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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최정진 시인

by 부흐고비 2022. 7. 7.

최정진 시인
1980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순천대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 대학원 문창과를 나왔다.

200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동경』과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가 있다.

‘는’ 동인.

 



기울어진 아이* / 최정진
세탁소가 딸린 방에 살았다 방에 들여 놓은 다리미 틀에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내 몸의 주름은 구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다림질 밖에 몰랐다 엄마의 품에 안겨 다려지다 어느 날 삐끗 뒤틀렸는데, 세탁소 안에서 나는 구부정하게 다니는 아이라고 불렸다// 다린다는 말은 주름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굵은 주름을 새로 긋는 문제였다 수선된 옷들이 마지막 누운 곳은 다리미틀 위였다 뜨거운 것과 닿으면 닳은 곳부터 반짝거렸다 오래 입은 옷일수록 심했다 엄마는 밤마다 어딜 가는지 브라더 미싱 앞에서 드르륵 어깨를 떨었지만 우는 게 아니었다 꿰맨다는 말은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얼마나 잘 가리냐의 문제였다 엄마, 엄마 가슴에 난 구멍은 얼마나 크길래 날 실통에 걸어야 했나요 나를 돌돌 풀어 가슴에 안아야 했나요// 천장엔 옷가지가 우거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바닥에 흘려두면 주머니 속의 새들이 쪼아 먹었다 엄마, 주는 대로 먹지 않는 헨젤에 관한 동화를 읽고 싶어요 뼈다귀를 내밀기 전에 끝나는 동화 말이에요 밤의 세탁소 깜깜한 비닐의 숲을 헤치고 다가가면, 엄마는 내 바지의 밑단을 늘려 내밀었다 짧아지지 않는 바지 안에 갇혀 내 몸은 부풀고 부풀기만, 그러다 세탁소 밖으로 뻥 터져버렸는데, 그 후로는 얇은 바람에도 어깨를 떨어서 지금껏 너덜너덜한 등을 가진 아이라고 불린다// 세탁소가 딸린 방에서 나는 밤마다 기울어졌다 엄마, 내 몸의 기울기에 맞춰 몸을 숙이지 마라 방에도 걸음걸이가 있는지 바지 단에 남은 얼굴처럼 곰팡이도 한쪽 벽에만 핀다 세제의 기울기가 달라서, 얼룩도 때로 빠지는 정도가 다르다 지구에서 잠드는 우리는 제 각기 다른 별의 중력을, 한 자루 가득 꿈 속에 담아온다//
* 베누아 페터즈
* 제14회 《실천문학》 등단작

바람세탁소 / 최정진
수면의 바람이 강변의 벚나무에게 옮겨간다/ 나무에 장이 서는지, 잎들이 소란스럽다// 새벽의 퉁퉁 부은 눈꺼풀 속에 지난밤의 꿈을 담아왔다 천막을 팽팽하게 끌어당기면 물건을 팔거나 사러 온 사람들은 장에 가기 전에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렀다 두고 간 옷가지에 묻어있던 주변 마을의 흙들은 저마다 조금씩 빛깔이 달랐다 그새 얼마나 컸냐,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듯 기침소리 앞세워 안개를 걷어내는 할아버지 내 고추 그만 만져요 발갛게 익어 떨어질 것 같잖아요// 바람이 벚나무의 가지를 손보고 있다/ 다음 장이 서면 바람은 벚꽃을 내놓을까// 보따리를 풀어놓고 할머니들은 줄지어 앉았다 수다가 들풀로 피어난 그 밭둑 사이에서 나는 보폭을 잃고 둥둥 떠다녔다 자주 길을 잃었지만 실밥이 옷자락에 묻어 나풀댔으므로, 집을 잃지는 않았다 바싹 마른 노을이 걷히면 물건을 팔거나 산 사람들은 읍내 하나뿐인 세탁소부터 들러 집으로 갔다 장터에 남은 바람이 빨랫감을 더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로 불어왔다// 벚나무가지 바람이 수면으로 돌아온다/ 벚꽃잎 신발 한 켤레 사 신고 하류를 향해 걸어간다//
* 제14회 《실천문학》 등단작

