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詩 느낌

신미나 시인

부흐고비 2022. 7. 11. 08:00

신미나 시인, 웹툰 작가
1978년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강릉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를 쓸 때는 ‘신미나’ 그림 그릴 때는 ‘싱고’이다.시집으로 『싱고,라고 불렸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와 시툰 『詩누이』, 『안녕, 해태』(전3권) 등이 있다. 2008 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진흥기금, 2016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집발간지원금 수혜

 



싱고 / 신미나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저무는 태양 속에 있었고/ 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다/ 그때부터 그 기분을 싱고, 라 불렀다/ 싱고는 맛도 냄새도 없지만/ 물이나 그림자는 아니다/ 싱고가 뿔 달린 고양이나/ 수염 난 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 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싱고답지 않은 일/ 싱고는 너무 작아서/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풍선껌처럼 심드렁하게 부풀다가/ 픽 터져서 벽을 타고 흐물흐물 흘러내린다/ 싱고는 몇번이고 죽었다 살아난다/ 아버지가 화를 내면/ 싱고와 나는 아궁이 앞에 앉아/ 막대기로 재를 파헤쳐 은박지 조각을 골라냈다/ 그것은 은단껌을 싸고 있던 것이다/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첫사랑 / 신미나
큰물 지고/ 내천에 젖이 불면/ 간질간질 이빨 가는/ 어린 조약돌 몇개 씻어/ 주머니에 넣고 가지요/ 상냥하게 종알거리고 싶어/ 나는 자꾸만 물새 알처럼 동그래지고/ 그 어깨의 곡선을/ 이기지 못하겠어요, 라고/ 쓰고 싶은//

안식일 / 신미나
여름 성경학교가 시작되었다/ 옷장을 열었다가 그냥 닫고/ 교복 치맛단을 접어 입었다// 매미 껍데기가 나무에 붙어 있었다/ 칼로 가른 듯/ 등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 서울에서 온 목사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라 했다/ 그것이 믿음이라 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날/ 신도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아름답고 무서웠다// 엄마한테 얘기했지만/ 쪼그려 앉아 마늘만 깠다/ 물에 불린 마늘 껍질이 쏙 빠졌다// 우리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곳에서 천국은 얼마나 멉니까// 동생이 혀를 동그랗게 말아/ 침방울을 날리는 사이/ 여름이 갔다//

안목에는 있고 안도에는 없는 / 신미나

물고기는 먹을 수 없는 말 같고/ 생선은 먹을 수 있는 말 같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야// 내 혀는 여태 죽은 것들만 받아왔는데// 죽어서 조용한 것들만 삼켰는데// 웃기지도 않는데 웃음이 난다/ 뼈도 아닌 살도 아닌 몸이// 이토록 싱싱하게 미치는 집중을 본 적 있니?// 산 낙지는 젓가락 사이로 미끄러지고/ 놓친 건지 잡으려는 건지// 잘 살자, 인간적으로/ 잔을 채우며 네가 말했을 때// 인간적이란 말은 참 질기구나/ 어금니에 낀 낙지처럼// 산 몸에서 죽음이 사는데/ 인간이 어떻게 몸 밖으로 나갈 수 있니// 씹지 말고 그냥 삼키자/ 죽은 듯이 살자// 죽은 물고기만이/ 뒤집혀 흰 배를 보여준다//

늑대 / 신미나
눈 쌓인 숲 속에/ 입김을 날리며 서 있었다/ 막내야, 부르니까/ 꿈속의 너는/ 몸을 돌려 나를 봤다/ 안전모를 옆구리에 끼고/ 우주복처럼/ 하얀 방진복을 입고 있었다/ 추우니까/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목도리를 씌우려고 했는데/ 너는 몸을 털었다/ 이상한 약 냄새가 풍겼다/ 어디로 갈 거냐고 했더니/ 코를 들어 언덕 위를 가리켰다/ 스위치를 올리면/ 클린룸의 불빛이/ 냉장고 속처럼 환한 곳이었다//

산 너머 / 신미나
문고리에 실 묶고/ 방문을 닫는 찰나/ 번쩍 세상이 온다/ 아가, 세상이 어찌 보이냐/ 할아버지 어린 나를 무등 태우고/ 뒤돌아서서/ 지붕 위로 어금니 던진다/ 까치가 어금니 물고 간/ 곡선으로/ 내 젖무덤은 부풀어 올라/ 백내장 걸린 할아버지/ 중얼거리시데/ 저 봐라, 상갓집에서 혼 빠진다//

묘의 함(函) / 신미나
묘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아이/ 헝겊 인형이 대신 말을 한다/ 오색 종이로 만든 가마에/ 고깔모자를 쓰고/ 묘는 검정으로부터 왔다/ 묘의 주머니는 작고/ 이따금 탄내가 난다/ 주머니 속에는 타다 만 볍씨가 있다/ 묘의 상자 속에는/ 문방구에서 훔친 종이 인형이 있고/ 엄마를 삽으로 때리던 아버지가 있고/ 정글짐 꼭대기의 해가 타고 있다//

