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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현관문 앞에만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숨 한번 뱉어내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이들이 먼저 알고 뛰어나온다. 막내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있었고, 아이들의 눈을 보니 마음이 시렸다. 막내가 안기면서 “엄마, 방금 언니가 나 놀렸어.”, “아이고, 그랬어, 왜 너는 동생을 놀려?” 하면서 일상의 대화를 안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베란다에 가득 쌓여있는 배추들. 앗, 김장이다. 순간 몸이 얼어버려 막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큰딸은 순식간에 차가워진 엄마의 표정을 감지하고 조용히 동생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예민하게 나의 마음을 알아채는 아이들과 달리 시어머니는 오히려 며느리의 늦은 귀가에 역정을 내셨다. “김장해야 되니까 오늘 밤에 베란다에 있는 배추들 다 다듬고 절여야 된다.” 불만 가득한 메마른 목소리가 소금이 되어 피곤한 나를 절였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시골에서 농사짓는 시 이모님이 배추를 갖다 주신다. 그 자체로만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지만 내 입장에선 결코 만만한 일들이 아니었다. 시어머님은 거실 소파에서 정이 흠뻑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런 착한 동생 없다면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했던 말씀을 올해도 하신다. “밥 먹었나?” 말 한마디 물어보지 않는 시어머니의 마음에 ‘내가 당신 딸이라면 이럴까?’ 싶어 왠지 모를 서러움이 한 발짝 다가왔다. 시어머니께 “작년에 제가 김장하면 한다고 미리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뾰로통하게 한마디 했지만 답답한 마음은 풀릴 길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내 마을 모른 척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늦은 저녁이라도 먹어야지 했던 생각은 이미 사라졌고 조금이라도 일찍 일을 끝내고 싶은 욕심에 베란다로 향했다. 밭에서 그대로 뽑아온 배추들은 옮기는 과정에서 거실 여기저기 흙을 뿌렸다. 더럽혀지고 얼룩진 거실이 그대로인 것을 보니 시어머니는 늦게 들어오는 며느리에 대한 원망을 시이모님에게 하신 것 같았다. 베란다로 가기 전 거실 바닥을 닦으면서 밥 한술 편히 먹지 못하는 상황에 머리가 찌근거렸고 가슴이 답답했다.

상심한 마음을 가슴에 묻고 배추를 들여다보니 널브러져 있는 배추들은 빨리 다듬어달라 시위하는 듯했고 아슬아슬 불안하게 쌓여있는 배추들은 성마른 나의 마음을 휘저었다. 절인 배추를 담을 붉고 큰 고무통은 엉덩이를 치켜들어 베란다를 밝히는 동그란 작은 주황색 전구를 겨냥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 초겨울 밤인데도 냉기는 온몸에 스며들었고, 무심하게 바라본 하늘엔 차가는 달이 홀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달이 내 모습과 비슷해 위로가 될 법도 하건만 지쳐있던 나는 오히려 투정하고 반항하고 싶었다. 둘 곳 없는 마음은 겨울밤과 함께 얼어갔다.

아이들은 엄마의 얼굴을 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조용하게 속닥거리고 있었다. “시부모님에게 며느리 마음 같은 것이 중요할까? 며느리도 피곤하다는 것을 아실까?” 의미 없는 물음 앞에 두 무릎이 그 답을 먼저 알고 꿇었다. 창문 틈 사이로 안방에 계신 시부모님들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날카로운 고드름이 되어 귀에 꽂힌다. 남편은 오늘도 귀가가 늦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어붙은 현관을 바라보면서 차가운 한숨을 내쉰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빠에게 전화해, 그리고 빨리 들어오시라고 해.” 거실을 가득 울리는 앙칼진 내 목소리엔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고 아이들은 동시에 “예.” 하고 답을 한다. 갑자기 안방에서의 소리가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나는 죄 없는 배추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언제 김장 할 것이라 미리 이야기하는 게 그리 힘든 일인가, 며느리 사정은 안중에도 없고, 아이고, 배추는 또 와이리 많노,”, “이왕 주실 것이면 이모님은 좀 다듬어 주지 않고 이게 뭐람, 자기 딸들은 김치까지 다 담아주면서.” 표출할 수 없는 억울함이 구시렁구시렁 흘러나왔다. 나는 배추 한 통을 잡고 배추의 전 잎을 가차없이 날렸다. 날아가는 잎들이 무참히 떨어졌다. 칼을 호기롭게 잡고 배추의 심장부에 날카롭게 칼집을 내었다. 배추는 온 힘을 다해 버텼으나 불만 가득 찬 내 양손의 힘을 막아낼 수 없었다. “휴.”하는 나의 한숨 소리와 “쫙”하고 갈라지는 배추의 절규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마침내 배추의 노란 심장부를 싸고 있는 속살들이 미끈한 자태를 뽐내면서 드러났다.

