 치켜들고서 광인처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더듬더듬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단순한 이름들을, 추위로 가득한 대기의 이름들을 겨울, 거대한 하늘, 서리의 길, 춤춘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인다 그녀는 사내가 분명히 그렇게 속삭였다고 느낀다 그녀는 여관 유리창을 통해 사내를 지켜보고 있다 한 손으로 알약통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는 잠시 망설인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인다 겨울, 거대한 하늘, 서리의 길, 춤춘다 그녀의 야윈 손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순간 거대한 대기의 굉음이, 고철 더미가 토해내는 음산한 비명 소리가, 버석거리는 얼음의 숨소리가 순식간에 그녀의 전신을 덮친다 바람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그녀의 살점을 찢어발긴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 없다 갑자기 그녀의 목구멍에서 끅끅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등에서, 그녀의 어깨 위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기묘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낮게, 냉혹하게 울려퍼진다//
그녀의 옆방 유리창 커튼이 반쯤 열리더니 벌거벗은 젊은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내는 팔을 내밀어 침대에 누워 있는 여인의 손을 잡고 있다 「그가 그렇게 말했어」 사내가 그녀에게 속삭인다 그녀는 잠들어 있다 그녀는 꿈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작업복을 입은 외팔이 사내가 속삭이고 있었어」 그녀는 말이 없다 사내는 꿈속에서 자신을 응시 하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느낀다 사내는 성냥을 긋는다 성냥 위로 섬광이 일어선다 「희디희다」 그녀가 속삭인다 「그래」 사내가 대답한다 「희디희다」 그녀가 다시 말한다 「서리의 길, 춤춘다」 「그래」 사내가 대답한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사내는 방 안의 어둠 속으로 풀어지는 담배연기를 바라본다 「희디희다」 그녀의 창백한 음성이 천천히 잦아든다 사내는 소용돌이치는 잿빛 대기 속으로 외길처럼 무겁게 파이는 새파란 대기의 띠를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떤다 사내가 거칠게 커튼을 닫는다 「그래」 사내가 중얼거린다 여인이 눈을 뜨고 사내를 응시한다 사내의 벌거벗은 몸이 침대 속으로 어둡게 파고든다//

일요일 / 서대경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목욕탕 앞이었다 이발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영 슈퍼 간판 아래 한 여인이 비눗갑을 손에 든 채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이발소 거울 앞에 앉아 그녀의 젖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면도칼이 나의 뒷덜미를 슥슥슥슥 긁을 때 하얀 와이셔츠 자락이 내 뒤에서 유령처럼 춤추고 있었다// 전국 노래자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후 마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허공으로 상어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귀가 / 서대경
사내가 퇴근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귀신은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벽지가 뜯겨 나간 방 안으로 검푸른 어둠이 일렁인다. 라디오 시그널이 아득히 울린다. 그녀는 라디오 위로 손을 펼친다. 투명한 전파들이 그녀의 손을 통과한다. 열린 창으로 가을의 자장이 밀려든다. 그녀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그녀는 운다. 자장이 옮겨오는 길목마다 일제히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별빛처럼 일어선다.//

사내는 홀린 듯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철거 명령 통지서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부서진 담벽 위로 전신주 그림자가 흔들린다. 사내는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익숙한 걸음으로 통과해간다. 가을의 자장이 귀신들을 불러 모은다. 사내는 허물어진 집 마당에 서있는 귀신들을 본다. 라디오 시그널이 울린다. 사내는 계단을 오른다. 사내는 난간에 서서 귀 기울인다. 바람이 사내의 넥타이를 흔든다. 삽날을 치켜든 포크레인 그림자가 아파트 담벽을 톱니처럼 긋는다. 문 앞에 선 사내의 얼굴을 긋는다.//

더 먹어. 더 먹어. 그녀가 음식을 먹고 있는 사내를 응시한다. 그녀는 사내 앞에 죽은 쥐와 모래가 섞인 검은 비닐봉지를 펼쳐놓는다. 그녀는 사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라디오 시그널이 울린다. 그녀는 사내를 침대로 데려간다. 그녀의 머리칼이 사내의 가슴을 덮는다. 메마른 달빛이 방을 가로지른다. 사내가 팔을 뻗어 라디오 주파수를 돌린다. 그녀의 머리칼이 사내의 어깨를 덮는다. 사내의 구두를 덮는다. 잊지마. 잊지마. 뒤척이는 사내의 얼굴을 덮는다.//