히말라야 변기 / 최정진
히말라야에서 찍어 온 사진 한 장이 욕실에서 머무르던 밤이었지 꿈속에서 나는 거울을 보고 있었지 거울 속에서 눈 대신 변기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 변기에 담긴 거울이 소용돌이치며 빨려들 때, 거울이 내 표정처럼 쩍 금가며 말했어// 눈물은 안에서부터 차오르지 않아 한 무더기 말과 냄새처럼 피어나는 풍경들을 네 시선이 고이는 곳에 싸질러 두는 거지 거기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구멍 속으로 빨려들다 변기 밖으로 몇 방울 튀면,// 그게 눈물이야 나를 보고 싶을 때면 변기를 열지 입을 대고 외친다 여보세요 메아리가 들려온다 변기에 입을 대고 외친다 나야 네 눈망울에 내 얼굴이 찰랑댄다// 바람은 메아리를 두텁게 얼리고 어둠을 얼렸지 욕실의 창밖은 걸음을 내디딜 수 없는 벼랑이었어 정상에 다가갈수록 추워지는 기압골에서 별빛은 가려졌다 드러났다 했지 지상의 온기는 죄다 빨려 들어갔고, 언저리에 묻어 고드름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보며, 오- 해가 떴다 외쳤지 구멍은 뭔가 빨려 들고 있는 중에는 보이지 않지 내 체온을 느끼고서야 따뜻하다고 말했어 아침이면 거울 속에서 나는 부은 몸을 떨며 언 채로 구조되었지//
* 제14회 《실천문학》 등단작

뒷모습 / 최정진
집 안에서 어렵지만 집 밖의/ 옥상에 가면 그의 굽은 등과 마주볼 수 있다/ 산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팔이나 다리 중에 하나가 사라지고 없는,// 지난 산행에서 돌아오던 그의/ 왼쪽 다리는 간데 없고/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풍란 한 촉을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말없이 가리키는 고갯짓을 따라 먼 산에 가보면/ 흰 양말을 벗어둔 그의 왼쪽다리가/ 등산로 구석 나무그늘 아래서/ 까맣게 여문 발톱들을 매달고/ 꼼지락거리며 쉬고 있었다// 오래 전, 두 팔을 심어 둔 산의 날씨는 사나웠다/ 바람이 불면 그의 두 팔은 나부낀다/ 야! 똥 방위라고 놀리던 집주인의 목 언저리에서,/ 손님의 수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아내 대신/ 그릇이나 가구들을 집 앞에 생가지처럼 부러뜨려 놓으면서,/ 팔 대신 뿌리내린 가녀린 화초들은 나부낀다/ 그때마다 지난밤에 걷히지 못한 어둠들이/ 웅크린 어깨에 안개로 걸려/ 아침까지 펄럭인다// 하나 남은 오른쪽 다리는 어디에 심을까/ 옥상 화단에 몇 안 남은 빈자리들을 살펴보는지, 그는 더 웅크린다/ 화단의 흙을 누군가 다져놓았다/ 누가 틔운 뒷모습인지 그 발자국에서도/ 그림자가 자라기 시작한다//
* 제14회 《실천문학》 등단작

첫발의 강요 / 최정진
발을 만지는 게 싫으면/ 그때 말하지 그랬어/ 외로워서 얼굴이 굳어가잖아/ 너의 집 앞에 다 왔어/ 창문을 열어봐/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참을 만큼 의자를 참았다는 듯이//