그 밤 구메구메 쌓인 곡절 많은 내 마음은 흐트러진 배추 더미와 씨름하면서 갈 길을 잃었다. 끊어질 것 같은 허리의 통증을 차라리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이 불편한 마음보다 편했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허리 한번 펴지 않고 배추와의 싸움을 계속했다. 길 잃은 마음은 허공에서 춤을 추었고 달빛은 장단 잃은 내 춤사위를 안았다. 어느새 휘몰아치던 감정도 배추처럼 숨을 죽이고 들끓었던 마음도 침잠해졌다. 오래된 벽시계의 추는 세월의 무게만큼 느리게 움직였고 시간을 알리는 괘종소리는 맥없이 늘어진 채 청승스럽게 거실을 채웠다.

불만의 세례를 받은 배추가 김치가 되었으니 이 김치가 나에게 맛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결혼 후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나는 멸치젓갈의 맛이 너무 강한 시어머니의 김치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무리 나의 노고가 담겨있는 김치라 할지라도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다 맛있다 하더리도 나는 고집스럽게 그 맛을 거부했고 대신 내 어머니의 김치만을 그리워했다. 김장이 끝나면 시어머니는 시누이들에게 김치를 나누어 주었고 그들은 모녀의 정을 나누었다. 내 노동의 무게는 솜사탕처럼 가벼웠고 그들은 친정엄마의 손맛에 환호했다. 하긴 결혼을 했어도 친정엄마의 김치를 당연하게 가져다 먹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어찌 내 시누이들 뿐이겠는가? 내가 아는 지인들 대부분 그랬다. 그러나 그 당연함이 때론 어떤이에게 말할 수 없는 부러움이었다는 걸 그들은 알았을까? 받는 게 당연한 이들에게 타인은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에게 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나의 외로움의 상징이었다. 김치를 누군가에게 받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김치는 항상 밥상에 놓여 있었고 엄마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었기에 언제까지나 먹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엄마의 김치가 어느날 사라졌다. 나는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찾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한 척하면서 현실에서의 슬픔을 숨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친정엄마 김치에 대한 이야기가 친구들이나 이웃에서 들려왔고 누군가가 “친정엄마가 김치 보냈어.”라는 말에도 내 마음은 서늘해졌다. ‘그깟 김치가 뭐라고 ……’ 말이 입으로 삼켜지는 날들이었다. 너무나 갖고 싶고 맛보고 싶은 김치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김치이기도 했다. 존재하지 않는 이에 대한 그리움은 내 외로움의 반증이었다.

김장과 김치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이 나에겐 뒤돌아 보고 싶지 않은 추억이지만 나는 여전히 김장철이 오면 김치를 담근다. 나를 경악하게 했던 배추더미도 없고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시던 분도 이젠 계시지 않은데도 나는 김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습관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김치 담그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시어머님과 함께 김장을 하고 김치를 담았지만 시집살이에 대한 반항심으로 나는 일체 그 맛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장은 물론 김치도 사 먹었다. 하지만 일상의 식탁에서 김치가 없는 것은 아쉽고 사서 먹는 김치는 비싸기만 했다. 그렇다고 가족들이 김치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겨울철이 되면 고민이 되었다.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딸들에게 푹 익은 김치로 돼지고기나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를 마음껏 해주고 싶은데 사서 먹는 김치로는 감당이 어려웠다. 점점 김장에 대한 압박감이 나도 모르게 상향선을 그렸다. 그때 문득 내 마음이 달빛 춤을 췄던 그 겨울밤에 내가 갈구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다가왔다. 너무나 추웠다고 기억되는 그 밤이 진짜 추웠는지 아니면 내 외로움과 고달픔이 그런 느낌을 주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끝내 내가 김장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나의 슬픔에 빠져 딸들에게 전하지 못한 그 시절의 사랑을 지금이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의 허덕거림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딸들에게 나는 내 외로움만 부이고 살았던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그 밤의 차가는 달이 어느새 보름달이 되어 내 마음에 빛을 밝히고 나를 다시 배추 앞에 앉게 했다.

