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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윤천 시인

부흐고비 2022. 6. 30. 08:00

정윤천 시인
1960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광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1991년 《실천문학》 여름호에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구석』 등이 있다. 2011 천태산 은행나무문학상, 제1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계간 《시와사람》 편집 주간 역임, 제주도 ‘제주유람선’ 홍보이사.

 



발해로 가는 저녁 / 정윤천
발해에서 온 비보 같았다 내가 아는 발해는 두 나라의 해안을 기억에 간직하고 있었던 미쁘장한 한 여자였다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자전거를 다루어 들을 달리던 선친의 어부인이기도 하였다 학교 가는 길에 들렀다던 일본 상점의 이름들을 사관처럼 늦게까지 외고 있었다 친목계의 회계를 도맡곤 하였으나 사 공주와 육 왕자를 한 몸으로 치러냈으나 재위 기간 태평성대라곤 비치지 않았던 비련의 왕비이기는 하였다// 막내 여동생을 태우고 발해로 가는 저녁은 사방이 아직 어두워 있었다 산협들을 연거푸 벗어나자 곤궁했던 시절의 헐한 수라상 위의 김치죽 같은 새벽빛이 차창 위에 어렸다가 빠르게 엎질러지고는 하였다 변방의 마을들이 숨을 죽여 잠들어 있었다// 병동의 복도는 사라진 나라의 옛 해안처럼 길었고 발해는 거기 눈을 감고 있었다 발목이 물새처럼 가늘어 보여서 마침내 발해였을 것 같았다 사직을 닫은 해동성국 한 구가 아직 닿지 않는 소자들 보다 먼저 영구차에 오르자 가는 발목을 빼낸 자리는 발해의 바다 물결이 와서 메우고 갔다 발해처럼만 같았다//
* 제1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

마루 / 정윤천
그가 이 莊園의 백년손님이었다는 사실을 전 쟁반을 들고 왔던 행랑 처자가 놓고 갔다 품이 깊었던 친구의 심성이 미더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마음이 시켰을지도 모르는 동작으로 신발코를 공손하게 돌려놓아 주었다 백 년 전부터 그래 왔다는 듯 검고 부드러운 윤이 슬어 있었다 마루라고 불리는 그런 일 앞에서였다.//
* 제1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

새들의 무렵 같은 / 정윤천
하루치의 기차를 다 흘려보낸 역장이 역 앞의 슈퍼에서 자일리톨 껌 한 통을// 권총 대신 사들고 석양의 사무실 쪽으로 장고나 튜니티처럼 돌아가는 동안과// 세간의 계급장들을 하나 씩 떼어/ 부리에 물고/ 새들이 해안 쪽으로 날아가는 무렵과/ 날아가서 그것들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 소란과// 이 무소불위의/ 전제주의와// (체재에 맞추어 불을 켜기 시작하는)/ 카페와 술집과 소금구이 맛집들과/ 무얼 마실래?와 딱 한 병씩만 더 하자와 이인 분 추가와// 헤아려 보거나와/ 잊어버리자와.//
* 제1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

 

 

못 / 정윤천
너를 위해서 박혀주는 거라고 갖은 폼을 잡다가 아무것도 걸어주지 않자 저 혼자 녹슬어 버리는 대가리들이 있다//

 

 

어디 숨었냐, 사십마넌 / ​정윤천
시째냐? 악아 어쩌고 사냐. 염치가 참 미제 같다만, 급허게 한 백마넌만 부처야 쓰겄다./ 요런 말 안 헐라고 혔는디, 요새 이빨이 영판 지랄 가터서/ 치과럴 뎅기넌디, 웬수노무 쩐이 애초에 생각보담 불어나 부렀다./ 너도 어룰 거신디, 에미가 헐 수 읎어서 전활 들었다야./ 정히 심에 부치면 어쩔 수 없고...// 선운사 어름 다정민박 집에 밤마실 나갔다가, 스카이라던가 공중파인가로 바둑돌 놓던 체널에 눈 주고 있다가, 울 어매 전화 받았다. 다음 날, 주머니 털고, 지갑 털고,/ 꾀재재한 통장털고, 털어서, 다급한 쩌언 육십마넌만 서둘러 부쳤다.// 나도 울 어매 폼으로 전활 들었다./ 엄니요? 근디, 어째사끄라우. 해필 엊그저께 희재 요놈의 가시낭구헌테 멫 푼 올려불고 났더니만, 오늘 사 말고 딱딱 글거봐도 육십마넌베끼 안 되야부요야./ 메칠만 지둘리먼 한 오십마넌 더 맹글어서 부칠랑께 우선 급헌 대로 땜방허고/ 보십시다 잉. 모처럼 큰맘 묵고 기벌헌 거이 가튼디, 아싸리 못혀줘서 지도 잠/ 거시기허요야. 어찌것소, 헐헐, 요새 사는 거이 다 그런다 말이요.// 떠그럴, 사십마넌 땜에 그날 밤 오래 잠 달아나버렸다.//

물고기 같은 저녁이 온다 / 정윤천
아직 숨이 붙은 시간을 들고 물가로 간다/ 지금부턴 누구나 위험해 진다/ 물고기는 물고기를 잘 꺼내주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어미들이/ 나타날 거라고/ 장세(場勢)가 철썩거리는 일들도 벌어진다// 우산을 든 물고기들이 태어날지도 모른다/ 칼을 들고 설치는 물고기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찔러도 더 이상 찔림이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유리그릇을 파는 집을 지나간다/ 관상이 사라진 관공서 옆을 지나간다/ 국기가 사라진 국가들 속을 지나간다// 미용실 닮은 발음에게로/ 웨이브를 주고 있는/ 물가에 닿은 발목들이 나타난다// 귓밥 같은 숨을 파내보는/ 수족관들의 밑으로// 물고기를 굽는 것 같은/ 저녁이 온다.//

저녁의 연극 / 정윤천
관중석에 앉아 무대 위 관객들의 대사와 몸짓을 보아주는 단역이다 주연 급에선 멀어진 조역 이지만 때를 놓치지 않고 박수를 쳐주어야하는 씬이 있어 주의를 기울여야 하였다 관객의 몸짓들이 격렬해져 간다 인생이 연극이라는 빤한 소리에게로는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더 센 바람이 부는 무대 쪽으로 옮겨 간 관객들도 더러 있었다 엔딩을 알리는 암전 뒤에서 무대의 관객들이 객석의 배우들 쪽으로 배꼽 인사를 올린다 옆에 앉은 출연진들과 긴 박수를 쳐주는 것으로 소극장에서의 공연은 끝이 났다 호프집으로 이어지는 저녁의 공연이 한 편 더 남아 있었다 골목 세트장은 쌀쌀했고 저녁의 연극 쪽으로 들어서는 내 연기 생활 위로도 바람이 불어간다 마타리처럼 길가에 늘어선 불빛의 이파리들 속에서 저녁이라는 조역 하나도 저를 몹시 열연해보는 중이었다.//