가을밤 / 서대경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 차디찬 두 개의 손이 내 안에서 내 입을 벌렸고 그것은 곧 타일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고 세면대 아래 배수관 기둥을 붙잡더니 거울이 부착된 벽면 위로 재빠르게 기어올라갔다 나는 술 깬 눈으로 온몸이 짧은 잿빛 털로 뒤덮이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그 작은 짐승의 겁먹은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속에 원숭이를 품었다 그것은 꼬리를 감고 외투 속주머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내 잔에 술을 채우던 사내가 놀란 눈으로 어디서 난 원숭이냐고 물었다 「구역질이 나서 토했더니 이 녀석이 나왔네」 나는 잘게 자른 오징어 조각을 원숭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여운 짐승이군. 자네도 알다시피 그놈은 자네의 억압된 무의식의 외화된 형체일세」 「그렇겠지」 우리는 오징어 조각을 물어뜯고 있는 원숭이의 작은 주둥이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저 이빨 좀 보게. 그리고 저 피처럼 붉은 눈을 보게. 겁먹은 듯 보이지만 저놈의 본성은 교활하고 잔인하지」 내게 술을 따르던 사내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물론 자네를 공격하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닐세」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원숭이를 품에 안은 채 낙엽 깔린 가로수 길을 걸어갔다 밤하늘은 맑고 차가웠다 그것은 자꾸만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고통스럽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속삭였다 「슬프고 고통스럽니?」 「응」 품속에서 원숭이의 힘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를 부인하고 너를 저주했지. 너를 때리고 너를 목 졸랐다. 하지만 넌 너 자신이 나의 억압된 무의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응」 「너는 죽고 싶니?」 「죽고 싶어」 「하지만 넌 나의 환상일 뿐이야」 「죽고 싶어」 나는 천천히 품속에서 온몸이 오그라든 채 떨고 있는 그것을 꺼냈다 그것의 짧은 잿빛 털 위로 가을의 가늘고 메마른 달빛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너는 누구니?」 「죽고 싶어」 작고 투명한 핏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요나 / 서대경
요나, 들어보렴, 검은 밤, 빈 겨울 가지, 도로의 불 밝은 곳으로, 우리의 죽음이 긴 꼬리를 끌며, 어둡게 반짝이며, 멀어져가고 있어, 그해 추운 겨울, 갈 곳 없던 우리는 순환선 열차를 타고서 밤새 도시를 떠돌았지,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멀리 우뚝 선 철탑 위로 새까만 어둠이, 날갯짓하는 새처럼 몰려들곤 했었어, 눈 감으면, 은빛 가시처럼 쏟아지던 잠, 우리는 온기를 뺏기지 않으려,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병든 병아리 같았지, 졸음과 추위 속에서, 서로의 손 더듬어 찾으며, 그날 밤은 왜 그리도 길었을까, 수많은 역들이 흘러갔어, 허연 김을 내뿜으며, 차량 문이 열릴 때마다, 너는 내 품속에서 놀라며 깨어나곤 했지, 여기가 어디지, 너는 속삭였어, 그러면 나는 너의 귀에 속삭였지, 요나, 들어보렴, 서로의 잠을 들여다보며, 너와 나는 요나가 되어, 시간의 푸르스름한 숨소리를 들었지, 우리는 졸렸고, 우리는 깨어있었고, 우리는 그 뒤로 달이 지나는 구름처럼 환했어, 요나, 어두운 요나, 나부끼는 잠, 너는 듣고 있었지, 요나, 들어보렴, 그날 밤 천사의 눈처럼 우리를 응시하던 대기의 정적, 너의 눈 속으로 뻗어나가던 검은 나뭇가지, 대합실의 추위, 선로의 호각소리, 숱한 터널의 어둠 속에서, 너는 눈을 떴고, 너는 나를 바라보았고, 요나, 너는 손을 뻗어 나의 눈을 만졌지, 어둠 속에서, 요나, 너는 미소 지었고, 나는 눈을 감았지//

굴뚝의 기사 / 서대경
요나 나는 굴뚝 안에 있다. 빛 아래. 얼어붙은 잿빛 위에. 요나. 어디까지가 시간이고 어디까지가 너인지 알 수가 없구나. 눈 감으면, 높고 황량한 고아원 천장 아래 헐벗은 삶의 허공이 끊임없이 우리를 때렸었다. 눈감으면. 나는 기어오르고 있었다. 천장에 웅크린 채 내려다보면 쥐새끼처럼 들끓던 겨울 햇살. 잠든 너의 이마 위로 메아리치던 파르스름한 희망. 춥다. 요나. 어쩌면 우린 서로의 입가에 맴도는 영원한 중얼거림인지도 모른다. 너의 입김. 너의 눈 속으로 펼쳐진 꿈의 거리, 눈 덮인 광장. 전차의 경적 소리, 인파 속에서 뒤돌아보는 너의 얼굴. 너의 어깨. 너를 지우는 자정의 눈(雪). 본다. 요나, 너의 기침 소리, 어디까지가 죽음이고 어디까지가 너인지 알 수 없는 이 빛 속에서.//

굴뚝의 기사 / 서대경
굴뚝에서 내려와, 꼬마야. 나와 함께 걷자. 하늘에는 구름의 웃음. 하늘에는 무(無), 굽이치는 무, 흔들리는 잎사귀들. 미지근한 빗방울의 감촉, 기차의 지나감. 내 웃음의 지나감. 내려와 꼬마야. 하늘과 뒤섞이자. 나의 투구를 너에게 줄게, 나의 당나귀를 줄게. 하늘에는 무, 굽이치는 무, 나와 함께 걷자. 네 머리는 거기 두고, 네 죽음은 거기 두고, 벚꽃 채찍을 줄게. 빗방울 박차를 줄게.//