숫자를 찾아가는 / 최정진
방들이 집을 부술 듯이 차 있다/ 옥상은 이상하게 비어 있어/ 숫자와 맞서고 있다/ 십자가의 조명이 횟수로 나뉘려 하면/ 물어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생각조차 느껴지지 않게/ 너의 입으로 너의 이름을 부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최정진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병원 원장과 상담하는 두 시간 동안 같은 고양이의 울음이 들려왔다. 개는 짖지 않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앵무새는 고개를 갸웃거리길 반복했는데 그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생후 2개월 정도 됐어요. 어미가 죽고 세 마리를 구출했는데 마지막 한 마리 남은 아이예요.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지는 증오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고양이 울음이었다. 두 시간 동안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고양이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고양이 울음이 끊이지 않는 사이로 고양이 울음보다 더한 정적이 있었다. 그것은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사라졌다.//
* 자비에 르그랑 감독의 영화 제목

거울의 정리 / 최정진
꿈속에서 나는 거울을 보고 있었지 거울 속에서 눈 대신 변기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 변기에 담긴 거울이 소용돌이치며 빨려들 때 거울이 내 표정처럼 쩍 금 가며 말했어// 눈물은 안에서부터 차오르지 않아 한 무더기 말과 냄새처럼 피어나는 풍경들을 네 시선이 고이는 곳에 싸질러두는 거지 거기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구멍 속으로 빨려들다 변기 밖으로 몇방울 튀면// 그게 눈물이야 나를 보고 싶을 때면 변기를 열지 입을 대고 외친다 여보세요 메아리가 들려온다 변기에 입을 대고 외친다 나야 네 눈망울에 내 얼굴이 찰랑댄다// 바람은 메아리를 두텁게 얼리고 어둠을 얼렸지 욕실의 창밖은 걸음을 내디딜 수 없는 벼랑이었어 정상에 다가랄수록 추워지는 기압골에서 별칯은 가려졌다 드러났다 했지 지상의 온기는 죄다 발려들어갔고 언저리에 묻어 고드름처럼 반짝이는 햇살을 보며 오- 해가 떴다 외쳤지 구멍은 뭔가 빨려드는 중에는 보이지 않지 내 체온을 느끼고서야 따뜻하다고 말했어 아침이면 거울 속에서 나는 부은 몸을 떨며 언 채로 구조되었지//

유성우流星雨에 젖은 날 / 최정진
유성우가 내린다하여 강변에 간다/ 아직은 저녁이어서/ 수면을 따라 걸으며 기다리는 밤/ 석양 앞세워 밀물 차 오르는 바다처럼/ 강도 만조를 꿈꾸는 걸까// 수면이 상류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뜨거운 숨 뿜으며 거꾸로 걷는 아줌마들/ 등이 아니라, 밤으로 가는 저녁 하늘처럼/ 짙어가는 표정 마주 보고 걷는다/ 맞닥뜨린다는 것은 본래/ 더 가까워질 거리가 남아있지 않을 때/ 터벅터벅 멀어질 일만 남을 때 아니었나/ 눈 마주치며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을 수 있다니/ 앞서 가는 아줌마 눈이 밤처럼 깊어지고/ 거꾸로 보면 느낌표 같은 그림자가/ 찰박찰박 흔들리다 내 발을 향해 차 오른다// 한참을 걷다 거꾸로 흐르던 하류가/ 상류와 만나는 곳에서 멈춘다/ 차 오르던 밀물도 어디쯤에서 썰물과 만나/ 흰 물거품 일으키며/ 서로의 안부, 파도소리로 토닥였으리라/ 강변에 무리 이룬 억새/ 유성우를 기다리는 사람들 표정 잔잔하다// 어느 쪽으로도 흐르지 않는 수면에서/ 송사리들이 물 밖으로 몸을 활시위처럼 당긴다/ 그녀가 내 밖으로 튀었을 때도/ 저렇게 반짝이는 것이 흘렀었나/ 오늘은 페르세우스자리에서 별들이/ 지상으로 튀는 날/ 만조의 별자리가 쏟은 눈물/ 우린 그것을 유성우라 부른다//
* 제2회 CJ문학상 시 부문 대상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 최정진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 마주친 사람도 있는데 마주치지 않은/ 사람들로 생각이 가득하다/ 그를 보는 것이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외면하는 것이 선행도 악행도 아니다// 환멸은 차갑고 냉소가/ 따뜻해서도 아닌데/ 모르는 사람과 내렸다 돌아보면/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타는 것 같다//