목적도 없이 / 정윤천
헌 신을 버리고 새 신을 삽니다 괜찮습니다/ 헌 시를 버리고 새( )를 씁니다 괜찮습니다/ 뒤꿈치가 한 사날 불편할 수 있습니다/ 잠옷 차림의 하숙 주인 여자가 두꺼비집을/ 내려버리고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만약에/ 어느 자리에선가/ 내가 지금보다 고운 옷을 입고/ 높은 말을 주워 삼키는 일이 생기더라도/ 괜찮을지 모릅니다// 저 위에/ (시)자 하나가 빠져 있기도 합니다// 목적도 없이/ 써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서울 / 정윤천
옛날 사람들은 거의 못 갔고 요즘 사람들은 그만저만 간다 향이나 부곡에 사는 이들에겐 북경이나 뉴욕 같기도 한 서울 언젠가 유홍준 선생이 친히 나서 종묘와 사직에 대해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死後를 옹립한 자리여서인지 종묘 사진 속의 종묘는 적막했다 서울 사람들도 잘 안 찾는 곳이라고 선생은 부언했다 종묘 바깥의 서울은 종묘보다 늘 시끄러운 것 같았다 배울 것도 기릴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어도 쬐던 나이롱 목 폴라처럼 얼른 벗고 싶어지던 서울 족히 영 점 일 톤씩은 넘어 뵈는 뚱딴지 남녀는 어울려 식탐을 치르는 먹방 프로 같은 건 그만 닥치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마음 고픈 마을들이 위 아랫께엔 아직 남아있었다 살아서 몇 번이나 더 갈른지 모르겠지만 내기까지 해대며 넣고 또 처넣던 서울에는.//

인생 / 정윤천
祭文으로는 쌀쌀한 강물소리가 끼쳐 들었다 음복 아래 께의 자리에서 누군가는 제 인생의 허튼 표정 하나 마음먹고 불러내려는 심산이었는데 선영 앞의 강짜에 대하여 한 끗 높았던 이의 일성호가가 물소리보다 높아 있었다/ 오던 길에 아버지는 뒤로 처지는 눈치 같았다 돌아다보면 거기 당신의 인생도 헐떡이는 발뒤축에 묻어 있었다 모년 모일은 같아 보였다// 겨드랑이 털이 한참 기승을 부리던 곳으로는 일가의 토방 아래 장독 내음 정한한 기운이 따라붙어 있었다 말하자면 내 인생에게도 비쳐 들 검고 쓴 강물소리인들 같았다.//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정윤천
기타 소리가 생겨난 뒤에야 기타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낙엽이 떨어지고 난 뒤에서야 벤치들은 태어나고 그 벤치에 걸터앉아 기타 소리를 쓰다듬었던 그가 가을 속으로 떨어질 때 당신의 손수건 한 장이 나뭇잎에 덮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마니아 동전 / 정윤천
삼킨 동전 한 개를 사이에 두고 젊은 아버지와 앳된 아들이 마당에서 보낸 하루가 있었다 동전을 기다리던 부자의 일에는 아버지의 꼬장한 성정이 도사려 있었다 오래고 먼 것들이나 지루하고 다정했던 일들을 이해하기에 父性의 개론들은 지금도 당신의 마당처럼 깊어 보일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삼킨 동전을 당신의 생일처럼 궁구하며 있었는데 먼 훗날 루마니아처럼 멀고 까마득했던 동전이 당신의 부지깽이 끝에서가 아닌 꿈속에서 집혀지던 일이 못내 궁금해지곤 하였다// 백수광부의 시절 속으로는 꿈에서 주워 올린 滑石의 날들이 루마니아 동전처럼 찾아 왔던 적도 있었다 깨진 활석 조각을 주웠던 손아귀를 풀면 오래 전에 삼킨 문양의 동전이 되어있고는 하였다// 한낮인데도 둘러앉아서 활석을 다투었던 이들의 판에서처럼 바닥에 깔아 놓은 신문지 위에서 아들의 인분을 헤집던 당신의 막대기 끝에서 같이 끗발을 고대했던 아들의 한 때가 꿈속에서 주워 올린 활석 조각의 일 같기는 하였다// 루마니아도 루마니아 동전도 본 적이 없었는데 주었다가 흘린 한 닢의 낯선 문양에게로 루마니아 동전이라고 여겨 주었던 기억 너머에 해 끝이 노루귀만큼 남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판에서 같이 삼켜진 동전 한 닢은 좀처럼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동전을 줍던 잠에서 깨어나면 손잡이에 땀이 찬 당신의 부지깽이 끝에서는 루마니아나 루마니아의 동전보다 먼데서 피었던 애기똥꽃 한 송이가 바람 속에 사뭇 살랑거려 주기도 하였다.//

눈물이라는 우체통 속으로 / 정윤천
시를 읽다가 자주 눈물을 흘린다는/ 이가 다녀갔다/ 잘 가지 않는 곳에 있는 해안가 같은 데를/ 자주 지내서 그럴 거라 했더니/ 설핏 따라 웃는다/ 해안이라는 말이 이제 와선/ 나도 슬펐다// 하루도 빼지 않고 편지를 쓰고 싶었던/ 등 푸른 시절이 내게도 지나갔다/ 그러던 마을의 초입에/ 느티나무 한 그루는 살고 있었다/ 백년 너머 지탱한 등대 같이나// 오래되었거나 느리고/ 구석진 것들에게로 붙여진 호칭들이/ 좋아져 가던/ 할 말들이 줄어든 날에는/ "먼 북소리"* 같은 제목의/ 책 한 권을 꺼내와/ 귀에 대어 보았다/ 등대이라거나 나이 많은 나무들도 그러는지 해질녘이면 눈시울이 젖어 있던/ 이파리들이 반짝거렸다// 늦도록 시를 헤아리다가/ 나온 날이면/ 느티나무 꼭대기도/ 먼데를 바라보았다/ 별이 되어 떠나간 식구들의 이름/ 같은 걸/ 떠올려 줄 때는 있었다// 방금 쓴 편지 한 통을/ 누군가의 비린 눈물 속으로 부쳐주고 오고 싶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유정(油井) / 정윤천

주유소가 궁금했어/ 끊임없이 드나드는/ 타이어들과 운전수가 궁금했어/ 엘지 삼성처럼 부르는 현대가 아니라/ 사실상의 현대現代가 궁금했어// 끊임없는 문예지와 신인들도 궁금했고/ 끊임없는 스트라이크와 삼진 아웃들이 궁금했어// 끊임없는 의원들과 위원들과/ 다툼들이 궁금했어/ 끊임없는 거래와 끊임없는/ 날파리들이 궁금했어/ 끊임없는 지상복합들이 궁금했고/ 끊임없이/ 끊이지 않는 뉴스들은/ 궁금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유정油井/ 몇 됫박이나 남아 있는지 궁금했어.//

그랬던 거라고 하자 / 정윤천
회색빛 보다 보라색 보다 먼 곳에서 였다고 하자/ 나뭇잎들이 머리 위에서 삽시간에 흔들렸던 거라고 하자/ 오래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고 하자.//