굴뚝의 기사 / 서대경
뿌연 형광등 불빛, 머리 위로 살금살금 기어가는 소리, 서대경 씨는 쓰던 글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노려본다. 천 장의 벽지가 갈라지더니 머리 하나가 불쑥 나온다. 「혹시 꼬마 놈 하나 못 봤소?」 머리가 말한다. 「꼬마 놈이라니 누구 말이오?」 「굴뚝의 기사 말이오.」 「당신은 누구요? 왜 굴뚝의 기사를 찾소?」 「옆방 사는 사람인데, 그놈이 또 내 담배를 훔쳐갔소.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걸 보니 형씨도 그놈한테 당했나 보구려.」 「그까짓 담배 없어진 걸로 남의 방에 함부로 머리를 들이밀어도 되는 거요?」 머리가 천천히 돌면서 방 안을 살핀다. 「그러니까 정말로 못 봤소?」 서대경 씨는 말없이 머리를 노려본다. 「그럼 담배 한 개비만 얻을 수 있소?」 서대경 씨가 책상 위의 책을 집어 치켜들자 머리는 구멍 속으로 냉큼 사라져버린다.//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 / 서대경
1./ 변두리 도시의 지저분한 거리 위로 눈이 내린다. 좁은 도로 양옆으로 낡고 더러운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은 상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건물 사이 좁은 골목으로는 붉은 깃발을 내건 무당집과 세탁소, 전당포들이 어둡게 웅크려 있다. 허공엔 추위, 그리고 어지러이 얽혀 뻗어가는 전깃줄의 소리.//
2./ 상가건물 5층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한 아이가 창문을 빠져나와 창턱으로 올라선다. 아이는 보습학원 간판에 기대어 서서 하얀 침묵으로 뒤덮인 인적 없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아이의 이마로 전깃줄 그림자가 지난다. 창문 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의 눈발을 올려다본다. 전깃줄 사이로 보이는 허공이 기차가 지나다니는 잿빛 벌판처럼 보인다. 아이가 가방을 앞으로 고쳐 맨다. 창문에서 욕설과 함께 한 사내의 손이 튀어나온다. 아이가 안테나를 잡고 몸을 비틀며 사내의 손을 피한다. 아이가 웃는다. 전깃줄이 윙윙거린다. 아이의 몸이 허공 속으로 펄쩍 날아오른다.//
3./ 상가건물 2층 만화방 카운터 뒤에 앉은 사내가 화면이 흔들리는 소형 TV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얼굴에 만화책을 덮고 잠들어 있던 내가 깨어 일어나 사내를 노려본다. 만화방 안엔 사내와 나 두 사람 뿐이다. 벌써 3시다. 나는 창문을 바라본다. 눈이 아직도 오는군. 차가 막힐 것이다. 목욕탕에 갔다가 이발소에도 들르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나는 그녀와 만날 시간과 장소를 떠올리며 서둘러 외투를 걸친다. 내게서 돈을 건네받은 카운터 뒤의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소형 TV 위로 몸을 웅크린다.//
4./ 무당집 좁은 마당에 소녀가 앉아 있다. 상가건물 벽이 마당의 절반을 가려 마당 한쪽이 저녁 무렵처럼 어둑어둑하다. 잠시 구름이 열리면서 마당으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쳐든다. 그녀는 무릎 위로 깍지를 끼고 웅크린 채 눈동자에 어리는 귀신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 박수 소리. 귀신들이 낡은 상가 교회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5./ 한 여인이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예배실 문을 열고 서둘러 나온다. 우리 애가 또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여인이 창문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문다. 여인의 시선이 무당집 마당에 웅크린 채 앉아있는 여자 아이에게 머문다.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풀어지며 창밖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는 바라본다. 그녀는 바라보고, 그녀는 욕을 내뱉고, 다시 바라본다. 창턱에 담배를 비벼 끄고 그녀가 돌아선다. 문을 열자 열기와 신음 소리와 박수소리가 그녀의 미소 띤 얼굴 위로 일제히 밀려든다.//
6./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가 걸어오는 나를 내려다본다. 평소처럼 벌거벗은 채다. 미친놈은 추위도 못 느끼나봐. 나는 생각한다. 그가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전에 썼던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와 <소박한 삶>이라는 시는 저 사내에게서 착상을 얻어 쓴 것들이다. 다음번엔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 써봐야지. 목욕탕 문을 열면서 내가 중얼거린다.//
7./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는 입을 헤 벌리고 굴뚝 아래 앉아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전깃줄을 바라본다. 사내에게 그것은 서로의 다리를 물고 늘어선 이상야릇한 거미 떼를 연상시켰다. 그것들은 전신주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검게 나아가면서 눈발로 가득한 허공을 비밀스럽게 지배했다. 사내는 허공에 번뜩이는 전깃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전깃줄의 여정을 눈으로 쫓아 가다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아파트 단지와 공장지대의 그림자와 바람의 속삭임과 불 켜진 창의 신비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다. 사내의 벌거벗은 몸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눈 녹은 검은 물이 굴뚝을 타고 주룩주룩 떨어져 내린다.//
8./ 「안녕하세요.」전깃줄에 매달린 아이가 사내에게 인사한다.「아저씨는 이런 거 못하죠?」사내는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아이를 바라본다.「너 내려와. 내 전깃줄이야.」사내는 목욕탕 옥상 옆으로 뻗어가는 전깃줄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자신에게 혀를 낼름거리는 아이가 못마땅하다. 사내가 벌떡 일어서서 옥상 가장자리로 다가간다.「이 동네 전깃줄은 내 거에요.」아이가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손을 놀려 옥상에서 멀어진다.// 「어디 한번 잡아 봐요, 바보 아저씨.」상가 건물 벽 사이 공중에 매달린 채 아이가 깔깔거린다. 하얀 눈송이가 아이의 몸 위로 내려앉는다.「나 바보 아냐.」사내가 고함을 지른다.「그럼 다음에 봐요.」아이가 손을 흔든다. 아이의 몸이 허공에 매달린 채 천천히 멀어져간다.「나 바보 아냐!」사내가 소리친다. 한 차례 돌풍이 일자 전깃줄이 일제히 윙윙거리며 사내의 벌거벗은 몸 위로 눈가루를 날린다. 사내가 씩씩거리며 머리를 턴다.「안녕! 잘있어요, 바보 아저씨!」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멀리 공장 지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물거리는 잿빛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9./ 깊은 밤의 거리 위로 여전히 눈이 내린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고 있다. 담배를 물고 창가에 선다. 불 꺼진 상가건물과 목욕탕 건물이 내다보이고, 무당집 마당의 어둠 속에 소녀와 가방을 앞으로 둘러맨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을 지켜본다. 파르스름한 눈송이가 아이들의 몸 위로 반짝이고 있다.//

봄, 기차 / 서대경
여기 이렇게 있는데, 등나무 벤치에 앉아 이렇게 꽃 피고 있는데 당신은 지나가요 당신의 지나감이 내는 소리로 거리가 넓게 느리게 무성해 져요 당신은 여기 있는데 당신은 등나무 벤치에 누워 이렇게 하얀 안개가 되는데 자꾸만 나는 당신 곁을 지나가요 당신은 눈을 뜨고 나는 지나가고 당신은 존재로 뒤덮여요 당신의 시선은 나의 지나감을 따라 목련 핀 허공을 걸어 가요 당신과 마주 잡은 손이 차가운 이데아로 식어요// 지나가지 말아요,/ 당신이 속삭이면// 지나가지 말아요,/ 울먹이며 기차에// 올라요 당신의 지나감이 일으키는 빛살을 주사했더니 검은 쥐가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졌어요, 거짓말이에요, 당신의 지나감이 얼마나 날 키웠는지, 얼마나 두들겨 댔는지, 정말이지 얼마나 그 짓을 해댔는지, 거짓말이에요, 얼마나 외로웠는지, 지나가지 말아요, 당신이 속삭이면// 기차는 밤이슬에 젖어요 우리는 마주 보며 웃어요 샤갈 같은 밤을 통과해요 우리가 마주 보고 있다는게 사실이야? 당신이 물으면 나는 당신의 손을 가만히 내 뺨에 부비며 지나가요 다섯 시에 지나가요 자정에 지나가요 환하게 타오르는 오월의 잎사귀들, 존재들로 뒤섞이는 당신의 서늘한 눈 여섯시에 지나가요 일곱시에 지나가요 지나가지 말아요, 당신을 지나가요//

