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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땅을 내려다보다 / 신유한

by 부흐고비 2022. 6. 15.
번역문


목멱산에 올랐다. 산의 높이는 수천 길이요, 서북쪽으로는 백악산(白岳山), 삼각산(三角山), 인왕산(仁王山)의 여러 산들이 바라보이는데 높은 산들이 모여서 하늘에 서려 서로 읍하는 듯 서로 껴안는 듯하다. 동쪽으로는 백운산(白雲山)의 뻗어 나온 산기슭이 구불구불 내려가 남산과 합하였다. 산등성이를 빙 둘러서 성가퀴와 망루가 있어서 종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들린다.

이 성안의 지세는, 가로 10여 리, 세로는 그 3분의 2가 된다. 이곳에 종묘사직, 궁궐, 곳집, 창고, 성균관, 정원이 다 들어서 있다. 그 외에 고관대작과 온갖 벼슬아치들의 관아이고 그 나머지는 수만 채의 가옥, 수백채의 가게, 수십 개의 저자거리이니, 이 모든 것이 또렷하게 손바닥 안에 있는 듯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옛 주나라 수도 풍호(豊鎬)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서에서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에는 사람이 하도 많아 사람마다 땀을 훔치면 비를 이룰 정도였다 하고, 초나라 수도 언영(鄢郢)에 엄청난 크기의 운몽호(雲夢湖)가 있다고 하는데, 이들 수도에 비하면 한양은 훨씬 못 미칠 것이다. 그럼에도 이 한양 땅에는 인재들이 넘쳐난다. 덕업으로는 이윤(伊尹)·부열(傅說), 지혜와 능력으로는 관자(管子)·제갈량(諸葛亮), 문장으로는 사마상여(司馬相如)·사마천(司馬遷), 고을 수령으로는 공수(龔遂)·황패(黃霸)·탁무(卓茂)·노공(魯恭)과 같은 이들이 모두 한양 땅에서 나오지, 머나먼 시골 촌구석 집안에서 취하는 경우는 백에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한양 땅 안에서 취한다 하더라도, 갑은 옳다 을은 그르다하며 어느 한편이 이기고 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전에 갑의 말을 옳다 여기면 갑의 사람을 귀하게 쓰지 을을 쓰는 경우는 백에 하나도 없다. 이후 을의 말을 옳다 여기면 을의 사람을 귀하게 쓰는 것을 마찬가지로 한다. 이 때문에 이 땅의 인재들을 열에 둘, 셋도 쓰지 못하는 근심이 늘 있게 된다.

(중략) 아아, 이것이 어찌 땅 신령이 인재를 기를 적에 안쪽은 풍성하게 하고 바깥쪽은 인색하여서 그런 것이겠는가. 주나라 관제에서 대대로 녹봉을 받는 제도가 만들어진 지 오래되자 부형이 가르치고, 자제가 본받아 단련을 따로 하지 않아도, 익숙히 보고 들어서 집집마다 보불(黼黻)의 높은 벼슬감이고 경륜(經綸)의 재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구하고 비루한 곳에 거처하는 선비는 밭두둑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보아도 그 재주가 미관말직 하나도 얻을 수 없는지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천 리 먼 길을 오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아무런 뜻을 얻지 못하고 물러날 적에는 또 황황하게 길을 떠나니 아, 슬프다.

