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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말은 참새가 아니다 / 지홍석

부흐고비 2022. 6. 27. 07:45

그날은 강진과 영암으로 등산을 떠났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아름답게 빛나야 할 산하가 온통 베일에 가려지던 그런 날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람이 가끔 불어와 한 뼘의 조망이 열렸다는 것이다. 파란 하늘은 수줍은 듯 운무 뒤로 숨어버렸고, 간간이 하얀 바위 능선들이 속살을 드러내곤 하였다.

출발 후 4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호랑이 울음소리를 녹음해 확성기로 틀면 산짐승들이 도망간다는 강진의 ‘달마지 마을’이다. 실제처럼 보이는 크고 작은 여러 마리 호랑이 조형물이 있었다. 월각산과 주지봉, 문필봉을 연결하는 종주 팀을 내려놓고, 짧은 등산과 유적탐방을 목적으로 하는 나머지 참석자들을 인솔해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두 번째 도착한 곳이 영암군 구림리 성기동이다. 붓의 끝처럼 보이는 뾰쪽한 주지봉과 현묘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바위 봉우리들이 군무를 추는 문필봉 자락이었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에서는 불꽃처럼 보이는 화산(火山)과 뾰족한 봉우리를 첨봉(尖峰)이라 불렀다. 학자의 의미인 문(文)으로 풀면 부드러운 붓(筆)이 되고, 무장(武將)을 상징하는 무(武)로 풀면 날카로운 칼(劍)이 된다. 그래서일까. 불세출의 인물 왕인박사와 도선국사, 고려의 최지몽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문산재(文山齋)는 마을의 자랑이었다. 이름난 선비와 훌륭한 유학자들을 배출한 학문의 전당으로, 학덕이 높은 석학들을 초빙해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는 인사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600여 년 전 왕인도 이곳에서 수학하고 《천자문》1권과 《논어》10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학문의 촉진제가 되었다. 영대암 아래의 거대한 바위 지대에는 “책굴(冊窟)”이 있다. 어릴 때 왕인이 공부한 장소로 밖에서 보면 커다란 바위처럼 보이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면 육중한 바위들이 지붕 구실을 해 방안처럼 아늑해지는 곳이다.

작은 구릉을 넘자 본격적인 등산이었다. 거대한 나신이라도 가리려는 듯 운해는 사방으로 자욱했고 바람은 점점 더 거세어졌다. 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느끼면서 걸어야만 했던 이유다. 종주에 비하면 산행이 짧다고는 하지만 산을 오르는 것은 똑같다. 그래서 산은 절대로 얕은수를 쓰지 말라며 늘 경고 하듯 가르치는지도 모른다. 운무가 짙어질수록 신비스러움은 더해졌으나 마음속 불안감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여 만에 문필봉이었다. 더할 수 없이 교묘하면서도 절묘한 바위로 형성된 바위 봉이라, 굵은 밧줄을 잡고 매달리듯 올랐다. 맑은 날이면 높은 곳이 선사해주는아찔함에 망설임도 있었겠지만, 몽환적인 안개에 취하다 보니 오히려 더 겁 없이 올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신경은 다른 데 있었다. 몇 미터 앞도 안 보이는 가시거리에 초행의 길이라 하산로를 어느 쪽으로 잡아야 할지 암담해서였다. 인적마저 드문 산이라 등산 초입에 청년 두 명을 만난 게 전부였다.

십여 명의 일행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산 아래로 향했다. 불투명한 조망에 하산이 길어서 일까. 가슴 속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런데 일행들 그 누구도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도 있었겠지만, 괜히 말을 꺼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안한 마음이 전이될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런 내 마음을 폭로라도 하듯 누군가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길이 맞긴 맞나??”

고개를 돌려 보니 모임의 총무였다. 순간 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훅 올라왔다. 산행 경력만 25여 년여, 단 한 번이라도 엉뚱한 곳으로 하산해 일행들을 곤경에 빠뜨린 적이 없었기에 화가 더 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에 그만 화가 나버리고 말았다.

해마다 연말이면 일 년을 결산하는 모임들로 분주해진다. 코로나 사태가 전 세계를 휩쓸었던 작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기쁜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 왔던 한 지인이, 해마다 수여하는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다. 오랜 기간 모임의 총무를 맡았던 분으로, 문필봉 산행을 함께 한 에피소드의 당사자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 축하를 해주어야 했는데도 정작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시상식이 열리던 날, 나는 제주도에 있었다. 결혼식 후 3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2박 3일 이상 여행을 같이한 적이 없는 아내와 처음으로 여행 중이어서다.

행사가 끝나고 나니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다. 그가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그와 나는 여러 명의 지인과 강원도 횡성에서 등산을 하던 중이었다. 그때도 축하한다는 인사를 시원스럽게 해주질 못하고, ‘누군가는 이 소식을 들으면 질투를 하겠네’라고 다소 엉뚱한 소리를 해 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필봉과 첨봉을 오르내렸던 결과물은 아닐 것이다. 그의 남다른 재능과 노력을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 왔기에 문학상 수상이 다소 늦은 감이 없지도 않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축하한다는 말을 글로서라도 전하고 싶은 이유다. 피치 못할 상황으로 미처 표현하지 못한 축하의 꽃바구니와 밥 한 끼는, 화사한 꽃들의 향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 번쯤은 기회가 올 것이라 여겼었다.

러시아에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말이 하나 있다. 『말은 참새가 아니다.』이다. ‘한번 날아간 참새는 언제든 잡을 수 있지만, 한번 해버린 말은 절대 그렇지 못하다.’라는 뜻이다. 별것도 아닌 말에 서운해질 수 있는 나이라 그런지, 그와는 근래에 연락이 잘되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사소하고 작은 오해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대될 수 있어 빨리 푸는 게 좋다. 그렇지만 세상사 모든 것이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칼에 맞은 상처보다, 말에 맞은 상처가 더 아프다”라는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 아프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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