차단기 기둥 옆에서 / 서대경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정어리 / 서대경
비 그친 여름날의 정오 바람이 흰 새가 되어 펄럭였다/ 가로수 가지마다 흰 새들이 내려앉았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하늘은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었고 거리엔 정어리가/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는데/ 그녀가 말하길 도시가 텅텅 비었으며 지금 이/ 도시엔 그녀와 나뿐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자꾸만 새가 되는 것은/ 내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인데 자신의 꿈속으로도/ 이런 흰 새들을 들여놓고 싶으며/ 그런 의미에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당신의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내 꿈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내가 내 꿈 밖으로 나가게 되면/ 당신을 꿈꿀 수가 없으므로/ 낭패가 아닌가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녀는 말하길 확실한 것은 나와 그녀는/ 꿈을 꾸고 있으며/ (여기서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는데) 사실 나는/ 그녀가 꾸는 꿈속의 꿈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는 않았지만/ 나는 조금 기분이 상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어투에는/ 얼마간의 정어리적인 기질이 들어 있었고/ 그것은 내가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었던,/ 그리고 마침내 어젯밤 일기장에 적어놓았던/ 나의 강박적 증상에 대한 나름의/ 진담과 형상에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비통한 기분으로/ 말없이 그녀를 따라 그녀의 침실에 도착했다// 침실 안은 정어리로 가득했고/ 그녀가 커튼을 열어젖히자/ 정오의 햇살을 받은 정어리들이/ 신선하고 차가운 푸른색을발하며 빛났다/ 그것은 어떤 낯선 영원의 형상처럼 느껴졌고/ 나는 황홀해져서 그녀에 대한 우울한 심사를 잊게/ 되었으며 그녀를 정어리 위로 눕힌 다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것봐요, 새가 날아와요/ 그녀의 크고 깊은 눈 속 저 밑/ 바닥에서 희고 보드라운 새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꿈이 더욱 거대해지기 전에/ 나는 내 꿈속의 그녀의 꿈에 일정한/ 법도와 절차를 부여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쉽게 되지 않았으므로/ 차츰 침실과 정어리와 햇살과 나의 꿈은 사라져갔고/ 대신 그녀의 눈과 그녀의 숨결과 그녀의 피와 그녀의/ 깊은 눈 속 저 너머에서 물결치듯/ 아득히 몰려오는 하얀 새들만이/ 사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집결 / 서대경
부대 집결을 알리는 두 번째 싸이렌이 울렸을 때 나는 군복 차림으로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맥주를 마시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화면 하단으로 전쟁이 터졌다는 속보 자막이 지나가고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속부대로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자기는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며 투덜대기만 했다. 통지서를 들여다봐도 가는 길을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지하실에서 총을 꺼내왔다. 이건 아버지 총이잖아요. 나는 아버지의 녹슨 칼빈 소총을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부대 앞에서 파니까 그냥 가라고 짜증을 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는 빨리 가서 뭐하냐며 나를 어느 지하 술집으로 이끌었다. 술집 안은 군복을 입은 사내들로 가득했고 홀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티브이에서는 흡혈귀가 등장하는 흑백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부대 가는 길을 몰라 초조했지만 창피해서 물어볼 수 없었다. 친구는 다른 사내들과 어울려 포커를 치기 시작했다. 술집 문이 열리더니 화생방전투 보호구를 착용한 동사무소 직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호루라기를 불면서 어서 부대로 집결하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술집 안의 사내들은 낄낄거리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해골처럼 생긴 가스 마스크를 쓰고 서류 뭉치를 들고 있던 한 직원에게 다가가 부대로 찾아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소속부대를 묻더니 따라오라며 술집 바닥의 해치를 열고 지하로 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가자 붉은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사창가가 나타났다. 길 양편으로 쇼윈도가 늘어서 있었고 그 안에 속옷 차림의 젋은 여인들이 앉아있었다. 여자들이 놀다 가라며 우리의 팔을 붙잡았다. 동사무소 직원이 양팔에 여자를 낀 채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어두웠고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나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 동사무소 직원이 해골 마스크를 그대로 쓴 채 여자의 가슴을 주물러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혼자 가시오. 해골 마스크가 손가락으로 건너편 화장실 쪽을 가리켜 보였다. 마스크 유리판 위로 붉은 조명이 혀처럼 날름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 바닥의 해치를 열고 내려갔다.//
어두운 통로를 더듬거리며 걸어갔다. 내 앞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사내들의 그림자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빨리 했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거대한 광장이 나타났다. 흐린 불빛 아래 군복을 입은 수많은 사내들이 종대로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 앞에 독수리 모자를 쓴 조교들이 허리에 손을 얹고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나는 맨 뒷줄에 가서 앉았다. 조교들은 호루라기를 불며 동작이 굼뜬 사내들을 군화발로 짓이겼다. 내 옆에 앉아 있던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조그맣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총을 사오지 못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우리는 철모를 쓰고 실탄을 인계 받았다. 사내들을 태운 군용트럭이 어둠 속으로 쉴새없이 떠나가고 있었다.//

거미 / 서대경
아이는 벽장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는 어둠 속에 웅크렸다./ 아이는 울지 않았고, 성냥을 그었다./ 아이의 시선 끝에서 희디흰 짐승이 옮겨갔다./ 흰 짐승은 저 끝까지 걸어가 아이를 흘깃 돌아보며 소멸했다./ 아이는 다시 성냥을 그었다./ 희디흰 짐승이 일어섰다./ 짐승의 걸음걸이의 정적 속에서 아이는 깜빡 잠이 들었다./ 희디흰 짐승이 아이의 배에 얼굴을 비볐다./ 그것은 늑대였다가 거대한 쥐였다가 잠시 후 하얀 거미가 되었다./ "네가 날 불러냈구나" 거미가 말했다./ 흰 불꽃 속에서 아이가 눈을 떴다./ 흰 불꽃이 아이 곁으로 원을 펼쳤다./ 거미가 말했다/ "아이야, 넌 죽을 거야. 하지만 무섭진 않단다. 모두가 하얗게 잠든단다."/ 아이는 불꽃 사이로 어둠에 잠긴 벽장을 바라보았다./ 너와 나는 깊은 곳에서 흰빛이 되고 바람이 된단다./ 아이가 거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거미는 흰빛이 되고, 꿈이 되고, 속삭임이 되고/ 거미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삼켰다./ 아이는 눈을 떴다./ 무너진 벽 너머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는 불붙은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작고 하얀 거미가 되어 아이는 벽장 밖을 바라보았다.//

