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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구두와 고무신 / 최병진

부흐고비 2022. 7. 11. 07:45

엄마 손을 잡고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다. 어른들 말을 들으니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인민군이라고 했다. 인민군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민군에 발각되지 않게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야 한다고 엄마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죽 구두 굽에서 들리는 “똑똑 딱딱.” 소리가 골짜기에 더욱 크게 울렸다. 아버지가 사주신 구두였다. 한 짝이 언제 없어졌는지 쭈그려 신은 한쪽 발에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구두 소리에 화를 내며 잰걸음으로 앞질러갔다.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욕을 먹으며 길을 걸었다.

밤하늘에 별들은 잠도 없는지 초롱초롱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엄마 등에서 동생도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엄마는 앞서가는 사람 따라가기에 버거웠을 테지만 죽기 살기로 내 손을 잡고 걸으며 사람들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날 동굴에서 한밤을 보냈다. 바위 속에서 이슬을 피한 엄마는 뜬 눈으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인민군에게 아빠를 잃은 두 아이와 헤쳐 나갈 앞날이 캄캄했을 것이다.

먼동이 트면서 우리는 외가 마을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인민군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행군하는 국군들과 피난민이 함께 걸었다. 한참 걷다 잠시 쉴 때 국군이 소금물이 묻어있는 주먹밥을 한 사람에게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나는 철없이 김치 없다고 투정을 부렸다. 엄마가 어디서 김치 한 가닥을 얻어온 것으로 밥을 먹었다. 엄마 등 뒤에서 동생도 먹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엄마는 우리들을 데리고 외할머니도 없는 외가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전쟁 통에 궁핍하기는 어디나 마찬가지여서 엄마는 혼자 시댁으로 식량을 구하러 가셨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그 길에서 만난 인민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어린 동생도 엄마를 따라갔다. 세 식구가 하늘나라로 간 그때부터 망망대해에 나만 남겨졌다.

할아버지께서 잠종장蠶種場 언덕바지 일본식 집 셋방에서 살 때다. 오갈 데 없는 나를 거두어 주었지만 식구는 많은데, 끼니 때우기가 어려운 처지라서 입 하나라도 덜어야 했다. 나를 고아원에 보내기 위해서 식구들이 달랬다. 나는 집을 떠나기 싫어서 투정을 부렸다. 그곳에 가면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말에도 내키지 않았지만 삼촌까지 나서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기에 가기로 했다.

집을 떠나기 전날 할머니께서 새 신발을 사오셨다. 검정 고무신이었다.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나는 삼촌과 친분 있는 사람의 소개로 가까운 고아원을 찾아갔지만 고아들을 더 수용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고아원으로 가게 되었다. 지름길이라고 산길로 갔다. 고개를 몇 개 넘고, 언덕바지를 걸어서 산밭을 지나 많은 무덤을 지날 때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웠다. 산봉우리를 타고 나서야 거의 삼십 리 길을 걸어서 고아원에 도착했다.

고원에서 조금 외진 곳에 대밭이 있었다. 대숲에서 범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그곳에는 남자들만 있었는데 키 큰 형들도 있었다. 다들 지금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거지 행색이었다. 저녁밥이 너무 적었다. 찬은 소금국이었다. 모두들 배가 고파도 참고 견뎠다. 나는 그날 저녁에 고무신을 껴안고 앉아서 잠을 잤다. 자리가 누워서 잘 수 없을 만큼 좁았고 사람들은 많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내 검정고무신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린 마음에 분통하고 비통했다.

유아 방에서 생활하면서 잔디 씨 받아오는 일을 하였다. 잔디 씨를 입에 물고 잡아당기면 별이 보인다고 하여서 그 장난을 하였다. 추석을 앞두고 가족사항을 묻기에 나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입양 가는 명단에 올랐다. 부친 기일이라며 고모와 할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할머니를 따라 걸어가는데 걷지 못할 만큼 힘들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지금도 신발 잃어버린 꿈을 자주 꾼다. 구두와 고무신이 잊히지 않는다. 짝을 잃어버린 구두에 아버지의 사랑이, 하루 신고 뒤꿈치가 헐어서 아팠던 검정고무신에 할머니의 사랑이 들어 있다. 두렵고 아팠던 기억 속에 따뜻한 마음을 담고 마음에 남아 있다.

유튜브 창을 열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때문에 화염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피난을 가고, 아이들이 운다. 전쟁이 만든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전쟁 속에서 가족을 잃고 험한 세상을 살아온 나는 식은땀이 나고 숨이 찬다. ‘아이들은 또 무슨 죄인가?’ 아문 줄 알았던 상처가 쑤셔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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