햇볕에 비춰진 먼지가 빛나고 있었다 / 최정진
정교하게 조정돼 있으니 손대지 마세요 수도관에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이 물에 젖어 읽을 수 없었는데 한참을 쳐다보았다// 다음 계절에 작은 화분들을 정돈하다가 수도관에 새롭게 붙은 안내문을 보았다 같은 말이 다르게 적혀 있었다/ 안내문에 물이 번져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데 나는 읽고 있게 된다// 정교하게 조정돼 있으니 손대지 마세요// 계단과 창문 사이/ 햇볕에 비춰진 먼지가 빛나고 있었다//

인공과 호흡 / 최정진
나는 살아 있는데 살아나는 것 같다// 이 차체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길래 굉음을 우리로 바꾸는 것일까 이런 이상한 의문처럼 너는 왜 노래가 끝나는 부분의 가사를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죽어서도 살아나는 것 같다// 어두운 표정이 죽음을 드러내고 지나간다 목소리에서 언젠가 파헤쳐졌던 죽음이 쏟아진다// 누가 좋아하는 노래인지를 우선 기억하고/ 그 노래의 제목을 생각해내는 나무// 내가 살아나는 기분은 밤과 이어져 있다// 어디론가 가자고 묻지 않고 어디로 가는 중이라고 답하고 있는 그런 밤과 말이다// 너는 속삭인다// 어항이 반사하는 빛깔들에 방의 어두움처럼 혼자 드러나서//

눈사람이 어는 동안 / 최정진
당신은 무엇에 눈을 뭉쳐둔 것일까/ 당신은 편의점을 향해 걷고 있다 편의점 너머로 주택가가 어둡다 방이 우는 것 같다고 당신은 중얼 거린다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다/ 오후는 의심으로 가득하다/ 누가 빛을 망가뜨렸는지…/ 병원 로비의 기계에서 대기표가 나오고 있다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 시작이면서/ 당신은 거리가 어딘가 뒤쳐져 있다고 중얼거린다 주차장은 비어 있다/ 가까운 곳보다 먼 곳이 실감나는 이상한 밤/ 당신은 물 밖에서 살아가는 감각은 어떤 빛깔인지 묻는다/ 휘어진 길의 휘어지지 않은 부분을 생각한다/ 눈사람의 표정과 단추와 두 팔의 재료를 떠올린다 이미 눈덩이에는 그것들이 가득하다 웃음과 돌멩이와 나무의 파편이 눈덩이를 굴린다/ 들어와 있는데 들어오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넘치고 있다/ 무언가를 잃고 있다면 잃은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피둥/ 피둥//

