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걸음을 디딜 때마다 딸그락거린다. 매끈하게 다듬지도 않고 넓적하게 생긴 돌들을 쌓아 올려 탑을 만들었다. 탑이라기보다 돌무더기에 가깝다. 남쪽 감실 속 불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비손하는 어머니 옆을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한다. 꼰들대며 내는 소리는 틈새를 메우고 있던 염원들이 내지르는 외침인 듯하여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다. 중앙고속도로 의성 나들목에서 20여 분 거리인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에는 시간의 더께가 켜켜이 쌓인 고려시대 장방형적석탑이 있다. 어린 시절 석탑 뒷산 8, 9대 조부 산소에 묘제를 지낼 때마다 따라다녔다. 나에게는 놀이터였고 어머니는 기도처로 삼았다. 정숙하게 앉아 들릴락 말락 주문을 외는 엄숙함에 주눅이 들었다. 지금의 깔끔한 모습과..
젊은 시절 나는 막차의 단골손님이었다. 야간 통금을 앞둔 밤 열한 시 무렵이면 도심의 버스 정류장은 늘 막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다가 서둘러 가게 문을 닫고 나온 장사꾼, 찻집 아가씨와 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수생들로 장터를 이뤘다. 피로에 지친 이런 군상 속에는 거듭된 야근에 녹초가 되어 귀갓길에 나선 사무직 직장인과 공무원도 섞여 있었다. 가게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라는 주인의 재촉에 떠밀려 나온 거나하게 취한 술꾼들도 섞여 있고. 나도 그중 한 사람일 때가 잦았다. 나는 일터가 자리한 광화문 인근 무교동이나 다동, 관철동의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다가 허겁지겁 종로로 뛰쳐나와 막차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막차를 잡으려는 사람들은 목적지 행 버스가 들어서면 우르르 몰..
숨소리도 미동도 없다. 턱없이 작은 입은 침묵이 지은 집이다. 오른쪽으로 쏠린 두 눈은 외부세계와 눈맞춤을 피한 듯 반응이 없다. 깊은 바다의 파고를 읽는 듯, 한 곳만을 응시할 뿐이다. 자세히 보면 여러 마리가 몸을 포개고서 죽은 듯이 있다. 사노라면 있기 마련인 자리싸움도 포기한 채 구석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퉁이를 지키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을 하던 남편을 도와 무던히도 열심히 달렸건만 호의호식은커녕 먹고 사는 일조차 걱정 줄을 놓을 수 없었다. 남편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고, 그녀는 남편이 남겨준 빚더미에 앉았다. 회생파산 업무를 담당하는 친구는 '파산신청'을 권했지만, 어떻게든 갚아보겠노라고 했다. 찔끔 눈 한번 감아버리면 외면해버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많은 빚을 지고도 편하게 살아..
이승잠 / 김수우 미음 몇 술 뜨고 진통제를 삼킨 엄마/ 금세 잠에 떨어진다/ 어둠을 밝은 데로 끌어내려는 듯/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었다// 벌어진 목구멍으로 매화가 피어났다 아, 아,/ 바람 한 점 없는 암병동 침상에서 홀로 한 꽃 떨어지고 한 꽃 터진다// 가슴팍 두 개의 낡은 창고엔/ 여든 여섯 갈피의 봄이, 여든 여섯 굽이의 매화숲이 살고 있었는가/ 덜겅대는 문짝 찐득찐득한 그리움을 밀고/ 돌아오는 매화, 돌아가는 매화/ 사랫길 아득하다// 조심조심 허물어지는 저 노동의 담장/ 먼지의 고집을 닮은 엄마의 창고는 전부가 사랑이었다/ 첫사랑을 오래 연습해온 모양/ 산그늘에 풀거미에 새벽달에게 혼자 젖물리던 날들/ 창고 속 그렁그렁한 눈물로 서성인다// 헝겊주머니가 된 창고, 이승잠 속에서/ 하루하루..
한때는 다섯 마리의 잉꼬들이 들어있어 복잡하던 새장에, 이제 혼자 남은 써니 Sunny의 점심 식사가 한창이다. 모이통에 담긴 그냥 조 알갱이는 별로 즐기지 않는 그녀가 열심히 쪼아 먹고 있는 것은, 막대기에 조와 꿀, 비타민제를 버무려 부쳐놓은 과자 같은 모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써니는 횟대에 잠시 올라앉았다가, 거울이 달린 곳으로 가서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열심히 지저귀기 시작한다. 친구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 남편과 아이가 친구를 대신하라고 사다 걸어놓은, 자기와 똑같이 생긴 플라스틱 새에게 써니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제 벌써 8살이 된 써니가 얼마나 더 우리 곁에 머물지는 알 수 없지만 (수의과 의사는 잉꼬가 10년을 살면 많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우리 집의 바로 앞에 있는 스탕기어 선생님의 정원에는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난다. 이른 봄에 빨간 꽃망울을 맺는 매화나무로부터 왕관처럼 생긴 노란 화관을 가진 수선화, 싸리비를 연상하게 하는 초록색 대궁이에 마치 노랑나비가 날개를 접고 풀잎에 앉은 듯 샛노란 꽃잎이 위로 촘촘히 올라가며 박혀있는 긴스터 (Ginster), 살짝 스치기만 해도 상큼한 냄새가 손안에 가득 묻어나는 향료로 쓰이는 튀미안 (Thymian),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진 남불 해안의 보라색 꽃밭을 떠오르게 하는 라뵌델 (Lavendel)…… ‘ 여신의 머리를 빗는 빗처럼 생겼다 해서 ‚비너스의 빗‘ (Venuskamm)이라 불리는 앙증맞게 생긴 귀여운 풀은 사전을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파리지옥풀’이란 무서운 이름이 붙어있..
한 번은 詩처럼 살아야 한다 / 양광모 나는/ 몰랐다// 인생이라는 나무에는/ 슬픔도 한 송이 꽃이라는 것을//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펄럭이는 날개가 아니라 펄떡이는 심장이라는 것을// 진정한 비상이란/ 대지가 아니라 나를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인생에는 창공을 날아오르는 모험보다/ 절벽을 뛰어내려야 하는 모험이 더 많다는 것을// 절망이란 불청객과 같지만/ 희망이란 초대를 받아야만 찾아오는 손님과 같다는 것을// 12월에는 봄을 기다리지 말고/ 힘껏 겨울을 이겨내려 애 써야 한다는 것을// 친구란 어려움에 처 했을때 나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때 내가 도와 줘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사랑은 이별로 끝나지만/ 어떤 사랑은 이별 후에야 비로소 시작 된다..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물길이 비단결같이 곱다는 청도 금천(錦川)의 장연사지를 걷는다. 온화한 부처의 미소가 그리웠을까. 개망초 무리들의 탑돌이가 한창인 절터에는 살색 감꽃이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넉넉했던 절터는 감밭으로 내주고 한 뼘 땅에 몸을 부비고 있는 쌍탑의 처지가 딱했다. 금당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 때문일까. 두 탑은 멀리 흘러가는 동창천만 무심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태고를 향해 눈물짓는 망부석 같기도 하여 탑돌이 하는 내 마음이 짠해진다. 육화산의 끝자락,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장연사지는 모든 게 수수께끼다. 빈대가 많아 불태웠다는 구전 외에는 절의 규모도, 창건과 폐망도, 심지어 절의 이름까지 어느 문헌에도 언급이 없다. 쌀뜨물이 십 리나 흘렀다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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