원문


登木覔山, 山高數千仞, 西北望白岳三角仁王諸山, 崔萃穹盤, 若拱若抱. 東得白雲枝麓, 宛延而下, 與南山合. 環山之脊而爲雉堞譙樓, 鍾皷之音相聞. 是其城中地勢, 衡可十餘里, 縱三之二. 於焉而立廟社宮闕倉廩府庫璧雍苑囿. 外爲三公六卿百官衙寮. 其餘爲萬人屋百貨肆十街市, 歷歷在指掌間. 卽亡論帝京豊鎬, 其視史傳所稱臨淄雨汗鄢郢雲夢, 吾惧其辟三舍矣, 然是土也, 材博而饒, 德業而伊傅, 智能而管葛, 文章而兩司馬, 典郡而龔黃卓魯, 咸是之自出, 而得於遐陬豊蔀之家者, 百無一焉. 又以取於斯者, 設甲可乙否齊贏楚輸之局, 前之是甲言貴甲人, 百不用一乙焉. 後之是乙言貴乙人亦如之. 所以是土之材, 常患於什不用二三. (중략) 於乎, 此豈地靈之毓材, 豊於內而嗇於外哉. 抑周官世祿之制, 作成已久, 父兄之敎子弟之律, 不假鍛鍊, 習熟見聞, 家黼黻而戶經綸故也, 而區區側陋之士, 起自耒耟, 材不能效一官, 而越千里重繭而至, 進墨墨不得意, 退又皇皇如也, 悲夫.

- 신유한(申維翰, 1681~1752), 『청천집(靑泉集)』 권4 「목멱산기(木覔山記)」

조선후기 문인 신유한의 시;서(書);서(序),기 등을 수록한 시문집. 6권 3책. 목판본. 간행연대는 미상이다.

 

해설


남산 타워에 올라가면 서울을 빼곡하게 메운 아파트와 빌딩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학 입학을 위해 상경한 지 얼마 안 되어, 남산에서 서울 전경을 바라보며 저 많은 건물 중에 왜 내가 머물 곳이 없을까 하는 한탄을 했었는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그런 대사가 나오는 걸 보면 그곳에 올라가면 흔히들 하게 되는 생각인 것 같다. 18세기 신유한도 비슷한 시선으로 목멱산, 지금의 남산 아래를 내려 보았다. 물론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당시 한양은 큰 도시로 성장하던 무렵이라 도성 안은 빼곡하게 궁궐과 관아, 민가, 가게들로 채워져 있다. 김수철이 그렸다고 전하는 <한양도성도>와 신유한의 시선에 포착된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유한은 시골 서얼이라는 도성 밖 출신이었기에 도성 안을 조금 더 냉철하게 직시할 수 있었다. 그가 전한 한양의 인상은 빽빽하고도 ‘좁은’ 곳이다. 한양 땅은 역대 중국 수도와 비교할 수가 없이 좁은 곳인데 이곳에서 덕업, 지혜, 문장이 훌륭한 자, 어진 수령들이 모두 배출된다. 자신과 같은 먼 시골 출신은 인재 안에 낄 수가 없다. 애초에 타고난 재능이 다를 리가 있겠는가. 문화와 교육이 경화에 집중되어 있는 탓에 한양 선비들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성장하여 원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한편 지방 선비는 아무리 애쓴들 도저히 장벽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경화와 시골은 그 차이가 이미 현격하여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더구나 당시는 선비들이 갑과 을로 나뉘어 치열하게 당쟁을 일삼던 때였다. 특정 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 그쪽 인재만을 수용하였다. 좁디좁은 땅에 장벽을 겹겹이 친 곳이 바로 한양이다.

신유한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오늘, 그가 느꼈던겹겹 장벽이 과연 사라졌을까. 지역과 가문이라는 장벽은 아닐지라도 오늘날 또 다른 장벽이 곳곳에 놓여있다. 청년들은 원하는 일과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높은 진입 장벽을 호소한다. 여성들도 여전히 뚫지 못하는 견고한 유리천장을 머리에 이고 있다. 혹자는 구조적인 문제보다는 개인의 능력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장벽 안의 삶에 익숙하여 장벽 자체를 망각한 것은 아닌지, 장벽 밖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금 더 귀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 : 하지영(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겸재 정선의 목멱조돈(木覔朝暾), 비단에 채색한 23.0×29.4㎝ 간송미술관 소장.

* 목멱산(木覔山)은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이다. 남쪽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 ‘마뫼’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마뫼’는 마산(馬山) 또는 마시산(馬尸山)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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