마고 / 신미나
갓난이였을 때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면서/ 어머니가 마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마고는 손톱이 고사리처럼 돌돌 말렸는데/ 긴 손톱으로 땅을 긁으면 온 천지가 아이, 시원타! 기지개를 켜고/ 재채기 한번에 산을 쪼개는 크고 힘센 할미// 마고는 곧 저승으로 떠나게 될 아기들이 가여워/ 제명과 맞바꿔 아기들을 살린다고 했습니다// 아기의 숨구멍에 흡, 하고 입김을 불어/ 군밤을 식히듯이 오른손 왼손 번갈아 둥글려/ 경단처럼 된 것을 여우처럼 물고 다니는데// 마고의 입에서 아기의 입으로 옮겨주면/ 꺼져가는 숨을 살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고와 눈이 마주친 아기는/ 경기를 일으켜 그 기억을 지우게 된다고// 내 혼도 어려지고 싶을 때가 있으니/ 어떤 날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좇아/ 눈보라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티를 따라갑니다// 기척 없이 어루만지다 사라지는 손/ 마고의 백발을 땋아 그네를 타는/ 아기들의 웃음소리가 올리는 설산으로 갑니다//

마고 2 / 신미나
오랜만에 찾아온 할머니가/ 장사치로 떠도는 게 싫어서/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화를 냈더니/ 이고 있던 채반을 내려놓고 갔다/ 채반 위에/ 팥 한 알/ 또렷이 남았다/ 다음날엔 보따리를 두고 갔다/ 매듭을 풀어보니/ 지푸라기 인형이 나왔다/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일으켜 세워도 자꾸만 목이 꺾였다/ 배를 갈라보니/ 노란 것이 반짝 했다/ 금니였다/ 할머니의 등에 새긴 문신은/ 쟁기, 방패 귀갑/ 귀갑, 쟁기, 방패/ 마작처럼 패를 뒤집어/ 얼굴이 자도르르 돌아간다/ 쟁기, 방패, 귀갑/ 귀갑, 쟁기, 쟁기/ 눈, 코, 잎을 갈아 끼운다/ 높고 슬픈 노래를 물려주려고/ 잠들면 가만/ 코에 손가락을 대본다/ 할머니는 피가 너무 환해서/ 인간의 잠을 자지 못한다//

탱화 3 / 신미나
붉은 구슬을 입에 물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흰 천을 배로 가르며 할머니가 나왔 습니다/ 천수관음은/ 천개의 손으로 슬픔을 어루만진다는데/ 손이 천개면 세상의 눈물을 닦을 수 있습니까/ 뜨거워서 그래, 아가/ 어쩌다 네 마음에 명랑을 잃었니?/ 할머니는 천수(泉水)를 한 모금 머금고/ 내 입에 흘려 열을 식혀 주었습니다/ 봄에 난 콩 싹처럼 웃어보라, 해를 피하지 않는 해바라기처럼 용감해라, 물 만난 오리처럼 신나게 욕해보라, 비 온 뒤 제비처럼 까불어라, 분수처럼 솟구쳐라, 쪼개고 쑤시고 부러뜨려라, 톱날의 요철과 같이 벌떼처럼 화를 내라, 연기처럼 곧게 서라, 백합처럼 기도하고, 뛰고 달리고 돌아서서 안고 뱉고 찢고 발 굴러라/ 할머니는 겹겹의 모란 치마로/ 나를 폭 싸서 공중에 띄웠습니다/ 키질하듯이 위아래로 까부르니/ 몸이 아기만큼 작아져/ 배꼽이 간지럽고/ 이히히 웃음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말을 배우기 전/ 아기들만 아는 우스운 재미로/ 슬픔을 걷어가려 한 것인데/ 오랜만에 웃은 게/ 세상에 없는 일인 걸 알고/ 섭섭해서 눈을 감았습니다//

정미네 / 신미나
장마 지면 정미네 집으로 놀러 가고 싶다. 정미네 가서 밍크이불을 덮고 손톱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고 싶다 김치전을 부쳐 쟁반에 놓고 손으로 찢어 먹고 싶다// 새로 온 교생은 뻐드렁니에 편애가 심하고 희정이는 한 뼘도 안 되는 치마를 입는다고 흉도 볼 것이다 말 없는 정미는 응 그래, 싱겁게 웃기만 할 것이다// 나는 들여놓은 운동화가 젖는 줄도 모르고 집에 갈 생각도 않는다 빗물 튀는 마루 밑에서 강아지도 비린내를 풍기며 떨 것이다// 불어난 흙탕물이 다리를 넘쳐나도 제비집처럼 아늑한 그 방, 먹성 좋은 정미는 엄마 제사 지내고 남은 산자며 약과를 내올 것이다//

지하철역에서 십오분 거리 / 신미나
마당이 있는 저 집에서 살면 참 좋겠다 언덕 위에는 여자 대학교가 있고 배구공 튕기는 소리도 가끔 들리고/ 비빔국수 잘하는 냉면집도 있고 가을이면 키 큰 은행나무가 긍지처럼 타오르는 동네/ 문방구 평상에 한참을 앉아 있어도 핀잔주지 않는 할머니가 있고 옆에서 신문지 깔고 고구마순 껍질이나 같이 벗기고 싶고/ 해 지기 전에 수건을 걷어 오른팔에 얹고 옥상에서 내려갈 때 젖이 불은 개가 헐떡이며 걸어가는 것을 보는/ 집 보러 왔다가 그냥 간다/ 이가 썩어 구멍 난 데를 혀로 쓸며 돌아보는 사직동//

