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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복수초 / 임동옥

부흐고비 2022. 6. 17. 07:27

무등산 골짜기가 기지개를 켰다. 박새 울음소리 청아하다, 화답하듯 계곡 물소리는 청량하다. 봄을 알리는 소리에 잠을 깬 단아한 ‘얼음새꽃’이 분주하다. 눈밭 서릿발 사이를 뚫고 피어나는 꽃, 바로 복수초다.

복을 부르며 장수를 기원하는 복수초(福壽草). 꽃말은 “영원한 행복”이다. 서양에서는 애틋한 전설 때문인지 꽃말이 “슬픈 추억”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미소년 아도니스가 산짐승에게 물려 죽어가면서 흘린 피가 진홍빛 꽃, 복수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땅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죽어가는 아도니스를 살렸다. 그 후 제우스는 아도니스에게 그가 평소 사랑하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6개월은 지상에서 살게 하고 남은 반년은 페르세포네와 지하에서 생활하라고 명령하였다. 지금도 제우스의 말을 실천하듯 복수초는 2월 말에 얼음 사이를 뚫고 나와서 복수초 꽃을 피우고 지상에서 6개월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반년은 지하에서 페르세포네와 살고 반년은 아프로디테와 지상에서 살게 되었으니 슬픈 추억을 승화한 영원한 행복 아니겠는가.

유럽복수초(Adonis vernalis L.) 꽃은 진홍빛이고 동양의 복수초(Adonis amurensis Regel & Radde,)는 진노랑 꽃이다. 샛노란 꽃잎을 받치는 꽃받침에 핏자국이 산화된 줄무늬가 아직도 남아있는 느낌이다. 줄기에는 오직 한 개의 큰 꽃봉오리를 단정하고 다소곳하게 올린다. 20~30개의 꽃잎이 나선상으로 감싸고 있다가 햇빛이 좋은 날 꽃잎 하나하나를 엮어서 금잔을 만든다. 그 안에 동심원상으로 130여 개의 수술을 펼쳐 놓고 한가운데에 작은 보석 알갱이를 모아놓은 거 같은 연둣빛 암술로 장식을 한다. 며칠 지나면 금잔의 꽃잎이 더 펴져서 금쟁반이 된다. 경기도 광릉의 뒤로 젖혀진 복수초나 제주도 절물오름의 금쟁반 같은 복수초도 아름답지만 무등산 복수초가 으뜸이다. 옥새(玉璽) 모양의 새인봉 자락에 핀 복수초는 곤룡포 용무늬의 황금색으로 피어 임금님 옥새를 보호하는 느낌이다. 그러니 새인봉은 산행하는 이들의 소원 하나쯤 들어주고 황금빛 트로피를 선물하는 산이다. 보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꽃, 보는 순간 마음의 빗장을 스르르 풀리게 하는 꽃, 심금을 울리는 마력의 꽃.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하는 꽃,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추어야 오래도록 완상할 수 있는 꽃이 복수초다.

복수초는 지족(知足)의 꽃이다. 겨울철 동안거를 마친 듯 해맑은 모습이다. 낙엽 밑에서 옹알대다가 산새 소리에 어깨춤을 추면서 스타카토로 꽃대를 올리고, 한 줄기 바람에도 파르르 꽃이 떨린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한줄기 봄볕에도 만족하고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서릿발 사이로 탱탱한 꽃망울 부풀려 봄 마중 나와서 노닐다가, 녹음이 지쳐 푸르른 날에 씨앗을 날리고 숲속으로 사라지는 풀이다. 사라짐은 죽음이 아니다. 땅속에서 씨앗과 뿌리는 내년을 기약하며 기다릴 줄 아는 제 분수를 아는 풀이다. 이른 봄 산비탈에 노란 꽃물을 들이고 늦여름에 지상부가 고사 되어 지하에서 생활한다. 작고 앙증맞은 복수초는 지상이든 지하이든 세상을 탓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큰 나무 숲속에서 은거하는 다년초이며 이른 봄 한줄기 햇빛을 즐길 줄 아는 꽃이다.

복수초는 이른 봄 생태문화의 요소이고 메시지이며 힘이다. 이 샛노란 꽃을 바라보노라면 동토 같았던 심장에도 청량한 봄기운으로 출렁인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마치 김구의 “내가 원하는 나라”를 찾은 느낌이다. 선생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경제력은 먹고살 만하면 되고 힘은 외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정도면 된다고 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그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시린 바람 속에 고고하게 피어난 복수초는 지족, 분수, 자족, 슬픈 추억, 영원한 행복을 상기시켜 시심을 자극하는 문화 요소다. 복수초는 세상을 힘으로 지배하는 게 아니다. 여리고 여리지만 이른 봄날 얼음장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꽃의 나라 만들고, 장마철이나 폭설에도 산사태를 막아주는 복수초는 산비탈 비오톱이고 마음을 힐링시키는 힘이다.

겨울 끝자락에 봄의 신령을 만나 눈과 마음의 호사를 누렸다. 푸른 웃음을 머금고 묵은 마음의 때를 벗어던졌다. 황금 잔에 담긴 봄날의 생기를 마시니 내 마음에도 새싹 돋고 시심이 번지는 날이었다. 이제 정년이 코앞이다. 정년 후를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복수초의 생을 닮고 싶다. 복수초처럼 꽃 피웠던 화려하게 살았던 날을 뒤로하고, 정년 후 명함 없는 생활일지라도 유유자적하며 생태문화의 나라를 만드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는 생활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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