검문 / 서대경
겨울이 시작되고 첫 눈이 내리던 날 내 애인은 검은 늑대가 되어 공장지대의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혹한이 계속되는 나날이다 작업장 안은 기계들이 내뿜는 잿빛 연기로 가득하다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들 절단기를 들어올리는 거친 손들 라디오에서 공장지대에 출몰하는 늑대 떼에 관한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서 있다, 식은 커피를 들고, 통로 기둥에 일렬로 기대어 있는 작업조 동료들의 잿빛 입김 곁에서//
우리는 함께 일하던 소년이 늑대로 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는 절단기를 붙잡은 채로 소년의 쥐처럼 작고 충혈된 눈이 조금씩 검고 무거운 털로 뒤덮여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저가 울리고,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고, 소년의 겁에 질린 신음소리가 차츰 냉혹한 광란으로 뒤덮여 갈 때 우리는 허공에서 들려오는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소년은 창문을 부수고 자욱한 연기로 뒤덮인 공장 앞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져갔다//
눈이 그쳐 있다 나는 공장 문을 나선다 어둑어둑해진 골목길을 무장한 경찰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앞쪽에서 사살한 늑대의 시체를 어깨에 둘러맨 경찰들이 다가왔다 나는 담배를 물고 말없이 검문에 응한다 나는 경찰의 어깨 위에 늘어져 있는 늑대의 푸른 눈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고 허공에서 얼음 냄새가 쏟아져 내린다//
나는 그녀와 함께 거닐던 고가철로 아래로 걸어간다 기차가 지나간다 맹렬한 속도로 지나가는 차창들 사이로 두 마리의 검은 늑대가 서 있다 그들은 바람에 검은 털을 나부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순간 뒤편에서 희미하게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뒤돌아선다 어두운 불빛 속에 잠겨 있는 공장지대로부터 한 줄기 차디찬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비로소 그 웃음소리가 공장 기계의 톱니들이 맞물리면서 내는 소리임을 깨닫는다 무정한 경찰들이 내게로 다가온다 철로 위의 늑대들은 사라졌다 나는 담배를 물고 말없이 검문에 응한다//

검은늑대강 / 서대경
사내는 문 앞에서 어깨에 쌓인 얼음을 털어내는 동안 멀리서 낮게 헐떡이는 듯한 마른 강의 물소리를 들었다. 사내의 등 뒤로 얼어붙은 거대한 회색 숲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낸 다음 한 자루를 신발 밑창에 숨겼다. 실내는 일을 마친 벌목꾼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술에 취한 붉은 얼굴로 말없이 문 앞의 낯선 사내를 주시했다. 그는 한쪽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잿빛 수염의 마른 사내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검은늑대강」그는 단검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잿빛 수염의 사내는 힐끗 탁자를 내려다본 다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꿈속에서 이곳에 앉아 있는 당신을 보았소. 검은늑대강. 당신은 검은늑대강이라고 말했소. 나는 꿈속에서 당신을 이 칼로 죽였소.」//
잿빛 수염의 사내는 두 눈이 멀어 있었다. 두 개의 허연 동공이 두건 사이로 창백한 빛을 발했다. 「검은늑대강. 그래. 나는 검은늑대강이라고 말했지. 나는 꿈사냥꾼이라오. 나는 당신의 꿈속에서 검은늑대강을 보았소. 당신의 꿈속에서 나는 당신과 마주쳤소. 당신은 나를 그 칼로 찔렀지. 나는 당신이 약탈하고 살인하는 광경을 모두 볼 수 있었소.」잿빛 수염의 사내는 접시 위에 놓인 감자를 조금씩 으깨어 먹었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죽이러 이곳에 왔겠지.」//
낯선 방문자는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술에 취한 벌목꾼들에게서 눈과 뒤섞인 씁쓰레한 흙냄새가 풍겼다. 그들은 말이 없었고 창으로 쏟아지는 뿌연 햇빛이 그들의 몸을 유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당신은 나의 비밀을 알고 있소. 그리고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요.」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단검을 들어 올렸다. 잿빛 수염의 사내는 나직이 웃으며 속삭였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소. 나는 당신의 꿈속에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꿈의 바깥에 있소. 당신은 꿈속에서 나를 죽였다고 믿겠지만 상황은 전혀 반대라오.」 잿빛 수염의 사내는 소매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낯선 방문자는 그것이 아까 자신이 숨겨 가지고 들어온 그 단검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몸을 숙여 신발 밑창을 더듬어 보았다. 순간 그는 발 밑으로 어떤 거대한 격류가 무겁고 음산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잿빛 수염의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속삭였다. 「검은늑대강. 나는 당신의 시체를 검은늑대강 속에 던졌지. 당신의 눈이 지금 발 밑에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소.」 낯선 방문자는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두 자루의 단검을 노려보고 있었다.「검은늑대강. 검은늑대강의 눈.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 대신 두목이 될 거요.」 잿빛 수염의 사내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술집 안에 있던 벌목꾼들이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하나 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를 가로막은 채 킬킬거리고 있었다. 햇빛이 잦아들면서 실내는 점점 더 짙은 유황빛을 띠기 시작했다.//

