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초입에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들이 잎을 버린 산등성이는 마치 용이 꿈틀대듯 골짜기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를 앞서 길을 안내하는 것 같았다. 계곡의 야윈 물소리는 얼음 속으로 가늘게 속삭이며 골짜기 밖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골 안쪽으로 올라갔다. 능선이 구불구불 걸어가다 멈춘 것 같아 잡고 가던 길을 잠시 놓고 고개를 들었다. 골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언제부터 전해 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곳은 소리막골이라고 앞서가는 이가 말했다. 제법 널찍한 터를 잡고 나직하게 엎드려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외로워 보인다. 마당에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충직하게 버티고 선 채 나그네를 맞았다. 누군가가 거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집은 비어있었다. 소리꾼 한 사람이 살고 있다..
참숯 / 정양 간장독에 띄울 숯을 사러/ 읍내에 간다/ 나무 타다 만 게 숯인데/ 나무토막 태워서 쓰자고 해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는 참숯만 써야 한단다// 읍내 장터를 다 뒤져도 숯이 없다/ 가슴속 한 세상 더글거리는/ 타다 만 숯덩이들은 쓸모가 없겠지/ 육십릿길 더 달려간 도회지 시장통에서/ 가까스로 숯을 만난다/ 휘발유값이 몇 배는 더 들겠다//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 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참숯이 된다고,/ 참숯은 냄새도 연기도 없다고/ 숯가게 할아버지 설명이 길다/ 참숯은 냄새까지 연기까지/ 감쪽같이 태우나 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내 청춘은 그나마 참숯이 되어 있는지/ 언제쯤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릴지 어쩔지// 간장독에 둥둥 떠서 한평생/ 이글거리지도..
눈시울이 뜨거워진 어머니를 보며 밥만 꾸역꾸역 삼킨다. 돈을 벌어도 내 손목만 치장했지 고생한 당신의 손은 대접할 줄 몰랐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손가락에 금빛이 반짝일 때 어머니 손에는 생선 비늘이 너덜거렸다. 본때 없어진 손이 뜻밖에도 응접을 받았다. 밥상 너머의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에 대한 불만을 애써 쓴웃음으로 윤색한다. 가난으로 다져진 불퉁한 손 모양은 고단한 생의 아픈 표현이었다. 금팔찌 하나가 지난한 세월을 달래 줄 수는 없지만 얼굴은 웃음 빛이다. 분결 같은 손가락에 진주나 비취반지를 낀 여인을 보면 품격이 느껴졌다. 험상궂은 손가락에 금반지 두어 개 끼워진 여인에게선 자식들의 사랑이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나는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해준 그것에 혈맥을 느끼며 단 한..
풍장(風葬) / 이한직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뜬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風葬) 이 되는구나.// 날마다 날마다/ 나는 한 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이 있다.// 깨어진 오르갠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북극권(北極圈) / 이한직 초록빛 지면(地面) 위에/ 한 개 운석(隕石)이 떨어지고.// 바람은 남(南)쪽으로 간다더라/ 징 툭툭한 구두를 신고.// 소란타, 마음의 계절(季節)/ 나의 뮤즈(Muse), 그대, 각적(角笛)을 불라!/ 귓속에선 매아미도 우짖어라.// 묘망(..
민간인 4명 태운 스페이스X, 지구로 귀환… 우주관광 시대 열었다 [사이언스샷] 크루 드래건, 사흘 우주궤도 비행 마치고 플로리다 앞바다에 안착 조선일보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입력2021.09.19 08:07 사상 최초로 순수 민간인만 탑승한 우주선이 국제우주정거장보다 높은 궤도에서 지구를 선회하고 지구로 귀환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비행을 계기로 본격적인 우주관광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세운 미국 우주기업 스페이스X는 18일(현지 시각) “민간인 4명을 태운 우주선 ‘크루 드래건’이 오후 7시 6분(한국 시각 19일 오전 8시 6분) 플로리다 앞바다에 안착했다”고 밝혔다. 스페이스X는 지구 귀환 과정을 생중계했다. ◇90분에 한 번씩 지구 선회 스페이스X는..
k형, 나는 후배작가 중에서 k형을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비록 평소에 작가들과 어울리지 않아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k형의 작품만은 일부러 찾아 읽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k형의 작품 속에는 독특한 재능 같은 것이 번뜩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나는 질투심을 느낄 수 있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되기를 고대해 왔었습니다. 마치 74세의 노인 괴테가 보헤미아의 온천지대에서 19세의 소녀 울리케 폰레베초프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구혼까지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괴테가 울리케에게 매혹 당한 것은 애욕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그 눈부신 젊음의 생명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울리케와 같은 싱싱한 생명력을 가진 젊은 작가를 고대해왔던 것입니다. k형, k형에게는 그럴 ..
마음의 단편 / 함형수 1./ 떼―○, 떼―○……/ 새벽공기를 지르고 종소리 은은히 들려오네./ 아― 내 저山속으로 들어가련지 오래엿건만.// 2./ 마음아./ 인제는 웃지도말어라, 울지도말어라.// 3./ 오늘은 꽃꺾으러 뒷산으로 가드니/ 가련한 자여, 너도 모르게 한줌의 샛(芒)대를 꺾어왓고나// 4./ 저녁하눌을 날아가는 기러기떼여./ 울며 멀―리어디론지 날아가는 기러기 떼여.// 5./ 그어느날인가 海邊에서본 景致 멀―리 水平線에 사라지는/ 배(船) 한척.// 6./ 갈바람을 원망하면서 가을들에 헤메는/ 나무잎과도 같이 내/ 밝는날부터는 그어디든지 헤메고싶소.// 7./ 내죽은 무덤앞에 碑를세워주겟다고/ 친구여 거기엔 이러케나 써주오./ 이世上을 울도웃도못하고 걸어간사람이라―고.// * 1935년..
“맨땅 천 길을 파 봐라, 어디 쌀 한 톨이 나오는가.” 부엌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음성에는 견고한 믿음이 실려 있다. 또 막내가 밥알 붙은 솥을 그대로 씻고 있었나 보다. 이 근년에 와서 어머니의 관심사는 온통 쌀 한 톨에 집중해 있는 듯싶다. 불편한 거동으로도 끼니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밥솥을 살피고 수시로 쓰레기통을 검사한다. 그러다 밥알 붙은 솥을 그대로 씻어 내거나, 누렇게 식은 밥 한 술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하면 매번 그 끝없는 잔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그까짓 밥알 몇 개가 무슨…….” 막내의 불평은 어머니의 할머니답지 않은 큰 소리에 주눅이 들어 버린다. “뭐시 어찌야, 이까짓 밥알이야…….” 거실에서 할머니와 손녀의 말다툼을 듣고 있는 나로서는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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