무거운 말 / 신미나
요새 택배비 얼마나 한다고/ 저 무거운 걸 지고 다녀/ 거지같이// 누구더러 하는 소린가 했더니//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아버지가 온다/ 쌀자루를 지고 낮게 온다// 거지라니,/ 불붙은 종이가/ 얼굴을 확 덮친다// 다 지난 일인데/ 얼굴에 붙은 종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신부 입장 / 신미나
날계란을 쥐듯/ 아버지는 내 손을 쥔다/ 드문 일이다// 두어 마디가 없는/ 흰 장갑 속의 손가락// 생의 손마디가 이렇게/ 뭉툭하게 만져진다//

길음동 / 신미나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게 된다/ 누가 붉은 페인트로 써놓은 소변금지/ 간판은 의상실인데 과일 파는 집/ 할머니가 전구를 갈아 끼울 때처럼/ 헝겊으로 조근조근 사과를 돌려 닦을 때/ 퇴근 시간쯤 마주치게 된다/ 얼굴만 아는 뚱뚱한 여자/ 얼굴에 기미가 들깨가루처럼 핀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욕하며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다/ 울지 않으려고 성을 내며 남편을 걷어찬 적이 있다/ 그녀와 스칠 때 빙그레 웃음이 난다/ 그녀를 닮은 뚱뚱한 아들이/ 엄마아, 하고 탁탁탁 달려오자/ 그녀는 한 손으로 번쩍 아이를 들어올린다//

연 / 신미나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 찌르기도 전에 너무 쉽게 부러졌다/ 나는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머리를 감고 논길로 나가면/ 볏짚 탄내가 났다/ 흙 속에 검은 비닐 조각이 묻혀 있었다// 어디 먼 데로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동생은 눈발에 노란 오줌 구멍을 내고/ 젖은 발로 잠들었다/ 뒤꿈치가 홍시처럼 붉었다// 자꾸만 잇몸에서 피가 났고/ 두 손을 모아 입 냄새를 맡곤 했다// 왜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고/ 도시로 간 언니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가끔 뺨을 맞기도 했지만 울지 않았다// 몸속 어딘가 실핏줄이 당겨지면/ 뒤꿈치가 조금 들릴 것만 같았다//

레몬 / 신미나
한 알의 레몬이/ 테이블 위에/ 있다/ 오래전에 있었던 것처럼/ 금방/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한 알의 레몬이/ 눈앞에/ 있다/ 그것을 치우면/ 레몬은/ 과거형으로 존재한다/ 흰 테이블보 위에/ 레몬이 있다/ 눈을 감아도/ 레몬은/ 레몬 빛으로 남고/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진심으로 보인다//

 

모란과 작약을 구별할 수 있나요? / 신미나
당신은 신발을 꺾어 신고 앞서 간다/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면 이별수가 있다길래 벗어놓은 당신의 신발에 몰래 발을 넣은 적도 있다 반뼘이 컸다// 이 봄은 끝내 소아병동 앞뜰에 할미꽃과 개양귀비와 망초를, 모란과 작약을 풀어놓았지만 내 눈은 당신의 신발 뒤축에만 가 앉는다/ 거기 앉아 구겨져 산 지 오래되었다// 손톱을 깎아야겠네/ 내리는 햇빛에 손목을 내밀면 파란 핏줄이//

 

그러나 석류꽃은 피고지고 / 신미나
풍문은 늘 대문 밖에서만 떠돌았다// 삼복에 애 낳다 숨진 처녀애가 살았다는 집 담벼락/ 거기, 어금니 금가도록 아득바득 이 갈던 사랑이 있었나 끝내 숨 놓지 않으려는 핏발 터진 눈동자 있었나// 알알이 탯줄 마른 애기들이 줄기 타고/ 살아서 돌아오는 대낮/ 천길 만길 무서운 하늘길이 있어, 산목숨 데려가는 소리가 있어// 하늘이 데려가는 목숨은 어디로 가는가 혀를 차도 모를 일 귀가 넷이어도 들을 수 없는 일이라// 짹짹 피는 저 꽃은 철없이 붉은 주둥이 벌려쌓는데//

복숭아가 있는 정물 / 신미나
그대라는 자연 앞에서/ 내 사랑은 단순해요// 금강에서 비원까지/ 차례로 수국이 켜지던 날도// 홍수를 타고/ 불이 떠내려가는 여름/ 신 없는 신앙을 모시듯이//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과즙을 파먹다/ 그 안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사랑일 수밖에요// 죽어가며 슬은 알/ 끝으로부터/ 시작으로 들어갑니다//

오이지 / 신미나
헤어진 애인이 꿈에 나왔다// 물기 좀 짜줘요/오이지를 베로 싸서 줬더니/ 꼭 눈덩이를 뭉치듯/고들고들하게 물기를 짜서 돌려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런 게 미안했다//

가지의 식감 / 신미나
물탱크에 걸린/ 해가 짧아졌습니다/ 야채 장수가 트럭을 몰고/ 오르막을 내려가고// 해가 터진 것처럼/ 등 뒤에서 구름의 둘레가 밝습니다// 어제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생각했던 모습과 다르네요/ 자꾸 웃으면 사람이 약해 보여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왜 웃는 사람// 양파가 굴러갑니다/ 언덕 아래로/ 감자와 토마토가 굴러갑니다// 세상은 이상한 수건돌리기 같아서/ 자꾸만 웃음이 납니다/ 등 뒤에 수건이 놓인 줄 모르고// 식재료는 둥글고/ 짓물러서 흠이 많습니다/ 어느 바닥에서도/ 잘 구를 수 있습니다// 저녁엔 야채 수프를 끓입니다/ 야채는 하나의 색을 입고/ 집안 곳곳에/ 냄새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풀이 죽지 않은 푸성귀는/ 초록을 자책하지 않습니다//