몽야간夢野間* / 최정진
네가 꾸는 꿈 속으로 들어가려고 네 잠꼬대에게 길을 물은 적이 있다/ 시린 몸을 뒤척여서 네가 덮은 것이 이불이 아니라 강줄기임을 알았다 감은 네 눈꺼풀 아래로 꽃잎도 아니고 금붕어도 아니고 새의 깃털로 채워진 강줄기가 흘러들고 있었다/ 혹여라도 너와 닮은 여자를 볼 때면 그 여자가 안보일 때까지 나는 몸이 얼어붙는 기후에 속해 있어야만 했다/ 불어간 바람을 따라 허공이 한 줄기 파였고 바람소리가 석순으로 자라났다 환한 빛에 이끌려 동굴의 입구로 나오면 추위 속에서 떨어 온 나무의 시간만큼 나뭇가지마다 꽃송이가 발자국으로 피어나 있었다/ 내가 뒤쫓던 네 흔적은 떠나온 지 오래 될수록 가까이서 빛나는 향기였을까/ 헤어진 날 밤에 너는 함께 베던 네 방의 베개를 만리향 밑에 묻었다고 했다 덕분에 일만 시간이 지난 오늘에까지 내 잠을 통로로 풍겨 오는 네 머리칼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바람을 따라가다 길가에서 쉬는 모자를 주워 머리에 썼다 그때부터 나는 모자 속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꿈만 꾸게 되었다 내가 지르는 짐승의 비명소릴 따라 깨어나는 날이 늘어갔다/ 내 방의 베개를 마당에 내놓고 태우던 날 멀리 보이는 산의 골짜기 속에서 캄캄하게 타고 있을 동굴들을 떠올렸다 꽃잎이었다가 금붕어의 지느러미로 나부꼈다가, 한 토막 숯에 벽화를 무늬로 남겨 놓고 날갯짓으로 솟구친 새떼를 떠올렸다/ 죽어서 땅에 묻히면 동굴이 된다는 불길에게 제를 올려주고 싶은 밤이었다/ 잠이 들면 나는 새로 산 베개에 조금씩 꿈을 흘려둔다 잠에서 되돌아오는 길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네 입속으로 날아간 내 목소리는 어느 하늘 동굴 앞에서 떨고 있을까/ 꽃은 나뭇가지가 베고 자는 베개이다//
* 우루시바라 유키, '충사' 인용

수면에 비친 풍경 속으로 날아간 새 / 최정진
날이 저물면 햇살은 날개를 접고/ 지상에 내려와 밀물이 된다/ 숨을 고르면 바닥에서 찬바람이 불어온다// 포구 끝에는 구두가 한 켤레 놓여 있었다/ 유서는 그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구두 밑창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여름에서 겨울로 날아오는 새*가 있다 성에 낀 겨울의 하늘은 그 새가 날기엔 너무 딱딱하다/ 그 새에 관해 소문만 무성한 것은, 겨울 하늘에 부딪혀 죽은 새의 깃털이 거리 가득 눈으로/ 쌓이기 때문이다 소문의 새를 실제로 본 사람은 폭염과 폭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다/ 여름이 오면 폭염 속에서 얼어 죽어 날아간다// 발을 디딜 수 없어 수면이라 부르는 것이/ 바다에게는 바닥이라는 듯이/ 물속을 날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살아 있을 때였다고/ 몸이 굳자 바다는 그를 돌려보내주었지만/ 그의 몸은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고/ 수면에 비친 풍경 속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의 둥지처럼 걸려 있었다// 어떤 구름은 하늘로 쏘아올린 공기방울이고 어떤 구름은 올려다 본 눈빛이 하늘에 일으킨 균열이다 비오는 날 울적한 건 하늘에 구름을 일으킨 눈빛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찬바람에 덜덜 떨리는 몸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 버릴까 봐 포구에서 나는 벌어지는 입을 내 손으로 막고 앉아 있곤 했다// 사람들은 포구에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눈빛만은, 찬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사이로/ 깊이 가라앉았다 되돌아오곤했다// 한 켤레 구두가 놓인 포구에서/ 새둘이 수면에 비친 풍경 속으로 날아갈 때/ 허공을 쥐고 있는 새들의 발을 보면/ 발금을 보고 운명을 점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 황지우 시[겨울-나무로부터봄-나무에로]

인간의 가벽 / 최정진
시계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액자를 걸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타지 않고/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처럼/ 이미 이곳에 들어와 있다// 모두의 이름을 부르면서/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으면서// 사랑은 고통의 원인을 네게서 찾지 않는 세계이다//

