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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화중지교 花中之敎 / 박순태

부흐고비 2022. 7. 20. 07:30

꽃송이가 들썩인다. 달빛에 젖은 만개한 꽃송이 속, 조수간만으로 넘쳐나는 바다가 되었다. 자기완성을 알리는 환희가 강할수록 맹렬해지는 것이 생명의 세계가 아니던가. 꽃의 운우지정에 몰입된 나는 은근슬쩍 염탐꾼이 된다.

꽃송이 속으로 시선을 돌린다. 팔등신 몸매에 왕관을 쓰고 드레스를 걸친 암술이 수술들의 거동을 살핀다. 왜소한 몸체에 턱시도로 단장한 수술들이 암술을 한가운데에 두고 원을 그리고 있다. 발뒤꿈치를 치켜세워도 암술에 다다르기에는 역부족인 수술들. 암술 하나를 에워싼 수술들이 피 토하는 경쟁을 벌인다. 외양으로는 향기롭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파고들면 이곳만큼 치열한 짝짓기 경쟁도 없을 것 같다. 꽃의 교접, 암술의 애타는 기다림과 수술들의 숨 막히는 겨룸이다.

암술과 수술이라 하지만 생식적으로 접근하면 암컷과 수컷이다. 꽃송이의 공통점은 암컷 하나가 수컷들의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결투장을 만든다. 교접은 꽃마다 다양하다. 겨울의 동백꽃, 봄의 벚꽃, 여름의 밤꽃은 온도와 향내와 무게가 각각 다르다. 햇살 속에서 뿜어 올리는 황홀감도, 빛 속에 잦아드는 열기도 제각각 나름의 성정을 지닌다.

동백꽃은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오래오래 피어있다. 암술은 유달리 뚱뚱한 여장부의 풍모로 일백여 개의 수술 무리를 호령한다. 내실을 살피니 초라하고 기력이 쇠한 수술들이 촘촘히 붙어있다. 뜨거운 가슴을 식혀 줄 짝을 쉽사리 만나지 못한 암술, 뿌루퉁한 인상을 쓰면서도 참고 또 참는다. 주어진 곡절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암술,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엄동설한을 신혼의 호기로 삼는다.

수술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주눅이 든 무리의 몸집을 보자 하니 어쩐지 궁상스럽기만 하다. 긴긴 겨울밤 내내 임 기다리다 지친 암술은 한숨으로 새날을 맞는다. 풀무질하느라 녹초가 된 수술들을 내려다보며 내 몸은 아직 달아오른 용광로가 아니라며 혀를 찬다. 원망 가득한 암술을 용맹 없이 바라다만 보는 수술들이다. 암술은 암술대로, 수술은 수술대로 낙심에 젖는다. 발버둥도 못 치는 무력감에 탄식하던 수컷은 천신만고 끝에 바람의 도움으로 암술에 씨를 꽂는다. 가까스로 임무를 마친 수술은 초주검이다. 펼친 꽃잎으로 온 겨울을 버티어낸 꽃송이. 땅바닥에 혈흔을 찍으며 송이째 떨어진 동백꽃, 한껏 욕망을 채우지 못한 암술의 속 깊은 내막이 시들지 않은 몸체에서 읽힌다.

동백꽃 암술엔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보인다. 혹한 속에서도 암술은 수술에 대한 그리움을 초연하게 키운다. 수술은 수술대로 태생의 한계를 불평 없이 끈기로 버티어낸다. 한번 결정된 배필에 대한 사랑은 일편단심이다. 힘든 사랑은 혼자 가는 법이 없다. 동백꽃이 이 깊고 오묘한 이치를 일깨워 준다. 생생한 모양새로 툭툭 떨어진 동백꽃, 시들지 않는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자 찬가이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벚꽃 아래 선다. 농밀한 애욕을 펼치는 암술이 “바람아 불어 다오, 벌 나비야 빨리빨리 날아와다오.” 애원하니 수술은 발버둥을 친다. 펼쳐진 꽃잎을 병풍 삼아 신방의 열기를 활활 피워 올린다. 암술은 어김없이 수술의 용맹스러움에 몸을 맡긴다. 암수는 기력을 다해 녹초가 되도록 운우의 정을 나눈다. 만개한 꽃잎 위에 활공하는 갈매기 날갯짓이 겹친다.