비린내 곁에서였다 / 정윤천
생선가게들이 늘어선 좁고도 긴 골목의/ 끝자락에 자리한/ 낡은 모텔의 구석방 안에서였다/ 두 달 남짓의 장기임대로 두 평 비린 거처의/ 방주(房主)가 되고나자/ 테이블 위의 물 잔에서도/ 옷장 안에 걸어둔 바지 주머니 속에서도/ 비린내는 흘러나왔다// 한 권의 시집에 담아야 할 몇 십 편의 시들을/ 얼음 든 생선 상자 마냥 쌓아 올려볼 요량이었는데/ 수십 편 시들의 입과 귀들이/ 비린내처럼 열리던 일이 신기하였다/ 내게 오는 시간의 온갖 속내들을 닦달하여/ 시를 쓰는 일에 우선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창문을 열면 어디선가/ 예기치 않은 원군이라도 닿은 것처럼/ 비린내는 몰려오곤 하였다 비린내는/ 살아서 겪게 되는 수많은 쓸쓸함과 간절함/ 그것들의 과거와 지금을 오롯이 제 몸에 간직한/ 특별한 기척 같았다/ 마음이 외로워진 날이면/ 비린내는 더더욱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어디선가 습하고 비린 밤안개가 몰려왔던 저녁에// *“마른 몸의 생선에게도/ 물이라는 단어 하나를 부여해 주면/ 물고기가 되어 살아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리라는/ 터무니없는 열망의 시 한 편이/ 헤엄쳐 왔던 날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돌이킬 수 없는 연애시와도 같은/ 기억의 몇 장면들은/ 비린내의 표정이거나 포즈로/ 살아 있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모르는 척 지나쳐 왔었던/ 내 안의 지독한 비린내 곁에서였다.//
*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에 들어 있는 '물고기라고 쓰는 시 한 편 같은' 중에서

내 마음의 블루스 14 ㅡ고무줄을 팔아 고무줄을 사야하는 生 / 정윤천
어린 아들이 ‘뭐 할래’ 아버지에게 오늘도 200원을 달라고 한다. 아들: 200원만 주세요. 아버지: 하루도 쉬지 않고 졸라대는구나. 도대체 너는 200원으로 뭐할래. 아들: 고무줄 사려고요. 아버지: 고무줄은 집 안에도 널렸다. 하다못해 네 엄마의 헌 팬티에서라도 하나 빼서 쓰거라. 고무줄로 뭐 할래. 아들: 새총 만들려고요. 아버지: 쓸데없는 짓 하는구나. 새총 만들어서 뭐할래. 아들: 새 잡으려고요. 아버지: 새총으로 새가 잡힌 다더냐. 새 잡아서 뭐할래. 아들: 새 팔려고요. 아버지: 누가 사 주지도 않겠지만, 새 팔아서 뭐할래. 아들: 고무줄 사려고요.// 청년이 된 아들이 ‘없다’는 아버지에게 2000만원을 해달라고 한다. 아들: 무조건 2000만원만 해주세요. 너무 다급해요. 아버지: 없다. 아들: 그러지 마시고요. 이번이 아마 마지막 부탁일 거예요. 아버지: 없다니까. 아들: 나쁜데 쓸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차 한 대 빼오려고요. 아버지: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아들: 누군가를 태워야만 해요.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아버지: 없구나. 아들: 사랑하는 여자예요. 잘못하면 그녀가 영 영 떠나버릴지도 몰라요. 아버지: 그래도 없다. 아들: 함께 여행을 떠날 생각이예요. 멋진 해안도로를 달려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에 들 거예요. 아버지: 좋겠지만 없구나. 아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아요. 아, 정말 미치겠어요. 아버지: 없어서 나도 미치겠다. 아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름답고 근사한 계획이 있어요. 한번 들어 주실래요. 아버지: 없지만, 들어는 주마. 아들: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서 입맞춤을 하려고 해요. 그리고 그 밤에, (아버지가 꿀꺽 침을 삼킨다.) 그녀가 허락해주면, (아들은 한참이나 뜸을 들인다.) 그녀의 팬티에서 고무줄을 하나 빼오려고요.// 나는 아버지가 더 이상 아들의 고무줄에 대하여 “뭐 할래”나 “없다”고만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너는 그래, 차도 고무줄처럼 빼오는 물건이더냐 정도의 참견으로, 아들의 아름다운 계획에 동참하여 주었으면 싶었다. 어차피 고무줄을 팔아 고무줄을 사야만하는 아들의 生에 대하여, 아버지는 아들이 가혹하거나 치밀한 방식을 간직하고 있음을 인정하여 주기를 바라고 싶었다.//

팔랑, 흰 나비의 집 / 정윤천
뜨락의 회화나무는 백 살이 코앞이다// 우듬지 까칠한 노모와 여든 살 아들이/ 제각각의 세월로 흘러 다니다가/ 운 좋게 한 지붕 아래 어울렸다/ 바라보거나 지나치는 눈결들이 살갑다/ 이즈막 노모의 행실이 가을모기 마냥 성가셔 졌는데/ "엄니요. 벵원이서 그러믄 안된당께라."/ 어미의 표정이 순식간에 뜨악해진다/ "야가 미쳤다냐. 여기가 먼 벵원이라냐"/ 그 소리에 놀라 무안해진 병원이 은근슬쩍 풀이 죽기도 하였는데// 더 이상 따질 일도 내칠 일도 사라진/ 팔랑, 흰 나비의 집// 하필이면 병원처럼 생긴 하얀 복도 끝의 실랑이가/ 삼등기관사가 몰고 가는 기차 칸 마냥 잠시 덜컹거리다 그쳤다.//

 

