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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에서 수많은 사람과 어울려 지냈다. 여러 사람과 마주하느라 가족을 잊고 산 것 같다. 이제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들은 사라지고 아무도 없다. 처음에는 낯선 세상에 나 홀로 내 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니 생경하다. 더욱 난데없는 역병으로 어디 가나 빗장이 걸려있어 난감했다. 갈 곳 없어 서재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강돈묵 작가의 <호미>를 읽으며 잊고 지냈던 반쪽을 찾았다.

체신이 강건한 것도 아니다. 농기구 중에서 가장 왜소하고, 인물로 따지면 꾀죄죄한 것이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성품마저 온순하니 창고 속에 있을 때는 있는 줄 모르게 구석에 처박힌다. 남들이 자리 다 차지한 뒤 겨우 궁둥이 붙일 곳을 찾아 숨어든다. 욕심이란 말도 모르고 그냥 차분할 뿐이다. 옆 친구의 큰 키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만족하며 더 이상의 중책을 꿈꾸지 않는다. 허접스러운 일만이 자신의 몫이라 해서 투덜거리거나 원망하는 법도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주 미천하다는 것을 알기에 늘 자족하며 살아간다.

글의 도입부를 읽으며 아내가 연상되어서이다. 어렵사리 결혼하여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꿈같던 신혼 시절이 아련하다. 가족이 생기면서 어깨의 짐이 무거워 그녀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지난 사진첩을 뒤적여보니 초라하기 그지없다. 부부의 인연을 맺고 수많은 날을 아내와 떨어져서 살았다. 공직을 시작하며 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홀로 지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서 하숙집이나 다가구, 오피스텔로 전전하다가 끝날 무렵 운 좋게 널찍한 관사도 살아 보았다. 그래서인지 혼자 빨래하고 밥 끓여 먹는 게 자연스럽다.

현직에서 퇴직하니 모두가 낯설다. 가끔 들락거리던 집이 남의 집처럼 느껴진다. 아내의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냈다. 칩거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딴 사람처럼 느껴졌다. 팽팽하던 얼굴이 어디 가고 노을빛이 어른거린다. 그녀와 마주하기가 당황스럽다.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자유롭던 공간을 점령군에게 침범당한 기분일 거다.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대화를 자주 나누지 못한 탓이다. 넓은 공간에 침묵만 흐른다.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커피를 마셔 보지만 어색함을 지울 수 없다.

작가는 <호미>에서 현미경을 쓰고 그녀를 들여다본 것 같다. 어디다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성품이 온순하여 남들 앞에 나대는 적이 없고 주위에서 아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지냈다. 그녀는 호미처럼 욕심도 모르고 그냥 차분할 뿐이다. 누구와 비교할 줄도 모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아내는 오늘도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간다. 나야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골을 치고 두둑을 만들고 작물을 심지만, 아내는 언제나 제초는 자기 몫이라며 퍼질러 앉아 호미를 놓지 않는다. 잡초를 뽑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하는 작업이 성과는 없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오금팽이가 저려오고, 심하면 등때기가 말린다. 제발 그만두라 해도 뿌리치며 괜찮다만 되뇐다. 한 수 더 떠 잡초를 뽑으면서 결실의 열매를 헤아리는 아내. 양에 따라 나누어줄 곳이 늘어난다. 아들네, 딸네, 시누이네, 시동생네, 교우집, 이웃집…. 내 손으로 가꾼 채소를 자식들은 물론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일념은 아무리 호미를 빼앗으려 해도 가당치 않은 일이다.

<호미>의 중간 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했다. 아내와 연애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하시던 일이 풀리지 않아 가세가 급격히 기우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님이 몸져누웠다. 그녀와 연애하던 시절 기억이다.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 결혼시킬 수 없다.’며 극렬하게 반대했다. 부잣집 귀한 딸을 데려와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결혼을 포기하려는데 그녀가 콩깍지가 씌었나 보다. 어린 나이에 친부모님을 뿌리치고 내게로 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혼 시절 그녀를 끔찍이 사랑했다. 저 하늘에 태양이 그대를 버리지 않는 한 나 또한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노래했다. 신혼 시절에는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칼퇴근하여 그녀 곁에 머물렀다. 알콩달콩하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아들이 생기고 기뻐할 틈도 없이 그녀는 돈벌이에 나섰다. 신랑의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워서다. 그녀는 가정 살림을 책임지느라 허접한 일을 닥치는 대로 해댔다. 남편의 허술한 빈 곳을 메우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만두어라 해도 집 마련하느라 진 부채를 갚느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느라 고단한 삶을 살아 냈다. 까다로운 교사의 비위를 맞추고 고약한 아이의 부모를 달래느라 곤욕을 치르곤 했다. 나는 사내랍시고 봉급 몇 푼 받아다 주고는 모든 일을 다 한 양 행세했다. 글을 읽으며 아내에게 애틋함이 느껴졌다.

강돈묵 작가의 글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문학에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작가는 호미를 보고 내가 미처 몰랐던 부분을 찾아냈다. 호미에 아내를 얹어 놓으니 가슴이 찡하다. 호미가 아내의 기질이고 살아온 모습이다. 작가는 수학의 고차방정식을 풀어낸 것처럼 보인다. 일차원의 점이나 선의 편협한 생각이 아니다. 또 한 면만 본 이차원의 단편적인 사유가 아니라 삼차원의 우주에서 사색의 바다를 유영遊泳한 것 같다.

수필 <호미>한 편을 읽고서 아내의 소중함을 깨우쳤다. 인간은 물이나 공기가 없으면 하루도 살지 못한다. 물과 공기와 같은 아내의 존재를 모르며 잊고 살았다. 이제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야 할 텐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온 호미를 다시 떠올린다. 하루해가 석양으로 기울고 있지만, 아직 가슴속에 피고 지는 꽃이 많다. 붉게 물든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그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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