실내악 / 서대경
피아노가 탕탕 울리는 오후였다 햇살이 유난히 밝아지고 있었다 그림자가 하나 둘 지워지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잠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책 속의 글자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피아노가 탕탕 울리고 있었다 버스가 오고 있었다 누군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펼치자 빛살이 우두두두 꽂히고 있었다 꽃집이 희어지고 있었다 꽃이 피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물조리개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확대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랍이 사라지고 있었다 거울이 희어지고 있었다 피아노가 탕탕 울리고 있었다 안경이 깨지고 있었다 그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피아노가 탕탕 울리고 있었다 건반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탕, 탕, 탕, 탕 검은 건반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철도의 밤 / 서대경
철도의 밤이네.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어둠 속에 펼쳐진 내 손가락, 내 가방.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내 고통의 소리. 차창을 뒤덮은 성에가 네온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네. 그날 밤, 난방이 형편없는 술집에서 자네와 헤어진 후 무섭도록 많은 가로등들이 켜져 있는 이상한 거리를 헤맸다네. 그러나 그만 길바닥 빙판에 얼굴을 묻고 잠들고 말았지. 그리고 이제 다시, 나는 나의 반복되는 꿈속에 있네. 우울한 마음으로, 내가 타고 가는 기차가 통과해갈 그 익숙한 수많은 철교들을 생각하며. 자네는 그날 밤 무슨 말을 했던가. 거래처의 P에 대해. 미결서류에 대해. 자네와 J양의 쓸쓸한 연애에 대해. 그러고는 심드렁하게 웃었지. 자네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경멸했네. 그리고 이제, 철도의 밤이로군. 아무래도 나는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을 작정인 것 같네. 열차는 줄곧 북상하고 있네. 추위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네. 어째서 나의 꿈속은 이리도 겨울, 겨울뿐이란 말인가. 언젠가는 이 열차가 멈출 테고 그러면 나는 이름 모를 북구의 작은 정거장에 홀로 내려서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차표를 끊을 걸세. 이것이 언제나 반복되는 내 꿈의 행로일세. 늘 그래왔듯이 자네는 이런 내 말을 믿지 않겠지만 말이네.//
이 글이 자네에게 전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네. 어쩌면 꿈 밖의 나는 벌써 깨어 일어나 창백한 몸을 사무실 의자에 기댄 채 내게 할당된 업무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나와, 나를 태운 이 열차와, 어둠 속으로 뻗어가는 겨울의 어두운 광채와,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내 고통의 소리는 모든 꿈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곧 소멸하고 말 것이네. 하지만 친구, 어쩌면 지금도 자네 곁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을 나를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J양을? 통근 열차의 흔들림을? 우리 곁을 자전하는 찬란한 업무의 성좌를? 자네는 알고 있을 걸세. 자네는 서류를 필사하는 틈틈이 경멸어린 시선으로 나를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자네가 알고 있다는 것, 자네가 부인하는 꿈속의 자네 역시 북구의 어느 이름 모를 정거장에서 돌아오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쓸쓸히 기차시각표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걸세.//
이제 열차는 불 꺼진 공장지대를 벗어나 눈 덮인 황량한 숲 속을 통과하고 있네. 내 앞에는 책상이 있고, 백지가 있고, 그 위로 흘러가는 겨울 가지들의 무수한 검은 선들.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나는 내게 쓰도록 명령하는 집중된 허공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내 손의 움직임을 듣고 있네. 자네는 듣고 있나? 들어보게. 밤, 어둠, 고독한 불빛들. 철로를 깨무는 추위,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철교의 속삭임. 얼굴을 쓸어내리면 두 손에 묻어나는 메마른 불빛.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고통의 소리. 어둠 속에 펼쳐진 내 손가락, 내 가방.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의 어두운 비명을 들으며 나는 자네를 생각하네. 사무실의 뿌연 조명 아래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자네와 나를 생각하네. J양을 훔쳐보는 우리의 어두운 욕망을 생각하네……. 자네는 듣고 있나? 들어보게. 소멸하는 열차들의 침묵을. 여관방에서 뒤척이는 불면의 밤을. 자네의 눈꺼풀 뒤로 열리는, 영원한 철도의 밤을……….//