비의 암각화 / 최정진
비의 암각화 마당에 고인 웅덩이를 어머니가 빗자루로 쓸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사냥한 짐승의 울음이 메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흙은 비에 젖고 동굴의 벽은 빗소리에 젖던 날이 있었습 니다 짐승의 비명을 사랑한 물이 하늘까지 달아나 구름이 되었고, 인간에게 연민을 품은 물이 지상에 돌로 남은 날이 있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빗소리를 주워 남들 몰래 동굴의 벽에 숨기고 있었습니다 비가 그친 줄도 모르고 빗소리를 숨기다 그만 사냥을 나서려면 아버지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내 모습을 기이하다 여긴 아버지들이 돌칼로 겨누고 달려든 순간, 내 몸에 뚫린 굴에도 어떤 형상들이 그려졌 을까요 돌칼의 하염없이 날카로운 딱딱함에 내 몸에서도 자꾸만 빗소리가 새나왔습니다// 비가 오면 아버지들은 동굴 밖의 빗줄기를 보며 돌칼의 날이 아직 무디다하고, 어머니들은 그런 아버지들의 어깨에 기대어 빗소리를 듣던 날이 있었습니다// 쓸어내도 마당의 웅덩이는 내가 쓰러졌던 자세로 고입니다 저 웅덩이들의 나열이 비 오는 날에서 비 오는 날 로만 이어지는, 비의 연표임을 알겠습니다 지상에 웅크 리고 울음마저 썩어가는 내 육신 앞에 앉은 어머니 하나 멍한 눈빛을 하늘에다 쏟아 붓고 있었나요 피부에 갇힌 구름이 되어 자신의 몸에 빗살무늬를 새기고 있었나요// 나는 한 없이 깊은 동굴입니다 인간들이 옷으로 꿰어 입기도 하고 말려뒀다 먹기도 하는, 사냥 당한 시간입니다//

경이로운 강습소 / 최정진
그녀가 내게 약속한 것은 무성한 잎이었다 건물의 구석에서 눈을 떴을 땐 밤이었고 내게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물이 되었다 나는 열이 났고 그녀는 내게 금방 낫는 감기라 했지만, 그녀는 춥다면서 내 앞에서 자꾸만 옷을 벗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드나들었다 나를 강물이라 여긴 사람들은 수면 밖으로 튀는 물고기의 얘기를 내게서 들었다 나를 구름이라 여긴 사람들은 창가에 기댄 채 낮은 곳을 디디며 흘러가는 소리의 지름길을 내게서 봤다// 나는 소리를 떠나 피아노가 되었다 새의 날개는 창밖에서 자꾸 제자리로 돌아갔고 덮개를 열어보면 피아노 안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피아노였지만, 들판에 놓인 고인돌이었으며 옥상의 빨랫줄에 며칠째 걷히지 못하고 나부끼는 팬티에서 마르는 무늬이기도 했다 뭐라 불리든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건반을 누를 때마다 내게서 무성히 나부끼는 잎을 음악이라 부르며 너는 어느 곳에나 있게 되었다고 했지만, 나는 어디든 늪을 드리우는 게 싫었고// 건반을 만져보면 슬픔은 굉장히 딱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버스의 탄성 / 최정진
나는 너의 어디에 닿은 걸까 버스가 급정거한 순간 소리 위로 정교하게 쓰러질 듯// 너를 밀어버렸지만 쓰러진 건 너와 내가 아니었다 당겨지는 귀를 내 팔이 붙들고 있었다 내 팔은 방아쇠를 당겼는지도 모른다 날개를 젓는 새처럼 귀가 많게 보였을지도// 버스가 급정거한 순간 잠들고 싶은 집을 떠올렸는지도 너의 비명은 너의 다짐인지도 모른다 버스는 더 빠르게 지나갔는지도// 버스가 멈추고 무언가 두고 온 건지 튕겨나간 건지 끌려가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네가 멀어지고 있었다//

숫자를 찾아가는 / 최정진
방들이 집을 부술 듯이 차 있다/ 옥상은 이상하게 비어 있어/ 숫자와 맞서고 있다/ 십자가의 조명이 횟수로 나뉘려 하면/ 물어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생각조차 느껴지지 않게/ 너의 입으로 너의 이름을 부르며//