사랑이 삶의 핵심임을 알려주는 벚꽃. 암술이 수술을 접하는 날에는 밤을 지새우는가 하면,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채 천지개벽을 알리는 황홀감에 빠진다. 수술의 화분이 암술머리에 닿는 순간 까무룩 눈동자가 흐려지고 암컷의 몸체는 허물어진다. 극도의 쾌락은 파괴의 형식을 수반하는 것일까. 꽃잎이 막을 내리자 수술의 핵은 암술 주머니에서 유영하다 자리 잡는다. 꽃은 항구적 고정된 형태를 간직하지 못하며, 애정도 필연적으로 지나가고 변한다는 이치를 일러준다. 꽃의 애욕도 이승에서 잠시 스치는 바람인가 보다.

벚꽃 사랑은 속전속결이다. 화르르 피었다가 삽시간에 흩어지면서 나풀나풀 떨어지는 욕정, 쉽게 달아오르다 금세 식어버리는 양은냄비 같은 열화이다. 마치 인생무상을 훌쩍 뛰어넘는 화끈하고 박력 넘치는 신세대를 앞에 둔 듯하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호기를 잡으려 전심전력으로 나오는 벚꽃, 삶에 대한 막연한 애착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허상임을 알린다. 쏟아놓는 열정 없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며 벚꽃은 기회가 왔을 때 불꽃 열연을 펼친다.

밤꽃은 가리개도 없이 완전 노출이다. 녹색 구슬 모양의 씨방을 달고 있는 암술은 천상의 여왕 같다만, 내막은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고로이다. 수술은 자력으론 도달하지 못할 높은 규방을 바라보며 떼 지어 대롱대롱 매달렸다. 드높은 자리에서 애간장 태우던 암컷이 위신을 망각한 채 수술들을 닦달한다. 암술의 격렬한 채찍질에 수술의 반응은 격정적이다. 정상에 깃발 꽂으려는 산 사나이들, 밧줄에 힘 실어 절벽을 기어오르는 가뿐 숨소리가 밤꽃의 수술만큼이나 진하랴. 수술은 저항 없는 순종으로 필연적 운명을 몸으로 불사른다.

밤꽃 암술머리에는 끈적끈적한 솜털로 이루어진 피뢰침이 꽂혀있다. 수꽃이 만발할 때면 송이송이에서 쏟아내는 교접의 비릿한 기운이 콧속을 질척인다. 수술들이 끝내 음양 조화의 내밀한 수법이라도 익혔던가. 뜨겁게 뿜어낸 정분으로 끈적끈적해진 양극 전류가 음극 부위에 닿으면, 암술이 흠뻑 젖어 절정의 순간을 맞는다. 일당백의 여장부는 차츰 풀이 죽어 시들다 그만 돌이 된 듯 굳는다.

누가 꽃다운 처녀라 불렀던가. 꽃다운 청년이라 해야 맞다. 밤꽃 향기는 수술의 꽃방이 뿜어낸 기운이다. 꽃방은 불가마에서 금방 구워낸, 화력이 가장 센 방이리라.

강하고 초연하기만 한 꽃들. 조물주는 암술을 향한 수술들의 경쟁을 끈기로 여기며 지켜보다가 끝끝내 목적을 이루도록 유도하나 보다. 식물의 생식은 가벼운 접촉, 꽃가루의 방랑, 바람의 호의, 벌 나비 같은 곤충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질 뿐이지만, 자연 절후의 때를 기가 막히게 맞춘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이상의 장면들을 연출해 낸다.

수술은 결코 밖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자기 집 안에서 발효하여 절정의 순간을 맞는다. 그 아찔함과 단단함이 진정한 사랑의 필수조건이기에 배필을 향한 첫정은 죽을 때까지 식지 않는다.

할머니는 생전에 남자는 조왕신竈王神을 잘 다독이면서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여인의 말을 통해 여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그 가르침이 꽃 속에 있다. 이제껏 눈요기로 보아 왔던 꽃은 화중지병畵中之餠이었다.

암술은 생명의 여신이자 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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