커튼콜​ / 신미나
그가 웃기려 할 때 사람들은 웃지 않았고/ 그가 진지할 때 사람들은 웃었습니다// 웃긴다는 말과 우습다는 말 사이에서/ 모자 밖으로 미리 나와버린 비둘기처럼 어리둥절한 자세로/ 고맙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 단지 키가 작아서 사람들을 올려다봤는데/ 누군가는 비굴한 눈빛을 읽고/ 누군가는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역할은 진짜 연기자가 나오기 전에 사람들을 웃기는 것/ 무대의 중앙에서 비켜선 작은 사람// 그는 왕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으스댔지만/ 그 모습이 그를 종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혼자서 걷어차이고, 스스로 뺨을 때리고/ 원맨쇼를 하면서 땀을 흘렸습니다/ 최선을 다할수록 박수 소리가 작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웃습니까/ 그는 웃을 때도 눈물 나게 웃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상한 고백을 받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인간이 원숭이 흉내를 낸다는 것이/ 원숭이 흉내를 내는 인간을/ 다른 인간이 보고 웃는다는 것이// 이 꽃은 원래 당신에게 주려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꽃을 주고 싶습니다/ 꽃을 주고 싶어서/ 원래부터 붉은 그의 낯빛을/ 수줍음으로 읽었는지도 모릅니다// 방금 전까지/ 꽃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낯설어집니다/ 물끄러미 빠져나갑니다// 이 꽃은 원래 당신에게 주려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연기하지 못하는 사람을/ 아마추어라고 부릅니다//

​오후 세시 / 신미나
쟁반에 무당벌레가/ 날아들었다// 갸웃거리는 더듬이의 궁리/ 시고 붉은 향로를 따라// 보라, 이 고요한 집중을/ 무당벌레는/ 자신의 무늬를 조롱하지 않고/ 앞으로 간다/ 골똘히 간다// 과도를 세워/ 무당벌레를 막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뒤에서 앞으로/ 일어서는 벽/ 물러서지 않는 벽// 그는 잠시 멈춘다/ 불행을 희롱하는 신을 마주친 듯이/ 깊고 작은 숨을 고른다// 실밥처럼 가는 다리/ 저 등에 수수 한알도/ 버거울 것이다// 무당벌레가 간다/ 금방 뒤집혀버릴/ 불안마저 데리고 간다/ 방향이 의지가 된다//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 신미나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오래 보는 사람이었지/ 계단 위에서 계단 아래를// 거기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 자라/ 한꺼번에 살아버리려는 듯이 긴 한숨을 쉬었지// 죽어버려야겠다/ 너도 죽을 거야/ 그 말을 하고는 당나귀처럼 이상하게 웃었지//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알 수 없는 사람/ 새끼를 낳자마자 물어 죽인 개를 이해했지// 너는 네 아비를 닮아 눈물이 헤프구나/ 눈물이 흐르기 전에 뺨을 쳐라/ 남들이 네 속을 뒤적거리기 전에 네가 먼저 끝내라//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동물처럼 울었고 식물처럼 사랑했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닭을 잡았지만/ 따뜻한 음식을 내올 때는 악기를 다루듯 했어/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어올릴 때처럼/ 터진 냄비 뚜껑을 가볍게 들어올렸지// 자, 야생의 시간이다/ 열 손가락에 기름을 묻히고 살코기를 발라주었지/ 포크를 쓰지 않고 힘줄을 끊었지// 밤색으로 그을린 발등/ 손등에 돋은 검버섯이 흙의 것이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지?/ 오직 당신의 것, 당신 자신이 된, 당신의 몸을//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여덟 번 아이를 낳았고 피를 몇 되나 쏟았지/ 뙤약볕을 욕하면서 쇠뜨기를 쥐어뜯었지/ 그녀는 자갈밭으로 갔고/ 내가 꾸민 화원으로 순순히 들어오지 않았어//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곡주를 맛보고 소매로 입가를 훔쳤지/ 찡그리듯 웃었다고 비웃는 게 아니야// 어느 날, 나를 불러 무릎에 앉히고는/ 손을 펴봐라/ 바늘에 실을 길게 꿰어/ 손바닥 위에 늘어뜨렸지/ 피돌기를 따라 바늘이 점괘를 낸단다/ 왔다갔다/ 호를 그리며// 너는 딸 하나에/ 아들 둘/ 자식 셋을 낳을 거야// 틀렸어요/ 집에는 고양이 두 마리뿐인걸요//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찡그리듯 웃었지만 화난 게 아냐/ 玉이나 子, 順 자가 들어간 이름은 흔했지만/ 당신처럼 웃는 사람은 혼자였지//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자벌레처럼 몸을 늘여서/ 허리를 반으로 접고/ 또 접고/ 한 줄씩/ 들어간다/ 나의 시 속으로// 그리고/ 계속 계단//