동경 5 / 최정진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있다// 내가 믿는 시와/ 꿈꾸는 시와/ 쓸 수 있는 시가 모두 달랐다// 그곳은 음악이 지나치게 크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곳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곳에선 원하는 만큼 팔을 모을 수 있고/ 모은 팔과 모은 팔이 닿지 않는다// 어떤 동작을 취해도/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무엇도 속일 수 없는 중에// 장갑을 갖고/ 손가락의 역할들을 나눈다/ 그들이 그곳에 흩어져 있기를 바라고 찾는다// 그곳은 너무 낮다/ 목소리보다 발소리가 먼저 도착한다//

열차 9호차 / 최정진
열차의 창문에 서린 김을 보고 있을 때 내가 어떤 커플의 재잘거림을 듣고 잠에서 깬 것이라고 너는 말한다// 내가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에도 너는 내가 어떤 커플의 재잘거림을 듣고 잠에서 깬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자/ 응/ 이번에는 내가 깨울게// 앞좌석에 앉은 사람은 조용히 깨어 있고 흔들림 없이 잠들어 있어 라고 뒤이어 네가 말할 때/ 나는 너를 보기 시작하고/ 어떤 커플이 열차의 객실 어딘가에서 재잘거리고 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 최정진
우리는 마주 보면 한곳을 본다/ 이번 마음은 느리지 않게 이 밤만큼은 네가 시작해봐/ 우리는 이곳에 오고 있다/ 폭죽을 터뜨리려다 하늘을 처음 본 표정을 짓는다/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없었다/ 누군가 붙들지 않는데 가지 않는다//

피아노 / 최정진
벽이 두꺼운 연습실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새로 연습실을 쓰는 사람들은/ 빛이 나게 먼지를 닦아주었지만 너 따위 이제,/ 입술을 깨물고 악보로 날 때리지는 않았다/ 문을 닫기 전에 슬픈 눈으로 날 한번 보지는 않았다// 밤에만 오던 그녀가 내게 기대고 책을 읽을 땐/ 이제는 없는 가지라든가 나뭇잎을 떠올리며 그늘을 드리워주곤 했다/ 그녀가 나가면 지나고 있을 복도 쪽을 향해/ 집에서 키운다는 고양이의 울음을 울어보곤 했다/ 복도 끝에서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지만/ 발소리가 그녀를 끌고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습을 찾은 그녀는 야위어 있었다/ 몇해가 지났지만 입은 옷의 색깔이라든지 머리 모양은 그대로였다/ 그대로여서 야위어야 했을까/ 그녀는 날이 밝도록 벽을 보는 날들이 늘어갔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한참 바라보다/ 내게 몸을 엎드린 날이면/ 그녀의 검은 눈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그 물은 뜨거워서 그녀 스스로 훔치지 않길 원했다/ 나는 기억을 되살려 눈을 가려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펭귄과 달의 난방기 / 최정진
내 방의 옷장에 그녀를 들였다 옷장 속으로 날씨들이 사라져갔다// 그녀를 만난 곳은 강변이었다 옷을 잔뜩 껴입은 네 몸이 참 뜨겁구나, 그녀에게 벗어준 장마는 한동안 내가 앓던 감기였다// 달이 커졌다 작아졌다 달이 녹았다 얼었다 달을 지나다 눈보라가 일면 혼자만 리코더를 불지 않고 입에 물고 있던 음악시간이 떠올랐다 리코더는 옷장에 걸어둔 옷처럼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음악은 갇힌 곳에서만 좋게 들려왔다//