나의 무지는 푸르다 / 서대경
나는 결국 이 길 위로 돌아와 있다, 이 길은 무엇인가,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본다, 아무도 없다, 오직 싸늘한 푸른빛에 잠긴 텅 빈 길만이, 저 너머로 끝없이 뻗어가는 소름끼치는 푸름만이 내 앞에 있다, 무엇이 나를 이 길 위로 옮겨다 놓는지 알 수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아이였을 때부터,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열세 명의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일년에 한두 번, 그러다가 한달에 한두 번, 언제부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이 길 위로 돌아와 있다, 지금은 하루의 대부분, 아니 일년의 대부분, 그런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이제 서서히 머리가 벗겨지는 나이가 되었다, 집에서 아내가 집어주는 사과 조각을 씹으면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또는 직장에서 서류를 검토하다가, 누군가의 명함을 교환하고 악수하다가… 돌연 섬광이 터지고, 나는 의식을 잃는다, 의식을 잃고, 다시 깨어나 눈을 뜨면, 내 앞엔 소용돌이치는 푸른 길이, 소름끼치는 낯익은 길이, 푸른빛의 무지가, 무한한 공허가 놓여 있다, 아니 내게 직장이 있었던가? 아내가 있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자식도 있을지 모른다, 알 게 뭔가, 더 이상 이 길 이전의 삶과, 이 길 위의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이른바,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치매를 앓고 있는지 모른다, 평생의 과업처럼, 평생의 사업처럼, 그러나 지금 나의 말쑥한 옷차림과 내가 들고 있는 검은 가죽가방을 보건대, 이 길 이전의 나의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마도 푸른 공기에 짓눌린 이 텅 빈 길을 한참 걸어올라가 버스정류장에서 보란 듯이 버스를 탈 것이고, 지하철을 갈아탈 것이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예전의 삶이란 무엇인가, 돌아간 내게 그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어온 사람은 없었다, 그런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한다,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나에 대한 기억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니 서서히, 아니 규칙적인 속도로, 아니 치매환자처럼, 아니 정신분석가처럼, 아니 병든 개처럼, 그런데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기억은 나의 기억이 확실한가? 나는 어디로 돌아갔던가, 집으로? 학교로? 학교라니? 가방 속에 든 물건들을 보건대 나는 교수인지도 모른다, 몇 권의 책, 비트겐슈타인, 프레게, 프레게? 그러나 또 가방 안엔, 휘발유가 담긴 작은 통, 담뱃값, 먹다 남은 빵 봉지, 죽은 쥐, 스패너, 깨진 사기그릇, 더러운 헝겊 따위가 들어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앞을 본다, 아무도 없다, 푸른 공기에 짓눌린 텅 빈 길만이 무한히 지속된다, 아니 단속적으로, 아니 동시적으로, 아니 악령처럼, 아니 신성처럼, 아니 심연처럼, 아니 구두처럼, 아니 악어처럼, 나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나는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어디로? 나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나의 의식은 지워져가는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더듬고 있고, 동시에 필사적으로 망각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나는 것은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는 것, 지금처럼, 누군가, 그런 것 같다, 나는 가방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다, 무언가 희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문득, 아니, 예상대로, 예상 밖으로, 아니 필연적으로, 아니 환영처럼, 아니 악몽처럼, 정류장, 마을버스, 이것은 무엇인가? 섬광이 터진다, 기억의 섬광, 그런 것 같다, 도로 위의 태양, 빗방울, 허공에 들려오는 삶의 웃음소리…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비가 내리는군요,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누군가, 섬광 속에서, 그러나 나는 예전에도 이 섬광을 여러 번 보았지, 그런 것 같다, 또다시 섬광이 터지고, 푸른 길이 창백해지고, 나는 본다, 가로수, 여름, 행인들, 차들의 경적소리, 섬광 속에서 나를 흘깃 돌아보며 버스에 오르는 한 사내를 본다, 망각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런 것 같다, 나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치켜든다, 아니 손을 치켜드는 시늉을 한다, 나는 연기한다, 나의 고통, 나의 삶, 나는 정류장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아니 앉는 시늉을 한다, 정류장 차양 끝에 망각의 물방울이 맺혀 있다, 물방울을 본다, 보는 시늉을 한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물방울이 고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이는 척한다, 누군가 낄낄거리며 나의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런 것 같다, 나는 본다, 보는 시늉을 한다, 물방울 속에서, 망각의 섬광 속에서, 검은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걸어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 서대경
내 할머니의 영혼은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 내가 혼자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있노라면 그것은 쥐가 돌아다닐 때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사실 할머니의 영혼은 쥐를 닮긴 했다. 사람들은 왠지 영혼이라 하면 밝거나 투명한 어떤 빛의 덩어리 같은 걸 떠홀리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영혼은 검고 앙상하고 털이 나 있다. 피터 아저씨는 그건 그냥 취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할머니가 누운 침대 밑으로 그것이 나오는 걸 나는 보았다. 그것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쥐가 아니다. 더구나 할머니가 숨을 거둘 때, 할머니의 눈동자가 천천히 뒤로, 얼굴의 내부로, 돌아갈 때, 나는 할머니의 죽음이 일으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언가가 뒷걸음치는 소리, 무언가 하얀... 그것은 할머니의 내부에서 섬광처럼 하얗게 빛나다가 곧 어두워졌고, 그것은 곧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나는 듣고 있었다. 하지만 피터 아저씨는 말없이 시트를 끌어올려 할머니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창밖으로 서커스 공연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온다. 골목을 달려 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는 탁자 위에 놓인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바라본다. 피터 아저씨는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피터 아저씨는 가끔씩 날 때리지만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아저씨는 술에 취해 하얗게 분칠한 내 얼굴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북소리가 멀어져간다. 문밖 계단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나는 문을 열어본다. 계단은 어둠에 잠겨 있다. 어둠의 가장자리가 희게 빛난다. 그는 어제 저녁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가파른 계단의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피터 아저씨? 하고 불었지만 나는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은 어두워져 가는 백야의 하늘 속에 잠겨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눈은 푸르렀다. 그것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자고 갈 거예요? 하고 물었지만 아니란 걸 알았다. 저녁의 열기가 잘디잔 물방울이 되어 계단 위를 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는 이해했다. 그는 꼽추 광대였지만 그는 아름다웠다. 나는 알았다. 나는 창녀지만, 내가 창녀가 아니란 걸 그가 이해한 것 처럼, 만나는 만나는 만나는 그가 내게 말했다. 내 가슴속에 머리를 파묻은 채. 그는 만나는 만나는 만나는 하고 속삭였다.//
할머니의 영혼은 비밀스러운 고독에 잠겨 홀로 돌아다닌다. 할머니는 나를 보러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방식이란 걸 안다. 나는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어둑어둑해지는 백야의 길거리를 내려다본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와줄까?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왜 이럴까? 오늘따라 내 방은 왜 이리도 끝없이 슬퍼 보일까? 오늘밤에도 그는 광대 모자를 쓰고 눈가에 붉은 불감을 칠한 채 머드 어두운 밤거리의 축축한 열기 속을 걷고 있을 것이다. 커다란 북을 둥둥 울리며, 안나 안나 안나 속으로 속삭이면서, 나도 눈을 감고 만나는 안나 내가 모르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다락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건들이 쓰러지는 소리, 다락방 창문이 깨지는 소리, 깨진 틈으로 백야의 열기가 밀려드는 소리, 할머니의 영혼 이 헐떡이는 소리, 만나는 만나는 만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

소박한 삶 / 서대경
아름다운 그녀는 자전거를 탄다 바람이 불면 셔츠 자락이 펄럭인다 그녀는 텅 빈 도로를 달린다 가끔 소방차도 달린 다 선명하게 붉은 사이렌이 그녀의 자전거를 스친다 아지랑이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합쳐 진다 텅 빈 도로 끝에서 서정적인 화재가 발생했다 서정적인 사건들이 신문에 났다 햇빛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은 투명하고 작고 고요했다 솜털이 나 있고 매끄러웠으며 얼음처럼 차가웠다 소방관이 말했다 아름다운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일터로 간다 목욕탕 굴뚝에서 사는 사내가 그녀에게 인사한다 그녀가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올려다본다 사내에게 말한다 화재가 발생했어요! 페달을 밟는 발이 빛난다 하얀 치마 속 종아리가 투명하게 빛난다 사내는 멀어져 가는 자전거에 대고 소리친다 투명하고 작고 고요한 불이에요! 사내는 소리친다,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소리친다 얼음처럼 차가운 불이래요!//

