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구불구불한 도로를 천천히 감아 돈다. 여기까지가 경계라는 듯 포장도로가 끝나고 숲이 나온다. 자동차 바퀴가 숲에다 철길처럼 쌍가르마를 그려놓았다. 가르마를 따라 능선을 오르니 차도 몸도 덜컹덜컹 흔들린다. 나지막한 구릉을 지나 산 중턱에 집 몇 채가 띄엄띄엄 놓였다. 카메라 줌을 당기듯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간다. 솔숲이 둘러싼 공간 푸른 잔디밭 한가운데 집이 앉아있다. 죽은 사람을 태워준 집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내 집에 든 것처럼 선뜻 안기지 못하겠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가 본다. 백 년이 넘은 이 상엿집은 본래 영천시 화북면 자천마을에 있었다. 그런데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오래도록 방치되다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우리의 얼과 혼을 소중히 여긴..
때죽나무 경전 / 최장순 쪽동백과 4촌쯤 되는 사이란다. 그러나 꽃차례나 잎사귀의 크기로 때죽과 쪽동백을 구별한다. 시제時祭참석차 고향에 내려갔다가 들른 대관령 기슭의 솔향수목원. 싱싱한 금강송 내음에 취한 산책길에서 꽃송이 가득 매달고 있는 몇 그루 때죽나무를 만난 것은 보너스였다. ‘눈종’snowbell이라 불리기도 한다. 정말 하얀 종처럼 생겼다. 누구는 활짝 펼친 꽃무늬 양산 같다고 했지만, 나는 앙증맞은 꽃과 열매가 사랑하는 이의 귀에 매달렸다는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아래를 향한 꽃들이 엎어진 사기 종지 같기도 하다. 향기로운 소리가 쏟아질 것 같다. 봄과 여름 사이, 숲 냄새를 맡으며 나는 때죽나무를 ‘귀 많은 나무’라 부르기로 한다. 귀가 많다는 것은 남의 소리를 잘 듣는다는 것. 위를 향..
불놀이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江)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 밀어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보니, 물냄새, 모래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不足)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江)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배꼽을 들여다본다. 옴폭 패인 그곳엔 나를 세상과 이어주던 탯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아직 뱃속의 양수에 잠겨 있을 적, 어머니는 한 줄의 제대정맥과 두 줄의 제대동맥을 내려 주었다. 나는 그 세 줄을 통해 신선한 산소와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받고 노폐물을 뱉어내면서 열 달 동안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내 태초의 집인 자궁은 어머니의 바다인 셈이었다. 바다를 본다. 이곳은 고래가 가끔 출몰한다는 포항 앞바다. 오래전 탯줄이 끊어진 날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탯줄이 끊어진 다음에도 바다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고래의 배꼽을 떠올려 본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엔 고래도 육..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 가만히 외우고 싶고 베끼고 싶은 65편의 시 안도현 엮음 모악출판사, 12,000원 젓갈 · 이대흠 어머니가 주신 반찬에는 어머니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입맛 없을 때 먹으라고 주신 젓갈/ 매운 고추 송송 썰어 먹으려다 보니/ 이런,/ 어머니의 속을 절인 것 아닌가// 가을소묘 · 함민복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메꽃 · 이안 뒤뜰 풀섶/ 몇 발짝 앞의 아득한/ 초록을 밟고/ 키다리 명아주 목덜미에 핀/ 메꽃 한 점/ 건너다보다// 문득/ 저렇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것이// 내 안에 또한 아득하여,// 키다..
희멀건 눈으로 멍하니 쳐다본다. 햇살이 환하면 우산은 현관 귀퉁이에서 무료한 삶을 이어간다. 형형색색이 행렬을 이룬다. 비 오는 날은 누군가에게 들림을 받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하다. 주인의 요구에 따라 반원이 되는가 하면 중세의 사원처럼 뾰족하고 둥근 지붕이 된다.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지나는 눈길을 잡아채거나, 화려한 색으로 자태를 뽐내며 빗속을 누빈다. 날이 들면 찾아오는 실직의 소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우산의 걸음이 활기차다. 우산은 임시직이다. 언제라도 불러주기만 하면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한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쓰임 받는 날은 높은 꼭대기에 오른 것 같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살필 여유도 잠시 뿐, 언제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며 가슴을 졸인다. 이십여 년 ..
아버지가 배 문서를 들고 집으로 오던 날의 기억이 선하다. 집안의 여인네들이 방 안 가득 어머니 곁에 둘러앉아 머릿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모습도 떠오른다. 문서가 담긴 싯누런 봉투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어흥 11호’는 아버지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할아버지가 소유한 십여 척의 배 가운데 제일 낡고 작은 배였다. 아버지는 서자(庶子)였다. 아들을 얻지 못한 할아버지가 씨받이로 맞아들인 여인의 몸에서 얻은 첫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낳은 후, 생모는 강보에 싸인 아들을 행랑채에 남겨 두고 새벽달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친할머니는 딸 하나를 더 낳았고, 이어 아들 형제를 내리 낳았다.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이 배움의 전부였다. 두 분 작은아버지가 서울 어느 대학에서, 당시로서는 이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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