고욤나무 아래서 보낸 나흘 중에서 2 ㅡ투스카니아의 태양* 아래에서처럼은 / 정윤천
바닷가/ 마을 앞을 지나가다가 였으리// 영화의 한 장면에서 같이는/ 멈추어도 보았으리// 지나가는 행인 1과 2의 등 뒤로/ 페이드 아웃되는/ 모퉁이의 배경만큼으로/ 굳게 닫혀져 있던 양철 문 밖에서 였으리// 한 벌의 옷으로만 평생을 견디는/ 물 표범이거나 북극곰 같이는/ 한 가지 일로만 대문을 열어주는 것 같은/ 느리고 더딘 손길의 집 주인을 마주치게도 되었으리// 젖은 바다 냄새는/ 한 올 옮겨 왔으리// 마당가 키 큰 미루나무 가지에서 였으리// 데면데면 들어서는 異邦의 너의/ 이마 쪽으로/ 잔 이파리 몇 닢인가는 흔들려도 주었으리// 비수기의 방 한 칸 속에는/ 어디선가 마주쳤던 삐뚜름한 자세의/ 선객 하나 미리 와서 담겼을지도/ 통성명 따위를 꺼내들지 않고도 하마/ 적막쯤은 이었으리// 어디선가 허물처럼 벗어 놓았거나/ 치우지 못하고 왔던/ 돌아다보기 싫은 기억들 같이/ 먼지는 와서 쌓여 있기는 하였으리// 집주인의 빗자루를 대신 챙겨들고서라도/ 쓸어 담을 것들은/ 쓸어 담아 버리자고 생각하여 보았으리// 이제와서 다시 멀고도 험 한 것들을 향하여/ 눈빛을 빛내어 본다거나 줄을 이으려 한다거나/ 그러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방 안의/ 먼지들은 고분고분 쓸리어도 주었으리// 창틀 아래로까지는 다가와 딸그락거려 주었던/ 밤물결 소리의 까닭인들/ 아직 헤아리지 못한 채로도 다가와는 주었으리// 푸른 심줄만 같았던 발등거리 앞에다는/ 고욤나무 눈물방울이라도 닮았던 고욤 한 톨은/ 핑그르르 굴러와 주었어도 괜찮았으리// 바닷가 언덕의 집도/ 지붕도/ 처마도/ 투스카니아 골목의 집들처럼 낡아 있었으리// 마을 쪽에서는 처음부터 한 사람도 오지 않았고/ 장미**는 피어있지 않았어도 괜찮았으리// 바닷가 마을 앞을 지나가다가/ 오래된 영화 속 장면같이 멈추어 보았다 치더라도/ 투스카니아의 태양 아래에서처럼만은 아니었으리// 고욤나무 그늘 아래로 지나갔던 하루인들 같아 졌으리.//
* 다이안 레인이라는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흑백 영화. 무대는 이태리의 시골마을.
** 떠돌이 청년의 결혼식 장면. 하객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 <마당의 담장 위에 장미꽃이 만개하였다.> -이혼 여행을 떠났던 주인공은 투스카니아의 골목 속에서 차를 세우고 혼자 내린다. 낡은 집을 판다는 쪽지가 담 벽에 붙어 있다. 집 주인 노부부는 한사코 낯선 이국여자에게로만 그 집을 사게 하는 고집을 피운다. 1)만삭인 채로 이혼을 한 친구가 찾아와 그 집에서 출산을 한다. 2)여우비처럼 짧았던 사랑의 기척이 지나간다. 3)떠돌이 청년의 위태로운 열애의 사정 속에 끼어든다. 떠돌이 청년과 부잣집 외동딸의 사랑. 두 연인의 결혼이 성사되기까지는, 어디서 굴러 온지도 모를 이국 여자의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투스카니아의 태양 아래에서, 정확하게는 그 집의 마당에서, 마을사람들이 어깨를 걸고 춤을 춘다. 결혼식의 뒤풀이를 겸하였다. “이 집에서 다 이루어 졌다”던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다. 막상 그 여자가 지니게 된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도.

진도, 봄이었다 / 정윤천
생강나무 꽃잎들은 가벼워서 철사 같이 가는 잔가지들도 위로 향해서만 있었다 봄 꽃잎들 속으로는 무거운 것들이 없어 보였다 아이들도 그랬으면 싶었다 해남보다 명부전 뜰 앞보다 가까운 곳에 진도 바다가 지내며 있었다 푸르게 멍이 들었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그리워지는 호명이었다 보내고 싶은 것들은 진도, 봄의 꽃가지들 같아 있었으나 흘러든 것들로 진도는 멀어 보였다 오래 전의 그림과 바람 죽음과 노래 북춤과 붉은 술이 꿰어져 한 몸이었다 진도, 봄이었다// 가지 않는, 가지 못한, 가기 싫은, 가서는 아니 되는, 갈 수 밖에 없는, 보내버린, 진도로 지나고 진도로 내쳐진, 도착한 만신창이들 마다 위에서는 다시금 진도, 봄이었다// 여기로 흘러든 흘러간 사람의 자취 하나도 떠올라서 거기 있었다 아이들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원(怨)없이 머무르다 간 사실만 남았으니 곽씨* 여자를 썼으니 진도, 봄이었다 허문(許門)**의 화업이 깨알처럼 반추되던 계절들이 흘러갔고 지초빛 노을이 왔다가 스러졌다 그림들이 글씨로 태어나고 글씨들이 그림들에 배어 죽어 나갔다 그런 뒤가 바로 진도, 봄이었다 아름다운 것들은 진도에 와서 거기 글자로 그림으로 걸려 있었다 곽씨 여자의 손목 심줄 하나도 그 바다의 혼백 속으로 담겨 있었다 아이들처럼 여자의 행적인들 진도, 봄으로 피어 있었다// 바라보는 끄트머리의 끝에 죽음이 담겨 있었다 숨 없는 육신을 낟가리에 뉘어 놓고 너나들이 노래를 대면 진도, 곁으로 오가는 일들이 한갓 봄 꽃잎에 맞아 떨어졌다 북소리는 너울을 넘고 그 장단은 멀리 갔다가 되돌아 왔다 어느 먼 산중 위에서 날 것들의 정령을 향하여 인간의 고기를 던지던 외지고 까마득한 마침의 말미로도 진도, 봄의 구역이 끼어들어 있었다 삶과 죽음을 떠올려 보면 너는 나고 너는 지며 진도, 봄이었다 보배로 오셨다가 보배로 흩어지는 그 사이가 진도, 봄이었다 진도, 봄으론 듯 맞춤하였다.//
* 진도 출신의 소설가 곽의진. 소치 허련의 일대기 “꿈이로다 화연일세”를 신문에 연재하여 장편 대작을 완성하고 진도에서 죽었다.
** 허씨 문중. 남종화의 태두인 소치의 화맥은, 소치 허련에게서 비롯하여 허유, 허형, 허건, 허문까지 5대에 이른다.

개씹 / 정윤천
공장 담벼락 애기호박 넌출 아래서, 진순이란 년 그날 시집갔다. 마른하늘에 갑작스럽게 소나기 한 줄금 후두기고 갔는데도, 일꾼 박 씨가 " 고것들 참 욕 본다 "며 한참을 희희덕거리다 지나갔는데도, 오래 붙었다.// 진순이란 년 오늘 아침에 새끼 내었다. 우글부글한 새 목숨들 여섯인지 일곱인지 늘어진 배꼽 아래 퍼다 놓고, 진순이란 년 저도 이제 어미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 살다가 손바닥만큼이라도 수가 틀리면 아무렇게나 내뱉기도 했던 '개씹' 같다는 그 말, 아서라, 하늘 아래 그 어디에서 저만큼이나 애틋한 일 자주 있었던가. 개씹이여, 아직 눈뜨지 않은 순한 목숨들로 이어지던 대낮같이 환한 혼신의 짓거리여.//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 / 정윤천
지붕이 없는 사원이 거기에 있다/ 수도원과 고해소와 갠지즈강이 있다/ 새벽마다 거기에 오르는 승려들과 요기들이 있다/ 사람의 히말라야보다 두 배나 높게 여겨진다는/ 거기에 올라선 이들은 시詩보다/ 서둘러서 물구나무를 서보이기 시작한다/ 등딱지에서 꺼내든 저마다의 날개 위에/ 새벽의 습기를 닿게 하려고/ 거저리*들이 나미브**에서 생을 구하는 자세/ 그러려니 생은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대가리를 거꾸로 처박고 폼이 나지 않아도 되고/ 정전이 되어 한동안 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같은 건 외우지 않아도 된다/ 만다라 꽃씨보다 작은/ 습기의 알갱이들이 날개에 맺혀/ 물구나무의 맨 아래에 붙은 입술까지만 닿으면 된다// 서정시가 아니어도 된다.//
* 풍뎅이의 일종.
**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사막.

