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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숯 2 / 황진숙

부흐고비 2022. 6. 24. 07:30

운명의 짐을 졌다. 시커멓게 과거를 지우고 뉘 집에 유배되었다. 나무에서 숯으로 바뀐 신세를 항변할 새도 없이 잿불에 파묻힌다. 가문을 지키며 불씨를 잇는 계율은 지엄하다.

그을음과 연기로 미적대지 않는다. 불티를 날리며 요란을 떨지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뭉근하게 타오른다. 살풀이하듯 발갛게 일렁인다. 밤새 가물거리며 화로의 불씨를 품느라 어둠살이 밝아오는 줄도 모른다.

몸 안의 길을 따라 저장해 놓은 한 톨의 비, 한 가닥의 바람, 한 점의 햇살마저 날려 버렸으니 한가로이 풍화에 들면 그만이다. 텅 비어 구멍투성이인 몸뚱이로 무얼 어쩌랴. 난데없이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묵은내를 들이마신다. 장독에 들어앉아 불순물을 흡착하느라 뒤척일 수 없다. 잡귀를 물리치는 문지기로 내몰려 문간의 금줄에 내걸린다. 수도승처럼 마냥 자리를 지키느라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서히 박제가 되어 간다.

꿈인 듯 생시인 듯 지난 시절이 스친다. 도토리로 굴러떨어져 싹을 틔운 곳에서 수십 년을 붙박이로 살았다. 사는 게 다 그런 양 몸을 내주는 데에는 이골이 났다. 껍질을 뚫고 들어오는 사슴벌레에게 속살을 파먹히고, 나뭇가지에 뿌리를 내리고 기생하는 겨우살이에게 양분을 빨렸다. 알을 낳은 혹벌에게 벌레혹의 거처를 내주고, 천재지변을 피해 여문 열매는 땅으로 떨어뜨려 다람쥐와 청설모의 배를 불렸다. 몸통이 굵어지고 물이 오르자 뭇사람들은 굴피집의 지붕을 인다며 껍질을 벗겨가 버렸다. 알몸인 채로 계절을 나야 하니 참으로 고달픈 숨을 이어가는 나날이었다.

사는 게 무망하던 어느 날, 숯쟁이를 따라 출가를 결심했다. 세속의 연을 뒤로하고 떠나리. 갈 길을 정하고 나니 불어오는 꽃바람이 향긋하기만 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려는 찰나 옆구리에 톱날이 와 닿았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천지가 핑그르르 돌았다. 짙푸른 하늘이 곤두박질치고 조각구름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둠침침한 가마 속이었다.

짓눌리고서야 새로이 피어나는 꽃 누르미처럼 불길에 눌려 거듭나리라 생각했다. 영원한 숨을 얻어 고이 모셔지겠지. 복닥거린 시간이 빠져나가고 온전히 고요에 들 것이다. 살아온 날을 추억하며 세상사에서 비껴나 있어도 좋겠다.

불구멍에서 연기가 치솟았던가. 원통형으로 재단된 몸피에 불길이 닿자마자 까무룩 숨이 멎었다. 깨어나 보니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단단했던 육신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굴곡진 껍질은 간데없고 물씬 풍기던 체취도 사라졌다. 뼛속을 달구는 화염 속에서 속속들이 탄화되어 새까만 몸빛으로 변해 있었다. 부풀었던 단꿈이 동강난 몸 위로 널브러졌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가며 다음 생을 별렀건만, 고작해야 우물 바닥과 땅속에 매몰되거나 다른 물성의 습과 악취를 머금어야 한다. 질화로에서 가뭇없이 사그라질 운명이 허망하기만 하다. 털어버리지 못한 속내로 궤적을 남기지만 숯검정이란 낙인이 찍힌다. 되돌아갈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시간을 안고 엎치락뒤치락 부대낀다.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다. 환하고 해사한 삶은 고사하고 한곳에 박힌 노박이로, 온몸을 사르는 불덩이로, 새까만 영혼의 몸덩이로 질긴 생애를 건넌다. 한뎃잠으로 지새우고 불구덩이를 통과하여 구멍마다 이물질을 빨아들이는 고행 속에서도 적멸에 들지 못한 속은 하얗게 삭아 내린다. 이리저리 몸 바꿔 봐도 메마른 속내는 채워지지 않는다. 한 치도 이탈할 수 없는 궤도를 따라 맴돌 뿐이다.

나를 낮추고 버려야 건져낼 수 있는 숯. 어둠에 잠겨 세상에 닿지 못하는 소리들이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뼈대만 남은 육신이 부동의 자세를 허물며 못다 한 소리를 토해낸다. 지난 삶의 회한을 내려놓고 붉게 타오른다. 목숨의 흔적을 지우며 비로소 홀가분해진다. 가져갈 것도 없이 남겨놓을 것도 없는, 또 다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귀의의 시간이다.

저 멀리 별이 뜬다. 밤하늘의 어둠을 깨우는 별처럼 온몸으로 불살라 뭇사람들의 마음을 지피리라. 깃드는 고요 속에서 오래도록 사위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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