속죄 / 신미나
사람들이 어렵게 꺼낸 얘기라며 돌을 주고 갔습니다/ 던지면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돌/ 이 돌에 대해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들은 실컷 울고 난 뒤에 평온해진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 돌을 받아줘서 고맙고 미안하다고/ 이제야 물웅덩이에 뜬 무지개가 보인다고/ 흙탕물에서 핀 연꽃이 깨끗하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혼자서 돌을 주고 떠난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돌을 주머니에 넣고 걸을 때마다 발이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그들을 만나면 얼굴에서 돌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저는 점점 무거워지는 돌을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돌이 피투성이 얼굴을 하고 운다고/ 밤마다 이를 가는 소리를 견디기 힘들다고//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돌이 다 있느냐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늦었으니 집으로 돌아가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나의 죄/는 너무 오래 돌을 매만진 것입니다/ 주머니에서 비슷한 돌을 꺼내 보여 주지 않은 까닭입니다// 돌아가는 길에 저는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쌓고 쌓은 얼굴로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 그중에는 저를 닮은 돌도 있었습니다// 저를 닮은 돌을 주웠습니다/ 돌을 없애는 방법은 돌을 되돌려 주지 않는 것입니다/ 안된다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돌을 묻을 구덩이를 찾기 시작 시작했습니다//

찬물 / 신미나
대문을 열어놓고 자자/ 몇 밤 지나면 올 거야/ 엄마가 다시 올 거야// 동생은 겨울 수도꼭지처럼 조금 울었고/ 나는 마루에 모기장을 쳤다// 백열등 불빛 아래/ 꼬리로 툭툭 날벌레를 쫓는 소/ 날개를 버리고 얇게 죽어가는 하루살이의 배// 취해 잠든 아버지가/ 벌컥 방문을 연다//

부레옥잠 / 신미나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 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 위에 공방(空房)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볼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 솜털 뻗는 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 참 오랜만에 당신/ 오실 적에는 볼 밝은 들창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민낯을 보겠네//
*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봄날 / 신미나
담 넘는 기침소리 질긴 기침소리 어려워서/ 에둘러 가려 했나 애먼 길 가려 했나/ 천지사방 다투어 꽃불은 내리는데/ 제 빛깔로 불땀 심어 개나리는 금쪽인데/ 천장 낮은 방에 누워 당신 홀로 캄캄한가// 보아라, 장물처럼 숨겨둔 내 아버지/ 피가래 밭은 손수건 찐득하니 말라가고/ 북어 한 쾌 못 든 빈손이 무거워서/ 꽃등에 붕붕대는 두엄자리만 보고 서 있나/ 장독 아래 괸 돌처럼 어금니 깨물고 서 있나//

옛일 / 신미나
해마다 잊지도 않고 공양하나/ 저 꽃들, 보노라니// 어쩌나/ 죽어도 너를 못 잊는다는 내 약속은/ 거짓이었어라// 너 없어도 찢어진 살 위에 새살 돋고/ 밑이 젖는 내 몸 봐라/ 어쩌나/ 향불 한 올 피우지 못하고/ 너는 이제 뜨문뜨문 강가에 던진 돌이나 되었는데// 내 슬픔만으로 꽃모가지 하나 꺾을 수 있느냐/ 산비알에 돌짝 하나 굴릴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어찌 잊어/ 어찌 잊을 수가 있어// 지글자글 타는 자갈밭 맨발로 걸으며/ 울던 내 낯도 옛일, 다 옛일//

​목련봉방(木蓮蜂房) / 신미나
나, 저 꽃봉속에 몰래 살림을 차려 딱 십오촉 밝기로만 살았으면// 지붕을 거쳐 굴러간 별구슬 불러다 유년의 앞마당 소란했으면// 그릇 부딪히는 소릴 들으며 설거지하고 꽃가지에 이불 널어/ 너와 나 희게 펄럭였으면// 텃밭에는 자잘한 비밀 몇 톨 심어두고 뒤꿈치에 꿀물 묻혀 늙어가는/ 너의 마른 입술을 적셨으면// 깰 줄 모르는 너의 꿈길을 내가 살아 맨 나중까지 배웅하고 혼자/ 날개 비비며 풀잎처럼 가난한 노랠 불렀으면// 그렇게 살아, 고봉밥 비워내고 가지가지 마다 사기밥그릇 매단// 저 生이 너무 환해 눈이 시다//

눈물점 / 신미나
며느리 들이고 내내 닫혀있던 그 집 대문이 열렸다/ 서산 요양원으로 가는 날이라고 했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 하얗게 센 머리 빗는 젊은 여자/ 병이 깊어// 분첩 거울이 흐려 제 얼굴 고운 줄 모른다//

콩비지가 끓는 동안 / 신미나
당신은 비위가 약해/ 지금껏 편육 한점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서랍장 위에/ 모과 세 개// 어릴 때 출가했다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곳이/ 이곳, 무주라 했다// 나는 속인이란 말도/ 환속이란 말도 멀어서/ 손으로 호두알만 굴린다// 기도가 오래되면/ 병이되고/ 헛것을 애처로워하면/ 몸에 허주가 돈다는데// 당신은 이제/ 묘목에 붉은 천을 묶지 않는다/ 생쌀에 숟가락을 꽂지 않는다// 대전에/ 딸처럼 키운 아이가 산다고 했다//