엄지손톱 밑에서는 가끔 갈치가 살고 있었다 / 정윤천
오른쪽 엄지에 등사용 잉크 같은 걸 쳐 바르고 검은 물결무늬가 돌올해진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였던 자리에서// 입술에 바늘이 꿰인 채 제 은빛을 중계방송 당하던 어느 갈치의 한 순간이 떠올라 와서 낚시 채널의 팔등신 리포터는 지문처럼 확실해 보이는 갈치의 은빛을 한참이나 들추어내 보이다가// 지문을 접수한 검은 표지의 장부 하나가 가마우치 같은 입을 다물 때와 같이 낚시 줄에 매달린 채로 축 늘어진 은빛의 꼬리 하나도 화면 속으로 제출되어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오른손 엄지 끝의 물결무늬 속에서는 갈 데 없이 사로잡힌 은빛의 한 마리로 와 있었던 순간들이 있기는 있었던 것만 같았을 때.//

버스처럼 / 정윤천
목도리 끝을 휘날리며 갔던 날도 있었다./ 그 겨울에 한눈을 팔다가/ 전봇대를 들이박을 뻔한 실수도 저질렀는데,/ 정해진 행선지와 번호표를 받아들기 일쑤였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길에게로 배치되었던 날에는/ 무리하게 모퉁이를 돌다 넘어진 기억도 있었다.// 운수로 여기거나 퉁을 쳐야 했던 날들이/ 다른 버스들에게도 있었으리./ 창문들에게로 무심해질 때가 오면/ 버스처럼 그새 낡아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일 따위에 등한해져 가고,/ 버스 안의 라디오에서는/ 옛날에 들었던 노래가 다시 새어 나오고// 더 빨리 달려야 할 사정도 없이/ 궁리도 없이, 버스처럼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였던 버스들이 공원의 산책로 위를 걷는다.//

십만 년의 사랑/ 정윤천

1./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년의 해가 오르고/ 십만 년의 달이 이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려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년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2./ 어쩌면, 십만 년 전에 함께 출발했을지 모를/ 산정의 별빛 아래/ 너와 나는 이제야 도착하여 숨을 고른다/ 지상의 사람들이/ 하나둘 어두움 속으로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우리는 이런 비탈진 저녁 산기슭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는가/ 여기까지 오는데 십만 년이 걸렸다// 잠들어 가는 지상의 일처럼 우리는 그만 잠기어도 된다/ 더 이상의 빛을 따라 나서야 할 모든 까닭이 사라졌다//
3./ 천 번쯤 나는 매미로 울다 왔고/ 천 번쯤 나는 뱀으로 허물을 벗고/ 천 번쯤 개의 발바닥으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으리라/ 한 번은 소나기로 태어났다가/ 한 번은 무지개로 저물기도 하였으리라//
4./ 물방울들이 모여 물결을 이루는/ 멀고도 반짝이는 여정을 우리는 왔다/ 태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난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불리던 나비처럼/ 날고 또 날아올라서 여기까지 왔다// 바다인들 거슬러 오르려는 거꾸로 붙은 비늘처럼/ 금빛의 역린같이/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구석 / 정윤천
시로 삼아 시집에 넣기에 만만한 것이 하나 있다. 외진 상가 부근(삼천리표 자전거 대리점 옆)이거나, 물 간 고등어 한 손 같은 것들로, 해찰 많은 걸음에 기대어 남부여대하던 허름한 장바구니의 동구 끝에 퍼질고 앉아 있기도 한다. 대량생산을 위해 벨트를 걸거나 자동 라인을 가동하지 않아도 되는 마지막 수공업과도 같은 이발소여, 그렇게 시집과 이발소는 여겨볼수록 닮아 있다. 하나는 4천 원 하던 제 몸값이 6천 원이 되기까지 꼬박 십년 넘게 걸린 영구(앞니 두 개 빠지고 칠부바지 걸친) 닮은 것의 이름이여, 다른 하나는 더 말하여 무엇 하리. 찜통에 데운 온수 한 바가지를 물뿌리개에 담아 흘러내리는 비누거품을 잰 손길로 씻겨주고 나면, 그새, 물려놓고 온 장기판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던, 변함없는 버르장머리는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애초부터 그들에겐 社訓이라곤 없다. 강령도 따로 없어서 꼴리는 대로 행간을 내거나 가르마를 타기도 한다.// 삐걱임 많은 의자에 걸터앉은 녹슨 바리캉에 틀기름을 치기라도 하듯이, 그래도 어디 쓸 만한 낱말 하나 찾아 나서다 보면, 저절로 쓸쓸해지기도 하던 시의 저녁 무렵이여, 두 구석이 닮았다.//

너에게 / 정윤천
일찍 피려고 다투지 마라/ 더 많이 피려고 애쓰지도 마라/ 높게 피어서, 우러르게 하려 하지 마라// 내려다볼 때마다/ 꽃은// 제 향기로 몸을 버틴, 여문/ 씨방도 보여준다.//

우기(雨氣) 아래 / 정윤천
공친 김생(生)이 슬레이트 지붕 쪽창 밑으서, 닷새 남짓 걸친 빤쓰 골마리에 손두덩 한 짝을 순하게도 묻고, 쩌어기, 영광 원자력발전소 수챗구녁 어름 빈 바다같이, 새우는 읎고 새우 그림만 그려져 있는, 새우깡 봉다리 닮은 꾸겨진 낮잠에 빠졌다. 김생에겐, 밀린 것이 빨래뿐이 아니다. 봄 꽃잎이라면 늦피었겠고, 하절(夏節) 것이라면 서둘러 벙글었을, 흰 꽃잎 몇 잎도, 마당귀 어쩐지 불어터진 밥풀테기 모냥인데, 밀린 것들에게 좀 셨다가 가라믄서,// 작년, 재작년 밀린 빗줄기만 허천나서.//

한라산에서 / 정윤천
처음 오르는 길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두 번째 오르는 길에도 말 한마디 걸어주지 않았다// 세 번째 오르는 길에서야 바람 한 줄기 얻어맞았다// 네 번째 오르는 길에 다리 한쪽 접찔러주었다// 마른자리에서나, 방 안에서나, 수음 버릇처럼 시 쓰다/ 온 작자, 네 글은 너무 작다고, 하다못해 저기 깨어진 기/ 왓장, 돌멩이 하나에도 어려 있을, 역사 될 노래 쥐뿔도/ 멀었다고, 크고도 희게 벗은 몸으로, 한 나라의 가장 마 지막까지의 山陰 하나여, 높고도 고요하다.//

모자를 하나쯤 / 정윤천
나와 함께 견디고 왔을 가난한 시간 위에도/ 하나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잘 변하지 않던 습관에게도/ 하나쯤/ 햇볕에 그을려 자꾸만 늙어가는 목덜미에도 하나쯤/ 내 쓸쓸한 눈매라거나 이마 위에도 하나쯤// 외양에는 별다르게 신경을 써본 일이 없던 나로서는/ 좀 엉뚱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지금과 같은/ 심경의 변화 위에도 하나쯤// 예전과 같이 억지로 밀어붙이거나 힘으로는 말고/ 제법 이처럼 공손해진 손길과 마음으로/ 되도록이면 사뿐하면서도 폼이 나도록 하나쯤// 정말로 주머니가 좀 헐렁해져도 좋으니/ 제대로 된 모자점에서 하나쯤// 거울을 보기 위하여, 머리 한쪽을 벅벅 긁어 보이며/ 멋쩍은 표정으로 그 앞에 서보기도 하는/ 거기 비쳐 있는 너를 향해서도 하나쯤// 굴렁쇠처럼 멀어져가는 세월의 뒷그림자에게도/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마음같이/ 하나쯤,//

