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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부채 / 홍정식

부흐고비 2022. 6. 30. 07:30

고향 집 안방 문 위에는 몇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모로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다른 손으로 부채를 부친다. 날은 한여름이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다. 아이에게 태극선을 살살 흔들어 바람을 피우고 혹시나 손주에게 달려들 파리나 벌레를 쫓는다. 다정하게 불어가는 바람으로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득하다. 그 마루 밖으로 아버지가 여동생을 안고 흐뭇하게 보고 계신다. 나는 뭔가 심통이 났는지 섬돌 위에 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찍은 사진이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간 그리고 두 동생이 같이 찍힌 사진이다. 흑백사진이므로 태극선은 검고 희게 나타나 있다. 사진을 찍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할머니 탈상을 했다. 그 부채는 사라졌으나 그 부채가 한때 존재했으며, 사진을 찍은 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살아있었던 그는 없고, 찍힌 그 풍경화 같은 사진만 살아있다.

부채의 구성이 신비롭다. 뼈는 대나무요, 그 뼈를 둘러싸고 있는 살은 종이다. 두 개가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부채가 하나 탄생한다. 그 조화는 땅에서 출발한다. 대나무도 종이도 다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사람이 땅에서 난 부채로 허공에 돌아다니는 바람을 부리니 참 신비로운 물건이다. 모양은 어떤가? 시작은 좁지만, 그 끝은 넓은 부채꼴이다. 그러나 부채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소용되는 일이 없다. 사람이 흔들어야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제 할 일을 다 하는 셈이다.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부채의 자리를 뺏고 나니 부채 구경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것은 오월 초였는데 일주일간 의무 격리를 했다. 그래서, 어디 가지는 못하고 컴퓨터를 부여잡고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때 이 도령이 춘향을 볼 제’, 라는 판소리 가락처럼, 그때 신기하게도 판소리에 빠져들게 되었다. 요즘은 동영상이 아주 잘 나와 있어서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배비장전과 수궁가에 온몸을 흠뻑 적셨다. 완전히 몰입하는 시간이었고, 코로나 증상을 잊어버리는 무심한 시간이었다.

심 봉사가 심청을 안고 젖동냥하러 다닐 때는 부채가 갓난쟁이가 되었다가, 춘향이가 서울로 가 버린 이 도령을 그리워할 때는 부채가 이 도령의 얼굴이 되었다가, 배비장이 기생 애랑에게 멀쩡한 치아를 빼 줄 때는 부채가 무시무시한 가위도 되었다. 또한, 부채를 확 펼칠 때는 어사 출두 장면이 흥이 나고, 부채가 접힐 때는 간을 빼놓고 왔다며 목숨을 구걸하는 토끼의 절절한 심정이 전달되었다. 접은 부채를 손바닥에 내리치면 치도곤을 맞는 춘향의 애절한 순간이 되었고, 흥부와 흥부 처가 부채를 맞잡고 실금, 실금, 실금, 박을 썰 때는 흥이 나 내 몸이 저절로 왔다 갔다 했다.

하나의 사물이 접히고 펴지며 그 난리를 피우는데, 과연 부채만 한 것이 있을까. 어느 시인의 말대로 접는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개진다는 의미다. 용도를 다할 때는 잠시 포개져 한 발 나갈 때를 대비하고 펼쳐질 때는 이순신 장군의 일자진처럼 쫙 펼쳐지는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얼굴이 펴지고, 살림살이 펴지고, 살판이 난다. 판소리 명창에게 부채가 없다고 상상하면 그 소리판이 어떨지 상상이 간다. 참 싱거울 것 같다.

부채의 모든 소용이 사람에게 달렸다.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룰 수 있으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뭇 달라 보인다. 또한 꽃과 나뭇잎이 흔들려 바람의 존재를 알듯, 인간은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며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뿐인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불을 활활 타오르게 만드는 것도 부채다. 다 죽어가는 불을 살리니 도깨비방망이가 따로 없다. 마음에 따라 둘둘 말렸다가 다시 활짝 펴지기도 하니 인생의 풍파를 닮았다.

차르르, 접혔던 부채가 펴지면 그 속에는 꽃도 있고 산도 있고 글도 있다. 바람과 구름이, 온 산천이 다 들어 있으니 왠지 부채를 들면 마치 신선이나 된 듯 좀 우쭐해진다. 옛 선비들이 부채를 들고 으흠, 하며 짐짓 위엄을 부리며 일상으로 들고 다닐법하다.

부채는 햇빛을 피하게 하고 얼굴도 가리게 한다. 부끄러운 면이 있다면 부채로 가릴 수 있었으니 지금의 선글라스 못지않은 역할을 한 셈이다. 민속화를 보면 부채로 얼굴을 가린 선비들이 눈에 띈다. 욕망을 숨기고자 한다. 하고 싶은 일을 대놓고 하지 못했던,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들의 마음을 잘 그려놓고 있다. 부채 속에 숨긴 얼굴은 본성을 숨기지만, 살짝 드러난 눈은 익살스럽다.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으나 그 속은 음흉한 것이다. 그런 것들을 가려주니 부채란 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었다.

흑백사진 속 할머니의 태극선은 불멸이다. 그때 전달된 바람과 기운이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내 대에, 또, 내 아이들에게 전달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 않고 무한하다. 할머니의 웅숭깊은 눈과 선한 웃음이 내게도 있어 아이들을 볼 때마다 사라지지 않으니 부채가 전해주는 바람이 무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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