​첫눈은 내 혀에 내려앉아라​​ / 신미나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손을 꼭 잡고 베개를 사러 가자 원앙이나 수壽자를 색실로 수놓은 것을 살 수 있겠지/ 이것은 흐뭇한 꿈의 모양, 어쩐지 슬프고 다정한 미래// 양쪽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걸으면, 열두 폭의 치마를 환하게 펼쳐서 밤을 줍는 꿈을 꾸겠네/ 목화꽃 송이, 송이 세 송이 콧등을 스치며 높은 곳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아도 좋겠네// 너와 나, 꿈길의 먼 이부자리까지 솜을 틀자 이불이 짧아 드러난 발목을 다 덮지 못해도/ 꿈속에서는 미래의 지붕까지 덮고도 남겠지// 오늘은 날이 좋다 좋은 날이야 철 지난 이불은 개켜 두고/ 일단 종로로 가자/ 종로에 가서 베개를 사자//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기차 / 신미나
​언젠가 당신이/ 내 손이 차다고 말했을 적에// ​연밥 위에/ 무밭 위에/ 아욱잎 위에/ 서리가 반짝였지// 고양이 귀를/ 살짝 잡았다가 놓듯이/ 서리,라는 말이/ 천천히 녹도록 내버려뒀을 뿐인데// ​꼭 당신이 올 것처럼/ 마을회관을 지나/ 비닐하우스를 지나/ 버스정류장을 걸어가네// ​덜 말라서 엉킨 머리카락이/ 마를 때까지 걸어가네//

돼지와 나 / 신미나
돼지와 나는 해변에 앉았다/ 수평선을 보며/ 사냥의 재미를 모르는 종으로/ 다시 태어나자고// 백사장이 하얗게 말랐다/ 홍조단괴/ 서빈백사/ 돼지에게/ 인간의 말을 들려주었다// 홍조단괴/ 서빈백사/ 들려주었다/ 돼지에게/ 인간에게만 어여쁜 말을// 한낮의 해가/ 엑스레이를 통과하고 있었다/ 구름 속에 신의 밝은 뼈가/ 드러났다//

곡비 哭婢* / 신미나
오동나무 아래 호리병의 무덤이 있다 // 네가 묘비명같은 표정으로 나를 읽고 지나간 후/ 나는 목이 긴 슬픔 하나 버려두고 호리병의 입을 벌려 오동나무 아래 묻었다/ 속이 깊고 입이 좁은 호리병이었다// 몇 번인가 소나기가 지나고 물약 뜨듯 흙물 머금는 호리병의 귀, 다시 덮어두지 않았으나/ 귀 속에 물이 차는지 자꾸 바람 소리가 들렸다// 문 걸어 잠그면 잎 지는 소리 들리고 끝내 너를 허락하여 가지 꺾어 지팡이 짚고 너를 찾아가면/ 비탈진 너를 찾아가면// 너는 이제 이 빠지고 귀가 삭아 내가 거짓으로 흔들려도 화낼 줄 모르고 생生의 방명록을 미리 넘겨/ 네 이름 위에 빨간 줄을 그은 죄로/ 다시, 물 위에 쓴 이름을 지워야 한다//
* 곡비: 지난날, 장례 때 행렬의 앞에서 돈을 받고 대신 곡을 하며 가던 여자 종

상여꽃점(點) / 신미나
한 잎, 두 잎, 꽃잎 낱장 떼며 가네 너를 잃고 백치처럼 나는 가네/ 송홧가루 날리는 길 맨발로 걸어, 해붉은 길을 걸어/ 이 고개 넘으면 바람이 점지한 사내 하나 만나 죄를 보태도 좋을라나 철없이 철딱서니 없이 천하게 웃음 흘려도 너는 다시 못 올라나/ 사람아, 나는 입술이 까맣게 탄다 내 살로 태胎를 키워 네 피나 물려둘 것을 이 세월 늙어 내 눈에 꽃물 다 바래면 네 몸내를 잊으면/ 한 시절 약속 없이 어기고 지는 꽃낱이 섭섭만은 않을라나 손금 위를 비껴간 사내였어도/ 이윽고 흘러갔어도//

눈 감으면 흰빛 / 신미나
살 무르고 눈물 모르던 때/ 눈 감고도 당신 얼굴을 외운 적 있었지만/ 한번 묶은 정이야 매듭 없을 줄 알았지만/ 시든 꽃밭에 나비가 풀려나는 것을 보니/ 내 정이 식는 길이 저러할 줄 알아요// 그래도 마음 안팎에 당신 생각을 못 이기면/ 내 혼은 지옷시옷 홑겹으로 날아가서/ 한밤중 당신 홀로 잠 깰 적에/ 꿈결엔 듯 눈 비비면 기척도 없이/ 베갯머리에 살비듬 하얗게 묻어나면/ 내가 다녀간 줄로 알아요, 그리 알아요//

입김 / 신미나
팔절지만한 창을 스치는/ 낯선 새 그림자 따라/ 휘파람 불며 길을 나서요/ 전깃줄을 이어폰처럼 끼고 흥얼거리는 가로수/ 어떤 날의 바람은/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 귀퉁이만 잘근잘근 씹다가/ 주머니 속에 반짝이는 동전/ 그 상냥한 음정만 매만지고 오기 일쑤죠/ 구인 정보지 활자 사이를 기웃거리다/ 연탄재 꼭꼭 눌러 밟으며 집으로 오는 길/ 리어카에 파지를 실은 노인들이/ 물 먹은 달을 어깨에 지고 언덕을 오르면/ 이윽고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붉은 십자가/ 눈 내리고 럭키슈퍼 유리창엔 김이 서리고/ 호빵도 몇 촉의 그리움으로 환해져서/ 마음은 어느 함박눈 내리던 한 시절에/ 자꾸만 전보를 치는데/ 이번이 마지막 일거예요/ 공중전화 부스에서/ 동전도 넣지 않고/ 당신 이름을 부르는 일//