여우계단 / 서대경
꿈에서 밝은 허공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잿빛의 높은 담벽들이 골목 양편으로 끝없이 뻗어나갑니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검은 쥐들이 일렬로 벽 위를 기어갑니다 나는 담벽에 매달려 저편에 서 있는 못 보던 공장들과 못 보던 아버지들을 봅니다 공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버지는 목장갑을 벗고 철근 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봅니다 공장 앞으로 흑백의 강이 흘러갑니다 아버지 곁에 누워 있던 개들이 일제히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짖어댑니다.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릴 적 동화에서 보았던 작은 여우가 보였습니다 여우는 계단 한쪽 구석에서 빙빙 맴을 돕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서 여우는 은은히 빛납니다 속삭임이 퍼지고 여우의 율동이 밝은 빛 의 여울을 이룹니다 어떻게 된 셈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저 은빛의 여울이 다음 꿈으로 가는 입구라는 걸 잘 압니다 꿈 밖에서는 아까부터 천장의 밧줄에 머리를 매단 채 어머니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나는 여울 속을 내려다봅 니다 아까 보았던 밝은 허공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버지들이 저편에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들이 성기를 빳빳이 세운 아버지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옵니다 여우가 입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당깁니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아버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여울 속으로 몸을 날립니다

아버지들 / 서대경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해 할 말이 많지 않다 다만 내가 그 아이의 꿈의 입구를 봉했을 때 흘겨보던 잿빛 눈에 대해 기억한다 술에 취한 어느 날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이후로 눈가에 희뿌연 안개가 사라지지 않는다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해대도 아이는 아무 말이 없다 모든 게 이상해졌다 이 모든 게 아이놈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꿈들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또다른 꿈속에 있었다 알 수 없는 속삭임이 얼굴에 덕지덕지 달라 붙었다 어느 날부턴가 마누라는 천장 위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마누라는 삼 년 전에 죽었는데 아직도 천장 위를 걸어 다닌다 자식놈은 잠만 잔다 제기랄, 언제부터 이놈의 개들이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을까 이렇게는 살 수 없다 나는 열심 히 일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나는 아이놈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새로운 꿈의 입구가 열리고 아이는 잿빛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입구를 닫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 나간다 오늘도 공장에 나갔지만 공장 문은 닫혀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들이 철근 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이는 꿈의 미로를 닫고 그러면 우리는 일한다.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일한다 빌어먹을 꿈의 입구가 다시 열릴 때까지//

세번째 아이 / 서대경
아버지, 나는 여우를 따라왔어요 여긴 무척 밝고 추워요 아버지, 왜 자꾸만 내 침대 안으로 들어왔나요 아버지가 아버지들과 함께 내 방문을 부셨을 때 나는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을 달렸어요 아버지, 왜 내 안에는 열세 명의 아버지가 들어 있나요 아버지, 꿈은 내가 꾸는 게 아니잖아요 열세 명의 내가 꾸는 게 아니잖아요 꿈은 아버지가 꾸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다른 아버지들과 어울려 내 바지를 내렸잖아요 아무리 꿈을 꿔도 아버지의 꿈속이었어요 아버지, 제발 어머니의 꿈속에서 나오세요 어머닌 삼 년 전에 죽었잖아요 아버지는 집에도 안 들어왔잖아요 우린 셋이에요 어제 또 하나의 내가 이곳에 왔어요 밝은 허공을 만나고 왔대요 여우를 따라왔대요 아버진 오늘도 공장에 나가겠죠 아버진 오늘도 또다른 날 쫓고 있겠죠 우린 곧 이곳에 모일 거예요 우린 곧, 열셋이 될 거예요.//

밝은 방 / 서대경
나는 내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여러 개의 꿈에서 하나의 꿈으로 건너왔다 나는 천장 위를 거닌 다 바람이 킬킬거리며 창문을 흔들어댄다 천장 위로 달빛의 음영이 일렁인다 나는 이곳의 리듬이 마음에 든다 이곳은 밝고 춥다 나는 이렇게 완벽한 고요가 존재하는지 몰랐다 이곳에선 허공의 숨소리가 들린다 알맞게 어둡고 서늘한 속삭임이 내 열린 가슴속을 드나든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오는 이 존재의 굉음은 무엇일까 저 아이는 누굴까 누가 저 아이를 이 방 안에 눕혔을까 여기서는 모든 꿈이 잘 보인다 꿈의 입구를 여닫는 소리 아이가 뒤척이는 소리 몸을 구부리고 달빛에 잠기는 소리 침대 안의 미로들이 우글거리는 소리 이 비명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아이는 누구를 기다리다 이렇게 잠이 든 걸까 그러나 나는...... 아이야, 삼 년 전에 네 아버지는 죽었단다...... 그러나 나는 ...... 그러나 나는...... 왜 아이는 깨어나지 않을까 왜 아이는 아까부터 가늘게 눈을 뜨고 있을까//

벽장 속의 연서 / 서대경
요 며칠 인적 드문 날들 계속되었습니다 골목은 고요하고 한없이 맑고 찬 갈림길이 이리저리 파여 있습니다 나는 오랫 동안 걷다가 지치면 문득 서서 당신의 침묵을 듣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남긴 유일한 흔적입니다 병을 앓고 난 뒤의 무한한 시야, 이마가 마르는 소리를 들으며 깊이 깊이 파인 두 눈을 들면 허공으로 한줄기 비행운(飛行)이 그어져갑니다 사방으로 바람이 걸어옵니다 아아 당신, 길들이 저마다 아득한 얼음 냄새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사유 17호 / 서대경
사유 17호는 언제나 동네 17번 마을버스 정류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비오는 여름날 정류장에서였다. 사유 17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때 절은 추리닝 차림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옆구리에 끼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가 말했다. 그곳엔 그와 나 둘 뿐이었으므로 나는 네, 안녕하십니까 하고 대답해주었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가 말했다. 그렇군요 내가 말했다.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장마기간이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퇴근 후 정류장에 내렸을 때도 사유 17호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차양 끝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곳엔 더 이상 물방울이 맺혀있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가 말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나는 그를 지나 구멍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가게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자네도 잘 있었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 친구로 보이는 아이가 사유 17호의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음 날도 비가 왔다. 사유 17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 니까, 선생님 네, 안녕하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렇군요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말없이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차양을 올려다보는 그의 치떠진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왜 그를 사유 17호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지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사유 17호는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잠시 떠돌다 곧 잠잠해졌다. 나는 그가 앉아있던 붉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보았다. 차양 끝을 올려다보았다. 고드름이 맺혀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비가 내리는군요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에 몸을 기울이는 순간 버스 차창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사유 17호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넥타이를 했고 머리를 멋지게 빗어 올렸으며 한쪽 옆구리에 서류봉투를 끼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그의 무표정한 시선 위로 빠르게 스쳐가는 경멸어린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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