참, 작다 / 정윤천
운동화 빨 때 썼던 칫솔로 이빨을 닦은 적이 있다/ 예전에 당나라 가는 길이었다던 한 스님은// 그 길로 무릎을/ 타악, 치셨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고작/ 침이나 뱉고 투덜대고 말았을 뿐이다.//

저녁의 시 / 정윤천
저녁이 온다고 마을이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랴/ 한낮의 겨운 수고와 비린 獸性들도 잠시 내려두고/ 욕망의 시침질로 기운 주머니 속의 지갑도 찔러 두고/ 서둘지 않아도 되는 걸음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때/ 등불을 내걸기도 하면/ 그러면 거기, 사람들의 마을에는// 멀리서도 깜박이는 환한 물감 방울이 번지기도 한다// 그렇게 식구들의 정다움 속으로// 방심과도 같은 마음의 등을 내려놓기라도 하면/ 머리 위의 하늘에선 地上에서의 계급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별들의 수런거림이 일렁이기도 하는 때// ​저녁이 오면/ 저녁이 오면/ 어디선가, 집집의 처마이거나 이마 위를 어루만지며/ 스스럼 없는 바람의 숨결 같은 것이// 느려진 시간의 긴한 뒷등을 스치며 지나가기도 한다.//

금남로를 지나갈 때면 시인이 생각났다 / 정윤천
예술의 거리 쪽에/ 시인이 먼저 나와 있었다// 계피향에 찌든/ 방석 너머에서 자신을 한껏/ 낮은 목소리로 소개했던/ 시인과는 초면이었다// 말수가 적은 그가/ 바둑을 내게 물어 왔는데/ 입으로보다는 손으로 들려주고 싶은/ 사실이 있었는가 보았다// 전체를 살피는 눈이/ 한 수 위에 있었다// 하단에 걸쳐보았던/ 내 축 머리 한 점이/ 참새처럼 작아지는 것 같았다// 악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몰린/ 패석들이/ 금남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죽은 돌을 들어내던/ 시인의 손목 앞에서/ 그에게로 시를 끄집어 내보는 일이/ 참람해지는 것 같았다// 이 거리에서 죽은 이들의 발자국 소리도/ 참람해져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금남로를 지나갈 때면/ 시인의 손목이 생각났다.//

어른이 되어야 알 수 있는 일 / 정윤천
백금녀와 서영춘네 마당 귀퉁이는 개울가에 닿아 있었다 개천의 상류에는 호가 파여져 있었고 육이오 때 포가 떨어진 자리라고들 하였다 가끔 부잡스런 청년들이 자라와 메기를 잡아내 오던 호 속은 한낮에도 까마득하게 깊어 보였는데 호에서 흘러나온 물의 발목들이 잘 나가던 시절의 순실 댁 마냥 개천을 밟고 지나가며 있었다 가난한 백성 같은 아이들이 호 아래 개천 안에서 끈하게 어울리고는 하였다// 개울가 집이 백금녀와 서영춘의 등기로 바뀐 뒤부터 백금녀는 개천 일대 어거지 주인 질을 놓고는 하였다 서영춘에게 터지거나 얻어듣고 나온 날은 애꿎은 개천 살림을 훼방 놓곤 하였다// 마른 미역 다발과 멸치 등속을 장에 내다 팔러 나가는 백금녀 뒤에서 물 속 같이 남은 서영춘은 기침을 불러 노닐다가 망년의 처녀 박씨 같은 하루를 혼자서 뱉어내곤 하였다// 호와 개천에서 건져 올린 청년들의 민물거리로 백금녀와 서영춘네 마당에서 매운탕 잔치가 열리던 날 백금녀는 마음 먹고 마을 아나운서인 지지배배 한천 댁을 찬 개울 속으로 투포환처럼 던져 넣어 버렸다 그 후론 백금녀와 서영춘에게 연루되었던 구구 팔십 일 같은 소리 소문들도 우물집 앵두나무 가지 밑에서 채송화 밭가에서 희미해져 가고 말았다// 호에서 산다는 발 달린 이무기가 승천하기 좋을 만큼 한참의 소나기가 하늘에 사다리를 걸쳤던 날도 있었다 개천이 먼저 흠씬 울어 대었고 잔비가 그치지 않은 둑 위에서는 서영춘의 칼부림 춤을 도망 나온 백금녀가 이무기같이 음산한 목구멍 소리를 하늘 가차이 올려 보내 주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셔츠바람 속에서 빗물에 젖은 수박 통 젖가슴이 호처럼 따라 흔들리며 있었다 검고 튼튼한 오디 꼭지까지 훔쳐본 놈들도 더러는 생겨났다// 서영춘이 먼저 개울가 집에서 생전의 기침소리를 마감하자 장에 나간 백금녀는 그 길로 개울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역 다발처럼 넓고 푸짐한 백금녀가 마른 멸치 같았던 서영춘에게 심심하면 깨지거나 피를 보는 이유가 호 속에 지낸다는 이무기만큼이나 궁금한 나이가 들도록 어른들은 끼리끼리만 차차 어른이 되면 절로 알게 될 거라는 비겁한 대답의 날들이 개천 속으로는 흘러갔다// 누군가는 가끔 백금녀의 검고 튼실한 오디 꼭지를 떠올려 주기는 하였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를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양 쓸어 올려/ 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긴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취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너라고 쓴다 / 정윤천
솜꽃인 양 날아와 가슴엔 듯 내려앉기까지의/ 아득했을 거리를 너라고 부른다// 기러기 한 떼를 다 날려 보낸 뒤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저처럼의 하늘을 너라고 여긴다// 그날부턴 당신의 등 뒤로 바라보이던 한참의 배후를/ 너라고 느낀다// 더는 기다리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서고야 만/ 이아침의 먼 길을 너라고 한다// 직지사가 바라보이던 담장 앞까지 왔다가, 그 앞에서/ 돌아선 어느 하룻날의 사연을 너라고 믿는다// 생이 한 번쯤은 더 이상 직진할 수 없는 모퉁이를 도는 동안/ 네가 있는 시간 속으로만 내가 있어도 되는// 마음의 이런 순간을 너라고 이름 붙여주고 나면/ 불현듯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라곤 사라져버려선// 사방에서 사방으로 눈이라도 멀 것만 같은/ 이 저녁의 황홀을 너라고 쓰기로 한다.//

파꽃은 피워놓고 그 곁에 잠이 들고 싶은 날이 올 것 같았다 / 정윤첨
맨 처음 너에게로 가까워져 갔을 때/ 너는 앞을 쳐다보며 있었고/ 나는 동그랗고 커다란 지구의/ 뒤편에서 걸어가/ 거기까지 닿았다/ 너는 너무 한참 동안이나 거기 서 있었던 것 같았고/ 나는 너무 오래 걸려서/ 거기에 닿았다/ 지하철 극장에서 나오는 배우들의 회랑이/ 깊고 붐볐다/ 머리 위의 태양이/ 아직 커 가는 한낮을 어루만지며 있는 중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자꾸만 어디선가/ 파꽃 같았다/ 파꽃이라고 피워 놓고/ 그 곁에서 잠이 들고 싶어지는 날이/ 올 것 같았다/ 나는 저 청색의 꽃 몸통 하나를/ 오래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맨 처음은/ 동그랗고 기인 지구의 뒤편에서 걸어와/ 피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 것 같다/ 그것은/ 파꽃보다 하얗게 부퍼 올랐던/ 순식간의 속으로 였을 것 같았다.//

