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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춧대 / 김사랑

부흐고비 2022. 6. 16. 09:16

뽀득뽀득 눈을 밟고 온 택배 상자를 열었다. 마른 대추 한 봉지와 함께 잘게 잘린 나뭇가지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가을걷이를 끝낸 마른 고춧대다. 언니가 보낸 선물이다. 쓸모없는 고춧대를 왜 보냈을까. 궁금증 해결은 잠시 미뤄두고 무엇보다 고춧대를 보니 언니 오빠들과 다정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우리 집은 꼭 휴일에 고추를 심었다. 호락질하시던 부모님의 일손을 돕는 날이면 한가하던 들판이 모처럼 분주해졌다. 도랑물 퍼 담는 소리, 종달새처럼 종종대는 발자국 소리, 숲속 바람까지 슬그머니 우리 곁으로 내려왔다. 밭이랑은 반짝이는 땀방울로 푸르게 메워졌고, 시들시들 눕던 고추 모종도 단물 한 모금에 화답하듯 화들짝 일어섰다. 고추를 다 심고 나면 오빠가 대장이 되어 작은 둠벙으로 먼저 들어갔다. 줄줄이 뒤따라 들어가 찰방거리며 물고기와 우렁이를 잡았다. 너겁에서 한가롭던 새뱅이도 얼떨결에 족대에 끌려 나와 팔딱팔딱 뛰었다. 뗏장으로 만든 화덕 위로 양은 솥 걸고 풋마늘 손으로 숭숭 뜯어 넣고 밝은 웃음까지 곁들여 넣어 매운탕을 푸지게 끓여 한 양재기씩 먹고 농막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잠시 오수에 빠진 우리는 사자처럼 포효하는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합창처럼 터진 웃음소리가 온 들녘에 핀 들꽃 향기처럼 퍼져나갔다.

하우스에서 뽑아와 옮겨 심은 고추 모종은 들녘 바람에 무럭무럭 잘도 자랐다. 그런데 어머니는 작은 고추 모종 두 포기를 장독대 앞에 따로 심었다. 그 고추는 월남 고추라 했다. 넓은 밭에 한가득 심어둔 고추보다 울안에 심어놓은 고추를 애지중지하셨다. 월남 고추는 하늘을 향해 마디게도 자랐다. 빨간 나마리처럼 귀엽고 신기하여 만져보려 하면 평소와 달리 불호령이 떨어졌다. 우리보다 더 아끼는듯하며 신줏단지처럼 모셨다. 월남파병 간 큰아들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에서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또한 울 안에 심었던 월남 고추는 무서리가 내리기 전에 헌 양재기 밑에 구멍을 뚫어 정성껏 옮겨 심었다. 안방 윗목에서 콩나물시루랑 함께 겨울을 났다. 그때 알았다. 고추나무도 겨울에 수면을 한다는 것을.

물기 마른 고춧대가 꾹꾹 눌러놓았던 추억을 불러와 마음이 따뜻해진다. 유달리 나를 아껴줬던 언니의 사랑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언니는 평소 주말농장에 채소를 심기보다는 꽃모종을 가득 심는다. 내가 지난해부터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큰 병원을 자주 들락거린다. 언니는 직접 가꾼 꽃을 말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꽃차를 만들어 보내 왔다. 그리고 고추 한 포기 심지 않았던 언니가 이번에는 엄동설한에 고춧대를 보내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염병이 난무하는 시절에 고춧대가 covid19에 특효약이란 소리를 들었는가 보다. covid19 예방 차원에서 고춧대를 구해다가 정성껏 보낸 것이다. 왈칵 치솟는 뜨거움에 코로나는 얼씬도 못 할 것 같다. 여름내 농약을 뒤집어쓴 고춧대가 코로나에 무슨 큰 효험이 있을까. 해충과 탄저병으로 인하여 농약을 자주 살포하여 환경오염으로 불쏘시개조차 하지 않는다는 고춧대다. 가슴 저미던 이별이 생각났는가 보다. 예전 같지 않은 내 몸처럼 이제 언니의 다홍치마도 색이 바래가고 있는데 자기 몸은 돌보지 않고 동생 걱정이 앞섰을 마음이 고춧대에 배어있다. 그런 언니가 보내준 고춧대에 관해서 부득부득 묻지 않았다. 그저 아끼는 마음을 짚으며, 고춧대를 여러 번 씻어서 식초 물에 담갔다. 그리고 프라이팬에 달달 볶다가 대추 세 알과 천일염을 주전자에 넣고 팔팔 끓이다 불을 줄이고 뭉근하게 다렸다. 몇 시간 후 달인 물을 맛보았다. ‘어라? 둥글레 차 맛이네.’ 농약 투성이 고춧대가 명약일 리가 없지만 온전하게 언니의 온심(温心)만 생각했다.

어느 한의사의 유튜브 방송에서 고춧대가 covid19에 효험이 있다는 방송을 들었나 보다. 물론 가짜뉴스다. 전염병을 앞세워 유튜브 조회 수를 늘리고자 하는 상상 초월한 발상이지만, 잠시 쓸모없던 고춧대가 명약처럼 둔갑하였던 해프닝이다.

고춧대가 차곡차곡 담긴 상자를 다시 열어본다. 언니의 마음을 한번은 달여 먹었으나 이제는 버려야 한다. 온종일 류마티스로 밤을 보내기 어려운 그 손에 물집이 생길 만큼 정성이 배여 있었던 고춧대. 아쉽지만 내용물을 모두 꺼내어 종량제 봉투에 쓸어 담는다. 언니의 정성과 버려야만 하는 고춧대 사이의 갈등까지 담아 쓰레기 봉지의 배가 불룩하다. 빈 상자 위, 우리 자매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있다. 고춧대는 버려졌지만 우리의 마음은 서로에게 녹아들고 추억 한 켠, 들녘 바람 속에 촘촘히 어우러진다. 이미 저녁별이 되어버린 언니 오빠들이 몹시도 그리운 날이다.

* 둠벙~웅덩이
* 새뱅이~새우
* 나마리~잠자리 충청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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