겨울, 눈사람 / 신미나
몇번인가 그 눈빛을 훔친 적 있었네/ 촛농처럼 흘러내린 얼굴, 코가 없는 얼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내 눈길을 거뒀지만/ 나는 보았네 촛불처럼 흔들리는 눈동자/ 소문은 악취처럼 쉽게 뭉쳤다 흩어지곤 했지만/ 오늘은 벽에 귀를 대고 그녀가 우는 소릴 듣네/ 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일이란/ 허기와 마주 앉아 다 식은 저녁을 말아 먹듯/ 서둘러 묵묵해야 하는 일/ 사방을 좁혀오는 빈방의 어둠속에서/ 반짝 물기를 감추는 그릇을 못 본 체하는 일/ 가늘게 새는 물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네/ 그녀가 문 앞에 내놓은 밥그릇/ 핥고 가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조금씩만 그녀를 엿보고 가네/ 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 천천히 녹고 있었네/ 방바닥이 온통 물집이었네//

면회 / 신미나
엄마랑 나는 여행을 갔네/ 처음이었지, 그건// 대성당의 뾰족한 탑/ 흰 공작새와 칠면조가 있는 사원/ 사람들이 탱고를 추며/ 빗방울처럼 동그랗게 모여들고/ 휙휙 빠르게 흩어지고 뭉개지고// 아, 좋다/ 이런 건 처음 본다// 어금니 아픈 것도 잊고/ 엄마는 입을 벌린 채 창밖을 보네/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다른 하늘의 꿈을// 이 기차를 타면/ 흰머리가 검게 변한대요/ 그러니 우리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 아름다운 깃털 하나가/ 천천히 내려오는 것을 보아요// 엄마는 엄마를 버리려고/ 기차는 나로부터 멀어지고/ 칸칸마다 깜빡이며 전구가 터지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의사가 오고 있어요// 기저귀를 차고 웃는 엄마/ 밥풀을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엄마/ 이제 그만/ 아코디언처럼 기차를 접어/ 천가방 속에 집어넣어요//

단조(單調) / 신미나
쪼그리고 앉아 보았지/ 물속에 떨어진/ 쌀을/ 물에 분/ 쌀 한 톨을// 무른 잇몸에/ 처음 돋는 젖니처럼/ 하얀 이것을/ 무어라 부를까// 갓 난 귀신처럼 웃다가/ 사라지는/ 무구하고 깨끗한/ 이것을// 천장을 보고/ 누우면/ 공증에 떠오르는/ 이 한 톨의/ 또렷함을//

개화기(開化期0 / 신미나
옛날 옷을 입고 옛날 사람처럼 성에 갔지요// 귀문을 지키는 돌은 사람의 얼굴을 닮은 돌/ 귀도 없고 코도 없이 문드러진 돌// 어쩐지 오늘 같은 과거의 어느 날에/ 한번은 이곳에 온 것만 같아서// 붉게 붉게 달려가다 일제히 핏기 가신 꽃/ 무서워, 무서워 몸이 떨려오는데// 앞서가는 사람은 위만 보고 걷습니다/ 물집 터진 뒤꿈치에 피가 밴 줄도 모르고/ 사쿠라가 유라유라/ 사쿠라가 치라치라/ 화첩 속에서/ 검은 이를 드러내며 사람이 웃습니다// 사쿠라가 유라유라/ 사쿠라가 치라치라/ 제 머리로 종을 치며 까마귀가 웁니다//

사랑의 순서 / 신미나
나는 오리라 하였고 당신은 거위라 하였습니다/ 모양은 같은데 짝이 안 맞는 양말처럼/ 당신은 엇비슷하게 걸어갑니다/ 나는 공복이라 하였고 당신은 기근이라 하였습니다/ 당신은 성북동이라 하였고 나는 종암동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일치합니다// 노인들이 바둑을 두는 호숫가에 다시 와 생각합니다/ 흰 머리카락을 고르듯 무심히 당신을 뽑아냅니다/ 은행알을 으깨며 유모차가 지나갑니다/ 눈물 없이 우는 기분입니다/ 괜찮습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은행잎도 초록인 걸요/ 떼로 몰려드는 잉어의 벌린 입을 보세요/ 씨 없는 가시덩굴이 기어이 벽을 타고 오릅니다//

거인 / 신미나
타워크레인에/ 거인이 매달렸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빙글빙글 돌았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욕을 했다// 그는 묵상하는 듯/ 궁리하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 신이라 불렀고/ 어떤 이는 괴물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첨탑과 굴뚝/ 옥상과 빌딩 위로// 높은 곳에서/ 그들은 눈을 피했다// 거인의 등 뒤로/ 부챗살처럼 펼쳐진 강한 빛이/ 눈을 찔렀기 때문에//