불인(不忍) / 정윤천
사산 직전의 염소 새끼를 들쳐 메고 들어와/ 사람 병원의 응급실 앞에서 울음을 바치는 이가 있었다/ 시골 의사는 등가죽을 늘여 두 대의 링거를/ 염소의 몸 안으로 흘려 넣어 주었다//

좋은 날 / 정윤천
장에 간 엄마는 잘 안 오시는 것이다 우리 엄마 안 오시네 엄마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배추를 팔아 신발을 사 오실 엄마// 엄마는 신발을 잊고 엄마는 빨랫비누만 소금 됫박이나 사 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좋은 날이란 신발은 오지 않고 좋은 날만 따라왔던 것이다// 언 발로 사위를 찍고 사라진 고라니의 겨울 산정도 신발처럼 저 너머에 솟아 있었던 것이다 고라니는 떠나가고 좋은 날은 혼자 남아 기다렸던 것이다 고라니도 신발을 깜빡했다고 들켜주었던 것이다 엄마처럼// 좋은 날은 어디선가 제 신발을 찾아 신고 오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사과를 깎는 저녁 / 정윤천
너와 헤어지고 온 저녁에/ 사과를 깎는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은/ 무심코 베어 먹었던 사과/ 먹다 남은 깡치를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을 사과를/ 깎는다/ 접시에 두 쪽으로 갈라 놓고 났더니/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우리 사이를/ 떠올리게 해 주던 사과/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내려다보게 했던 사과를/ 한 조각만 입으로 가져가 본다/ 너를 보내 놓고 혼자서만 돌아왔던 저녁에/ 접시에 오래도록/ 한 조각이 남아 있었던/ 사과를/ 깎았던 저녁//

​불편한 손 하나로 / 정윤천
1/ 새 한마리 날아와 손바닥 위에 앉았다//
2/ 저 새/ 그러쥐면 상할 것도 같아서/ 펴 주면 날아가 버릴 것도 같아서/ 손가락을 살째기 오므려 보는데/ 새장처럼 동그마니 말아 쥐어 보는데// 너, 이제 남은 날일랑/ 오므린 손바닥 하나/ 그러쥔 채로 살아가야 한다/ 불편한 손 하나로 살아가야 한다//

말투 / 정윤천
불현듯 당신이 곁에 없을 때/ '허전해'라는 말이 모르는 사이에 새어 나올 때/ 그 말은 이미 입술의 말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몸이 지르던 소리/ 그렇게 어깨 한쪽이 시큰하게 결려올 때도/ 몸은 벌써/ 모로 누워서 뒤채인/ 잠 못 이룬 어제의 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일이 그런 것이다/ 서로를 반드시 기억하는 일이다// 내가 보낸말로/ 네가 다시 부쳐 온 말을 읽는 시간// 당신의 말투는/ 그 사이에 벌써 내 말 버릇마저 닮아 있다// 사랑이여/ 우리는, 같은 목청으로 다투고 같은 음계로 운다.//

가을이라고 불러 버리자 / 정윤천
솜꽃인양 날아와 가슴엔 듯 내려앉기까지의/ 지난했을 거리를 가을이라고 부르자. 아니라면,// 기러기 한 떼를 다 날려 보낸 뒤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은/ 저처럼의 하늘을 가을이라고 여기자// 그날부터선 당신의 등 위로 바라보이는 한참의 배후를/ 가을이라고 느끼자// 더는 기다리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서고야 만/ 이 아침의 기척을 가을이라고 부르자// 화지사가 바라보이던 담장 앞까지 왔다가, 그 앞에서/ 돌아선 어느 하룻날의 사연을 가을이라고 믿어 버리자// 생이 한번쯤은 더 이상 직지할 수 없는 모퉁이를 도는 동안/ 네가 있는 동안만 내가 있어도 되는// 마음의 이런 지극한 한 순간을 가을이라고 이름 붙여 주고 나면/ 마침내 돌아갈 곳이라곤 송두리째 사라져 버려선// 어디에선가 눈먼 순간만 같은/ 저녁녘 같은, 아득한 비어져 버림 하나를 가을이라고 쓰기로 하자//

새들의 문자 같은 / 정윤천
새들도 편지를 쓰네. 허공의 빈칸 위에 콕콕 찍어서,/ 어딘지 조금은 화들짝스러워 보이는 새들의 글씨./ 그렇게 짐작이라도 해보면, 사랑의 독백 몇 마디 스미어/ 있을 것도 같았네. 무리를 지어 먼 곳을 함께 나는/ 그들도 결정적인 순간 앞으로, 새들도 한번씩은 외로워져/ 버리는지. 가야할 곳의 주소를 일러주지 않은 채 새들은/ 떠나가지만,// 얼마든지 기꺼웠을 허공의 문자만으로, 어디선가 그것을/ 받아 읽어내는 까마득한 수신지가 있었다는 것처럼.//

라말레라*의 기억 / 정윤천
누구나 오래전에, 그 해변의 사람이었던 적 있었으리/ 고래를 잡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물결 높은 나날 같은// 애써 발라낸 고래의 흰 심줄로/ 물 위를 걸어 돌아오는 젖어 있는 생의 발목/ 그 발등에 붕대나 부목을 감아주려 애를 써보던/ 비린 손길의 순간인들// 달팽이관의 저 안쪽에서 어저다 가끔 환음幻音의/ 한 올쯤이 풀리던 날이면/ 지금도 까마득한 고래의 울음소리가 끼룩이고 있어// 라말레라의 기억같은/ 라말레라의 기억 같은// 멀리서도 금세 서로를 알아차리던 깊은 귀와/ 눈빛의 시간 곁으론/ 지금도 어쩌다가 고래의 울음소리에 실려오던/ 까마득한 해변에서의 날들이 있었으리/ 당신과의 처음 같았던 날들이 있었으리//
* 가장 원시적인 고래잡이가 지금도 행해지는 인도네시아 남쪽의 섬.

