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의 시가집 〈그날이오면〉은 1932년, 간행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좌절되었다. 저자가 사망한 뒤, 1949년 한성도서(주)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왼쪽 사진은 삼판본으로 세로 18cm×가로 12cm다.(출처: 코베이 경매) 〈그날이오면〉시가집을 검색해 목차순으로 발췌하였다. 찾지 못한 시가와 수필은 제목만 적었다. 머리말씀 나는 쓰기를 위해서 시를 써 본 적이 없읍니다. 더구나 시인이 되려는 생각도 해 보지 아니하였읍니다. 다만 닫다가 미칠 듯이 파도치는 정열에 마음이 부대끼면 죄수가 손톱 끝으로 감방의 벽을 긁어 낙서하듯 한 것이 그럭저럭 근 백 수나 되기에 한 곳에 묶어 보다가 이 보잘것없는 시가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가에 관한 이론이나 예투의 겸사는 늘어놓지 않습니다마는 막상 책상..
몇 년 전인가 십대들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 중에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가사가 대충 이랬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등등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이다”라는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이란 말은 분명히 ‘왜 나만?’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어도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뿐더러 가끔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오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만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걸핏하면 일이 꼬이고, 그래서 공..
그리움 1 /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2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그리우면 / 유치환 뉘 오는 이 없는 곬에는/ 하늘이 항시 호수처럼 푸르러/ 적은 새 가지 옮으는 곁에/ 송화가루 지고/ 외떨기 찔레/ 바위돌 하나/ 기나긴 하로해 직하기 제우노니/ 참으로 마음속 호올로 숨겼기에 즐거워/ 고은 송화가루 송화가루/ 손에만 묻다// 행복 / 유치환 오늘도 나는/..
송강 정철 선생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여인, 강아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K선배를 따라 강아의 묘를 찾은 것은 지난 봄, 춘삼월 호시절이라 하나 아직 매서운 바람이 품속을 파고드는 어느 날이었다. 경기도 고양군 삼천리 골에 송강의 묘가 있었고, 그 오른쪽에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아의 묘가 있었다. 그들은 사신(使臣)과 기생의 신분으로 마주했다. 송강이 명나라를 다녀오던 길에 강아를 만나게 되었지만, 평양에서 그를 따라 내려왔을 때는 ‘남과 여’의 의미였으리라. 이후 강아는 한 번도 송강의 옆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송강이 노후에 아버지 묘를 지키며 외롭게 지내던 시절에도 강아는 곁에서 벗이 되고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눈에 보이는 강아의 묘는 슬프다 못해..
지난해 가을, 지방에서 있었던 제법 큰 규모의 수필문학상에 도전했다 낙선을 했다. 이만한 글이면 되겠지, 하고 자만한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첫 수필집을 낸데 이어 등단도 하고, 몇 군데 수필지에 발표한 글이 호평을 받는 등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터라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 그 다음달, 같은 작품으로 출신고교 총동창회에서 제정한 문학상에 응모해 요행 대상을 받았다. 그나마 위로가 됐다. 시상식과 송년파티를 겸한 정기총회 자리에는 많은 동기들이 참석해 함께 수상을 기뻐했다. 화려한 꽃다발을 세 개나 받았다. 박수도 받았다. 부상으로 노트북도 하나 받았다. 기쁜 한편 쑥스러워 행사 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이라고 타본 게 과연 얼마만인가. 단상에 올라가 상을 타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달밤 / 이호우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나는 자연(自然)에 흥미를 잃은 지가 오래다. 그것은 내 생활이 강파르고 윤기(潤氣)가 없어진 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감격을 잃고 살아온 데 기인한 것이라 함이 더 정확할는지도 모른다. 절경(絶景)을 앞에 두고 바보가 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이렇게 자연 앞에서 허수아비인 내가 그래도 한 가닥 슬픔이나마 느낄 줄 아는 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슬픔을 느낄 줄 아는 다행 때문에 내가 인간을 저버릴 수 없게 되는지도 모른다. 인간에의 흥미마저 잃어버린다면 나는 바보가 되는 슬픔마저 잃어버리고 말게 되는 셈이다. 허수아비가 되는 슬픔조차 나에게서 없어지는 것이다. 무료(無聊)해지면 산수(山水)를 찾는 대신 나는 저자를 찾곤 한다. 사람들이 저자는 속(俗)되다고 하지만 나는 그 저자가 그리워지는 때..
꽃 / 박양균 --그 신(神)은 너에게 침묵(沈黙)으로 답(答)하리라. //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망(亡)한 이 황무(荒蕪)한 전장(戰場)에서 이름도 모를 꽃 한 송이 뉘의 위촉(委囑)으로 피어났기에 상냥함을 발돋음하여 하늘과 맞섬이뇨.// 그 무지한 포성(砲聲)과 폭음(爆音)과 고함(高喊)과 마지막 살벌(殺伐)의 피에 젖어 그렇게 육중한 지축(地軸)이 흔들리었거늘 너는 오히려 정밀(靜謐) 속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자랐기에 가늘은 모가지를 하고 푸르른 천심(天心)에의 길 위에서 한 점 웃음으로 지우려는가----.// 창 / 박양균 창(窓)은 밤을 믿으려 하고/ 내가 창(窓)을 믿으려 합니다.// 누구의 구원(救援)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암묵(暗墨)에서/ 창(窓)은/ 스스로의 폭(幅)을 기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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