초록의 배추 한 포기를 절이고 빨갛게 양념한 김치를 식탁에 올리던 그날, 내 딸들이 보여준 환호는 지금도 생생하다. 맛있다고 할 수 없는 김치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딸들의 모습에 울컥했다. 내가 딸들에게 사랑을 준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내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온전히 나를 향한 사랑이 내 가슴에 들어온 그날, 나처럼 외로움을 오롯이 안고 살았던 내 동생들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내 불행에만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 내가 눈 먼 자였다.

김장하는 날이 되면 이젠 내가 절이지 않은 배추들이 내 앞에 숨죽여 부끄럽게 앉아 있다. 매번 양념의 맛이 달라지는 신묘한(?) 재주를 가진 나는 올해도 열심히 김장 양념을 만들었다. 어렵게 구한 태양초 고춧가루는 마늘, 생강, 육수, 액젖, 참쌀풀, 배즙 등을 모두 삼켜 자신의 색을 더 붉게 토해내었다. 삼십 년 가까이 고아로 살았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미혼인 여동생은 김장 후 다 함께 먹을 수육용 돼지고기를 준비해온다. 동생은 앞치마를 두르고 배추에 양념을 치대면서 양념 색깔을 보고 “와, 너무 예쁜데 이번 김장 맛있겠다.”덕담을 한 후 “나는 어릴 적에 엄마가 김치 양념을 한 것을 보고 고추장으로 하는 줄 알았어. 엄마에게 그 말을 했다가 한 소리 들었지. 모르면 알려주면 될텐데 우리 엄마 왜 그랬을까?” 하면서 옛 추억을 이야기한다. 이젠 성인이 된 딸들 역시 심부름을 하면서 이모의 이야기에 웃음으로 화답한다. 할 일 없이 바쁜 남편은 배추를 옮겼다가 쉬었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달빛 대신 오후의 햇살은 거실을 따뜻하게 비추고 김치 치대는 소리, 수다와 웃음 가득한 오후의 북적거림은 멋진 하모니가 되어 거실을 채웠다. 허리가 아파 휴식을 취하려 잠시 일어나 고개를 드니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보인다.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하기에 느끼는 존재감 앞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렇게 만든 김치를 나는 타향살이하는 큰 딸에게 보낸다. 엄마김치라고 환호하는 딸의 얼굴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김치 한 포기가 내 딸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할 화수분이라 믿는다.

재주 없어 맛이 없다고 여겨졌던 김치도 해가 갈수록 김치맛을 내고 깊어지기도 한다. 나의 인생도 내가 담그는 김치처럼 익어가고 깊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맛을 알기도 전에 외로움과 고달픔을 먼저 알았던 나의 과거이지만 그래도 뒤늦게라도 김치 담그는 것을 익힐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젠 김장과 김치 담그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밀키트가 인기를 누리는 시대이다. 노동과 시간을 요하는 김치가 어쩌면 사라지는 우리의 수많은 음식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기우일까? 익히지 않고 숙성되지 않은 날 것들이 유행을 선점하고 이끄는 이 시대에 ‘생김치, 익은 김치, 묵은 김치’등 우리의 인생과 비슷한 김치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내 딸들은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이 전혀 없다. 그러나 김장을 하거나 김치를 먹을 때 한번씩 들었던 내 엄마의 이야기는 딸들에게 외할머니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죽음이 육체의 사라짐이라면 기억과 추억은 죽은 이들을 부활시키는 단초이다. 힘든 노동과 오랜 시간을 통해 만들어진 김치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고 기우 너머에 존재하는 희망이 되기를 기원한다.
// 제16회 동서문학상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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