눈물 / 정윤천
가진 것 중에 제일 빛이 났다// 혀로 찍어서/ 맛보아야만 할 때에도 그랬다// 언제나 마지막엔 네가/ 그랬다.//

눈물의 자세 / 정윤천
눈물은 파는 게 아니어서, 눈물에게는 한사코 가격을 매기지 못한다. 가격을 사양하는 눈물의 자세. 간과 신장은 1500이라는 스티커가 '인간적'으로 돌아다니는 현금지절에, 환금과는 무관한 인간의 품목이, 인간의 몸 안에 아직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얼마나 통렬한 발견이었는지. 신에게도 없는, 혹은 짐승에게는 가끔 있으나 짐승만도 못한 것들에게는 더더욱 없는, 눈물의 자세. 알량한 가산이나마 마지막까지 들어먹고 돌아온 말라비틀어진 논다니 아들의 손등 위로, 아마도 선운사 동백꽃 모감처럼은, 투욱, 떨어져 내린 누군가의 더운물 한 방울. 차암, 거시기한 눈물의 자세.//

등에 박힌 시(詩) / 정윤천
딸아이의 방에는 등이 온통 드러난 드레스 차림의 뒷모습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뒷모습이어도 딸의 모습이 확실해 보였다 온통 드러내 놓고 등이라도 태우고 싶었던 열불의 날이 있었으리 브래지어 자국 같은 흰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좀처럼 끝을 내지 못했던 내 시 한 줄처럼.//

고수의 사랑/ 정윤천
고수들은 그렇습니다/ 손바닥만으로 쇠막대기를 구부리기도 하고/ 배 위로 트럭을 지나가게도 합니다/ 흉내내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고수일 것입니다// 고수의 사랑, 수거미 한 마리 자리에 누워 하늘을 한번 쳐다 봅니다. 지상에서 바라보는 마지막 하늘입니다. 암거미 한 마리가 배 위로 올라옵니다. 사억 년 전부터 저들의 체위는 한결같았다고, 자막이 처리하고 지나갑니다. 이제부터가 고수의 사랑입니다.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이 끝나자 암거미는 수거미의 복부를, 여린 살집을, 집게발로 마구 헤집어 구멍을 팝니다. 헤쳐진 수거미의 뱃속으로 그들 사랑의 내용물을 슬어놓기 시작합니다. 알들은 씨앗들은 자라면서 수거미의 몸을 남김없이 먹어치울 것이라고 합니다. 사억 년을 이어온 사랑의 방정식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목숨에 빚지는 일이 사랑의 진풍경일지 모릅니다.// 함부로는, 썩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일인지 모릅니다.//

이사, 뽕짝에서 랩으로 / 정윤천
캐시밀론 이불을 묶은 요철이 비워주고 오는 방의 쪽창 모양을 닮았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누드로 길에 나온 세간들이 어깨를 한번 뒤챈다. 두고 온 것들이 멀어질수록 짧아지는 정처를 위하여 용달 씨가 흥겨워 진다. 아뿔싸. 세상의 모든 노래는 용달 씨를 위하여 지어 놓은 것만 같았다. 냉장고도 세탁기도 숨을 죽이고 용달 씨의 노래에 귀를 기댄다. 네모나고 세모지고 동그랗고 뿔난 것들 속으로 용달 씨의 노래가 파고든다.// 歌詞가 스민 세간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그가 잠시 목청을 쉰다./ 목줄에 매인 주인집 개가 용달 씨 대신 서서히 스피커의 볼륨을 높이기/ 시작한다.//

어깨를 감싸줄 때 / 정윤천
사람들의 마을에 매달린 사과의 개수는 그래서 항상 유동적이지 어깨가 따뜻해져 가는 시간의 속도로 사과는 물들어 가지 하늘의 예쁜 구름들에게로 옆에 있던 이가 어머나, 저 구름들을 좀 봐 손가락을 치켜 올려줄 때도 구름들의 숫자는 지상의 어린아이들이 흘린 웃음소리의 개수이었을지 모르지// 누군가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불러줄 때 그쪽으로 돌아서는 바라봄의 힘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먼 데를 헤아리지 그곳을 향해 떠나가는 미지를 시작하지// 누군가 등 뒤에서 어깨를 감싸줄 때 거기서 한 알씩의 사과가 돋아나지//

천천히 와 / 정윤천
천천히 와/ 천천히 와/ 와, 뒤에서 한참이나 뒤울림이 가시지 않는/ 천천히 와// 상기도 어서 오라는 말, 천천히 와/ 호된 역설의 그 말, 천천히 와// 오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마음이 건네준 말/ 천천히 와// 오는 사람의 시간까지, 그가/ 견디고 와야 할 후미진 고갯길과 가쁜 숨결마저도/ 자신이 감당하리라는 아픈 말/ 천천히 와// 아무에게는 하지 않았을, 너를 향해서만/ 나지막이 들려준 말/ 천천히 와//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 정윤천
毒가시들 사이로 피어난 꽃/ 만약에 누군가 내게 그리움에 대하여/ 묻는다면//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그것, 그 작지만 완강한 꽃잎에 비기어/ 대답하리// 그나마 그렇게 나마/ 내 마음의 토로가 되었다면/ 딴은 우리 생의 어느 한 꼭지점이/ 까마득한 창천의 푸른 상공쯤/ 比翼鳥(비익조), 퍼덕이는 깃 치는 소리를 내어/ 한번은 먼 곳을 향해 날아올라 버려도 좋으리//

사슴이라는 말은 슬프다 / 정윤천
귀에서 실이 나왔다/ 어머니가 발등을 밟아주면 사슴은/ 잔발로 숲을 달렸다/ 사슴의 다리 밑에서 나뭇잎 같은 헝겊을/ 만지작거리며 지내기도 하였다/ 누군가 사슴의 모가지만 잘라서 가져가 버렸다*/ 천강(千江)에 내린 달빛이 남김없이 스러졌던/ 아침까지/ 사슴의 울음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궁금하고 무서운 달이 방문 앞에/ 한동안 넘어져 있고는 하였다/ 사슴을 잃은 어머니의 눈빛이/ 늦게까지 슬픈 짐승처럼 남아 있었다//
* 당신의 재봉틀에서 누군가 머리만 떼어가 버린 적이 있었다.

​슬픔을 맞아야지 / 정윤천
쓸쓸한 날보다는 쌀쌀한 날에 맞아야지 손톱에 들었던 가시부터 빼내 보아야지 너무 길게 딸려 나오지 않게 해야지// 마늘차와 생강차 중에 생강차부터 앞세우기로 해야지 돌담에게 풀피리에게 장미넝굴에게 갈참나무 이파리들에게로 생강차의 아린 향을 본받게 해주어야지// 마늘차야, 너는 참고 기다려 졸래 둘이 기대어야만 하나가 되는 말들이 있네 들과 담, 풀과 피리, 장미와 넝쿨, 갈참나 무와 이파리 이럴 땐 어쩌면 마늘차 향이 더 제격일지도 모르지 눈과 물이 함께 매워져서 눈물이 되는지도 모르지// 쌀쌀한 날이 아니어도 쓸쓸한 날에 찾아오는 슬픔은 있어 생강차라도 되도록 떨어지지 않게 해 놓아야지//

초년 / 정윤천
망초밭이 따라왔다 부추밭이 더 열심히 따라왔다 만물상회 차부 앞의 한 봉지를 갔었다 심부름을 밀가루 봉지에는 어른이 되어서도 찾아 나서야 할 국수틀을 돌리던 하염없는 일과 상여 꽃을 접어 파는 무섭고도 아름다운 일을 치르던 친구네 사이에 끼어 있는 먼지 푸석한 점집의 문턱 한 줌이 담겨 있었다 무섭고도 아름답기로는 점집 안도 환했던 것 같았다 궁금한 데가 많았던 하얀 분(紛) 같은 하루는 어디에서 날아왔을까 밀가루 봉지를 싸맨 신문지에 와 걸렸던 갈래 어디로 바람아 너도 차부 앞의 큰길에서 돌아오던 그때 군데군데에서 더듬거렸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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