낮잠 / 신미나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훔치다/ 쌀벌레 같은 것이 만져졌다/ 검지로 찍어보니 엄마였다/ 나는 엄마를 잃어버릴까봐/ 골무 속에 넣었다/ 엄마는 자꾸만 밖으로 기어나왔다/ 엄마, 왜 이렇게 작아진 거야/ 엄마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다/ 다음 생에서는/ 엄마로 태어나지 말아요/ 손가락으로 엄마를 찍어/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잠에서 깨어나/ 눈가를 문질렀다//

남항진 민박 / 신미나
반봉지 먹고 남은 살구를 쪼개 연애운을 본 적 있으신지. 살구뼈가 복숭아뼈보다 큰가 작은가 대보면서 당신에게 전화를 넣으려다 맙니다. 히유 찐다 쪄, 할머니가 치마 속에 대고 부채질할 때 소나기라도 한바탕 쏟아지면 좋겠다 싶고 빗소리 듣기엔 함석지붕만 한 게 없지. 선풍기 버튼을 강으로 돌리면서 이런 편지도 곧잘 쓰곤 했습니다// 무릎에 문질러 닦은 마음/ 얇게 깎아 띄워 올리고// 백사장에 앉아/ 조개껍질로 쓴다// 당신 이름 달다. 참 달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기차 / 신미나
언젠가 당신이/ 내 손이 차다고 말했을 적에// 연밥 위에/ 무밭 위에/ 아욱잎 위에/ 서리가 반짝였지// 고양이 귀를/ 살짝 잡았다가 놓듯이/ 서리,라는 말이 천천히 녹도록 내버려뒀을 뿐인데// 꼭 당신이 올 것처럼/ 마을회관을 지나/ 비닐하우스를 지나/ 버스정류장을 걸어가네// 덜 말라서 엉킨 머리카락이/ 마를 때까지 걸어가네//

적산가옥 / 신미나
나를 만난 것이/ 나쁜 꿈이었던 듯 살길 바라요// 손바닥을 펼치면/ 마음에 이리도 많은 적이 기를 세웠으니// 신발을 세워 불기를 빼던/ 댓돌은 사라지고// 향만 취하고 술은 뱉듯이/ 저는 여태 빌려온 사랑/ 주인 없는 이별만 하였습니다// 이제 알 것 같아요/ 태양이 실눈을 뜨면/ 금을 쪼갠 듯 빛이 새요// 구름이 해와 합해질 때/ 처음으로/ 당신 속을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이마 / 신미나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두번째 전화 / 신미나
이곳에 오래 앉아 있다면/ 당신은 나를 이상하게 보겠지/ 용서를 구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한참 내려다본다면// 칸칸마다 색색의 알약을 채우다가/ 문득,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비상구 불빛 같은 게/ 되고 싶은 적 있었냐고 묻는다면// 당신의 이름은 윤/ 동백잎 위에 빛나는 이름/ 윤, 하고 부르면/ 처방전에 손을 베일지도 모르지// 회색 스커트와 굽 낮은 단화는/ 당신의 평범을 위한 것/ 창이 풍경을 갈아 끼우고/ 은행나무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잎을 떨어뜨리고// 한때의 풍문도/ 당신의 구두코처럼 흐려지겠지/ 어느날엔가/ 옷걸이에 걸어둔 얼굴이/ 힘없이 흘러내리고/ 서랍 밑에서/ 잃어버렸던 단추를 찾듯이// 언제였더라/ 의자에 오래 앉아서/ 두 손을 내려다보던 여자를/ 기억할지 몰라// 볼펜 자국이 스친/ 스친 끝자락으로/ 안경알을 문지르면서//

새로운 사람 / 신미나
누구냐고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창경원에 같이 가겠느냐고/ 당신이 내게 물었는데// 없어요 이제 그런 곳은/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어요// 창경원이 종로에 있는데/ 종로에 가야 하는데// 과거로 이어진 길을 따라/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완전해졌네// 죄를 짓지 못하는/ 당신의 손은 깨끗해/ 이리도 천진하고 슬픈 몸// 원이었던 수박과/ 삼각형이 된 수박/ 수박을 자리기 전의 손과/ 자른 뒤의 손// 접시에 붉은 자국이 마르고/ 요양원 창밖의 구름이 바뀌고//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거울을 보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히로시마 단풍 만주 / 신미나
좋은 사람 같아요// 그녀가 나를 보고 말한 순간/ 웃음소리가 큰 것 같아/ 입을 가리고 웃었습니다// 얌전히 웃으니/ 예의 바른 사람이 된 것 같고// 치에코는 상냥한 사람/ 깨끗한 양산을 들고 다닙니다// 한번도/ 이마가 어두워지는 모습을/ 본 적 없지만// 히로시마에서 가져온/ 단풍 만주는/ 한 상자에 여덟 개// 치에코는 다정한 사람/ 왼손으로 찻잔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찻잔을 가볍게 쥡니다/ 일어설 때/ 소리 내어 의자를 끌지 않습니다// 엽서 속/ 히로시마의 하늘은 맑음/ 휘어진 철교와 위령비 위에/ 붉은 이슬이 내려도// 대추차에 뜬/ 잣을 건지며/ 이런 대화는 어울리지 않나요// 검은 버섯구름과/ 조선인의 시체를 덮은 재/ 백년도 채 되지 않은 이야기//

'시詩 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수미 시인  (0) 2022.07.13
박소란 시인  (0) 2022.07.12
황인숙 시인  (0) 2022.07.08
최정진 시인  (0) 2022.07.07
서효인 시인  (0) 2022.07.0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