건너뛴 심장박동 ㅡ첫과 처음의 사이 / 최정진
머리맡에 전화기가 있다 모두가 무서워할 만한 이야기를 참고하면/ 오늘밤에 골목에서 목을 돌아보는 입김과 부러질 하이힐이 상상되게/ 불 꺼진 너의 집 창문을 둘러보다 비켜서게/ 그는 조용히 있어 부르지 마 정각과 물 한 컵과 비상벨과 메모장을/ 머리맡에 전화기가 있다 대화중에 유리를 보며 얼굴을 고치다가 어디론가/ 골목에서 두 사람이 자조같이 무언가의 시도같이 걸어가게/ 닿을 만한 거리가 강조되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참고하지 않으면/ 골목의 냄새가 주차장까지 이해한다는 듯이//

가능성의 엉뚱한 핑계가 아프는 / 최정진
네가 다시 보이든. 누가 유리를 의식하는, 극장에서 꺼내면서 줄거리가 구겨지는./ 두 눈은 보고 있다/ 육중한 자동차가 네 앞에서 서서히 방향을 바꾸든. 손은 손잡이의 분위기에 못박혀 떨고 있다/ 너의 역할이 잘 움직여지지 않든./ 극장에서 꺼낸 줄거리를 찢어서 얼굴의 땀을 닦든. 네 얼굴이 굳기 전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 문제가 답이든.//

로션의 테두리 / 최정진
로션을 바르다가 나는 시작된다 이것을 내 체취라고 생각하면 머릿속은 새하얘져서/ 네가 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소리가 쏟아지지 않게/ 인사를 한 만큼 얼굴은 당겨졌다가 견고하게 어디론가 베개에서 겨우 손을 놓은 냄새가 맡아지기 전에/ 맹세와 다른 체취를 맡아본 적이 없게/ 내 답은 겨우 문을 열었다 닫지만 내 불안이 가본적 없는 곳을 지나간 곳으로 만들기 전에/ 도착을 거부하고 있다 용서가 잊었던 용서를 생생하게 겪게//

대담한 연결 ㅡ관심 / 최정진
상자를 흔들고 흔들어보는 우리의 재미에/ 과녁은 명중되길 기대했다는 듯이 막혀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거침이 없다 아무것도 와닿지 않나봐/ 네가 남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웃으면 눈알이 돌아간다 우겨넣은 손가락이 빠지지 않아서 시위를 자꾸 당기나봐 등을 구부리고 한쪽으로 과녁들을 미나봐 안기려고/ 안긴 사람을 밀어내고 있다 방이 부풀다 미칠 만큼 승강기가 추락할 만큼 떨고 있다 궤도를 돌아가는 계량기의 바늘처럼/ 풀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상자가 네게도 있겠지? 네 목소리가 듣고 싶다/ 더는 내려갈 수가 없다 너와 이을 말이 더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세면대에 얼굴을 띄우고 늘 해오던 세수가 어려워지고 있다 물속에서 눈을 뜬 채로/ 어른대는 그림자에 돌아보다 부딪히기를 기다리나봐 등뒤에 꿈이 있다고 믿을 뻔했다/ 우리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거의 믿을 뻔했다//

내 몸 안의 반지층 / 최정진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뼈가 헐거운 새가 울다가 텅 빈 곳으로 날카롭게 날아갔다/ 욕조에 담긴 내 몸이 물을 더럽히고 있다 뼈는 내 몸 안에 부풀린 딱딱한 거품이다 나는 내 방의 여러 구석에 나뉘어 있고 방은 자꾸만 비좁다/ 나는 어디서든 머리를 기대고 쉽게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면 빠져 있을 머리카락 몇올을 그대로 두고 왔다/ 욕조에 누워 책을 읽는데 욕조 밖으로 뻗은 발이 시리다 창밖으로 무덤이 보인다 내가 몸을 씻는 높이에 누군가 죽어 있다 이 높이에서 애인과 나는 옷을 벗는다 이 높이의 욕조를 향해 새들이 날아오르 고 있다 나를 지나갈 것이다/ 머리카락 몇올은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만 내 곁에 와서 나를 안쓰럽게 쓰다듬다 간 손짓인가/ 욕조로 쏟아지는 물을 보면 계단은 중간에서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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